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93화
093. 헛다리 짚기(3)
쿠우우!
평택 미군기지를 통해 군 수송기 한 대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착륙했다. 격납고들이 즐비한 활주로 가운데 미군 정복을 입은 군인 한 명이 서 있었는데 그 군인의 모자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세 개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미군 정보사 리바인 대위.
그는 몰아치는 바람 아래서 모자를 눌러 잡은 채 짜게 식은 눈으로 착륙한 수송기를 쳐다보았다. 잠시 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수송기가 열리며 그 안에서 군복이 아니라 평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터덜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척.
“카터 요원?”
“카터입니다. 리바인 대위님.”
미간에 그어진 주름을 보니 인상을 자주 쓰는 듯한 카터와 리바인 대위가 악수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반가운 기색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작전국에서 국방성의 일까지 관여하다니. 바쁘실 텐데요.”
CIA의 작전국은 국가 비밀 공작국의 약칭으로 CIA 내에서도 기밀로 다뤄지는 위험한 작전들, 통칭 흑색 작전을 전담하는 곳이었다.
그런 계획국의 요원이 이곳 평택기지로 파견되었다는 것은 CIA의 조사 범위 내에 국방성도 포함이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국가 안보에 중대한 일이 생겼으니 CIA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리바인 대위는 눈앞의 카터가 작전국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도 알지 못했다. 정보사 소속인 리바인이지만 정보사보다 CIA의 정보 통제 능력이 한 수 위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의 이름과 소속만 알뿐, 그 외의 정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서로 악수를 하고 있다는 셈이었다.
정보사 소속으로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미 기초 수사는 정보사에 의해 거의 종료가 된 상태입니다. 그러니 오셔서 자료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국방성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CIA의 수사선상에 놓였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게다가 민감한 군사 기밀들이 많았기 때문에 CIA가 자신들의 내부를 쑤시고 다니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CIA에게는 지금 바로 절호의 기회였다.
미국 행정부 중에서도 가장 비밀이 많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 국방성이었다. 국가 안보와 기밀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CIA는 정보국인 자신들이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방성은 그 특수성을 이유로 CIA의 협조를 거부하면서 계속해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는데, 이번이 그 내부를 들여다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이번에 미군 기지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재 사건 때문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인해 미군기지 내 제8군 제35방공포방여단의 막사 세 동이 전소됐고 그 외에도 수많은 피해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리바인 대위는 이 정도 일로 본토에서 작전국 요원이 파견되었다는 것에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었다.
‘들어온 건 카터 요원 하나. 하지만 작전국이 움직였다면 한 개 팀 이상이 움직였을 것이다. 거기에 동아시아 지부까지 동원됐을지도.’
작전국은 미국의 본토 안전에 심각하게 위협이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곳의 요원이 직접 한국까지 들어왔다는 건 미군기지에서 일어난 화재에 대해 CIA에서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무언가 내면에 리바인 대위가 알지 못하는 이해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럴 수는 없겠군요. 이미 화재 현장에 요원들이 파견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사령관님의 재가도 없이 말입니까?”
“죄송합니다. 극비리에 진행되는 부분인지라. 각하께서 한 시간 전 사령관께 전화를 드렸을 겁니다.”
“…….”
대통령까지 등판했다. 대통령이 등판했다면 사령관도 일개 명령을 받는 지휘관일 뿐이다. 그렇다는 건 정보사인 리바인 대위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미 기지 안에 CIA가 들어와 있었다는 뜻이다.
“너무 경계하지 마시길. 여러분이 미국의 안보를 위해 노력하시듯, 저희도 다른 필드에서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카터는 리바인 대위의 옆을 슥 지나쳤다. 리바인은 입술을 꾹 깨문 다음에 그의 뒤를 따랐다. 카터는 리바인 대위가 준비해 놓은 차에 올라타서는 말했다.
“현장으로 가 주시죠.”
