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핏빛 군주 (5)
에니스 백작령.
순례자의 십자가가 성스러운 힘을 내뿜는다.
마치 성서에 나온 성역처럼 일대 전체가 신성한 힘으로 가득 찬다.
치이이익.
-꾸에에엑······!
-꾸르륵.
그 결과, 에니스 백작령 일대에 발을 디딘 피의 괴물은 비명을 지른다.
불에 타오르는 고기처럼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스스로 소멸한다.
사악한 마력 자체를 배척한다.
샤아아아!
“의혈의 뱀파이어 나이틴. 유언은 미리 써놓고 왔겠지.”
반면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는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성검으로 나이틴을 몰아붙인다.
병사들 또한 각자 나이틴에게 일제사격한다.
[크으······! 역겨운 프레야의 광신도들이 감히!]
콰아앙!
물론 진혈의 뱀파이어 나이틴이 아무리 크게 다쳤다지만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다.
진혈의 뱀파이어.
이는 혈마왕 블라디미르와 직계 혈통이라는 뜻이므로. 더구나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과 계약하여 막강한 죽음의 힘을 가졌으므로.
공중에서 폭발이 연거푸 이어진다.
혼자서 대륙 7대 성인 둘과 궁왕 엘레노아까지 상대한다.
쨍그랑.
[······커헉?]
그때,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나이틴을 지키고 있던 사악한 마력이 순식간에 붕괴한다. 검은 마력이 스르륵 사라진다.
[이, 럴수가······?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 아버지의, 불사(不死) 비약을 개발 중인, 그자가 소멸했다고······?]
의혈의 뱀파이어 나이틴은 힘없이 땅으로 추락한다. 그 이유를 직감한다.
계약 불발.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과 계약한 힘이 일방적으로 사라지고 있으므로.
영혼의 계약으로 묶어뒀던 만큼 사전통보 없이 발생한 일은, 상대 영혼이 소멸하는 일밖에 없던 것이다.
샤아아!
“끄아아악!”
의혈의 뱀파이어 나이틴이 비명을 지른다. 날개가 빠르게 타들어가며 지상으로 추락한다.
성역 선포.
이를 막아줄 어둠의 사라졌으므로. 그녀의 피가 성수로 바뀌며 소멸되는 것이다.
‘······마신 문두스 공께서, 드디어 성공하셨구나······!’
이에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는 다 죽어가는 몸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룡기사 네카르, 마신 문두스라고 불리는 자.
전 대륙에 단 두 명에게만 붙는 ‘신(神)’이라는 이명을 가진 존재.
그자가 예언했던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희생자들이 값어치 없이 죽어 나가지 않았으므로, 작은 안도를 하는 것이다.
“쿨컥, 모순적인 프레야 여신······. 너희 인간도, 개돼지와 비둘기를 잡아먹으면서······. 우리 흡혈귀만, 사악하다고 하다니······.”
나이틴은 바닥에 쓰러진 채, 읊조린다.
물론 프레야 사제들과 엘프는 듣지도 않는다.
“유언은 그걸로 끝이냐?”
궁왕 엘레노아가 냉랭하게 내려다본다. 활시위를 겨눈다. 그간 뱀파이어에게 죽어 나간 엘프 수가 많으므로.
결코, 용서할 수 없다.
“큭큭, 엘프란 것이······. 숲은 볼 줄 모르고, 나무만 보는구나······.”
그러나 의혈의 뱀파이어 나이틴은 두려움 없이 비웃는다.
앞으로 너희들에게 닥칠 재앙을 떠올린 듯.
“셋이서 나 하나 쩔쩔매서야······. 너희 수준으론, 결코 우리 아버님을, 막지 못한다.”
“······.”
“더구나 너희 모두가 이곳에 있다는 건 ‘하이 엘프’ 쪽이 비었다는 거겠지. 물론 너희 딴엔 안전하게 숨겼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이틴은 하나 남은 붉은 눈을 번뜩인다. 에니스 백작령을 한번 쭉 훑는다.
그리고 비릿하게 웃는다. 하이 엘프가 이곳에 없음을 직감했으므로.
뱀파이어 일족답게 주위에 어떤 피가 있는지 감지할 수 있는 거다.
“내 동생, 그림자의 뱀파이어 ‘하사신’은 너희 따위가 상상하는 수준이 아니다. 지금쯤, 이미 하이 엘프를 찾아냈을 거다······.”
“!”
그 말에 프레야 사제들과 엘프들이 웅성거린다.
