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47화
47. 잘 먹는 마법사(2)
SG호텔&리조트 태안의 환경관리 팀장인 최규태는 누군가에게서 묵직한 007 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누군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최규태는 곧장 차에 올라탔다. 품 안에는 007 가방을 신줏단지 모시듯 귀하게 껴안은 채 차에 시동을 건 것이다.
“흐흐흐.”
최규태는 운전대의 핸들을 잡은 채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웃었다. 이 돈이면 외국에 나가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왕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조금 불편하긴 하겠지만 요새는 외국에 산다고 해서 예전처럼 한국을 그리워할 일은 별로 없었다. 웬만한 건 전부 다 도시에 있는 한인타운에 가면 해결됐기 때문이다.
“인생 역전이야. 인생 역전이라고!! 크하하하!!”
몇 가지 수치만 조금 조작하여 윗선에 보고하는 것만으로 그가 거머쥔 돈은 어마어마했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사직서를 올려놓고 나왔다.
최규태는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집에서 나오면서 이미 모든 짐을 다 싸서 나왔기 때문에 집에 갈 것 없이 곧장 인천공항으로 갈 생각이었다.
“간다. 내 인생 드디어 피는 거야! 쥐구멍에 볕이 들어오는 날이구나!”
부아앙!!
액셀러레이터를 밟자 차가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속도위반 카메라가 있었지만 걸려도 뭐, 돈 좀 내면 그만이라는 마음이었다.
부다다다닥!!
그런데 그때 최규태가 탄 차량의 옆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가 스쳐 지나갔다. 앞바퀴를 든 채로 묘기 주행을 하는 걸 보니 폭주족인 듯했다.
“쯧. 요새에도 저런 미친놈들이 있었나?”
경찰한테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최규태는 위험천만한 오토바이가 묘기를 부리는 걸 보면서 혀를 찼다. 그런데 그때 무언가 덜컥하는 소리가 났다.
“응?”
사이드미러를 통해 옆을 보니 웬 오토바이 한 대가 달리고 있는 최규태의 차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주유구를 열고 그 안에 무언가를 넣는 것을 본 최규태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콰앙!!
최규태가 탄 차가 달리던 도중 어마어마한 화염을 내뿜으면서 터져 나갔다. 그렇게 불길에 휩싸인 최규태의 차를 덩그러니 내버려 둔 채 오토바이 두 대가 사고 현장에서 빠르게 빠져나갔다.
활활활.
불타오르는 최규태의 차만이 어둠을 외로이 밝혀 주고 있었다.
* * *
“뭘 원하세요?”
백정연은 상혁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상혁이 흐음 하며 팔짱을 꼈다.
“그 드레스가 백만 달러라고 했죠?”
백정연이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상혁이 쪼잔하게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그대로 돌려주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드레스를 입으면 당신이 오늘 벌 돈은 얼마였죠?”
상혁이 접근 방식은 백정연이 상상한 것 그 이상이었다. 상혁은 드레스 자체의 가격이 아니라 그 드레스를 입음으로써 백정연이 얻을 이득에 관심이 있었다.
“SG호텔의 대표님이시라고 하니 분명 백만 달러짜리 싸구려는 아니겠죠?”
백정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대사 부인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어 SG호텔이 이탈리아로 진출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이 드레스가 깨끗해져야만 한다.
“그래서요?”
“당신이 얻을 이득의 10퍼센트만 받읍시다.”
“무슨!”
백정연은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기업가다. 비즈니스를 하는데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비율로 이익을 나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차라리 그냥 이 드레스를 입고 나가겠어요.”
“음, 엄청난 금액인 모양이죠?”
“…….”
이탈리아에 진출한다는 것은 백정연으로서도 큰 리스크를 감수하는 일이었다. 그냥 단순히 물건만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곳의 부동산을 매입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초 비용 자체가 말도 안 되게 들어간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걸 시작으로 SG호텔이 한 단계 더 발돋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SG호텔이 얻을 이익은 얼마나 될까.
그것의 10퍼센트?
드레스 하나 세탁하는 비용으로 그 10퍼센트를 쓰기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혁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제안하라고 했으면서 원하는 걸 말했다고 안 된다고 외치면 곤란하죠. 이럴 시간이 없으실 텐데? 뭐 지원금 심사합니까?”
