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여명의 궁 (1)
황제의 비서실장 빈센트 드 발루아 후작은 늦은 밤까지 바빴다.
황제의 최측근이라는 그는 계속 칩거 중이던 황제와 그나마 연락이 닿던 자였으니.
중앙 관료들이 하나 같이 마신 문두스가 어떤 자냐고, 무슨 바람이 부는 것이냐고 물었으니까.
향후 황실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자인지 조사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으으! 아무리 나라도 십수 년 전에 떠난 마신 문두스를 무슨 수로 아냐고.”
······물론 빈센트 후작으로선 미쳐버릴 노릇이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황궁 중앙 관료는 하나하나가 대륙 전체에 큰 파급력을 가지니까.
고위 간부만 해도 그럴 텐데, 전 대륙에 길이 남는 대마법사 마신 문두스라면 또 어떨까?
지방 영주들도, 하급 관료들도, 상인들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래도 일전 황제 폐하와 마신 문두스의 관계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가장 곁에서 모셨다면서요.”
제법 친해진 재무 실무관이 넌지시 물어온다. 마신 문두스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 건 이들도 마찬가지인 모양.
빈센트 후작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그래. 폐하께서 한창 열정적으로 개혁하실 때였지.”
빈센트는 아련한 눈빛으로 과거를 회상한다.
자신 가슴에 부착된 니케아 제국 배지가 가장 자랑스럽던 시절.
황제 세실리아가 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인지 증명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마신 문두스는 다소 과격했다. 문제를 파악했다면 당장 해결하는 스타일이었지.”
정확하게는 왜 적법하게 처리하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마치 인간의 율법까지는 존중하지만, 왜 그조차 하지 못하냐는 뜻.
실무자는 무슨 상황인지 눈치챈다.
“아하. 속세를 떠나 마법을 연구했기에 정치 관계를 몰랐던 모양이군요?”
“······그래, 대영주들과 이권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던 눈치였다.”
다만 실무자들은 안다. 아무리 위법한 일을 저질렀어도 일을 그대로 행정 처리할 수 없다는 걸.
특히 그 상대가 각 지역을 다스리는 대영주들이라면.
자칫 잘못 건드리면 내전과 반란이 속출하는 것이다.
“폐하께서 그 때문에 상당히 고생하셨지.”
“그럼 마신 문두스가 폐하를 떠난 이유도 그 때문인가요?”
“······아니, 그건 아니다. 사실 오르비스 대학살 이전에 대비극이 하나 더 있었거든.”
빈센트 후작은 씁쓸한 입맛을 느끼며 말했다. 더 말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사실 빈센트 또한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었다.
악의 교단 디메토르의 추종자들.
그들을 사전에 발견했음에도, 황제는 정치 관계 때문에 함부로 손대지 않았고,
그렇게 미적지근 댄 결과, 끝내 ‘어린 화이트 드래곤들’이 전멸하게 되었다는 일만 얼핏 전해들었을 뿐.
황제의 실수로 인하여 완전히 결별하게 됐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도 생생하군. 세실리아 폐하께 구더기 같은 간신들이랑 놀아나고 있다고 싸늘히 말씀하시던 모습이.’
오랜 기간 황궁에 근무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빈센트라지만 그 장면만은 잊을 수 없었다.
만물의 영장 화이트 드래곤.
그자가 대륙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황제를 내려다보며 거칠게 분노하는 모습은.
그 누가 황제에게 그토록 화를 낼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때처럼 꾸짖어줄 사람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빈센트는 한숨을 쉬며 생각한다.
이후 황제는 십여 년간 칩거하며 국정 운영에 손을 뗐으니까.
실제로 황궁은 구더기 같은 자들로 들끓게 되었다.
아무리 그녀가 가장 의지하고, 존경하며, 이상향이라고 생각했던 마신 문두스가 떠났다고 한들 이는 황제로서 하면 안 될 일.
이를 엄히 깨우쳐줄 수 있는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
다음날, 여명의 궁.
오랫동안 닫혀 있었지만 시종들 덕분에 케케묵은 먼지는 없는 어전 회의실.
그곳에 오랜만에 인파가 북적인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 세실리아는 그러한 인파를 가로지르며 들어간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조용해지는 회의실.
또각또각,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어전회의실 중앙에 놓인 옥좌에 차분히 앉는다.
검왕 알렉스와 로얄가드가 등 뒤를 지킨다.
‘기분이 싱숭생숭하구나.’
황제 세실리아는 머리 숙이는 신하들을 턱 괴고 내려다본다.
마신 문두스의 귀환.
이는 사실 매일 밤 꿈꾸는 일이었다.
