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여명의 궁 (2)
니케아 제국 수도 콘스탄틴.
여명의 궁이 존재하는 이 대도시는 유례없는 대혼란에 빠졌다.
아무리 악의 교단 추종자들을 처치했다고 한들, 제국의 고위 관료 중 절반이 한순간에 소멸한 일이니까.
더구나 이는 민중들에게도 퍼졌다.
“······들었어? 마신 문두스가 귀환하자마자 피의 숙청을 벌였데!”
“그, 그게 사실이야? 누가 그래?”
“옆집 사과 가게 아주머니 딸 에이미가 있잖아. 황궁 하녀로 들어가 있어서 아는데 지금 황궁이 난리래!”
“헉. 정말? 진짜 무슨 일 터지는 거 아냐?”
황궁에는 고위 관료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을 보좌하는 실무진들도 있고, 아부하는 대형 상인들도 있으며, 소일거리를 맡는 시종과 하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들은 황궁에서 무사했으니까.
자신들이 보고 들은 충격적인 것을 가족과 지인에게 전한다.
공포는 전염병처럼 퍼진다.
“에이미. 그래서 마신 문두스를 봤다고? 어떻게 생겼는데?”
“엄청 잘생긴 미남자였어. 황금빛 머리카락에 깊은 푸른 눈을 가졌는데. 마치 저 사람처럼. ······앗?”
“······.”
나는 용용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줄 겸 사과 가게를 찾았다가 황궁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금빛 머리카락은 비교적 흔하고, 검은 로브까지 뒤집어썼기에 들킬 줄 몰랐건만.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리는 에이미.
-친한 척하도록.
나는 굳이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서 3써클 중급 마법 텔레파시를 했다.
“아······. 저······. 그, 그······. 나, 날씨가······. 참······.”
그러나 에이미는 안색이 파리하고, 수전증이 있는 듯 떤다. 심지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괜히 부담 주는 것 같아서 자리를 떠난다.
‘어쩔 수 없는 반응이겠지.’
-키야악!
아삭아삭.
나는 소형화한 용용이를 쓰다듬으면서 한숨을 쉰다.
악의 소굴이 된 황궁에 극약처방을 했다지만 방식이 다소 과격했던 건 사실이므로.
당장은 공포의 대왕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개혁이 지속 가능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니까. 뒤바뀐 황궁이 민심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여론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다.
아무리 아르카나 대륙이 절대왕권 시절의 중세라고 하지만, 계속된 전쟁과 혼란으로 거주 이전이 자유로운 상태.
만약 민심을 잃는다면 상인과 용병들이 대거 이탈해버린다.
이는 부와 인구가 다른 지역으로 빠져버린다는 뜻.
기사와 마법사를 양성하는 데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만큼 절대적인 텃밭을 무시할 수 없다.
‘그 때문에 후속처리가 필요하지만······. 이건 내가 손대면 안 되겠지.’
힐끗 수도 콘스탄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여명의 궁을 바라본다.
나는 이미 황궁에서 수많은 신하를 대거 학살한 상황.
정치적으로 더 개입한다면 황권 찬탈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기껏 남긴 친황제파 충신들과 정치적 마찰이 예고되기 때문이다.
이미 절반 가까이 관료를 죽여서 행정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최악의 가능성이다.
‘따라서 나는 마신 문두스로만 남아야 한다. 여전히 정치에 대해 잘 모르는, 속세로 잠적한 대마법사로 인식돼야 해.’
그래서 한동안 황궁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더 적합한 자, 과거 니케아 제국의 개혁을 이끈 전문가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왔으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주는 것뿐.
태양처럼 빛나는 여명의 궁이 아니라 그늘진 외곽에서 머무는 거다.
***
여명의 궁.
황제 세실리아는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돌아온 마신 문두스. 그리고 황궁에 벌어진 피의 숙청.
이 모든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던 것이니.
“폐하, 서부 자유 도시들의 반역 가능성에 대한 보고입니다.”
“폐하, 지방 대영주 하리파가 악의 교단 디메토르를 후원한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해야 합니다.”
“······.”
살아남은 신하들과 함께 어전회의를 진행한다.
아직 핏기가 완전히 닦이지 않은 바닥 위에서.
그러나 마음이 완전히 불편하진 않다.
이들은 정말 믿어도 되는 신하들이라는 생각 덕분에. 적어도 악의 교단에서 보낸 추종자는 아니란 생각에 안도하는 것이다.
‘······상대를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이렇게 편안한 거였나.’
황제 세실리아는 마음속 후련함을 느낀다.
비록 마신 문두스의 만행이 황권을 실추시켰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지만.
