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결급 특성으로 대마법사-132화 (132/140)

132. 핏빛 군주 (7)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는 부서진 휠체어에 매달려서 애처롭게 숨을 고른다.

하늘조차 죽은 듯 붉은 모습에 합장하고 기도한다.

‘오, 여신이시여······. 어찌 저희에게 이런 시련을······.’

불과 몇 시간 전.

검왕 알렉스가 당도할 때까지만 해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느꼈다.

대륙 최고 기사단 로얄가드.

거기에 프레야 교단 7대 성인이 무려 둘이나 함께 했으며, 사왕이라고 불리는 고귀한 존재 또한 둘이나 존재했으니까.

대륙 제일이라 불리는 초강자가 네 명씩이나 집결한 것이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갈수록 그 촛불만 한 희망조차 꺼져가고 있었다.

‘저 거악은, 영원히 되살아나는 괴물인 건가······?’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얄가드.”

검왕 알렉스는 흙투성인 채로 제 수하들을 부른다.

어느새 세 명씩 삼제진을 펼치고 있는 로얄가드들.

고오오!

로얄가드들이 검기를 모아 하나의 거대한 칼날을 만든다.

삼제진에서 각기 하나씩, 총 두 개의 황금빛 칼날을 번쩍인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번쩍.

그리고 검왕 알렉스가 마지막으로 가장 빛나는 칼날을 휘날린다.

세 방향에서 작렬하는 황금빛 검기.

쿠과과광-!!

검은 연기가 뿜어진다. 제대로 적중한 굉음. 마왕의 뿔을 가진 붉은 머리 사내를 산산 조각낸다.

그러나 누구도 기뻐하는 안색은 없다.

고고고.

검은 연기 속에 붉은 눈동자가 빛난다.

그 안에는 피의 장막을 펼친 붉은 머리 중년 사내가 고고히 서있다.

상처는커녕 장막에 흔적조차 남지 않은 모습.

“이런.”

검왕 알렉스가 표정을 굳힌다.

검기로 몇 번을 베어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너희가 '지금' 대륙 제일이라고?]

검은 연기 속에서 중년 사내의 굵직한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환청 마법이 부여됐는지 공포스럽다.

성서에도 기록된 거악 중 하나인 혈마왕 블라디미르.

그가 인간들을 내려다본다.

[그래봤자 겨우 수년간 살아가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군.]

기대가 너무 컸다는 듯 실망한다.

붉은 눈을 번뜩인다.

[나는, 영원한 거악. 피의 제왕이다······!]

번쩍,

세상이 붉은 빛으로 가득 차오른다.

혈무로 뒤덮인 대륙 남서부 전체가 뒤흔들린다.

그와 동시에 8개의 방향으로 산개하는 피의 파도.

쿠과과과과과광-!!!!

고막이 사라지는 소리가 난다.

로얄가드가 튕겨져 날아간다.

에니스 백작령 성벽이 8조각으로 소멸한다.

대륙 남서부를 지키는 최후의 관문.

인류의 최후 전선이 가루가 되어버린다.

주춧돌조차 없는 황무지가 된다.

“쿨컥, 흐읍······!”

그 속에서 대량학살을 막을 수 있던 건 오직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의 헌신 덕분이었다.

성역 선포.

고대 성물 순례자의 십자가에 막대한 신성력을 부여했으므로.

그녀가 눈코입에서 피를 토할 만큼 에니스 백작령 일대를 신성력으로 보호했기에,

그나마 피난민들이 떼죽음 당하지 않도록 피해를 최소화한 거였다.

“······엘프 피난민들이 위험하다. 대피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 모습에 궁왕 엘레노아는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이미 그녀 입에서 ‘승리’가 아닌 ‘대피’가 거론된다.

엘레노아의 장엄한 명령에 엘프 레인저 부대는 일제히 활시위를 장전한다.

각기 다른 정령이 수백 마리나 소환된다. 일반 화살도 천 발 넘게 장전된다.

“발사!”

쐐애애액! 파바바바박-!!!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

에니스 백작령 성벽을 지키던 거의 모든 엘프가 혈마왕에게 화살을 쏜다.

전투성녀 루크레치아 또한 명한다.

“프레야 사제들! 엘프들의 화살에 신성 축복을 부여해라. 뱀파이어의 상성인 신성력을 담아야 한다!”

샤아아아!

그 명령에 수많은 사제가 합장하여 기도한다.

상성.

뱀파이어 또한 마족. 신성력에 취약하다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므로.

