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58화
58. 영감이 기운도 좋다(3)
SG그룹 집안은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다.
어떤 재벌가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SG그룹은 특히나 더 심했다. 특히 백성철 회장은 선대 회장이 있던 시절부터 알아주는 호색한이었다.
이혼 두 번에 결혼만 세 번을 했다. 또 결혼생활 도중에도 내연녀와 정부들을 만들어 두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차피 돈이야 차고 넘치니 그 돈으로 여자들에게 집을 사 주고 사치를 하게 내버려 두어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그건 백성철 회장이 올해 일흔다섯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유 닥터.”
“회장님. 오시지 말라고 부탁드렸을 텐데요.”
“내 병원에 내가 오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이요?”
“진짜…….”
“허허, 걱정 말게나. 이곳에 있는 건 아무도 모를 테니.”
백성철 회장이 아무리 늙고 병들어도 그가 가진 돈과 SG그룹 회장이라는 이름은 딸보다도 어린 여자들을 결국 굴복시켰다.
그는 공략하는 데 어려운 여자들이면 여자들일수록 더 좋아했는데 이번 타깃은 SG충청병원에 있는 한 VIP 전문 여의사였다.
백성철 회장과 그 선대가 태어난 곳이 충청도였고 그중 태안이었기 때문에 백성철 회장은 정치권에도 생색을 내고 국민들에게도 생색을 내기 위해 태안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중 하나가 수도권 병원에 뒤지지 않는 인력풀과 시설을 자랑하는 SG충청병원이었다. 충청도의 거점 병원으로 지정이 될 정도로 경기도권 바깥 지역에서는 손꼽히는 병원이었다.
그리고 오늘 백성철 회장이 무려 한 달이나 공을 들인 유 닥터라 불리는 여의사가 넘어오기 직전이었다.
“태안은 당신 같은 뛰어난 의사에게 너무 좁은 곳이지. 서울로 오시오. 유 닥터 정도라면 강북SG병원에 의과장 자리를 만들어 놓으리다.”
백성철은 돈과 권력으로 여자들을 유혹했다. 그리고 그런 백성철을 정복하면 SG그룹의 권력을 누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여자들은 그 유혹에 걸려들었다.
지금 눈앞의 여의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백성철을 거부했다. 그래서 백성철이 지난 한 달 동안 줄기차게 시간이 날 때마다 시찰을 이유로 이곳까지 내려왔다.
그러고는 그녀를 계속해서 유혹했다.
집, 차, 명품, 사치와 향락.
그리고 대학병원의 의과장 자리까지.
결국 그런 유혹에 사람은 흔들리고, 넘어오게 된다. 백성철은 여의사에게 손을 뻗었다.
“어때. 나와 함께 가시겠…….”
이 말만 하면 이제 끝이다. 백성철은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를 만나왔기 때문에 바로 느낌이 딱 왔다. 하지만 그때 바깥에서 소란이 벌어지더니 누군가 문을 탕 하고 밀고 들어왔다.
인기척에 놀란 여의사가 손을 얼른 빼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백성철은 안타깝게 쳐다봤다. 저렇게 다 된 밥에 누군가 코를 빠뜨리면 다시 밥이 익게 하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지난 한 달간의 노력이 수포가 되었다는 것에 백성철이 난입한 침입자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오늘도 여전히 더러우시네요, 회장님.”
“정연아.”
“나보다 어린 의사 선생님. 나가셔서 일 보세요.”
“예, 대표님.”
여의사는 후다닥 병실에서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백정연은 못마땅한 눈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아서는 아버지인 백성철을 쳐다봤다.
“요새도 이러고 다니세요?”
“왜. 이 아비가 언제 반쪽 없이 다니는 거 보았느냐?”
백정연은 차갑게 웃었다.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마흔 중반이 훌쩍 넘은 딸 앞에서 자신보다 어린 여의사를 유혹하다가 걸린 것치고 백성철은 너무나도 떳떳했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보고 욕하세요.”
“왜. 네 어머니는 나의 자유로운 연애관을 존중해 주었지. 네 어미도 그런 것을 왜 네가 난리인 것이냐?”
“딸이니까요.”
“내 딸이기 때문에 그 나이에 이 커다란 호텔과 리조트의 대표가 된 것이다. 그러니 그것에 만족해야지. 어디 아버지 사생활에 끼어드느냐?”