막상 마신 문두스는 정책적인 내용에서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으므로.
오히려 황제와 마신 문두스가 굉장히 친밀한 관계이기에, 합작하여 일을 벌였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것이다.
‘더구나 마신 문두스는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많은 증거를 확보한 건가?’
세실리아는 보고서와 함께 동봉된 수많은 영상 구슬을 살핀다.
-남부 자유 도시 반란 건, 남부의 대표도시 시장의 비밀 결사 모임 장면.
-하리파 영주 개인 서재 속 악덕 장부 내역.
수많은 영상 구슬에는 작은 쪽지가 묶여 있었다.
검왕 알렉스의 말에 따르면 혈마왕 블라디미르를 처치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집했다는 자료들.
단, 며칠 사이에 준비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이 자료들의 디테일과 정확성은 도저히 며칠 사이에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평소부터 아르카나 대륙의 안건을 면밀히 조사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날 아직 포기한 게 아니었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버려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몰려온다.
물론 마신 문두스가 해결해준 사건은 정말 극히 일부였다.
근 10년 간 자신이 칩거했으니까.
지금부터는 그 업보를 갚을 때, 10년 간 미뤄온 일을 한꺼번에,
아니, 과거보다 훨씬 복잡하게 꼬인 현황을 처리해야 한다.
‘······윽, 또 두통이.’
더구나 머리가 다시 아프다.
최근 들어 더욱 심하다. 벌레가 머릿속에서 알을 깐 듯 안쪽에서 콕콕 찌르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악물고 참아낸다.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보고서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이번에도 주저앉는다면 정말로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영영 떠날 것 같아서.
10년을 기다려서야 겨우 다시 만났거늘, 다음번엔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으므로.
그간 10년간 느낀 좌절감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이번 사안에 대해 결정하겠다.”
그 때문에 과거의 개혁 군주 시절 황제처럼 일을 처리한다.
하나부터 착실히.
차곡차곡 기틀을 잡아가는 것이다.
***
일주일 후,
그동안 나는 황궁이 아니라, 수도 콘스탄틴에서 거주했다.
특별히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니다.
평범한 주민들처럼 광장 거리를 거닐고, 자연의 4대 속성이 충만한 특별 공원을 둘러보거나, 첨탑처럼 생긴 프레야 교단을 정처 없이 떠도는 것 뿐이다.
‘잘 감시하고 있군.’
-lv31 황실 감찰단원. (변장.)
-lv29 암실길드 정보단원. (은신.)
나는 주위 감찰단원들을 모르는 척 지나친다.
주목적은 사람들에게 내가 황궁이 아니라, 그 밖에 계속 머문다는 걸 보여주는 것.
속세에 관심 없는 대마법사라는 걸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lv41 악의 교단 광신도 암살자 드레드. (은신.)
-lv42 악의 교단 최상급 훈장 수여자 마칸. (은신.)
······더구나 아직 악의 교단에서도 보는 눈이 많으므로.
괜히 움직여서 더 경계하게 하지 않는다.
-우움~! 움! 움!
‘그래, 내가 지하에서 찾아보라고 한 건 발견했냐?’
-움~!
다만 정말 아무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건 아니다.
황제 세실리아가 거주하는 여명의 궁.
악의 교단에서 이를 통제하는 핵심 장치는 황궁 간신들만은 아니었으므로.
‘황궁 지하에 숨겨진 ‘세뇌 흑마법진’이 있다. 그것까지 파괴해야 제대로 황궁이 움직인다.’
나는 노움에게 여명의 궁 지하에 숨겨진 흑마법진을 찾게 시켰다.
세뇌 흑마법진.
초대형 범위 내에 있는 자들을 자기도 모르게 생각을 조종하는 마법진.
마계에서도 대악마급 거물만이 가동할 수 있는 아주 섬세한 마법진이다.
아무래도 니케아 제국은 프레야 교단을 국교로 삼기에, 황궁 근처에 프레야 첨탑과 교황청, 신성 결계가 있으므로.
대놓고 흑마법진을 설치하다간 곧장 파악 당하는 만큼 최대한 들키지 않게 지하에 최고급 흑마법진을 설치한 거겠지.
그 흑마법진 때문에 황궁에 들어오면 악의 교단 토벌에 대해 신중해지고, 거짓 루머라고 생각하게 된다.
심지어 디메토르 교단 외의 일에 대해서도 대악마의 사상에 지배당한다.
만약 이에 반하는 일을 할 경우, 머릿속에 악충이 들어온 것 같은 두통까지 일으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마법진.