리바인은 아무 말 없이 카터를 데리고 현장으로 갔다. 밤새 타올랐던 불은 간신히 그다음 날 새벽이 되고 나서야 꺼졌다.
하지만 그 불이 꺼지는 데에 미군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꺼지지 않는 불.
백린을 터뜨리지 않는 한 꺼지지 않는 불이란 불가능했는데 아무리 미군이 용을 써도 그 불은 거세게 주변을 태우다가 새벽이 되자 더 태울 것이 없엇는지 저절로 사라졌다.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현장에 카터가 도착하자 여기저기 퍼져 있던 CIA 요원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전문적인 과학 감식 훈련을 받은 요원들인 듯, 손에 첨단장비를 들고 있었다.
‘애초에 우리의 조사 결과는 믿지 않겠다는 뜻인가.’
정보사가 현장 주변에서 현장에 들어오지 못한 채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위에서 아마 CIA를 방해하지 말라는 명령이 따로 내려온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화재가 일어난 날, 본국에서 작전국 요원이 파견될 정도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정보사는 이 현장에서 다른 특별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CIA 요원 중 하나가 카터를 데리고는 한쪽을 가리키며 뭐라고 수군거렸다. 그러자 카터가 그곳으로 가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리바인을 쳐다봤다.
“대위님.”
리바인은 카터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카터가 바닥에 있던 무언가를 본을 떠 들어 올리면서 리바인에게 물었다.
“불이 난 그날, 기지 안으로 들어오거나 나간 차량 중 8톤 트럭 크기 이상의 차량들을 모두 다 조사해서 가져와 주세요.”
“그날 기지 내 인근 CCTV가 모두 먹통이 되었습니다.”
“먹통…….”
카터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이건 그의 예상외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리바인은 CIA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무작위로 다수의 흔적이 남은 이 현장에서 정보사는 발견하지 못한 바퀴 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군에서 쓰는 차량이 아니다.’
그리고 그건 그가 아는 한 미군 내에서 사용하는 차량이 아니었다. 리바인이 그런 카터에게 말했다.
“대신 인근 경찰서에 협조해 기지 주변의 CCTV를 확보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 주시죠.”
“대신.”
리바인이 카터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해서 저와 공유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셔야만 합니다.”
리바인은 자신들의 안방을 CIA가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러자 카터가 다가와서는 리바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기심이 수명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협박하는 겁니까?”
CIA가 정보사를 협박하는 꼴이다. 리바인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자 카터는 빙긋 웃었다.
“당신 한 명 처리하는 것에 대해서 정보사가 나설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그러자 리바인의 얼굴이 굳었다. 카터의 말인즉슨 자신이 죽어도 그것이 CIA와 정보사의 알력 다툼으로 번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 확신은, 지금 이 일이 리바인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위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게끔 하였다.
“그러니 부디.”
카터가 리바인에게 한 발자국 뒤로 떨어지면서 고개를 옆으로 까닥였다.
“오래오래 사시길 바랍니다. 같은 미국인으로서.”
카터의 두 눈이 새파랗게 빛을 발했다.
* * *
끼익.
상혁은 오승택이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김지예의 병원 앞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상혁이 내리자 건물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 김지예가 걸어 나왔다.
“빨리 오셨네요.”
“예. 그 여자는 어디 있습니까?”
사만다 허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당장 미국이 들썩일 것이다. 김지예는 그것이 사만다 허드라는 것을 알고 인터넷을 검색했다가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사만다 허드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은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석한 김지예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1번 병실이요. 제일 위층.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격리해서 보호하고 있기는 한데. 정말 사만다 허드 맞아요?”
“네.”
“아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정연이는 제대로 말도 안 해 주고, 지금 바쁜 거 같던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기는 그렇고요.”
“나 참. 이 사람들 입원 사유부터 시작해서 다 제가 작성해야 하는 거 아시죠? 다른 사람한테 맡길 곳도 없고. 이래 봬도 이 병원의 수장인데.”
