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먹는 대마법사 46화
46. 잘 먹는 마법사(1)
“가져오세요.”
“예, 사장님.”
박정철의 고갯짓에 구석에 서류 봉투를 두 손에 든 채로 대기하고 있던 이익현이 재빨리 백도현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백도현은 앞에 앉아 있던 여자에게 고개를 까닥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일이 바빠서.”
“아니에요.”
이 자리는 백도현의 선 자리였다. 재벌들에게 있어 혼맥이란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고 백도현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도 재계 서열 순위에 드는 집안의 딸이었다.
SG그룹만큼은 아니지만 해외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샌드페이퍼(사포) 기업 오너의 딸이었다.
공업용 샌드페이퍼는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쓰이는데 SG그룹의 소비량은 국내 1위였다. 그래서 내로라하는 곳을 거절하고 백도현은 그곳의 딸과 선을 보기로 한 것이다.
“언제 실험한 결과값입니까?”
“일주일 전입니다.”
“잘 포장해서 환경부와 이탈리아 대사관 쪽에 넣으세요. 아마 관심이 많을 겁니다.”
“예, 사장님.”
박정철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백도현은 거짓 웃음을 장착한 채 여자를 보며 빙긋 웃었다.
“좋은 날인데 업무를 이곳까지 끌고 와서 죄송합니다. 혹시 이탈리아 와인 좋아하십니까?”
여자는 백도현에게 이미 단단히 빠져 있었다. 백도현은 차기 SG그룹 회장이라 불릴 정도로 능력이 있었고 얼굴 또한 제법 잘생긴 축에 속했다.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능력과 외모를 갖춘 배우자감을 탐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좋아해요.”
“제가 사죠.”
백도현이 눈빛을 보내자 대기하고 있던 박정철이 곧바로 손짓했다. 잠시 뒤 피처럼 붉은 와인이 와인잔에 차오르는 것을 보며 여자가 백도현에게 물었다.
“도현 씨는 와인 좋아하세요?”
“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더 좋아해요.”
“오늘 같은 날이요?”
여자는 백도현의 말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는지 사르르 볼을 붉혔다. 하지만 백도현은 눈앞의 여자보다 저 멀리 태안에 있는 자신의 핏줄을 떠올렸다.
아마 지금쯤 백정연도 와인을 잔에 따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SG호텔&리조트의 해외 진출이라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응당 그녀의 훌륭한 대적자로서 그녀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는 것은 동생으로서 당연한 처사였다.
* * *
찰랑!
피처럼 검붉은 포도주가 와인잔 안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백정연은 웃는 낯으로 자신의 손안에서 찰랑거리는 와인잔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하나도 모르겠네.’
술 중에서도 와인은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로 한 손에 꼽힌다. 특히나 아이스 브레이킹이나 대화를 이끌어 나갈 때 와인에 정통한 것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있는 사람들의 사치와 허영을 채워 주는데 와인처럼 좋은 것은 없었다.
‘떫은 건 뭐고 프루티한 향이며 초콜릿은 뭐고.’
백정연의 코와 입에 와인은 다 비슷비슷했다. 그냥 떫고 신 포도 삭힌 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바로 와인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백정연은 고상함을 연기하며 와인을 즐기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호텔이에요, 무척 멋집니다.”
이탈리아 대사 부부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정연은 얼굴 근육이 땅겨 왔지만 그것을 티 내지 않으며 그들을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즐기실 만하시다니 천만다행이군요.”
“즐길 만하다니요. 이런 훌륭한 장소가 서울이 아닌 곳에도 있을 줄이야. 감탄했습니다.”
이탈리아 대사 부부는 오늘 이 호텔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다. 백정연은 이 두 부부를 태안까지 모셔오기 위해 세미나의 모든 비용을 부담했다.
몇몇 연설자는 외국에서도 오기 때문에 그들의 교통비와 체류비까지 전부 다 지원해야 했다. 그때 대사 부인이 백정연의 옷을 가리켰다.
“어머, 그 옷은 설마?”
대사 부인이 옷을 가리키면서 놀라워하자 대사도 한 박자 늦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사 부인이 가장 좋아하고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는 디자이너의 드레스였기 때문이다.
“오르세 부인의 드레스인가요?”
“어머. 부인께서도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아실 줄은 몰랐는데.”
