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149화
149. 복수는 차갑게 먹어야 제맛(4)
“환경부 쪽에도 백도현의 끄나풀이 있었지?”
상혁은 멍한 눈의 파울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용산에서는 주기적으로 이런 식으로 몰래 한강에 생화학 물질을 방출했다. 하지만 그 사실이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건 환경부에 이미 백도현의 끄나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수 용기에 적힌 제피렐리란 이름은 미국의 유명 군수 기업이다. 그리고 한 가문의 이름이기도 했다.
원탁.
글레이저에 이은 제피렐리의 이름이 연달아 나온 셈이다. 상혁은 대체 이 나라가 대한민국인지 미국의 속국인지 순간 헷갈렸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의 한복판에서 제피렐리의 주도로 생화학 실험이 이뤄지고 있는데 대한민국 정부에는 고지의 의무가 없다라.”
이곳은 대한민국 정부가 미군 주둔을 위해 할양해 준 부지이다. 대한민국에 전쟁 억제력을 가져다준 미군에게 대한민국의 위정자는 이 부지를 사실상 미국령으로 인정했다.
즉 용산 기지는 대한민국 속의 미국이었고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대한민국 정부는 개입할 수 없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원탁이란 놈들이 문제군.”
문제는 미군이 아니다. 그 미군에 검은손을 뻗쳐 대한민국을 거대한 실험장처럼 쓰려고 한 미국의 원탁이란 놈들이 문제의 근원이다.
“이놈도 원탁의 끄나풀이고.”
파울로의 이력은 상혁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작전을 성공시킨 스페셜리스트가 바로 파울로였던 것이다.
물론 그 작전이란 것들이 철저히 미국의 국익을 위한 논리로 입안된 작전이고, 세간에 공식적으로 밝힐 수 없는 만큼 입에 담을 수 없는 공작과 권모술수로 점칠된 작전들이었지만 말이다.
“일전의 카터란 놈도 그렇고.”
상혁은 미국의 저력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CIA의 비밀작전국 소속으로 한국에 파견되었다가 상혁에게 딱 걸린 카터라는 비밀 요원도 그렇고, 파울로라는 군인도 그렇게 미국의 역량은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미국은 미국이라는 건가.”
역시 괜히 최강대국이 아니다. 최강대국이라는 소리를 듣는 나라는 그 나라가 가진 자금력이나 기술도 무섭지만 가장 무서운 건 바로 이런 인재들이다.
전 세계에서 인재들이 모여들고 그 인재들이 최강대국을 더 부강하게 만드는 선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구에서는 미국이 딱 그러한 나라다.
“이놈을 어쩐다.”
상혁은 파울로와 그 부하들의 처우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카터처럼 암시를 거는 것이었다.
그러나 암시는 불안정하다.
인간의 정신력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연약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법을 통해 암시를 걸더라도 깨질 확률이 높았다.
“제피렐리란 놈들까지 의문을 품게 해서 좋을 건 없지.”
카터처럼 처리한다는 건 무리다. 이미 그런 전례가 한 번 있기 때문에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제피렐리 정도 되는 큰 가문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글레이저에 이어 제피렐리까지 한국의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상혁이 이 시설을 폐기시키지 않았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상혁은 손이 하나지만 그들은 손이 백 개, 천 개쯤 되기 때문에 모두 다 막아 낼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그때 상혁의 머릿속에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상혁 대신 나서서 칼을 휘둘러 줄 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리조.”
행크 모리조.
“짬 처리당했다는 것도 모를 것이고, 오히려 써먹을 카드가 많이 생기는 셈이니까 좋아하겠지. 욕심이 많은 양반 같던데.”
직계의 사회에 편입하고 싶은 방계. 행크 모리조에게 부족한 것은 핏줄을 채워 줄 만한 전공이다. 상혁은 그런 그를 밀어주기로 했다.
“파울로, 넌 지금부터…….”
마나가 담긴 상혁의 언령이 파울로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파울로는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감고는 옆으로 쓰러졌다.
암시가 걸렸다.
“내일 보자 귀염둥이들.”