하늘을 뒤덮는 듯한 수천 발의 화살이 새하얀 빛을 뿜어낸다.

인간과 엘프가 한마음으로 힘을 모은다.

[······상성이라.]

그러나 성서에도 거론된 거악 중 하나는 읊조린다.

[압도적인 힘 차이 앞에 상성 따위 무의미하다.]

붉은 파도가 소용돌이친다. 에니스 백작령부터 하늘까지 닿는 거대한 기둥.

날아온 수천 개의 신성 화살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킨다.

세계 대종말의 날처럼 사악한 마력이 요동친다.

[너희는 그저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를 상대할 때 사용할 ‘스페어’ 혈액일 뿐.]

블라디미르가 오른손을 들어 올린다.

[약자답게, 피지배 종족답게, 피조물답게 굴종하라.]

고오오오오!

붉은빛이 수천 조각으로 쪼개지더니 자신에게 대항한 생명체에게 이어진다.

그 결과,

“커헉······?”

“끄아아악!”

그들의 피를 흡수하기 시작한다. 성서에도 거론되는 거악답게 한 번에 한두 명을 흡혈하지 않는다.

에니스 백작령 전체.

성서에도 거론된 거악답게.

그들을 한꺼번에 집어삼키는 것이다.

샤아아······!

‘······순례자의 십자가가, 힘이 부쳐 밀리고 있다?’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는 품에 쥔 순례자의 십자가가 덜덜 떨리는 걸 느낀다. 마치 과열되는 듯 뜨겁게 타오르는 십자가.

실제로 순례자의 십자가는 주위 피와 마력을 신성력으로 정화하는 ‘성역 선포’를 발동 중임에도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아무런 타격이 없어 보였다.

고고고!

오히려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뿜어내는 피의 세계가 점점 넓어진다.

블라디미르의 곁에 열린 아공간 게이트.

이곳에서 끝없이 정체불명의 혈액이 나오고 있으므로.

이대로는 에니스 백작령 전체가 피로 잠겨버릴 것 같았다.

샤아아!

“큿······! 세인트 발키리! 어서 신성 검기로 붉은 줄을 잘라내라! 동료 교도를 구해내!”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가 성검 듀란달을 휘두르며 붉은빛들을 끊어낸다.

그러나 에인햐라르와 세인트 발키리급 최정예 성기사조차 제 몸에 붙은 붉은 줄을 자르기도 벅찼다.

그 이하 성기사단과 사제, 병사들은 차례로 죽어 나갈 뿐이었다.

30분.

단 그 시간이면 에니스 백작령에 모인 수만의 병사가 절멸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정말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겠지······.’

에클레시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피를 토했다.

뱀파이어는 흡혈할수록 강해지는 종족.

이 많은 생명체를 잡아먹은 흡혈귀의 왕을 도저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으니.

“으으, 아아악······.”

“크헉, 살고 싶어······. 엄마······. 아빠······.”

“······.”

절망에 빠진 병사들을 돌아본다.

수년간, 순혈의 뱀파이어들에게 포위당해서 함께 동고동락한 이웃들. 그들이 죽어가고 있다.

에클레시아는 작은 주먹을 불끈 쥔다.

사제는 결혼하지 않는다. 프레야 교도는 모두 이웃. 이웃을 가족처럼 사랑하고, 내 몸처럼 여기는 자들이므로.

보편적 인류애.

그들의 고통에 가족이 죽어 나가는 듯한 괴로움을 느낀다. 제 생살을 떼어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모두, 포기하지 마세요! 이제 곧, 우리들의 신이 돌아오실 거예요.”

타는 목마름으로 진실을 고해준다. 목구멍에 황야의 모래가 타들어 가는 듯하다.

[있지도 않은 신을 믿는 인간들이란.]

다만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그 말이 몹시 불쾌한 듯 붉은 눈을 번뜩인다.

질서의 섭리.

노화라는 자연 현상 때문에 제 몸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설혹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마신 문두스를 기다리는 것이냐?]

노골적인 비웃음을 짓는다.

그의 손에는 이미 다른 곳으로 대피시켰던 하이 엘프 일가가 쥐어져 있다.

[만약 나타날 거였다면 진작 나타났겠지.]

“크악!”

하이 엘프의 피를 뽑는다. 이 피는 따로 보관된다.

불로장생의 비약.

그 마지막 두 가지 재료 중 하나로서, 소중히 채집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일이 틀렸음을 깨닫고 달아났나 보구나.]

