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159화
159.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곳(4)
“예, 알겠습니다. 곧 뵙겠습니다.”
상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런 상혁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얹었다. 백이현이었다.
“김 실장이냐?”
“예, 형님.”
“안 됐구나 김 실장도. 이미 네가 내 편에 섰다는 걸 모르니까.”
이창엽은 상혁의 사람이 되기로 한 후 상혁의 동선을 감췄다. 그 때문에 김대엽은 상혁이 백이현과 회동을 한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백이현은 백성철과 백도현의 뒤통수를 원대하게 쳐 버릴 계획을 끝마쳐 놓은 상태다.
“그런데 그 무기란 게 뭡니까 형님?”
“음. 너에게도 말은 해 줘야겠구나.”
백이현은 상혁이 넘겨준 그 자료를 슬쩍 밀었다. 상혁이 자료를 살펴보고는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백이현은 이 와중에도 상혁을 견제하는 듯 중요한 부분을 빼놓고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놀란 척을 해야 한다.
“이, 이게 사실입니까 형님? 인체 실험이라니. 저는 그냥 소문인 줄 알았습니다.”
“소문이라니. 인터넷도 보고 좀 그러려무나. 어떤 의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것을 자료까지 첨부해서 퍼뜨린 사람이 있으니까.”
가볍게 상혁을 타박한 백이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건 도현이만 아예 날려 버렸을 뿐이지. 그리고 이건 아버지도 힘드실 거다.”
백이현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자신이 곧 SG그룹의 회장이 될 것이라는 장밋빛 미래에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백도현의 인체 실험을 백성철이 묵인해 주었다는 것을 백이현이 직접 보았으니까.
백도현과 백성철에 대한 여론이 나빠진 지금 백이현이 그걸 들춰내고 그 둘을 지탄하고 나온다면 주주들은 백이현의 편을 들어 줄 것이다.
“주주총회를 여셔야 할 텐데 가능하시겠습니까?”
“그럼.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다.”
긴급주총을 열 모든 요소가 갖춰졌다. 거기에 백이현은 명분도, 자격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김대엽 실장이 나선다고 해도 주총이 열리는 건 막지 못할 것이다.
지금 사태는 SG그룹의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기로였기 때문이다.
“주총을 통해 내가 회장으로 선출이 되면 김 실장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겠지. 그리고 내 사람들로 채우면 되는 것이고.”
턱.
백이현이 상혁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그러니 넌 백씨를 가진 로열패밀리로 날 지지해 주어야 한다. 아버지와 도현이가 그렇게 된 이상 우리 백씨 자체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형님.”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이현이 굳이 필요 없는 상혁을 자꾸 안으려고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어차피 상혁은 회사 주식을 0.1퍼센트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백성철이 아직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혁이 로열패밀리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상징성이 있었다. 백성철의 카리스마가 손상된 지금 주주들을 설득하고 강력한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같은 로열패밀리인 상혁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럼 사흘 뒤 주총에서 보자.”
“예. 무운을 빌겠습니다.”
“무운은 무슨. 이미 균형의 추는 우리에게 기울어진 지 오래니까. 다음번에 만나면 축배를 들자꾸나.”
백이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대주주들을 포섭하고 다니느라 백이현은 1분 1초가 아까울 것이다.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하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이현이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사라진 순간 상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헛된 꿈을 꾸다가 그게 망상인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절망적인 건 없지.”
상혁은 백이현에게 SG그룹의 회장직을 넘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상혁이 딱히 따로 움직이며 다른 주주들을 설득하고 다닌 것 또한 아니다.
그런다면 백이현이나 김대엽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혁은 직접 발로 뛰어 주주들을 만나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주총장에서 모든 걸 끝내 주지.”
백이현은 자신이 믿었던 이들이 자신을 배신하는 상황을 두 눈 뜨고 똑똑히 목도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 싸움에서 이기는 건 백이현도, 백성철도 아닌 바로 상혁이 자신이 될 것이다.
왜냐면 상혁이 그렇게 만들 것이었으니 말이다.