백정연은 능청을 떨었다. 사실은 다 알고 준비한 드레스였다. 백정연이 움직일 때마다 한 개씩 손으로 붙여 만든 스와로브스키 수정이 반짝거리면서 빛을 반사했다.
마치 빛을 입고 다니는 듯한 백정연의 자태에 대사 부인은 홀딱 매료됐다.
“제 프롬 드레스를 만들어 주셨던 분이시죠. 가끔 이이랑 함께 가서 옷을 맞추기도 했답니다. 참 좋으신 분인데. 혹시 만나 보셨나요?”
오르세 부인은 이탈리아의 상류층 여성들의 드레스를 제작하는 전설적인 디자이너였다. 그리고 그녀가 대사 부인과 사적으로 언니 동생 하는 사이란 걸 백정연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준비를 철저히 했다.
“네, 한 번이요. 이 드레스도 그때 부탁을 드린 것이었는데. 이탈리아에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뵙게 되었지 뭐예요.”
“이탈리아에 오셨군요!”
“네. 카프리섬과 메라노 쪽에 갈 일이 있어서요.”
그 말을 하며 백정연은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대사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메라노를 가 보셨다구요?”
“예, 대사.”
“이럴 수가. 한국에서는 잘 모르는 곳인데.”
“북부의 알프스를 어떻게 모르겠어요. 보자마자 한눈에 사랑에 빠져 그곳에 저희 호텔 하나 있었으면, 싶더라니까요.”
카프리섬과 메라노 둘 다 이탈리아에서 휴양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카프리섬은 말 그대로 바다와 맞닿은 섬이라 활동적이었고 메라노는 산지를 마주한 곳으로 정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대사는 메라노 출신이었다.
백정연은 치밀하게 그런 것까지도 다 조사를 하고 난 뒤 계산을 해서 적합한 타이밍에 말한 것이다.
‘세계적인 호텔 브랜드로 SG호텔이 발돋움하는 첫걸음이다.’
대한민국에서 SG호텔은 5성급이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이름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로컬 호텔에 불과하다.
백정연의 꿈은 SG호텔을 힐튼이나 매리어트처럼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어 모든 도시에 하나씩 SG호텔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 시작은 바로 이탈리아였다.
“메라노에 SG호텔을? 제 고향에서 아주 기뻐할 만한 소식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 해외 진출을 도모하였다가 창피나 당하지 않을지 걱정이 크네요.”
“크긴요! SG호텔 정도면 충분히 이탈리아에서도 통하는 수준일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부드럽게 풀려 갔다. 파티의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웨이터들은 쉴 새 없이 쟁반 위에 샴페인과 와인이 놓인 잔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툭.
그런데 그때 대사 부인이 옆에 있던 사람에게 떠밀려서는 손에 든 와인잔을 들고는 휘청였다.
바로 앞에 있던 백정연이 놀라 대사 부인을 잡아 주는데 하필이면 그때 와인잔이 백정연의 가슴팍으로 쏟아졌다.
촤악!
“어머!!”
대사 부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백정연의 하얀 드레스가 포도주색으로 앞섶이 완전히 물들어 버렸다.
자신의 손으로 거의 예술품의 경지에 다다른 오르세 부인의 드레스를 망쳤다는 것에 대사 부인은 대경했다.
“어떻게, 이거 어떻게!!”
대사 부인은 발까지 동동 굴렀다. 자신이 입은 옷도 아니면서 저러는 것을 보면 오르세 부인을 정말로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연회장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뛰어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백정연은 와인을 닦아 내면서 대사 부인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부인. 드레스보다 부인이 다치시지 않은 게…….”
“아니에요. 오르세 부인의 드레스는 예술품이에요. 내 손으로 예술품을 망쳤어…….”
대사 부인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백정연이었다.
“우, 울지 마세요, 부인.”
“내가 어떻게 이런 실수를. 최악이에요.”
“진정해, 여보.”
대사까지 나서 대사 부인을 달래기 시작했다. 백정연은 이러다가 애써 마련한 자리가 그대로 깨지겠다고 생각하고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대사 부인은 자신이 드레스를 망쳤다는 자책감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하얀 드레스에 적포도주를 흘렸기 때문이다.