백성철의 목소리는 까랑까랑했다. 죽으려면 아직 한세월이 남았다는 것을 보여 주듯 그렇게 꼬장꼬장할 수가 없었다.
“왜요. 또 증권가 찌라시에 이름 오르내리면 돈 돌리시게요? 아버지 때문에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요.”
“건강하다는 증거다. 너는 이 애비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느냐?”
“아니요. 자식들을 창피하게 만드시는 거죠. 건강하시다는 게 아니라!”
백정연은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대들었다. 백성철은 그런 백정연에게 콧방귀를 뀌었다.
“차라리 삼촌이 회장이 되어야 했어요.”
“너!”
그때 백정연의 말에 백성철의 두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그러자 대기업 회장으로서의 존재감이 살아났다.
백성철이 호색한이라고는 하나 그는 재계의 굵직한 거물이다.
그런 그가 진심으로 화를 내자 분위기가 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백정연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아직도 열다섯 살인 줄 아세요? 그 정도로 겁먹을 제가 아니에요, 회장님.”
백정연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녀도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 의외의 반항에 멈칫한 백성철이 멈칫했지만 이를 이내 뿌득 갈았다.
“그놈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요. 아버지도 형제를 죽이고 회장 자리에 앉으신 건 양심에 찔리시는 모양이네요.”
“너 정말 혼나고 싶으냐?”
백성철은 저 회장직에 안기 위해 자신의 형제를 제 손으로 죽였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어 백성철은 경찰과 검찰에서도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러니 백성철은 자신의 형제를 죽였다.
그것도 자신보다 열다섯 살은 어린 동생을 죽였다. 10년 전에.
“회장에 오르고 나서도 뭐가 그렇게 두려우셨어요. 조용히 살고 싶다는 삼촌의 바람도 무시하고 죽이셨잖아요.”
“너! 입 다물지 못해!?”
“그러니까 아버지.”
백정연은 화를 내는 백성철을 딱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뭘 보고 배우겠어요. 아버지가 그러셨는데. 그리고 이 말 듣기 싫으시면 저 보는 일 없게 해 달라고 했잖아요.”
“너…….”
백성철은 말문이 딱 막혔다. 실제로 콩가루 집안인 SG그룹은 명절이 되어도 흔히 가족들끼리 모이는 경우가 극히 적었다.
어차피 서로 얼굴을 맞대 봤자 좋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백정연은 그런 백성철에게 말했다.
“도현이가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지 묻더군요.”
“너…….”
“그리고 이 호텔이랑 리조트. 어차피 공짜로 주신 것도 아니잖아요? 입막음용으로 주셨으면서.”
“함부로 말했다가는 네게 준 것을 다 가져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가만히 티 내지 말고 계시라구요. 왜. 도현이가 너무 커서 더 이상 컨트롤이 안 되세요?”
백정연의 말에 백성철의 얼굴이 굳었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왕좌에 앉은 백성철에게는 자식들도 그냥 자식들이 아니었다.
언제든 자신의 왕좌를 넘볼 수 있는 잠재적인 경쟁자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셋째인 백도현이었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뒤를 밟을 정도로 자신만의 사람들을 만들고 세력을 키웠다는 뜻이었으니까.
자신과 가장 닮은 셋째에게 백성철은 가장 큰 위기감을 느꼈다.
만약 백성철이 여기서 또 호색한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들 백도현이 알게 된다면 백도현은 그것을 무기로 삼아 백성철을 압박할 것이다.
“이만 가세요.”
백정연은 백성철에게 말한 뒤 VIP 병실에서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려 백정연은 벽을 짚고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정말 싫다. 아버지고 동생이고.”
그녀는 자신의 집안이 지긋지긋했다.
* * *
박정철은 백도현 앞에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백도현은 박정철에게서 상혁이 한 말을 듣고는 턱을 쓰다듬다가 이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어려서 그런 걸까요?”
백도현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디 스무 살짜리 고시포기생이 SG전자의 사장이 부르는데 그런 식으로 뻗댄다는 말인가.
적어도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설명이 되는 행동이었다.
“아니면 믿는 구석이 따로 있다던가? 이선호가 같이 있었다면서요?”
“예. 그런데 이선호가 오히려 상혁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리가. 회장님 앞에서도 눈치 한 번 안 봤던 양반인데 누구 눈치를 봐요.”
“…….”
박정철도 그 부분이 설명되지 않았다. 이선호가 대가 세다는 것은 SG그룹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박정철은 분명히 확신했다.
