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137화
137. 마법사의 기만술(2)
최만금이 문을 닫고 나갔다. 그의 표정은 마치 영혼이 다 빨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마 혼란스러울 것이다. 상혁은 피식 웃었다.
“이사장님.”
이창엽이 최만금이 가는 것을 확인한 뒤 서둘러 들어왔다. 잰걸음으로 들어온 것을 보니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꽤 궁금했던 모양이다.
“왜요.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보고하시게?”
“윽…… 그…….”
이창엽이 당황해하는 소리를 내면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상혁이 보고하라고 해서 열심히 보고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편이 쿡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 대신 학교 행정 일 좀 봐 달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보다는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리고.”
상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두 형님께도 열심히 내 정보 내다 팔라고 말씀드렸고.”
“예에?”
이창엽이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는 깜짝 놀랐다. 그와 한 번 눈을 마주쳐 준 뒤 씩 웃은 상혁은 이창엽에게 말했다.
“그리 걱정할 건 아닙니다. 어차피 최만금 씨도 어느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요.”
“…….”
“회장님이 껄끄러워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한국대 이사장 자리를 지켜 온 분입니다. 그러니 그 정도 수완은 있겠죠.”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백성철 회장도 최만금 이사장을 쳐 내는 데는 주저했다. 그래서 상혁이라는 명분으로 최만금을 자리에서 몰아낸 것이다.
적어도 최만금이 그냥 힘없는 인형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리고 어차피 형님들에게 보고하는 거라고 해 봤자 이 비서랑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저랑요?”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것만 보여 주면 되니까.”
상혁이 그렇게 말하며 이창엽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이창엽이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상혁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걸 찾기 위해 굳이 파고들려고 하진 않았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터놓는 사이는 아니었어도 상혁은 괜찮은 상사였다.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은 지킬 줄 알았고 때때로 아무것도 모르는 듯하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은 충분히 나이에 맞지 않게 유능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 비서에게도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상혁이 그렇게 말하며 찻잔의 찻물을 다 비웠다.
“언제든 내게 올 수 있는 기회가. 운 좋은 줄 아세요. 이 비서가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 그 선을 넘어올 기회는 주는 거니까.”
“저는…….”
이창엽은 자신도 모르게 주저했다. 그러나 상혁은 됐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당장에 라인을 바꿔 타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비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슬슬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상혁이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손가락으로 슬슬 문지른 뒤 그걸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턱 하고 덮으면서 말했다.
“내 라인이 끊어질 동아줄 같은지, 아니면 튼튼한 등산용 로프 같은지.”
“…….”
* * *
이창엽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사장실에서 나왔다. 상혁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상혁의 말에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궁금하다.’
상혁은 비범했다. 상혁의 비밀을 알지는 못하지만 상혁이 비범하다는 것은 종일 붙어 다닌 이창엽이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그 비밀이 무엇인지 이창엽은 몹시 궁금했다.
‘도저히 스무 살 같지가 않아.’
상혁과 대화를 나누고, 그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도저히 스무 살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창엽은 상혁이 자신보다 어리다는 것을 때때로 깨닫고는 놀라기도 했다.
백도현, 백이현.
상혁보다 열 몇 살씩 많은 백성철 회장의 직계뿐만 아니라 가끔 상혁이 보이는 행보나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면 비서실장인 김대엽보다도 더 노련하고 노회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과연 그게 정상일까.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어려서 보육원에 보내진 사람이?
절대로 아니다.
이창엽은 그 때문에 상혁의 말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야망이 큰 만큼 능력도 되는 이창엽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장님이 두 사장님을 이기고 SG그룹을 물려받는다…….’
이창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너무 먼 미래의 일이다. 상혁은 이제 막 한국대 이사장이 되었을 뿐, 아무런 성과도 보이지 못했다.
그때 이창엽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전화가 울렸다. 김대엽이다. 멈칫한 이창엽은 핸드폰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쁘니까.”
이창엽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보지 못했을 때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김대엽의 연락을 무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받을 수가 없었다.
상혁이 시킨 것으로 인해 바빠서, 전화를 받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창엽은 그렇게 생각한 스스로에게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변명이요, 합리화란 말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하라고 이창엽의 마음이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창엽은 상혁이 시킨 것을 수행하기 위해 기획조정처의 문을 두드렸다.
“처장님 계십니까?”
이창엽이 그를 찾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덕술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 * *
“증언이요?”
“예.”
사만다는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맞은편의 상대는 사만다가 초조해하건 말건 하등 상관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미스 허드를 지켜드릴 수 있는 건 저희 모리조뿐입니다.”
모리조.
원탁에서 정계를 대표하는 가문으로 글레이저 가문이 있다면, 모리조 가문은 프리메이슨 소속으로 글레이저 가문이 대척점에 서 있는 가문이다.
그런 모리조 가문의 사람이 갑자기 한국에 나타났고, 사만다를 찾아온 건 미처 예상치 못 한 일이다. 주드 포터도 미처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한 대 얻어맞은 셈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만다는 이대로 저들의 페이스에 말려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글레이저 가문과 대척점에 선 모리조 가문이라고 하지만 글레이저 가문과의 일로 사만다는 그런 이들을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섣불리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사만다는 어리석지 않았다.