하이 엘프의 피.
이는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진정으로 각성하기 위한 마지막 두 재료 중 하나다.
아무리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라도 전투 중에 피 한 방울 안 흘릴 수 없으므로.
마신 문두스가 어쩌면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일지도 모른다는 엘프들의 전언을 들은 만큼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거다.
쾅.
이에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는 발로 나이틴의 머리를 짓밟는다. 깨끗이 터진다. 더 이상 살아나지 못한다. 즉사였다.
“에클레시아 예하.”
“어떻게 할 거냐? 인간.”
“······.”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와 궁왕 엘레노아가 동시에 묻는다.
현재 하이 엘프를 중앙으로 대피시킨 건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였으므로.
지금이라도 하이 엘프를 회군시킬지, 아니면 구원군을 보내야 할지 의사를 묻는 거다.
에클레시아는 두 눈을 감고 침묵한다.
‘아니야······. 나이틴의 말에 따르면, 결국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이곳으로 강림한다는 뜻이니까.’
품속 순례자의 십자가를 꼭 쥔다.
하이 엘프를 ‘중앙’으로 대피시키라고 조언한 것은 다름 아닌 아룡기사 네카르.
프레야 교단조차 버렸던 광휘의 성녀와 에니스 백작령을 구원하고, 궁왕 엘레노아가 이끄는 엘프 일족 또한 구해낸 대륙 남서부의 영웅이므로.
“지금 와서 병력을 보내봤자 늦었을 거에요.”
모두가 신뢰하는 이가 제안한 작전인 만큼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자신이 보냈던 ‘비밀 편지’가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네카르 경을 믿고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이제 모든 건 여신님께 맡길 뿐.
-쿠에에엑!
더구나 아직 성벽 아래에 피의 괴물이 남아있으니까.
휠체어 위에서 숨을 고르며, 자신들의 영웅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
나는 살아남은 마계의 악마들을 길 안내시키고 따라간다.
환골탈태의 비약.
이는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이 이용하던 지하 창고에 숨겨져 있으므로.
최단거리로 가기 위해 악마들을 협박한다.
차가운 밤공기에 젖으며 날아든다.
“저, 저쪽입니다!”
뼈로 만든 궁전이 보인다. 거대한 뼈를 기둥 삼고 군데군데 최고급 목재로 보강한 궁전.
그로테스크하지만 묘하게 품격이 있는 궁전이다.
“고생했군.”
나는 솔직하게 말한다.
현실과 원작 <별들의 전쟁2>는 지형에서 다른 점이 있으므로. 마계의 악마들이 없었으면 한참 헤맬 뻔한 것이다.
“하하, 그럼 저희는 살려주실 거죠?”
다행히 살아남은 마계의 악마들은 대단히 협조적이었다.
강자지존.
마계는 힘과 본능, 무질서가 가치관인 세계니까.
내가 자신들의 군주인 위리놈을 죽였으니, 새로운 주군으로 모시려는 자가 많은 거다.
“아니.”
【포스 lv3.】
콰아아앙!
나는 아부 떠는 악마들까지 모조리 으깨버린다.
물론 마계의 악마들은 하나 같이 괴랄한 자들.
지금 형체를 없애봤자, 잠깐 고통스러워할 뿐 곧 부활하겠지만.
나 또한 혈마왕 블라디미르를 막기 위해 어서 돌아가야 하므로.
환골탈태의 비약만 챙겨서 돌아가려는 거다.
‘더구나 내 몸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들키면 위험하니까.’
-경고! 육체파열! 계속된 무리로 몸속 마나가 질질 새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폭주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툭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내 몸 상태도 문제다. 마계의 악마들은 신의가 없는 자들.
만약 내가 위태롭다는 걸 눈치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까.
아예 깨끗하게 치운다.
“위리놈의 전용 방은 어디지.”
“앗, 이, 이, 이쪽입니다!”
-lv14 스켈레톤 메이드.
궁전에 있던 시종들이 안내한다.
하늘 같던 마계의 악마가 일격에 처치되는 걸 보고 바로 고개를 조아리는 시종들.
눈치 빠른 것들은 살려두고, 나머지는 마찬가지로 가루로 으깨버린다.
순식간에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의 전용 방에 도착한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말 잘 듣는 스켈레톤 메이드들에게 명령한다.
그리고 뼈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메이드들이 방 청소는 안 하는 모양이군.’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의 방안은 개판이었다.
드넓은 방에 아무렇지 않게 쌓여 있는 연구자료들.