검왕 알렉스를 제외하면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황궁에서 가장 신뢰하고, 존경하며, 절친한 벗이었던 신하가 바로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였으니.
······그러나 끝마무리가 비극적으로 매듭지어진 만큼.
마신 문두스를 다시 보는 일은 마치 아직 잊지 못한 옛 연인과 재결합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이는 말처럼 아름답기만 한 일이 아니다.
황궁 관료들은 자신들을 개혁 대상으로 여긴 마신 문두스를 특히 싫어했으니.
“이번 안건은 그간 대륙을 구원한 마신 문두스에 관한 안건이다. 그의 복귀에 대해 자유롭게 토의해보도록.”
당장 진통이 터져 나온다.
“······오르비스 대학살을 벌인 대륙 공적을 황궁 정중앙으로 들어와도 되는 겁니까?”
“만약 황궁으로 들어와서 또다시 피의 학살을 감행한다면. 그 일을 어찌 책임져야 할지 너무나 두렵습니다. 폐하.”
“결국 황제 폐하를 배신하고 떠난 오만한 신하 아닙니까! 그를 받아주시면 아니될 것입니다!”
파벌은 크게 셋으로 나뉘었다.
먼저 강경한 반대파 귀족들. 주로 명성과 유서 높은 중앙 가문들이었다.
가장 많은 신하가 속한 파벌이다.
그간 대륙 절반을 구제한 활약은 인정하나, 황궁에는 발 디디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그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래도 마신 문두스가 벌인 공이 너무 큽니다. 형벌은 형식적으로 진행하고 마신 문두스와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몇해 사이에 벌써 성서에 나온 거악이 무려 넷이나 됩니다! 이 비상시국에 가장 강력한 전력인 마신 문두스를 처벌하자니요. 현실적으로 아니될 말씀이십니다!”
“피의 학살을 저지르면 책임지라니. 당신들이 그딴 식으로 나와서 다시 폭주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걸 왜 모르시오? 어차피 힘으로 막을 수도 없는 거 어르고 달래서 잘 써먹어야 하오!”
이들은 대체로 중하급 계급의 실무자들이었다.
이들은 그간 마신 문두스의 활약을 서류와 증언으로 실제로 보았으니까.
그의 엄청난 무력을 지표로 직접 확인했기에 옹호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오오! 드디어 마신이 귀환하는 건가!”
“새로운 마법! 그간 마신 문두스가 활약한 마법은 기존에 사용하던 마법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어쩌면, 마법의 발전에 또다시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르는 일! 흐흐, 황궁에는 발 못 디뎌도 마탑은 환영입니다.”
“······.”
······그리고 마지막 소수파는 마탑의 마법사들.
마법 연구에 미치광이인 이들은 정치적 문제고, 죄고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마법의 전설적인 선구자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매우 기쁠 뿐.
‘이들 중 누가 내 신하일까······? 아니, 대체 있기는 할까?’
황제 세실리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황실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이 있다고.
다만 이들은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조차 분간하지 못할 만큼 철저히 은닉하는 게 문제다.
심지어 때론 충신임을 연기하고, 합리적으로 비판하기도 하니까.
그 누구도 마음을 열고 의지할 수 없는 거다.
‘······윽! 또 두통이······.’
오랜만에 난장판으로 돌아가는 황궁을 지켜봐서일까?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마치 머릿속에 해충이 들어와 날뛰는 느낌. 관자놀이를 짓누른다.
······하기야 마신 문두스가 돌아와도 문제다.
이들 말을 무시하고 마신 문두스를 기용한다고 해서 무엇이 바뀔까?
이미 십수 년 전, 훨씬 충신이 많던 황궁 때도 끝내 개혁이 실패하였거늘.
자신이 그간 칩거하고 마음 꺾인 것이 괜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창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폐, 폐하······. 그, 급히 아뢸 것이······.”
“?”
밖에서 하급 관료가 하나 들어온다.
공포에 질렸는지 안색은 창백하고 저 멀리서 보일 만큼 덜덜 떤다. 자세히 보니 굵은 땀도 한 움큼 흘리고 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어전회의실이 다소 잠잠해진다.
그러나 하급 관료가 일을 고하기도 전에 누군가 들어온다.
벌컥.
안으로 들어온 자는 단 한 명이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에 깊은 푸른 눈을 가진 젊은 사내. 동부의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감추고 있는 사내다.
······비록 과거에 보았던 마신 문두스와는 전혀 다른 인상착의지만.
황제 세실리아는 알고 있었다. 저 자가 자신이 그토록 그렸던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란 걸.
