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95화
095. 헛다리 짚기(5)
“살려 달라?”
상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사만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사만다는 상혁에게 말했다.
“이 상황까지 왔는데 뭘 더 숨기겠어요.”
“숨기려고 했잖아요?”
“당신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미군까지 들어가 날 구해 낸 거니까 믿기로 했어요.”
상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만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뻔뻔해 보이나 그게 사만다에게는 놀랍게도 잘 어울렸다.
“날 죽이려고 한 자들에게 지킬 의리도 없고. 어차피 그자들 손에 잡히면 죽을 거라는 건 당신이 방금 확인해 줬으니까요.”
인체 실험.
사만다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몸이 보균체가 되었다니.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거의 서른 여 개가 넘는 병원균을 자신의 몸에 주입했단다.
‘그럼 그 고통이 꿈이 아니었다는 뜻이겠지.’
사만다에게 드문드문 남아 있는 찰나의 기억 중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도 있었다. 그것들이 전부 다 자신을 팔아넘긴 글레이저 가문 때문이라니 사만다는 그들의 잔혹함에 치가 떨렸다.
“저는요.”
사만다는 하나씩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서 상혁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녀가 15년이 넘게 할리우드에 있으면서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은밀한 비밀까지도 있었다.
글레이저 가문과의 밀월, 그리고 차기 대선 후보감으로 꼽히는 윌리엄 글레이저의 가면, 그리고 제 아들을 살리고 진실을 덮기 위해 사만다를 팔아넘긴 프랭크 글레이저 전 대통령의 위선까지.
그녀가 정치적 희생양으로 그 꼴이 되었다는 사실에 상혁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왜 그렇죠? 내 불행이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리고 그건 말을 하고 있는 사만다도 알 정도였다. 사만다가 분기에 차올라 상혁을 쳐다보자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 불행이 아니니까 아무렇지도 않네요.”
“당신…….”
상혁의 태연한 대꾸에 사만다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이 꼬여도 무슨 이렇게 꼬인 사람이 있는가. 사만다가 겪은 것을 들으면 생판 모르는 사람도 힘들었겠다면서 빈말이라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혁은 그럴 의지조차도 없어 보였다.
그 이유가 자신의 불행이 아니기 때문이라니.
사만다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분하긴 하지만 상혁의 말에 뭐라고 반박할 만한 말이 없었다. 자신도 저랬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일이니까 그게 그렇게 힘들고 대단한 불행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난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니까.’
영화에서도 그랬다. 늘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여주인공의 슬픔과 고통이자 행인 3 정도로 나오는 이의 고통과 슬픔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만다는 더 이상 자신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뭐, 그 정도 불행은 다들 겪고 사니까. 단지 당신은 그 불행의 제 공자가 명확하기라도 하니 차라리 다행 아닌가?”
“다행이라구요?”
“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모르거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의 근원지를 명확하게 하는 사람은 1퍼센트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혹은 복수를 할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불행이 누구에게서 기인한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만다는 달랐다.
그녀에게는 그녀를 그렇게 만든 글레이저 가문이라는 이들이 명백하게 존재했고 그녀가 알고 있었으니까.
사만다는 상혁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최악을 차악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네요.”
사람을 위로하는 것에는 영 꽝이지만 그래도 최악을 차악으로 느끼게끔 만들어 주는 빌어먹을 화술은 상혁의 특기였다.
상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최악을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사람을 괴롭히는 건 없는 것 같아서.”
가나안에서 인체 실험을 당하며 끔찍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지낼 때 혹여나 누군가 나를 도와주러 오지 않을까, 저 악마 같은 마법사가 천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수만 번도 더 넘게 품어 보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인체 실험을 하는 마법사를 처리하러 오는 정의의 기사도 없었고 하늘이 내리는 천벌 따위도 없었다.
그렇게 수만 번도 더 넘게 품은 희망은 어느덧 분노와 절망이 되었고 그 분노와 절망 속에서 상혁은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했다.
자신이 마법을 익혀 저 마법사를 죽이고 탈출하는 것.