그리고 상혁은 비밀 실험실에 놓인 특수 용기들을 안타깝다는 듯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너무 시간이 길어지면 기절한 마이클을 깨우더라도 둘러댈 말이 없었다.
그러니 저것들을 마나로 흡수하는 건 내일 할 일이다.
퉁퉁.
“아쉬워서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린담.”
* * *
“이사장님. 김대엽 실장님께서 만나 뵙고 싶으니 언제가 좋으시냐고 여쭤보라고 하셨습니다.”
“김 실장님이?”
“예.”
기절한 마이클에게 대충 말을 둘러댄 뒤 상혁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곳에서 소모한 마나를 회복하기 위해 저택 지붕에 설치한 전기집진식 필터에 모인 공기 중 오염물질에서 마나를 흡수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덕분에 소모했던 마나를 깔끔하게 회복했다. 고작 지붕만 한 크기임에도 서울의 공기질이 얼마나 나쁜지 전기집진식 필터를 통해 걸러지는 오염물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서울의 공기질 개선에 한 손을 보태고 있는 상혁이었다.
그런 상혁이 백성철의 비서실장인 김대엽이 찾는다는 소리에 눈을 반짝였다.
“이 비서님이 아시는 건요?”
“저도 아는 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창엽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비서실에서는 이창엽을 통해 기밀이 상혁에게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해 이창엽에게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창엽은 살짝 서운함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상혁의 비서가 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러다 비서실에서 잊혀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죄송할 것까지야. 근데 그러다 비서실에서 쫓겨나시면 저한테 오세요. 제 제안은 유효하니까.”
상혁은 그런 이창엽의 불안감을 일부러 자극했다. 이창엽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상혁은 그에게 말했다.
“곧장 간다고 하세요.”
“지금 바로 가시겠습니까?”
출근 시간이다.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슨 말씀하실지 알 것 같거든요.”
이창엽은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엽이 꺼낼 이야기가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기 때문에 상혁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잠시 뒤 상혁은 본사에 도착했다. 그러자 미리 상혁을 기다리고 있던 김대엽이 나와서 상혁을 맞았다.
백성철 회장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그가 직접 상혁을 기다리려고 나왔다는 것에 주변에서 놀란 시선들이 쏟아졌다. 하필이면 출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게 더욱 눈에 잘 띄었기 때문이다.
상혁은 그런 김대엽을 보면서 자신의 예상에 확신을 가졌다.
‘엘릭서 프로젝트에 탐이 났구나. 늙은이.’
백이현을 통해 슬쩍 흘린 엘릭서 프로젝트. 그걸 보고 욕심이 난 것이다. 무병장수할 수 있다는 신약 개발 프로젝트이니 욕심이 날 수밖에.
‘늙은이가 그걸 나와 공유하려고 들진 않을 것이고.’
백성철은 아마 상혁을 얕보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나이에 비해 상혁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인정해 백도현과 백이현을 견제하는 칼로 쓰기로 결정하긴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필요 이상의 정보를 상혁과 나누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게 상혁이 일부러 흘린 정보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아니요. 찾으셨다구요.”
그 때문에 상혁은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척 김대엽이 내준 자리에 앉았다. 비서가 물 두 잔을 들고 와 앞에 놔준 후 김대엽은 입을 열었다.
“한국대 분원 캠퍼스 부지를 찾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상혁이 백도현에게만 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걸 김대엽은 벌써 알고 있었다. 백성철 회장의 그룹 내 지배력은 여전히 서슬 퍼렇다는 뜻이다.
상혁은 숨길 일이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침 용산이 매물로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한민국 한복판에 최고 지성을 다루는 대학교가 들어선다는 게 상징적으로도 괜찮지 않겠나, 싶어서요.”
“둘째 도련님과 함께 추진하려고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 한국대만으로는 부족하니까요. 형님의 경륜이라든지 인맥을 동원한다면 더 수월할 테구요.”
김대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께서는 한국대 정도 되는 대학교에 연구소가 부족한 것을 늘 마음에 걸려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세계 대학 순위에 매번 들기는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 뒤처지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 생각하셨죠.”