“조금 상식적인 선에서!”
“당신이 오늘 얻을 수 있는 그 이득이 드레스에 따라 좌우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비상식적이라고는 생각 안 하는데요. 뭐, 어쨌거나 그게 싫다면.”
상혁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뭐 그럼 약간의 수고비와 SG호텔이랑 리조트 견학 정도?”
“견학이요?”
“환경오염 쪽에 관심이 많아서. 특히 이런 호텔이나 리조트, 그리고 컨트리클럽들에서 나오는 오염물질이 많다고 들었거든요.”
상혁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백정연이 자부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면 별로 볼 것 없을 텐데요.”
“왜요?”
“우리 SG호텔&리조트는 환경 부분에 있어서는 완벽하거든요. 환경관리팀도 따로 두고 있고, 주기적으로 오염도 체크도 하고. 환경부에서 매년 받는 기업 환경상도 늘 우리가 받는데요?”
상혁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백정연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속고 있다는 거겠지?’
적어도 상혁이 느낀 호텔 주변의 마나 농도는 SG반도체 공장에서 내보내는 오·폐수가 오염시키고 있는 내림천의 수질보다 나빴다.
그 말인즉슨 반도체 공장보다 더 많은 양의 오염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리였다.
“정말요?”
“네. 뭐 견학이야 얼마든지 시켜드리죠.”
백정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입은 드레스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어서 세탁해 주세요.”
상혁은 백정연을 보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백정연이 고개를 갸웃하자 상혁이 씩 웃었다.
“끝났는데요?”
“어머!”
백정연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자신의 드레스가 포도주 자국이 없는 순백의 드레스로 되돌아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백정연이 상혁을 쳐다봤다.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죠?”
“마법사라니까.”
상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백정연은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눈으로 상혁을 쳐다봤다. 상혁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을 말했는데도 저런 눈빛이라니.
하지만 백정연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상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선 당신이 누군가는 둘째치고, 도움 주셔서 감사드려요.”
“받을 건 받고 하기로 했는데 감사는.”
“비서에게 연락처를 주세요. 약속한 보상은 꼭 드리도록 하죠. 그리고 견학도 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백정연에게 물었다.
“파티인 것 같던데. 나도 구석에 껴서 와인이나 좀 마셔도 됩니까?”
가나안에 비하면 밍밍한 포도주였지만 그래도 간만에 마셔서 그런지 또 마시고 싶었다. 백정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삐 사라졌고 상혁은 뒷짐을 진 채 느지막하게 나갔다.
이미 뷔페에서 보는 사람이 기가 질릴 정도로 먹었지만 마나 몇 번 쓰면 금방 소화될 열량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상혁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와인을 도장깨기하듯 마셔대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한 잔을 손에 든 채 우아하게 걸어 다니며 사담을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상혁은 손에 잡히는 모든 와인을 한 모금에 넘겼다.
“스읍, 이건 좀 시네.”
“이건 떫고.”
“풍미가 부족해.”
그러면서 나름 와인에 대한 평을 내렸다. 상혁이 내린 평 중에 5점 만점에 3점 이상을 넘기는 것들이 없었다.
“역시 소주가 최곤가?”
지구의 맥주나 와인, 혹은 독주와 비슷한 것들은 가나안에도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소주 같은 증류주로 만든 독주는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째 소주만 못하다고 생각하며 상혁은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여기요.”
상혁은 웨이터를 불러 테이블 한쪽에 쌓아 두었던 와인잔을 한꺼번에 웨이터의 쟁반에 놓아주었다. 그 무게에 웨이터가 잠시 휘청거렸지만 용케 넘어지지 않고 비틀거리면서 걸어갔다. 물론 상혁을 원망 섞인 눈으로 쳐다본 것은 덤이었다.
“어우, 이거 맛있네.”
와인이 밍밍하자 상혁은 손으로 집어 먹을 수 있는 핑거푸드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다채로운 음식이 더 나았다.
마카롱을 먹던 상혁은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지자 고개를 갸웃하며 돌렸다.