그리고 상혁은 그것에 성공했고 지옥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마법이란 힘을 얻었다.
결국 최악을 벗어날 수 있는 건 내 손으로 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은 상혁이다.
“그래서 나보고 직접 그자를 찾아가 총으로 쏴 죽이기라도 하라는 건가요?”
상혁은 끔찍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사만다를 쳐다봤다. 괜히 이상한 여자가 된 기분에 사만다는 인상을 찌푸렸다.
“끔찍해라. 내가 언제 그랬어요?”
“아니, 결국 내 손으로 해야 한다고…….”
“내 손으로 방아쇠를 당기라는 게 아닙니다. 그때 글레이저인가 뭐시긴가 하는 그 가문의 정적에게 찾아가지 그랬습니까.”
“아.”
사만다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복수심에 사로잡혀 거기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글레이저 가문은 사만다가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그녀를 빠르게 처리해 버린 것이고 말이다.
이게 초보자와 숙련자의 차이다.
글레이저 가문은 보나 마나 이런 짓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신속하게, 할리우드의 여배우를 인체 실험하는 곳의 실험체로 보내 버렸겠지.
“하지만 이제 늦었어요. 그러니까.”
사만다가 상혁을 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날 책임져 주세요. 부탁드려요.”
사만다는 상혁에게 매달렸다. 상혁이 자신을 어떻게 미군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걸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사만다의 목숨은 상혁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누굴 책임져?”
백정연이 문을 드르륵 열면서 나타났다.
* * *
“지혜병원?”
“지예병원입니다.”
“김지예…….”
백도현은 백정연이 급히 웬 병원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곳이 한성그룹의 일가인 김지예가 운영하는 지예병원이란 걸 듣고는 턱을 괴었다.
“거기 있을까?”
“예?”
“실험 대상자들.”
박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정황상 그럴 확률이 컸다. 그게 아니라면 미군에서 증발한 실험 대상자들이 어디로 갔을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미군이 감시하고 있던 질병 대상자들을 구한 게 백정연이라고? 말이 돼?”
백도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히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그 뒤에 있었다. 하지만 백도현은 섣불리 그에 대해 알아보라고 박정철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위험해.’
백도현은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이 있었다. 애초에 미군과 손을 잡고 인체 실험을 진행하는 것 자체가 백도현에게는 크나큰 리스크였다.
그게 엎어진 와중에 또다시 자신이 감당 못 할 무언가를 짊어진다?
“대체 누굴까.”
미군의 수중에 있던 실험 대상자들을 빼돌렸다면. 최소한 러시아 정도는 돼야 한다. 하지만 러시아 측에서 움직였다는 첩보는 없었다.
“백정연과 러시아 사이에 관계가 있는 거 아니야?”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백정연과 러시아 사이에는 특별하다고 할 만한 관계가 전혀 없었다. 그럼 대체 백정연은 자신이 미군에게 협조했다는 그 증거를 어디서 찾아냈다는 말인가.
“SG대학병원 조사 결과는?”
“특이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아가씨나 첫째 도련님과 연이 닿은 사람들은 있지만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 알 수 있을 정도의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겠지.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모르는 배신자가 우리 안에 있다는 소리야.”
백도현은 턱을 괴었다. 대체 누구일까. 백도현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 있었다. 엘릭서 프로젝트가 완전히 실패하면서 미국과 은밀하게 맺었던 모든 협약들이 취소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관세부터 시작해 미국 내 판매망 확보 및 공장 이전의 압박까지.
엘릭서 프로젝트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엘릭서 프로젝트의 관계자는 백도현에게 이 모든 것들을 무마해 주겠다고 했다.
단 그 조건은 엘릭서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혹시 엘릭서 프로젝트가 미국 내 반대파들에게 알려진 게 아닐까요?”
“반대파?? 원탁?”
“예.”
백도현은 차라리 그게 더 신빙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백정연에게 원탁이 접근했다는 말인가?
“왜 백정연이지?”
“첫째 도련님과 사장님께서는 이미 끈이 닿아 있는 곳이 있으시니까요.”