하기야 고대용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언 능력이 있으니.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그렇게 읊조렸다. 그와 동시에 털썩 쓰러지는 하이 엘프들.

이미 뽑을 만큼 뽑았는지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버린다. 당장 손 쓰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

[아쉽지만 내가 직접 찾아나서야 겠어. 영생의 마지막 조건을 말이다.]

물론 이미 흡혈하던 다른 주민들도 놔주진 않는다.

너희들을 여비 삼아 흡혈하겠다는 뉘앙스.

이 비극이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를 찾을 때까지 되풀이될 것이란 분위기다.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는 입술을 세게 깨문다. 안색이 창백해서 피가 나지 않는다.

“······아냐. 그분께서 달아나셨을 리 없어.”

에클레시아는 비장하게 읊조린다.

떨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인다. 두 다리가 없었으나 부서진 휠체어를 지팡이 삼아 상체나마 일으킨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지 모르겠군.]

이에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말과 달리 흥미가 동한다는 눈빛을 번뜩인다.

[너희들의 신이 존재한다면 어찌하여 이러한 악을 막지 않는단 말이냐?]

의도적으로 흡혈하던 사람들의 피를 더욱 쥐어짠다. 사방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메아리친다.

마치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를 부르려면 당장 부르라는 듯.

[자, 어서 말해 보아라.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강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진정 악마의 왕처럼 달콤하게 속삭인다.

“······.”

물론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에클레시아조차 없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두 손을 꼭 모으고 말한다.

“······그야, 내게 마지막 희망을 주셨으니까······.”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는 어렵게 입을 연다.

샤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뿜어지는 찬란한 빛.

에니스 백작령 일대는 물론, 대륙 남서부 일대를 새하얗게 빛낸다.

그 빛은 건강했을 때의 에클레시아가 발휘한 빛보다도 찬란했다.

“저 빛은, 설마······!”

“안 돼요! 에클레시아 예하. 그 힘은!”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와 프레야 사제들은 그 힘을 알아보고 경악한다.

상식적으로 다 죽어가는 에클레시아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저토록 찬란한 빛을 뿜어낼 수 없으니.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이미 결심이 섰는지 읊조린다.

“······고대 성인분들께서도, 이런 마음이셨겠지요.”

콰아아아아아-!!

에클레시아의 몸이 급속도로 노화한다.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새하얗던 피부가 검게 탁해진다. 아름답던 외모 또한 추악하게 변해버린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뿜어지던 신성력만큼은 몇 배로 찬란해진다.

[······그 빛은?]

악의 교단 제4군단장이자 대륙 남서부 흡혈귀의 왕.

혈마왕 블라디미르조차 이 빛만큼은 경계한다. 지금 에클레시아가 무슨 짓을 하려는 지 눈치챘으니까.

동귀어진(同歸於盡).

지금 그녀는 제 생명력을 불사 질러 자폭을 하려는 것이다.

“혈마왕 블라디미르. 유언을 남기세요. 지금의 저라면 당신과 함께 죽을 수 있습니다.”

쿵,

다 늙은 에클레시아가 그리 말하며 한 걸음만큼 앞으로 나온다.

에니스 백작령 이웃들을 흡혈하는 블라디미르를 협박한다.

물론 다리가 없는 에클레시아가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을 리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잘린 무릎을 기어 온다. 부서진 휠체어에 매달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다. 드르륵, 이끌려 앞으로 끌려간다.

‘어쩌면, 제게 순례자의 십자가를 주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에클레시아는 생각한다.

여신 프레야의 안배.

전지전능한 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결과론적으로 선한 운명을 지정해놓으시므로.

어쩌면, 고대용이라는 마신 문두스 또한 이러한 미래를 보고 자신에게 순례자의 십자가를 맡겼을지도 모른다.

[광신도. 두렵지 않느냐? 인간이 프레야 여신을 믿는 것은 구복신앙. 삶에 축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더냐?]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에클레시아를 광신도라고 깎아내린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떨림이 멎는다.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제 영혼. 목숨 따위가 아닙니다.”

에클레시아는 떠올린다.

먼 옛날, 뱀파이어가 처음 에니스 백작령을 습격했을 때 느꼈던 공포를.

‘아직도 생생해. 내가 처음 성녀로 간택되었을 때가.’

뱀파이어의 습격으로 불바다가 되어 버린 과거의 에니스 백작령.

환자를 돌보던 에클레시아는 다리가 없어서 미처 대피하지 못했다.