“모리조가 미스 허드의 신뢰를 사지 못했다는 점,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비밀리에 미스 허드에게 접촉하기 위해 저희 측에서도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모리조 가문에서 나왔고, 스스로를 행크 모리조라고 밝힌 40대의 남자는 눈빛이 강렬했으며 표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마치 로봇과 대화를 하는 것 같은 느낌.
사만다는 행크에게서 인간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를 더 경계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윌리엄 글레이저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
사만다의 표정이 싹 굳었다. 윌리엄 글레이저, 저주받을 그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더 말씀해 드릴까요?”
“…….”
사만다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성을 잃을 뻔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 사만다의 몸속에서 마나가 피어올랐다.
짝퉁 엘릭서.
상혁이 짝퉁이라고 했으나 마나를 품은 것만은 사실이던 엘릭서가 혈액에서 흐르는 사만다다. 그 마나가 사만다의 이성의 한 줄기를 붙잡았다.
“그 사람과 저는 헤어졌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사만다는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행크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사만다가 여기서 버틸 줄은 몰랐다는 놀람이 담긴 이채였다.
“옛 연인에 대해서 처음 보는 분과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군요. 할 말을 다 하셨다면 나가 주세요.”
사만다는 축객령을 내렸다. 행크는 여기까지임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사만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음번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서로 얼굴을 봤다는 걸로 만족하기로 하지요. 저희 도움이 필요하실 겁니다. 저희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 한 가지 알려 드리죠.”
행크 모리조가 사만다에게 호의를 가장한 독배를 내밀었다.
“윌리엄 글레이저는 당신뿐만 아니라 미스터 백도 가만둘 생각이 없습니다.”
사만다가 그 자리에 굳었다. 행크는 그런 사만다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까닥 숙였다. 그러고는 미련을 두지 않고 돌아 나왔다.
곧바로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는 모리조의 사람이지만 그 흔한 수행원도 하나 없었다. 오히려 그편이 더 돌아다니기가 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란 점이 주효했다. 한국의 뛰어난 치안과 총기 금지는 만약을 대비하는 수고로움을 크게 줄여 주었기 때문이다.
“재밌네, 사만다 허드.”
행크는 사만다 허드가 보인 모습들을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다. 상대를 관찰하여 결과물을 유추해 내는 것은 그의 전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만다 허드는 예상외였다.
“흔들리긴 했지만 잘 버텼네. 예상과는 다르게 말이야.”
사만다가 가질 경계심에 대해서 행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대부분 인간이 그러한 일을 겪으면 사만다 같은 경계심을 품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당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서 무너지지 않고 버틸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행크의 계산대로라면 거기서 사만다는 윌리엄 글레이저에게 분노하고 저주하며 자신에게 진심을 드러냈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다면 사만다 허드의 협조를 쉽게 얻을 수 있었겠지만, 사만다 허드는 그런 행크의 예상에서 빗나가겠다.
“예상대로 백상혁과는 깊은 사이는 아니지만 각별한 사이는 맞는 것 같군. 적어도 사만다에게는.”
그리고 마지막에 사만다는 상혁의 이름이 나오자 크게 놀라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그 둘 사이가 최소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헛소리라는 뜻이다.
최소한 사만다는 그러했다.
띵!
그때, 엘리베이터가 중간이 멈췄다. 그곳에 마이클 무어가 올라탔다. 그를 본 행크가 씩 웃었다.
“직접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 성격은 여전하군요.”
“소란을 벌이지 않을 거라고 해서 들였지만 다음부터는 막겠습니다.”
마이클과 행크는 원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마이클은 행크를 경계했고 행크는 그런 마이클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참 아깝습니다. CIA 같은 다 무너져 가는 조직에서 그 능력이 썩기에는요. 우리 모리조 가문으로 오면 최고의 대우를 해 드리겠다는 말, 아직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마이클 무어.
그는 상혁이 예상한 대로 그냥 나우 호텔의 총지배인이 아니라 CIA 소속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나우 호텔 자체가 CIA 소유였다.
그리고 마이클 무어는 CIA에서 꽤 유명한 현장 요원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생산되어 미국으로 넘어오는 마약 중 80퍼센트 이상이 마이클 무어에 의해서 소탕됐고 해외에서 미국을 상대로 은밀하게 벌어졌던 테러를 다섯 건 이상 무마시킨 것이 바로 그다.
그리고 그런 마이클 무어가 한국에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저도 아직 제 제안을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마이클이 행크를 보며 말했다.
“적성국으로 들어간 프리메이슨의 무기들에 대해서 실토한다면 형을 감형해 주겠다고요.”
모리조 가문과 글레이저 가문이 한국에 관심을 보였기에 CIA에서도 마이클을 보내 상황을 파악하려 한 것이다.
행크가 오늘 마이클이 총지배인으로 있는 나우 호텔을 그냥 불쑥 찾아온 건 일종의 자신감이었다. CIA라고 해도 프리메이슨을 막을 수 없다는 그런 일종의 과시였다.
“안타깝게도 제 소관이 아닌 일에 대해서 인정할 것은 없네요. 그럼.”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행크는 마이클을 향해 눈을 찡긋한 후 내렸다. 마이클은 그런 행크가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차가운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