적포도주는 하얀 천에 이염되면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이 예술품을 완전히 망쳐 버렸다는 생각에 대사 부인이 저러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지울 수 있다면?
백정연은 곧바로 아까 방에서 상혁을 봤던 비서를 불렀다. 그러고는 그 비서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 찾아와요.”
“예?”
“오늘 낮에. 드레스 얼룩 지워 준 남자.”
하지만 이름도, 몇 호에 묵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비서에게 백정연이 말했다.
“CCTV를 싹 뒤져서 찾아내요. 몇 시에 들어왔는지 CCTV로 알아내고 인상착의만 알면 알 수 있으니까. 빨리!!”
대사 부인을 빠른 시간 내에 달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도, 아니면 이대로 위기가 된 채 끝나는지를 정할 것이다.
백정연은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 * *
네 시간.
“하아.”
상혁은 무려 네 시간 동안 호텔 뷔페를 탐닉했다. 이선호는 그런 상혁을 보면서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게 다 사람의 몸에 들어갈 수 있는 양이었습니까?”
“마법사들은 원래 다 이 정도 먹습니다. 마법사가 되시면 아실 텐데요.”
“저도 될 수 있습니까?”
“아뇨.”
상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이선호가 풀 죽었다. 상혁은 네 시간 동안 거의 뷔페에 놓은 음식을 거덜 내다시피 해치웠다.
상혁은 가리거나 못 먹는 음식도 없었다. 살기 위해 먹던 습관과 기억이 있는데 편식을 할 리 없었다.
상혁 때문에 아마 오늘 호텔 조리장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빴을 것이다.
오죽 먹었으면 나중에는 호텔 직원들이 수군거리면서 멀리서 그런 상혁을 보고 소곤댔을 정도다.
타다닥!!
그런데 그때 누군가 저쪽에서 상혁이 있는 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러고는 상혁 앞에 서서 헉헉거리면서 상혁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손님!! 상혁 손님!!”
상혁이 흠칫했다. 자신의 이름을 백정연의 비서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통성명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게다가 갑자기 손은 왜 잡는다는 말인가.
“……왜요?”
“저, 저 좀 살려 주세요.”
“네?”
상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비서가 상혁을 질질 끌고 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이선호가 멍하니 지켜보고 있자 상혁이 먼저 들어가라며 손짓을 했다.
상혁은 질질 끌려가다가 주변의 인종 비율이 동양인 다수에서 백인 다수로 바뀌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럽인들.
저 멀리서 잔잔하게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연회가 열리는 자리 같았다. 그리고 문 하나를 지나가자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사람들 천지인 곳이 나타났다.
“오호.”
상혁은 놀랐지만 어색해하지는 않았다. 지구상에서 이런 파티를 가장 많이 가 본 사람을 꼽으라면 상혁이 한 손에 꼽힐 것이다.
그런데 비서는 상혁을 계속해서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쿠, 한잔만요.”
상혁은 그 와중에 와인 한 잔을 낚아챘다. 간만에 마셔 보는 포도주였다. 적당히 떫고 향이 은은한 것이 그냥저냥 한 수준이었다.
“와인 하면 이탈리아라면서. 그저 그런데?”
가나안의 와인은 지구의 와인보다 맛이 족히 열 배는 더 풍부했다. 그것도 일반 평민들이 마시는 포도주가 그 정도였다.
대기 중에서 숙성에 영향을 주는 마나의 존재 덕분인지 포도도, 술도 더 맛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신 상혁을 비서는 프라이빗한 룸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백정연이 초조하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상혁을 보고 반색했다.
“당신!”
“뭐야. 옷에 그림 그리는 게 취밉니까?”
“이, 이 얼룩 좀 지워 줘요.”
백정연은 다급하게 상혁에게 말했다. 하지만 상혁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옆에 내려놓은 뒤 삐딱하게 팔짱을 척 꼈다.
“내가 왜요?”
“그…….”
백정연의 입이 다물어졌다. 상혁이 오라고 해서 오고, 그리고 지우라고 하면 지우고 이럴 그녀의 아랫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살려 달라고 해서 오기는 했는데, 그거 해 주면 나한테 뭐 해 줄 겁니까?”
낮의 일은 어쨌거나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서비스를 해 준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는 아니다.
상혁이 백정연을 보며 히죽 웃었다.
어디서 돈 냄새가 진하게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