“일호. 우리가 확보한 지분은?”
“4.99프로입니다.”
“대주주 공시 직전까지 확보한 건가? 수완도 좋군.”
“이호의 공이 컸습니다.”
일호가 빙긋 웃으며 자신의 옆에 있는 이호를 슬쩍 가리켰다.
이호, 두 번째 서번트.
일호와 비슷하게 생긴 이호는 밤낮없이 움직이며 일호의 일을 도왔다. 그리고 일호는 그가 벌어들인 거의 모든 주식 수익을 투자해 SG전자의 주식을 4.99퍼센트까지 매집했다.
5퍼센트부터는 대주주로 공시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딱 그 전 지점까지만 정확히 주식을 매집한 것이다.
시총 300조인 SG전자의 주식을 5퍼센트나 매입한 것 자체가 기염을 토한 일이다. 그걸 일호가 고작 10억으로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일호는 그걸 가능케 했다.
인간을 뛰어넘는 결단력과 주식의 등락에 조금도 영향받지 않는 야수의 심장까지.
서번트 일호는 인간이 꿈꿔 바라마지 않는 궁극의 주식 투자자 그 자체였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상혁은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꽤 재밌는 구경거리가 되겠군. 팝콘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상혁이 큭큭 거리면서 웃었다.
* * *
SG그룹 긴급주주총회.
주주총회 공시가 나자 언론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만큼 SG그룹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다.
물론 그 대부분 사람들은 SG그룹을 욕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재계나 정계의 거물들은 SG그룹의 이번 긴급 주총으로 인해 큰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SG호텔.
5성급 특급 호텔인 그곳의 연회장에서 주총이 예정됐다. 그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주주들이 그곳으로 집결했고, 인근 교통이 극심한 혼잡을 빚었다.
“준비는?”
백이현은 호텔 상층에서 개미처럼 새까맣게 주주들이 몰려드는 모습을 보며 유원태에게 말했다. 그러자 유원태가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차질 없이 준비가 끝났습니다.”
“과반수는 확실히 확보한 거지?”
“예. 회장님과 둘째 도련님에게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긴 후 알아서 접촉을 해 왔습니다. 그들도 SG그룹이라는 건실한 투자처를 잃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섭섭지 않게 보답해 드리겠다고 전해 줘.”
“예. 그리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일반 주주들 중 0.1퍼센트 이상 주식을 보유한 이들을 찾아 위임장을 받아 냈습니다.”
“비용은?”
“황제파에서 처리했습니다.”
“잘됐군.”
황제파는 이번 긴급 주총을 위해 지난 사흘 밤낮을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채 모든 조직원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주주들을 찾아 위임장을 받았다.
물론 그 가운데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들이 생겼으나 백이현은 그런 작은 일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일은 고대로부터 번번이 있어 왔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확보한 것이 약 58퍼센트입니다.”
“충분하군. 의문의 투자자는?”
백이현의 질문에 유원태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미처 개인 정보를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4.9퍼센트의 주식을 보유한 의문의 투자자. 대주주 의무 공시 직전 수준까지 무려 4.9퍼센트나 주식을 매집한 이를 찾아서 회유하려고 했지만 마지막 날까지 결국 찾아내는 데 실패한 모양이다.
그러니 백이현은 깔끔하게 잊기로 했다. 어차피 안건은 절반의 지지만 얻어도 끝이었기에 58퍼센트면 충분하고도 남는 수였기 때문이다.
“조철왕이한테 전해. 주총 이후에 한번 보자고. 지난번 실수는 눈감아 주겠다고 전하고.”
“예, 회장님.”
유원태가 회장이라고 부르는 말에 백이현은 씩 웃었다. 하지만 표정과는 달리 목소리는 엄하게 유원태를 나무랐다.
“회장이라니. 임시회장이지. 그렇게 불렀다가는 다른 사람이 오해하기 딱일 테니.”
“유념하겠습니다, 회장님.”
유원태는 그런 백이현의 심중을 정확히 꿰뚫어 봤다. 그러고는 그의 가려운 부분만을 긁어 주었다. 백이현이 씩 웃으며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이 됐군. 이만 내려가지.”