김지예는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어 꽤 답답했던 듯 상혁에게 종알종알 떠들었다. 하지만 상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자 김지예가 입을 자신도 모르게 다물었다.
“계속 그렇게 떠드실 겁니까? 다 들리겠는데?”
“까칠하긴. 내가 나이도 훨씬 많은 것 같은데.”
김지예가 투덜거렸다. 김지예와 상혁의 나이 차이는 기본 스무 살이 넘게 난다. 겉은 스무 살이지만 살아온 경험은 일흔인 상혁에게 그런 항의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이 많이 드신 대우해 드릴 테니까 이만 가시죠. 계속 붙어 다녀서 좋을 것 없지 않습니까.”
“무슨. 내가 괜히 따라온 줄 알아요?”
띵!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사람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늘 상주하기 마련인 간호사들도 없었기 때문이다.
김지예는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으니까 일단 제가 다 관리하고 있어요. 깬 환자들도 SG에서 이쪽으로 이송됐다고 하고 진정시키고 있고.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 다 해야 돼요?”
김지예는 거의 백 명에 달하는 환자를 홀로 보고 있는 셈이다. 간호사가 없는데도 그게 가능할 정도면 김지예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감당 못 할 환자들은 백 대표님이랑 상의해서 다른 곳으로 이송하세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고 그러실까.”
“근데 정연이랑은 무슨 사이에요?”
상혁이 김지예를 쳐다보자 김지예가 그렇지 않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연이가 누구 말을 들을 애도 아닌데, 그쪽 말은 잘 듣던데. 그렇다고 둘이 사귄다고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고.”
“사촌 동생입니다.”
“사촌이요?”
사촌이란 말을 우물거리던 김지예의 눈이 커졌다. 백정연의 사촌이란 말은 상혁이 곧 SG그룹의 핏줄이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에이. 그런데 정연이가 존대를 해요?”
“저도 얼마 전에 알았거든요. 백 대표님도 얼마 전에 아셨을걸요?”
“네? 그게 어떻게…….”
“집안일이에요. 복잡하기도 하고. 그럼 안내 감사합니다.”
상혁은 김지예의 수다에 더 반응해 줄 생각이 없었다. 사만다 허드가 있다는 1호실에 도착한 상혁이 김지예의 코앞에서 문을 탕하고 닫아버리고는 문에 마법까지 걸었다.
“락.”
이제 절단기를 가져와서 문을 통째로 자르지 않는 이상 이 문이 함부로 열릴 일은 없을 것이다. 상혁은 호기심도 많고 말도 많은 김지예에게 그새 질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그때 당혹에 찬 목소리가 상혁의 귀에 들렸다.
“누, 누구시죠?”
사만다 허드였다. 열화판 엘릭서를 주입 당하고 고통에 부들거리며 떨던 모습이 아니라 제대로 정상적인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사만다 허드는 마치 조각을 빚어 놓은 것만 같았다. 창백한 안색이 그녀를 인간이 아니라 조각상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상혁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병상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엉덩이를 붙이고는 앉아서는 그녀에게 말했다.
“댁 구한 사람입니다.”
“나를요? 당신이?”
사만다 허드가 불신에 찬 눈으로 상혁을 쳐다봤다.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이건 숫제 물에서 건져 줬다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형국이었지만 상혁은 그런 그녀를 이해했다.
당황스러울 것이다.
미국에 있던 잘나가는 배우인 그녀가 모종의 연유로 잡혀 와 눈을 떠보니 한국이었으니, 그게 얼마나 놀랍겠는가.
하지만 상혁은 그런 사만다 허드의 당혹감을 해소해 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누굽니까?”
“예?”
“누구한테 찍혔길래 한국으로 팔려 왔냐고요.”
상혁의 거침없는 말에 사만다 허드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