그래서 오랜만에 최대한 살갑게 맞이하려고 하는데,
“네, 네놈. 폐, 폐하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오한에 든 듯 머리에서 식은땀이 난다. 살기 어린 푸른 눈에 마주한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는 신하들 또한 마찬가지다.
어전 회의실 전체를 짓누르는 압력. 그 힘에 안색이 창백해지는 건 물론, 몇몇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쓰러지기까지 했으니까.
드래곤 피어.
황궁에 들어와 대놓고 적의를 보이는 것이다.
더구나 그자가 쥐고 있는 붉은 눈의 스태프 또한 불길했다.
‘피······?’
마신 문두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붉은색 마력석 3개. 저것들엔 무언가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니.
등 뒤의 검왕 알렉스가 한걸음 다가온다.
“네놈, 지금 뭘 하자는 뜻이냐.”
채앵, 챙, 챙!
검왕 알렉스의 말에 12명의 로얄가드가 일제히 검을 뽑는다.
로얄가드.
황실을 지키는 대륙 제일의 기사들.
현재 황궁이 악의 세력에 반쯤 넘어갔음에도, 치안을 통제하고 있는 절대적인 힘이다.
만약 이들이 배신했다면 이미 제국은 무너졌을 터이므로, 황제 세실리아가 그나마 믿는 자들.
그들이 모두 살기를 번뜩이며 마신 문두스를 노려본다. 당장이라도 맞붙을 것 같은 긴장감에 늙은 신하들이 경악한다.
지금 이들이 충돌하면 중간에 있는 자신들은 모조리 전멸한다는 걸 직감한 거다.
무거운 침묵이 짓누른다.
그 누구도 허투루 움직이지 못한다. 혹여 자신이 내는 숨소리가 전투 시작의 신호탄이 댈까 두려워한다.
그렇게 한참 침묵이 계속됐을 때,
“아직도 구더기들과 어울리고 있구나.”
마신 문두스가 자신에게 싸늘한 눈매를 번뜩이며 말했다.
정신이 확 깨는 기분.
떠올랐다.
마신 문두스. ······아니,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자신에게 완전히 실망하고 떠난 날을.
그때 지은 실베스타의 푸른 눈과 지금 저 푸른 눈은 너무나 닮아있었으니.
바다처럼 깊은 눈동자에 빨려드는 것이다.
“구, 구더기라니! 지금 우리더러 구더기라는 거요?”
“······.”
몇몇 용기 있는 신하가 반항적으로 고함쳤다.
그러나 마신 문두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움츠리는 자들.
마신 문두스는 무겁게 입을 뗀다.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
무시무시한 이름을 꺼낸다.
악의 교단 디메토르.
이들은 그간 전 대륙을 피바다로 물들인 절대악 조직이었으니.
“내가 너희를 절멸시킬 방법을 강구하지도 않고 돌아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
전 대륙의 마법 역사를 50년 이상 앞당겼다는 과거의 마신 문두스조차 찾지 못한 방법.
이를 찾았다고 선언하는 거였으니.
쿠구구구궁-!!!
무시무시한 마나가 뿜어진다.
숨이 턱 막힌다. 어전 회의실 공기가 휘몰아친다.
원체 막대한 마나였기에 움직인 것만으로도 공간이 찌그러진다.
“크헉······?”
“끄아아아악-!!!”
이에 어전 회의실에 모여있던 신하들 절반이 으깨진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힘이 쳐죽인다.
어전회의실 바닥 전체가 흥건해질 만한 피바다가 된다.
“네놈! 당장 멈추지 않으면!”
채앵.
그러한 만행에 검왕 알렉스가 마지막으로 보검을 뽑는다.
그러나 도중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흠칫 멈춘다.
검은 펜던트.
이들이 가진 펜던트가 깨지자 사악한 마력이 흘러나왔으므로.
'이 많은 자들이, 악마 추종자라고...?'
그나마 다행인 건 남은 신하 절반은 아주 작은 타박상도 입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공포에 질려 덜덜 떨 뿐, 아무 항의도 하지 못하는 신하들.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표정이다.
마치 너무나 당연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표정들.
사실 마신 문두스는 대륙 공적.
그 이름은 마냥 상냥하지 않았다. 애초에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자, 그 방식이 대단히 과격한 자였으니까.
"거악을 상대하는 데 이쪽만 수단을 가릴 수 없다."
그제야 마신 문두스가 다시 세실리아를 바라본다. 붉은 눈의 스태프를 꺼뜨린다.
모두가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대륙의 구원자이자, 대륙 공적이기도 한 자, 마치 신처럼 선과 악을 구별 짓는 자.
그 자가 진정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