“그래서 백정연이다.”
백도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박정철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 쪽에서 먼저 원탁과 대화를 해 보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아. 이번에 이런 사고가 일어난 건 엄연히 그들이 잘못했기 때문이니까. 우리는 실험 대상자와 장소를 지원해 주는 데서 끝인데 말이야.”
백도현은 자신에게 접근한 이들을 경계했다. 천성이 신중한 그에게 엘릭서 프로젝트를 들고 온 자들은 경계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만 얇은 계약을 맺은 것인데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게 되다니.
그렇다면 백도현은 그게 괘씸해서라도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 원탁과 대화를 해 보기로 했다.
“곧바로 시간을 잡겠습니다.”
박정철이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 * *
“그, 그러니까. 내가 오해했다는 거지?”
“네.”
상혁의 간결한 대답에 백정연은 자신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대체 이게 무슨 추태인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촌 동생 앞에서 보인 모습에 백정연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상혁은 알고 보니 자신과 핏줄로 이어진 사이였으니까.
“말은 놔도 되지? 내가 누나니까.”
그것도 나이 차이가 25살이나 나는 한참 누나였다. 상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부터 놓으셨어요.”
“그, 그런가?”
그러나 상혁이 자신의 은인이란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리고 백정연은 상혁이 마법사란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자신의 사촌 동생이 마법사였다니.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려고?”
백정연은 상혁과 사만다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완전히 오해해 버렸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제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하긴요. 저 여자가.”
“사만다.”
상혁이 사만다를 슥 쳐다봤다. 백정연과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었는데 기가 막히게 자신을 부르는 말이란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 여자, 저 여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뜻이겠지.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만다가 꽤 흥미롭거든요. 그래서 당분간 데리고 있으려구요.”
“데리고 있는다고? 할리우드 스타를?”
“방법이 있나요. 그냥 방치하면 죽을 텐데. 저 여자를 죽이려고 한 가문을 보면 벌써 저 여자를 찾기 위해 대한민국으로 사람을 보냈을 겁니다.”
권력자들의 끈질김을 상혁은 잘 알고 있었다. 글레이저 가문처럼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자마자 사람을 실험체로 판 이들이라면 아마 미군기지에서 일어난 화재 소식과 실험체 실종 소식을 듣고 곧바로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조사를 가장한 암살대.
상혁은 그들이 사만다를 금방 추격해 낼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나면? 네 말대로라면 미국에서 계속해서 사람들을 보낼 텐데.”
상혁은 사만다를 보고는 히죽 웃었다. 안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마나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해외에 나갈 일이 없나 해외의 오염지를 찾아내어 보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마침 미국에도 있었다.
‘6서클.’
6서클에 오르는 것은 1서클에서 5서클까지 오르는 것보다 훨씬 더 지난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전에 준비할 것도 많았다. 그동안 사만다를 곁에 두고 엘릭서의 효과를 받은 그녀를 관찰하면서 준비하면 될 것 같았다.
더불어 퀘스트까지 마무리해서 마나석과 마정석을 받으면 그걸로는 쓸 만한 아티팩트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 후 미국에 가면 된다.
‘엘릭서도 몇 개 더 찾고. 인체 실험을 한 놈들도.’
상혁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웃음에 사나움이 일렁이는 것이 맹수 못지않았다.
‘깡그리 쓸어버리면 되겠지.’
상혁은 그렇게 생각한 뒤 사만다에게 말했다.
“살고 싶으면 내 집으로 갑시다.”
상혁의 허락에 사만다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백정연은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사촌 동생이 할리우드 스타와 동거를 한다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방적이어도 동거는…….”
“그보다 누나께서는 하나만 알아봐 주십쇼.”
상혁은 쓸데없는 말을 하려는 백정연의 입을 사전에 막았다.
“뭘?”
“혹시 인간 골격으로 된 로봇이나 그런 걸 만드는 곳이 SG 계열사 중에 있습니까?”
서번트와 골렘.
상혁은 SG그룹의 일가가 된 김에 한 번 그 돈의 힘이란 것을 한번 제대로 누려 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