이것까지 파괴해야 니케아 제국 여명의 궁이 완전히 정상화되는 것이다.
“더 미룰 수 없겠지.”
【라이트닝 lv4.】
“크아악?!”
따라서 나는 움직인다.
향후 악의 교단을 막는데, 황실의 힘이 필요하므로.
날 감시하던 악의 교단 스파이들을 한꺼번에 처치한다.
마지막 자정 작용을 시작한다.
펄럭.
우선 드래곤 윙즈를 펼쳐서 노움이 안내하는 곳으로 날아간다.
-우움~! 움! 움움!
노움이 데려간 곳은 황궁 밖에 있는 수도교였다.
수도 콘스탄틴.
이곳은 대륙 제일의 번화 도시답게 도성 근처에 흐르는 강물을 끌어다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지하에는 상수도가 있던 것이다.
‘슬픔의 대악마 몰로크. 그 녀석이 거주하는 곳이었지.’
슬픔의 대악마 몰로크.
그자는 니케아 제국 황궁 지하에 자신의 궁전인 ‘눈물의 궁’을 연결해둔 대악마였다.
혼자서 황궁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중앙의 흑막 중 하나.
‘불행 중 다행이라면 몰로크는 전투에 능한 자가 아니라는 점인가?’
몰로크는 부정적이고 우울한 기억을 계속 수집하는 대악마.
정보를 수집하고 이간질하는데 능통한 존재였다.
애초에 그의 임무는 니케아 황궁 전체를 세뇌하고, 악의 교단 디메토르의 입맛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 숨겨져 있었군.’
-lv??? 다크 리플렉터. (은신.)
나는 슬픔의 대악마 몰로크를 찾아 수도교(水道橋)로 내려간다.
그 결과, 수원지 쪽이 아닌 다른 방향과 연결된 통로를 발견한다.
숨겨진 히든 스테이지다.
어둠의 힘으로 숨겨져 있었기에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시스템 창에는 훤히 보이므로.
우우웅.
품속에서 마정석을 꺼내서 마력에 반응한다.
이곳은 마력을 가진 흑마법사들이 출입할 수 있는 곳. 검은 악령 문양이 새겨진 악마의 문이 드러난다.
끼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통짜 철문인지 묵직한 감각이 느껴진다.
쏴아아.
그 안에서 보이는 건 아래로 흐르는 어두운 지하 수로.
슬픔의 대악마 몰로크의 '눈물의 궁'으로 갈 수 있는 길이다. 물의 명가 크라우드 소속이자, 주 속성인 물인 내겐 안성맞춤인 전투 환경.
“누구냐. 암호를 대라.”
-lv35 악의 교단 디메토르 소속 황실 마법사 카틴.
그 길 입구에는 검은 탄광 같은 공간에 흑마법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근처에 편종이 달린 걸 봐선, 언제든 비상종을 치고 경비 태세를 갖출 준비가 된 모양이다.
“‘에크론의 황제’를 모시고 있다. 방해하지 말고 비켜서라.”
“!!”
나는 암호를 싸늘하게 말한다.
품에서 어전회의실에서 고위 흑마법사를 죽이고 강탈한 검은 펜던트를 보여준다.
내 말에 경악하는 흑마법사들.
에크론.
마계에서 가장 높은 산.
거악 중 거악이자, 마계의 대군주 제1군단장 심연왕 프로세피나 폰 이슈타르가 거주하는 궁전이 있는 곳이다.
흑마법사는 마력과 경지가 높을수록 더욱 강한 악마를 모실 수 있으니.
나는 프로세피나를 모실 만큼 드높은 신분의 흑마법사라고 거짓말을 한 거다.
“시, 실례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
그러자 경비를 서던 흑마법사들은 내 펜던트를 보고 화들짝 고개를 숙인다.
악마와 영혼의 계약을 하지 않는 자는 결코 알 수 없는 암호문이므로.
흑마법사는 서열이 절대적인 만큼 제 몸을 사리는 것이다.
또각또각.
그렇게 경비 흑마법사들을 지나쳐서 눈물의 궁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자, 잠깐만요! 설마.”
“?”
갑자기 경비 흑마법사가 날 붙잡는다.
혹시 들킨 걸까?
인피면구로 인상착의를 바꾸긴 했지만, 낌새를 눈치챌 수 있으므로. 즉발 마법을 시전하려고 할 때,
“아하하, 혹시 먼 곳에서 오신 것 같아서. 내부 신분증입니다.”
“······.”
친절하게도 내부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여분의 신분증을 전해준다.
나는 겉으로는 퉁명하게 신분증을 빼앗듯 받고, 안으로 들어간다.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