인간이 가장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는 화형을 당한다.

그러나 불지옥 속에 불타 들어감에도, 가장 괴로웠던 건 다름 아닌 눈빛이었다.

평생 돌보던 장애인과 전염병 환자들의 원망 어린 눈빛.

왜 하필 오늘 담당이 두 다리가 없는 수녀 에클레시아였냐고.

그녀 때문에 자신들도 고통받으며 죽어간다는 그 시선.

그 시선이 너무나 죄스러웠고, 두려웠다.

‘그때, 천국에서는 내 영혼이 그런 눈총을 받지 않기를 기도했지.’

따라서 당시 그녀는 죽어가며 남들과 다른 기도를 했다.

남들이 비가 꺼지고 살아남기를 바랄 때,

평생 여신을 믿고 따라온 자의 마지막 소원으로, 두 번 다시 저런 그런 눈총을 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 이후 벌어진 기적.

자신은 대륙 7대 성녀로 각성했고, 장대비가 내려서 화재는 꺼졌다.

그러자 세상이 천국처럼 변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존중했고, 자신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나누었다.

그 때문에 에니스 백작령으로 자원한 것이었다. 제 영혼은 이미 천국 속에 있다고 믿었기에.

여신의 자비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인 영혼을 바친 것이었다.

“그것도 이제 마지막이겠지만 말입니다!”

번쩍-!!!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는 제 생명력을 갈아 모은 신성력을 순례자의 십자가에 밀어 넣는다.

그러자 폭발할 듯 타오르는 순례자의 십자가.

마치 제 이명대로 광휘(光輝)가 되어 빛난다.

혈마왕 블라디미르와 함께 소멸한다.

에니스 백작령 전체를 진정 천국처럼 빛의 세계로 인도한다.

--!!!!!

빛의 기둥이 강렬하게 빛난다.

밤하늘의 초신성처럼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타들어가는 육신의 고통.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진짜 화형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솔직히 이 정도면 호상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이웃들을 구하고, 이종족들과 원만한 관계까지 구축할 수 있는 희생이라면. 기꺼이 몸을 던지는 것이다.

마치 달을 추구하기에 스스로 불 속에 들어가는 부나방처럼.

그 누구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누군가 반드시 희생해야 한다면, 한 명의 희생으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자신이 하고 싶었다.

그렇게 만족스럽게 삶을 마치려고 할 때,

[그게 네가 생명을 버리는 이유인가.]

······머릿속에 경악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고고고.

사악한 기운이 느껴진다. 찬란한 빛이 약해진다.

[죽음의 진정한 공포를 모르는 풋내기였군.]

쩌저적!

광채가 나는 성역에 붉은 피로 된 손아귀가 뚫고 들어온다.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사악한 손.

그 손가락 마디 하나가 성녀 에클레시아보다 거대하다.

에클레시아의 품에 있던 '순례자의 십자가'를 강탈한다.

콰직, 파사삭······.

압도적인 힘으로 산산이 조각낸다.

마신 문두스가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며 남기고 간 고대 성물.

과거 순혈의 뱀파이어로부터 에니스 백작령을 구원하고, 지금까지 피의 괴물들로부터 지켜주었던 순례자의 십자가.

그것이 너무나 힘없이 가루가 된다.

물론 혈마거인 손이 신성력에 반쯤 타들어갔지만. 금세 수복한다.

천국처럼 빛나던 에니스 백작령이 또 다시 사악한 피와 붉은 하늘에 지배당한다.

“이, 이건······?”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는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는다.

목 아프도록 그림자 지는 곳을 올려다본다.

[내 이명이 ‘혈마왕’인 이유가, 고작 핏빛 군주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느냐.]

고고고고.

에니스 백작령 중앙에는 에니스 백작령 전체를 내려다보는 붉은 거인이 서있었다.

혈마거인.

과거 진혈왕자 발데마르가 사용했다는 혈마거인과 겉모습은 유사하나 덩치는 최소 10배 이상 거대한 피의 괴물이다.

그 크기는 북부에 강림했다는 악의 교단 제6군단장 설인왕(雪人王) 이미르에 버금갔다.

-키익······!

-캬아악!

심지어 지금 저 혈마거인은 살아있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피조물들이 강제로 융합했기에, 아직 살아있는 부분이 있었다.

마치 키메라처럼.

수많은 세포를 뭉쳐서 만든 건물 같은 모습이었다.

“마, 말도 안 돼······. 혈마거인이, 이토록 크다고······?”

