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별들의 전쟁2 (2)
옆 대륙 ‘아리아’.
이곳은 니케아 제국이 존재하는 ‘아르카나’ 대륙과 바로 옆 대륙이다.
고고고.
그곳에서 북부, 혹한의 바람이 부는 땅에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사내가 앉아있다.
검은 로브로 몸을 감추고, 허리춤에는 호화스러운 검집이 두 개나 있는 사내였다.
사악한 힘을 가지고 있진 않았으나, 음산하며 매우 패도적인 살기를 가진 검객.
“아르카나 대륙에서 흘러들어오는 마족이 갈수록 많아지는군.”
철컥.
길이가 2m나 되는 검푸른 검을 집어넣는다. 어찌나 잘 벼린 명검인지 검집에 넣는 소리마저 아름다웠다.
“쿨컥, 어떻게 인간 따위가······.”
“설마 나 진혈의 뱀파이어 프라스보다 빠르다니. 이건 말도 안 돼······.”
눈보라에 새빨간 피를 묻히고 잊는 자들은 모두 흡혈귀였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건너온 뱀파이어들.
불로장생의 비약을 개발하기 위해 재료를 찾아온 자들이다.
······물론 불로장생은커녕 당장 수분을 못 견딜 만큼 죽어가고 있었지만.
쐐애액, 서걱!
붉은 손잡이로 된 명검이 공중에서 스스로 날아든다. 그들의 심장을 확실히 꿰뚫는다. 이후 회색 머리 사내의 두 개의 검집 중 하나에 되돌아가 꽂힌다.
이기어검술.
검객들에게 전설적인 경지로 손꼽히는 기술 중 하나다.
“과연 ‘검신(劍神) 카를’ 공. 최상급 마족 셋을 무려 3분 안에 처치하시다니. 역시는 역시군요.”
그 모습에 한 늙은 사내가 손뼉 치고 나타난다. 눈발을 뽀득뽀득 밟는다.
그는 회색 머리 사내를 검신 카를이라고 칭한다.
검신(劍神) 카를 폰 프란츠.
마신 문두스와 함께 전 대륙에서 단 두 명에게만 부여된 ‘신(神)’이라는 이명을 가진 남자.
마법으로 따지면 ‘8써클’에 해당하는 ‘마스터급’ 경지를 뚫은 검객.
마신 문두스가 아르카나 대륙을 지키듯, 아리아 대륙을 대표하여 수호하는 전설적인 검객이다.
다만 회색 머리 사내는 이런 칭송이 지겨운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트. 내가 알아보라고 한 바는 어떻게 됐지?”
“말씀대로입니다. 현재 ‘마신 문두스’가 옆 대륙에 있는 거악 중 셋을 물리친 게 확실합니다. 일이 다소 골치 아파졌군요.”
“······.”
늙은 사내는 쓴웃음 지으며 말한다.
다만, 그 말에 검신 카를은 눈매를 싸늘하게 뜨며 말했다.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그 여자 상태가 더 위중해졌겠군.”
염려가 섞인 목소리.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검신 카를은 과거 악의 교단 디메토르 세력을 처단하던 중, 그자를 직접 만나본 적 있으므로.
거악을 상대할 만큼 용의 권능을 과하게 사용하면 악룡이 되어 버린다는 걸 알고 있다.
옆 대륙의 영웅 안위를 걱정한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나라도 심연왕 프로세피나와 마룡이 된 실베스타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말에 늙은 사내는 표정을 다소 굳힌다.
검신 카를이 상대할 수 없다.
이는 곧 자신들의 대륙 아리아에 안위를 보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으므로.
“그렇다면?”
“······.”
검신 카를은 잠시 눈을 감는다.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그자가 대륙의 평화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악룡화 되어 마룡으로 지배당한다면 검신 카를이 거주하는 아리아 대륙 또한 멸망할 것이 분명하므로.
“옆 대륙의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마룡으로 지배당하는 일을 막아야겠지.”
검신 카를은 허리춤에 손이 올라간다.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아르카나 대륙 쪽을 바라본다.
직접 아르카나 대륙으로 가겠다는 뜻.
그러나 이는 타 대륙에 간섭하는 일이다.
심지어 검신 카를은 아리아 대륙의 절대적인 힘을 상징하는 인물이므로.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다. 상대 아르카나 대륙 입장에서는 검신 카를이 군대를 이끌고 침략해올 빌미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다.
“공식 외교망으로 서신을 보내라. 나 혼자 가겠노라고. 공동의 적을 두고 굳이 니케아 제국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검신 카를은 공식적 제안을 한다.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
그들이 지금 저지르려는 건 악신 디메토르를 강림시키려는 일.
그로 인해 아르카나 대륙이 무너지면 그다음은 바로 아리아 대륙 차례가 될 것이므로.
사사로운 번거로움과 수고로움은 감수하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뜻대로 전하지요.”
늙은 사내는 꾸벅, 허리를 숙인다.
자신들의 영웅이 얼마나 큰 리스크를 짊어졌는지 느낀다.