“하이.”
금발에 벽안, 전형적인 유럽인인 여자가 상혁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보였다. 나이는 30대 정도. 상혁은 마주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마저 입에 음식들을 넣고 있는데 여자가 다가와 물었다.
“너튜버?”
“왜 그러시죠?”
여자는 영어를 썼다. 상혁도 한국 교육 과정을 마쳤기 때문에 간단한 회화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사실 통역 마법 한 번이면 되지만 이곳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반드시 필요한 마법도 아니었고.
“먹방 너튜버. 유 에잇 어 랏.”
여자가 먹는 시늉을 했다. 아마 상혁이 먹는 양을 보고 신기해서 말을 건 모양이었다. 먹방 너튜버라고 하는 걸 보니 그쪽에 관심도 있는 것 같았고.
“아닙니다.”
“와우.”
여자는 상혁이 먹방 너튜버도 아닌데 그 정도로 먹었다는 것에 더 놀라 했다. 그렇게 안 되는 영어로 서로 더듬거리며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상혁의 눈이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사념?”
공중에 상혁의 눈에만 보이는 검은 형체가 부유하고 있었다. 그 순간 상혁의 눈동자가 오색으로 빛났다. 마나안을 발동한 것이다.
“어?”
검은 형체의 내부를 투과하기 위해 마나안을 발동한 상혁은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상혁의 가슴팍이 불룩 솟아올랐다.
뽀르르!
초아였다. 그런데 저 위에 부유하고 있는 것도 초아와 비슷해 보이는 어떠한 형체였다.
물론 풀의 정령인 초아와는 다르게 타락한 것처럼 불길한 기운을 뿌리는 사념이었다.
“와우! 유얼 아이!”
그런데 그때 여자가 상혁의 눈을 보면서 관심을 보였다. 상혁의 눈이 오색으로 빛나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보다는 사념에 관심이 생긴 상혁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망각.”
여자가 상혁에게 관심을 가진 그 순간을 잊게 한 상혁의 앞에서 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왜 여기 서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여자를 물리친 상혁은 사념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게. 아주 천천히.
‘타락한 정령인가?’
초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불길한 기움을 품은 저 사념은 타락한 정령이다. 가장 순수한 자연에서 파생된 존재인 정령은 때로 타락하기도 한다.
계약을 맺은 이에게 학대를 당하거나 버려졌을 때. 혹은 자연이 훼손되고 망가져 더 이상 정령으로서 존재하지 못할 때 타락하게 된다.
그렇다면.
‘후자겠네.’
이 지구에는 정령사가 없다. 마나도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 마법사도 없는데 그보다 더 희귀한 정령사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정령이 없는 건 아니다. 자연이 있다면 정령은 반드시 존재했다. 그런데 환경이 심각하게 오염된 지구는 타락한 정령이 탄생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사실 이제야 보였다는 게 신기할 정도지.’
지구의 상태를 보면 더 일찍 타락 정령을 마주쳤어야 한다. 오히려 이제야 마주친 것이 지구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었다.
타락 정령조차도 없어진 자연환경.
그건 지구의 자연이 거의 고사(枯死) 상태에 빠졌다는 소리다. 상혁은 타락 정령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가슴팍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넣어 둔 초아가 불룩대기 시작했다. 상혁은 초아를 슬슬 쓰다듬어 달래며 타락 정령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 상태의 정령은 위험하다.
지금 저 타락 정령이 사람이 많은 곳에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폭탄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자연 상태의 정령과는 다르게 타락 정령은 오히려 더 예민하고 사납다. 집에서 쫓겨나 들개가 된 개들이 위험한 것과 같은 이치다.
한 마디로 독기만이 남은 상태.
그러나 마법사에게 저런 정령은 아주 좋은 실험 재료였다.
‘운이 좋네.’
상혁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런데 그 순간 타락 정령이 고개를 돌려 상혁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상혁의 가슴팍 부분, 초아를 쳐다본 것이다.
그 순간 타락 정령의 두 눈이 붉어지면서 입이 쭉 찢어졌다. 그 사이로 침 같은 것이 뚝뚝 떨어지더니 이내 상혁을 향해 광폭하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