“혈마왕 블라디미르. 넌 도대체 저 혈마거인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체를 학살한 것이냐!”

이미 혈마 거인과 결투를 벌여본 궁왕 엘레노아가 절망한다.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는 그 크기와 피해자의 수를 유추하여 분노한다.

그러나 혈마 거인 속에 있는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코웃음칠 뿐이다.

마치 너는 지금까지 잡아먹은 개와 돼지, 비둘기의 숫자를 외우고 있냐는 듯.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

허리 숙여 에클레시아에게 상체를 내민다. 혈마거인의 붉은 눈이 에클레시아의 코앞까지 당도한다.

[정말로 두렵지 않느냐.]

지이이잉.

혈마거인의 몸에서 붉은 빛이 뿜어진다.

수초 후, 정확하게 에클레시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작렬한다. 깨끗이 녹여버린다.

[그간 삶이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르는데.]

눈앞이 깜깜해진다.

제 목숨을 바쳐서 이웃들을 구하려고 하였거늘.

죽음을 각오했음에도, 그 누구도 구하지 못하였으니. 말 그대로 개죽음인 것이다.

[아니, 애초에 죽기 직전까지, 선조들을 떠올리기는 했느냐.]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비웃는다.

얻어걸린 우연으로, 있지도 않은 신을 믿느라, 제 목숨을 버리려 했다고.

[후회하지 않는다면 어디 말해보거라.]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왜인지 굳이 에클레시아를 살려두고 계속 묻는다.

[누가 널 위해 계속 울어줄 것인지. 기억해줄 것인지 말이다.]

고오오오!

혈마거인 가슴에서 핏덩이가 모여 사람 얼굴 형상을 만든다.

그동안 죽은 뱀파이어들.

진혈왕자 발데마르와 진혈의 뱀파이어들, 불로장생의 비약을 만드느라 희생된 다른 뱀파이어들도 얼굴이 하나하나 박혀 있다.

다행히 마족과 드래곤은 영원한 기억력을 가진 존재.

이들은 전부 혈마왕 블라디미르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기억되고 있지만.

만약 혈마왕 블라디미르마저 영멸하고, 뱀파이어 일족이 사그라진다면.

그 누구도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할 수 없으므로.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제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자, 다시 한 번 묻겠다.]

고오오오!

혈마거인이 다시 한 번 사악한 붉은 빛을 빛낸다.

[누가 너희의 희생을 기억해주겠느냐?]

흉폭한 질문에 에클레시아는 아무도 지목하지 못한다.

지금 대답하면 혈마거인이 즉시 내리찍어 처형시킬 것이므로.

그 누구도 호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도 대답 못할 때,

휘이이잉.

찬바람이 불어온 건 그 무렵이었다.

쏴아아아-.

검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슬픔에 젖으면 하늘이 울고, 새가 울며, 세상이 울어준다는 말이 있듯이.

장댓비가 에니스 백작령에 흐르는 피를 흐느껴 적셔주는 것이다.

“성수······?”

그러나 에클레시아를 비롯한 사람들이 당황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성수.

지금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에는 명백히 신성력이 담겨 있으므로.

아니, 애초에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강림한 이후, 하늘이 죽은 듯 붉었거늘 어느새 검은 하늘이 드리운 것이다.

번쩍, 콰아앙!

천둥번개가 내리친다. 혈마거인의 살점을 새까맣게 태운다.

크오오오!

휘이이잉!

촤아악!

심지어 잔잔하던 황야에 광풍이 몰아치고, 흙이 창처럼 솟구쳐 찌르며, 물이 분노해 회오리친다.

마치 대자연이 분노한 것처럼.

세상이 희생자들을 대신해 슬퍼해주고 화를 내준다. 함께 싸워준다.

[크으으, 저건······?]

혈마거인이 고개를 돌려 등 뒤를 확인한다.

그 시선을 따라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 또한 시선을 옮겨간다.

“······당신은!”

그곳에는 한 사내가 서있었다.

그 모습에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는 눈물이 왈칵, 솟아났다.

“네카르 경!”

빛과 어둠의 가면을 쓴 사내.

검은 망토를 두른 채, 푸른 눈을 번뜩이는 자.

그자가 샌드 드레이크를 탄 채 초고속으로 날아오고 있으므로.

오른손에 쥐어진 붉은 눈의 스태프가 형형이 마나를 공명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그리던 것이었으므로.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울음이 나올 수밖에 없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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