“······다만 현재 아르카나 대륙은 혼란합니다. 니케아 제국은 황제 칩거 이후 사실상 무정부 상태라는 평이 많습니다. 군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악의 교단 추종자들과 지방 대영주들이 결탁했다고 합니다.”
늙은 사내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만약 아르카나 대륙에서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정상적인 국가라면 응당 환영할 일이지만, 지금 니케아 제국 관료들은 상당수 악의 교단과 관계되었으므로.
악의 교단 디메토르와 숙적인 검신의 강림을 바라지 않아 온갖 핑계로 거절할 수도 있다.
“더구나, 저희가 나섰을 때는 이미 일이 늦었을 수도 있습니다.”
“······.”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이미 악룡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에 잠시 침묵하는 검신 카를.
“내게 중요한 건 아르카나 대륙의 자주권이 아니라, 우리 대륙의 평안뿐이다.”
그렇게 대답을 일축한다.
상대가 협력한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아니더라도 움직인다는 뜻.
“만약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이미 틀렸다면, 내가 직접 찾아내서 베는 수밖에 없겠지.”
“······!”
목소리가 장중해진다.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검신 카를은 그자를 개인적으로 존중하는 눈치였으나, 적의 수뇌가 된다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대재앙이 되므로.
자신의 대륙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철썩.
파도가 친다. 짠 바람과 함께 한기가 불어온다. 북해에는 고기들이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고 있다.
늙은 사내는 저 멀리 있는 아르카나 대륙을 바라보는 회색 머리 사내를 살핀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럴까?
앞으로 큰 전쟁이 벌어질 것 같은 직감이 든다.
***
한편, 아르카나 대륙 니케아 황궁.
이곳은 유례없을 만큼 부산스러웠다.
마신 문두스의 귀환.
과거 황제의 최측근이자 오르비스 대학살을 저지른 장본인. 그자가 현재 여명의 궁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하니까.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논의가 쉽지 않은 것이다.
‘제기랄······. 이제 어떻게 하지? 설마 마신 문두스가 곧장 귀환할 줄이야.’
그런 황궁 분위기 속에서 로얄가드 부기사단장 알프레드.
아니, 가짜 알프레드 또한 고민이 깊어졌다.
현재 악의 교단 디메토르에서 여명의 궁 전체를 흑마법진으로 세뇌하며 세력을 넓혀가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악의 교단 숙적인 마신 문두스가 제 발로 들어오다니.
이는 가장 큰 기회이기도 했지만, 최악의 위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알프레드님. 지금 아리아 대륙에서 공식 서신이······.”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 매년 있는 거 아냐! 적당히 둘러대고 마신 문두스 안건부터 해결해야지!”
“앗, 예!”
남몰래 비밀회의를 시작한다.
황궁에 있는 악의 교단 추종자들이 모인다.
무려 중앙 관료 전체 중에서 절반이나 되는 숫자. 오랜 기간 황제가 국정에 손을 놓고 있었기에 가능한 수다.
“대악마께선 뭐라고 하시더냐.”
“일단 현상 유지. 마신 문두스를 ‘황궁 지하’로 끌고 와서 처리하자고 하십니다.”
“······!”
황궁 지하.
이는 단순히 지하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 황제가 있는 여명의 궁 전체를 지배하는 세뇌 흑마법진.
아무리 자신이 현혹당하는 줄도 모르게 은밀히 생각을 종용하는 비교적 약한 흑마법진이라고 하지만,
이를 간파당하지 않고 숨기기 위해서는 마계의 대악마가 직접 강림해야 했으니까.
무려 마계의 대악마가 일대를 마계화하여 가동하는 공간이 있던 것이다.
‘확실히······. 마신 문두스급 대마법사를 정면에서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다. 무려 마계의 군주분들을 넷이나 처치한 괴물이니.’
가짜 알프레드도 침을 꿀꺽 삼킨다.
정보부로부터 마신 문두스의 전투 영상을 확인했으니까. 그 괴물 같은 마법 영창 속도는 결코 직접 싸우고 싶지 않았다.
“과거 황제 세실리아께서 개혁 군주이던 시절, 마신 문두스를 어떻게 떼어냈지?”
따라서 자신들이 직접 물리적으로 상대하기보다는 정치적인 면모로 괴롭힐 계획을 짠다.
“집단 반대를 계속해서 지치게 하고, 대악마께서 세뇌 흑마법진으로 남몰래 마음을 꺾으셨습니다.”
“황제와 마신 문두스가 지원하는 사업을 의도적으로 망쳐서 명분을 잃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배후를 확인할 경우, 함부로 쳐내기 어려운 대영주들과 연루시키는 일이 효과가 컸습니다.”
“황제께서 신뢰하는 몇몇 충신들을 현혹해서 합리적인 비판을 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그간 사용한 방법이 수없이 나온다.
말 그대로 제국을 좀 먹게 하는 방법들.
그러나 이들에겐 어떤 죄책감이 없었다. 애초에 니케아 제국은 공식적으로 프레야 교단을 추종하는 국가.
힘과 무질서의 교단 디메토르의 추종자들에겐 영원한 적이었으니.
오히려 내부부터 망치는 것이 이들의 달성 목표인 것이다.