글로벌 시장에서 1, 2위를 놓고 다투는 SG전자가 있는 SG그룹이다. 그런 SG그룹이 후원하는 한국대학교도 그 수준까지 올라야 한다는 것이 백성철 회장의 지론이다.
그 때문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교수진을 보강하고 그들의 연구를 독려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으나 여전히 갈 길은 멀었다.
그러나 백성철 회장이 그런 순위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걸 상혁은 잘 알고 있었다.
‘엘릭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연구소를 짓고 싶어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상혁으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백성철이 직접 나선다면 용산 기지를 낙찰받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회장님께서 도련님을 도와드리기로 하셨습니다.”
“정말 잘됐습니다. 사실 형님만으로도 부족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아무리 형님이라고 하셔도 동원 가능한 자금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상혁은 훌륭하게 연기를 해냈다. 김대엽은 기뻐하는 척을 하는 상혁에게 깜박 속아서는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 하시면.”
“제약연구소를 반드시 하나 이상 만드는 조건입니다.”
상혁은 고민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상혁은 환하게 웃었다. 귀찮은 일을 비서실에 떠넘길 절호의 기회다. 백성철이 직접 나선다면 용산 기지를 낙찰받는 귀찮은 절차는 비서실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백이현과 백성철 사이에 균열을 만들어 냈고.’
이득을 본 것은 상혁뿐이다. 상혁은 김대엽이 뒤이어서 하는 이야기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속으로 히죽 웃었다.
* * *
한미 방위비 협상의 중점은 미국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 정부가 얼마나 더 큰돈을 쓰게 만드느냐는 데 있었다.
말이 협상이니 협정이니 하는 그럴듯한 단어를 써서 그렇지, 막말로 하면 미국의 입장은 간단했다.
[우리가 중요하다면 그만큼의 성의 표시를 더 해라. 이제 너희도 잘 살잖아?]
그렇다면 한국의 입장은 간단했다.
[너희도 너희가 좋아서 있는 거잖아. 여기서 빠지면 북한이랑 중국에는 어떻게 대응하려고?]
미국이 굳이 대한민국에 주둔하는 건 바로 인접한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최강대국인 미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동시에 다른 동맹국들에게는 미국이 이렇게 먼 대한민국까지 와서 동맹이라는 이유만으로 오십 년이 넘게 주둔하며 지켜 주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이미지를 호의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사실 미국이 한국에 주둔함으로써 부가적으로 얻는 이익은 그들이 미군을 주둔시켜서 발생하는 비용보다 몇십 배는 더 컸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도 미국이라는 강력한 군대가 주둔함으로 인해 주변국의 쓸데없는 도발이나 전쟁 가능성을 억제할 수 있으니 그만큼 국방비에 여유를 둘 수 있는 것이었기에 윈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매번 이런 험난한 협상 과정을 겪는 건 미국에게 있어서는 한국 길들이기의 일환이었다.
혈맹국이고 우방이라고는 하나 가끔씩 이렇게 질서를 다잡아주고 위계를 확인시켜 기강을 잡기 위해서인 것이다.
윌리엄은 턱을 괴고 불량한 자세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나 그런 윌리엄에게 지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미국 측도, 한국 측도 윌리엄이 누군지 알고 있었기에 그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한국 측 협상 담당자가 손을 들었다.
“귀국 측에서는 방위비 증액을 여러 이유로 들면서 대한민국을 압박하고 계신데, 제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오히려 귀국 측에서 여러 이유로 오히려 대한민국에 배상을 해야 할 실정입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지금 이 협상을 깨자는 겁니까?”
“증거와 증인이 있습니다.”
한국 측 협상 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협상장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그 순간 윌리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는……!”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글레이저.”
행크 모리조.
그가 협상장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윌리엄은 등줄기를 찌릿하게 만드는 묘한 불안감을 느끼고는 두 눈을 부릅떴지만 행크 모리조가 이 자리에 나타난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설명할까요. 미군이 대한민국 정부에 배상해야 한다는 근거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크의 입을 통해 글레이저가 그토록 가리고자 했던 용산 미군 기지의 진실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