“모시겠습니다.”
백이현이 뻣뻣하게 목을 세운 채 앞서 안내하는 유원태의 뒤를 따랐다.
* * *
“오랜만입니다, 누님.”
상혁은 긴급 주총이 열리는 SG호텔의 볼 룸에서 백정연을 발견했다. 온양에서 올라온 이후로 거의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 몇 달 만이다.
백정연이 상혁을 슬쩍 흘겨봤다.
“바쁘다고 이제 난 찾지도 않는구나?”
“그럴 리가요. 이것저것 회장님이 시킨 게 많아 적응하느라 애 좀 썩었습니다.”
“그래도 필요할 때는 그렇게 찾더니 말이야.”
백정연이 짐짓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장난을 하고 싶다니 그렇다면 장단을 맞춰 주는 수밖에.
“캐나다랑 러시아에 다니시느라 바쁘셨잖아요?”
“러시아? 말도 하지 마.”
백정연은 얼굴을 팍 찡그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러시아 쪽에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백정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거기 있다 오니까 여긴 천국이야.”
그래도 백정연 덕분에 러시아 인근 해역의 방사능을 정화하여 국제 사회에서 어깨 좀 폈다고 하던데, 공적 사업과 사적 사업은 괴리감이 큰 모양이었다.
백정연의 푸념을 한동안 들어 준 상혁은 백정연에게 물었다.
“누님도 큰형님 손을 들어주시기로 한 건가요?”
“나?”
백정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 누가 되든지 난 호텔&리조트 사업만 분리해 주면 되거든.”
백정연은 회장직에 큰 욕심이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이 초기부터 도맡아 한 호텔과 리조트만 있으면 된다는 마음이었다.
“바뀌셨네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회장직에 욕심은 없지만 SG란 것에 대한 애정 자체는 있었다. 그런 그녀가 불과 몇 달 만에 바뀐 것이다.
“나가 보니 알겠어. 굳이 내가 SG라는 이름 아래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걸. 어차피 아버지나 오빠들은 내 쪽에는 관심도 없잖아. 그런데 내 위에 누가 있어서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인 일이야.”
호텔과 리조트 사업은 SG에서 일차적인 우선순위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해외 사업을 야심차게 추진하면서 백정연은 회의감을 많이 느낀 모양이다.
“일단 오늘은 아니야. 이곳의 책임자로 관리하러 나온 거니까. 하지만 조만간 오빠랑 이야기를 해 봐야지.”
“큰형님이 임시 회장 자리에 오르실 거라고 보세요?”
“그럼. 누가 됐든 배에 선장은 필요하잖아. 아버지가 검찰에 오래 계시진 않겠지만 여론을 의식해서라도 곧바로 복귀하는 건 무리일 테고.”
“뭐.”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정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때 일호가 상혁에게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마스터, 백도현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어디로?”
“부산입니다.”
“이호에게 바짝 쫓으라고 해. 시간 못 맞출 것 같으면 먼저 움직이라고 말하고.”
“예.”
상혁은 빙글거리며 웃었다. 백도현은 알아서 상혁이 쳐둔 덫으로 걸어 들어왔다. 상혁이 빙긋 웃자 백정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웃어. 좋은 일이라도 있어?”
“글쎄요. 누님. 하나 알려 드릴까요?”
상혁은 특별히 오늘 같은 좋은 날 작은 힌트 하나를 백정연에게 주고자 했다.
“원하시는 게 있으면 누군가에게 부탁해 얻어 낼 생각을 하지 마세요. 누님이 직접 쟁취하는 방법도 있을 테니까요.”
“뭐?”
“그럼 전 먼저 들어갈게요, 누님.”
백정연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자신이 직접 일궈낸 호텔과 리조트이기에 자신의 손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면 진작에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철은 욕심이 많았고, 그건 오빠인 백이현 역시 마찬가지다.
“참 나. 자기가 뭘 안다고.”
괜히 심통 난 백정연이 상혁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킁 하고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