“좋다. 그렇게 하지. 아예 초장부터 기를 꺾어야 한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나선다.
상대가 마법에 신이라고 한들, 인간들의 정치에 눈이 밝지 않다는 건 익히 알고 있으므로.
“다만 거기에 만족하면 안 된다. 마신 문두스가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파벌도 셋으로 나눠야겠다. 후후, 몇몇은 문두스 편도 들어줘야겠어.”
악랄하게도, 자신의 편을 의도적으로 들어주는 자도 몇몇 배치한다.
배신감이야말로 의지를 꺾어버리는 가장 훌륭한 방법의 하나이므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다.
대어를 사냥할 준비를 마친다.
***
히히힝. 다그닥다그닥.
“도착했군.”
나는 검왕 알렉스와 함께 니케아 제국의 심장 여명의 궁에 도착한다.
사계절에 피는 꽃들이 골고루 장식돼 있어 언제나 화려한 꽃들이 피며, 제국이 선포된 이후, 가장 먼저 등불을 밝힌 곳.
그리고, 황제의 칩거 이후 오랫동안 불이 켜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
나는 황실 기사단의 삼엄한 경비 속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마신 문두스.
과거 황제의 최측근으로 대륙 전체를 개혁하려고 한 거물이 돌아왔으니.
아마 황궁에 있던 악의 교단 디메토르 소속 관료들이 벌떼처럼 모였을 것이 분명하다.
‘하기야 황제가 손을 뗀 만큼 더욱 늘어났겠군.’
-lv25 악마 추종자 사하드.
-lv2 중앙 대귀족 파오트. (악마 세례.)
.
.
실제로 여명의 궁궐 내부로 들어가니, 물반 고기 반으로 악의 교단과 결탁한 자들이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 챌 만큼 철저하게 은닉했다지만 내 시스템 창엔 훤히 다 보이는 법이므로.
그래도 다들 원작보다 레벨은 낮아 보인다는 게 그나마 희망적이었다.
‘정치 개혁은 한두 명 제거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만약 그랬으면 과거 황제와 실베스타가 알아서 처리했겠지.’
더구나 나는 알고 있다.
직접 악마 추종을 하진 않더라도, 지방 토호들이나 악덕 상인들은 그들과 연루하여 큰 이득을 챙긴다는 걸.
그렇게 얽히고설켜서 결국 지방 대영주들과도 연결이 된다는 걸 말이다.
만약 이들을 잘못 건드리면 집단적인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만큼 과거 세실리아도,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던 거다.
‘아마 이것이 황제와 실베스타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었을 테고.’
개혁 의지가 있던 황제, 그리고 악의 교단을 막아내고 싶었던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그러나 황궁은 이미 잠식된 후였으니.
결정적인 사건이 터질 때까지 케케묵은 감정이 쌓일 뿐이었다.
‘결국, 언젠가 정리를 해야 하긴 하는데.’
내 목표는 황제와 황실을 정리하고 니케아 제국이 온 국력으로 악의 교단을 맞서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저런 쓰레기들을 전부 치워내야 한다. 그래도 악의 교단 디메토르를 막아낼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으니.
‘더구나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날 찾아오고 있다······.’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당신의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고대 마법 ‘대지의 기억’으로 그간 당신의 행동을 파악했습니다!
-마신 문두스를 사칭한 자를 추격해 옵니다!
심지어 타임아웃까지 있다.
이러한 황궁을 혐오하던 실베스타가 언제 당도할지 모르는 일.
사태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만큼, 최대한 빨리 정리해야 한다.
“마신 문두스. 어전회의는 당장 내일이다.”
“······.”
검왕 알렉스가 말을 건다.
황제 세실리아가 내 도착과 동시에 칩거를 박차고 나와서 어전회의를 열었다는 소식.
내게 성은이 망극해야 할 것이라며 주의를 주고 간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지.’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원래 악의 교단 간부들이 활동하는 내역을 일일이 증거 수집하고 정치 개혁을 하는 것이 원작 <별들의 전쟁2> 중앙 지역 퀘스트다.
대단히 복잡하고 귀찮지만, 그만큼 깊이도 있고 니케아 제국이 건강해지는 게 느껴지는 길.
중앙에서 시작하는 플레이어가 제법 많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내겐 시간이 없다. 부작용이 있더라도 극약처방 하는 수밖에.’
하지만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
지금껏 대륙에 거악이 몇 번이나 들이닥쳤는데도 황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식물인간 상태였으니.
더구나 황제 세실리아마저 황궁 지하에 있는 세뇌 흑마법진에 적용된 상태.
정석적으로 일을 처리하려면 너무나 많은 산을 건너야 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도 생기겠지.
쿵.
따라서 붉은 눈의 스태프를 만지작거린다.
아직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도착하지 않은 상황.
지금 내게 가장 큰 자산 중 하나는 마신 문두스라는 이명이었으니.
이것이 사라지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시스템 창 덕분에 무고한 희생자는 없다는 데 만족해야겠군.’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길을 택한다.
쓰레기는 제거해야 하니까.
악의 교단 끄나풀들을 힘으로 쓸어버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