그 둘의 사이에서 주도권은 상혁이 쥐고 있었다.
“어쩔 수 없네요. 가 달라면 가야지.”
“정말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네. 원래 보러 가려고도 했고. 이야기를 들으니까 더 궁금해졌어요.”
백도현이 히죽 웃었다.
“그 정도로 건방진 놈인데 기대가 되네요. 그냥 어린 나이의 혈기인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인지 어느 쪽이건 잃는 건 없잖아요?”
“예. 그럼…….”
“가시죠.”
백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박정철과 경호원들이 따라나섰다.
* * *
“나가죠.”
상혁이 이선호에게 말했다. 박정철이 돌아가고 난 바로 그다음이었다. 이선호가 어디를 가냐면서 고개를 갸웃하자 상혁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백도현이 만나러 올 테니까 어디 한번 기다려 보라고 하고 나갔다가 오죠.”
“백도현이 온다고요?”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요. 철저하게 선민주의 사상에 찌든 인간입니다. 같은 재벌이 아니면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망나니고요. 그런데 오라고 해서 오겠습니까?”
“오. 그럼 내기?”
상혁이 눈을 찡긋했다. 이선호는 이번만큼은 상혁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백도현이라면 상혁보다 자신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좋죠.”
“만약에 제가 이기면 호텔에 연하향이라는 중국 레스토랑이 있대요. 거기서 식사 콜?”
이선호의 표정이 굳었다. 상혁이 먹는 양을 잘 알기 때문이다. SG호텔의 연하향은 미쉐린 스타를 받은 중국 레스토랑이다. 거기는 짜장면이 한 그릇에 25,000원이다.
그런데 그걸 상혁이 배부를 때까지 먹인다?
“절 파산시키시려구요?”
“당연히 변호사님이 이기신다는 표정 같아서요.”
“좋아요. 만약에 제가 이긴다면…….”
이선호가 씩 웃었다.
“저도 마법 쓸 수 있게 해 주세요.”
마법은 어려서부터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다. 영화와 만화를 보면서 마법사에 대한 동경은 다들 한 번씩 하게 된다.
그런데 눈앞에 진짜 마법사가 있으니 그런 소원 하나 못 빌 리 없다. 게다가 이건 내기다. 지는 사람이 무조건 들어 줘야 하는 내기.
“콜.’
그런데 의외로 상혁은 쿨하게 승낙했다. 마법을 익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얼마 전에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그 반응에 오히려 내기를 제안한 이선호가 놀랐다.
”진짜요?”
“네.”
상혁의 말에 이선호는 얼른 재킷을 챙겨 들었다. 그러자 뒤에서 오승택이 슬며시 나와서는 손을 들었다.
“으. 그럼 저는요?”
백도현 때문에 쫓기고 있는 오승택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호텔에 있다는 것이 오승택의 입장으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도망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다. 상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오승택의 어깨를 짚었다.
“슬립.”
스르륵.
오승택의 눈이 풀리면서 쓰러졌다. 수면 마법을 건 뒤 상혁은 오승택을 침대에 눕혔다.
“인식장애.”
거기에 인식장애 마법까지 걸어 주었다. 그러니 설령 저들이 문을 따고 들어온다고 해도 오승택이 침대 위에서 자고 있다는 건 꿈에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오승환처럼 신내림을 받은 사람이 없다면 말이다.
“저렇게 둬도 됩니까?”
“네 됩니다. 얼른 나가죠.”
상혁은 이선호의 등을 떠밀면서 나갔다. 그런데 이선호가 등 떠밀려 내려가면서 상혁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죠?”
어딜 가느냐가 문제다. 로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상혁은 씩 웃었다. 그러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안내도를 가리켰다.
“여기 가면 되죠.”
“연하향이요? 잠깐. 아직 내기 결과가 안 나왔는데요?”
이선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상혁이 손가락을 들어 엘리베이터 쪽을 가리켰다. 그쪽에 경호원들을 주렁주렁 매단 백도현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가는데요?”
“…….”
이선호는 침묵했다. 저기에 있다고 해서 상혁의 방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었으나 마법사 앞에 그런 우격다짐이 통할 리 없다.
상혁은 싱긋 웃었다.
“저녁 먹고 가면 딱일 것 같은데요.”
이선호는 벌써부터 자신의 지갑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죽을상을 짓고는 상혁을 따라 연화향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