철컥.
무시하고 방구석에 있는 수많은 서랍 중 666번을 연다. 암호가 걸려있었으나, 위리놈의 뼈를 가져다 대자 자동으로 해금된다.
‘이거로군.’
[이름 : 불로장생의 연구일지. (ANCINET.)]
그곳에는 수많은 연구일지와 정체불명의 물약들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중 핵심 자료를 읽는다.
[수명을 늘리는 방법. 이는 크게 두 가지다.]
[환골탈태 혹 노화 방지의 비약을 만드는 것.]
노화방지의 비약.
이것이 최종적으로 ‘불로장생의 비약’이었다.
[그러나 노화방지의 비약은 아직 미완성이다.]
[일시적으로나마 생명력을 연장할 수 있는 보물을 찾았다. ‘옆 대륙’ 아리아에서 발견했다. ‘환골탈태’에 관한 연구다.]
내가 찾던 것이 언급된다.
환골탈태의 비약.
한계가 된 육체를 재구성하고 정화하는 일이다.
부록으로 붙어있는 옆대륙에서 입수했다는 연구 자료를 읽는다.
[나는 궁정 마법사 프로인트다.]
[환골탈태한 기사들을 조사해본 결과, 육체에 자연의 4대 속성 마나가 골고루 담기는 걸 확인했다.]
[반면 마법사는 주 속성만 사용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강제적으로 4대 속성을 담는다면 어떨까? 마법사도 환골탈태할 수 있지 않을까?]
내용은 간단했다.
모든 속성을 균일하게 모으는 것.
그 순간, 환골탈태의 기적이 발현된다고 한다.
‘질서의 수호자가 되는 것과 유사하군.’
-불 : 73%.
-바람 : 56%.
-물 : 98%.
-흙 : 46%.
나는 과거 용의 유산으로 받았던 히든 퀘스트를 떠올린다. 이 또한 모든 속성을 동일하게 100%씩 모아야 했으므로.
모든 물줄기는 한데 모여 결국 바다가 된다고 하더니.
이유는 아직 모르겠으나, 그 해답은 같은 것이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마법사 또한 육체가 탁월하게 재구성될 뿐만 아니라, 고대용처럼 ‘용언(龍言)’ 마법이 가능하게 된 것 아닌가?]
[용언 마법. 마법사 내부의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마나를 끌어다가 사용하는 마법. 이것을 깨닫자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기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나는 저것이 무슨 뜻인지 안다.
‘용언 마법. 이는 대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궁극의 마법 중 하나였으니까.’
드래곤들은 선과 질서의 수호자로서, 자연에서 힘을 그대로 끌어내서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니까.
세계 그 자체에서 마나를 뽑아서 사용하는 것이다.
비록 이 마법들은 인간들의 마법과 궤를 달리 하기에 일일이 새로 익혀야 하지만······.
마나 소모 없이 난사할 수 있는 5써클 위력의 대마법.
그렇게 아낀 마나는 다른 곳에 활용할 수 있으므로.
말도 안 되는 가치를 가진다.
과장을 보태서 혼자서 거악급 존재가 될 수 있는 거다.
‘물의 궁극의 대마법 헤일 스톰 또한 달이라는 자연물을 활용하는 거였지.’
더구나 나는 과거 대지의 기억으로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테라 행성은 모든 것이 마나로 이루어져있으므로.
달 또한 막대한 마나 압축 덩어리인 만큼, 끄집어낼 마나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감정.’
[이름 : 환골탈태의 비약 (ANCINET.)]
[설명 : 고위 마법사는 환골탈태할 수 없다는 기존 통념을 깨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비약. 고대 마법사 프로인트의 레시피를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이 똑같이 재현했다.]
[특수 효과 : 환골탈태. (조건 : 6써클 이상 대마법사.)]
* 경고! 프레야 여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만 가능합니다!
물건에도 문제가 없다.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환골탈태하지 못한 이유도 기재됐다.
프레야 여신의 피조물.
이는 혈마왕 블라디미르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므로. 아마 이 때문에 아직 불로장생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리라.
‘아마 혈마왕 블라디미르에겐 독이 됐겠지.’
나는 피식 웃는다.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이 바친 이 비약에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한껏 기대했을 모습이 상상됐으므로.
펄럭, 지이이잉!
환골탈태의 비약을 가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마계에서 거울 속으로 돌아간다.
다시 도착한 혈마왕 블라디미르의 본거지인 밤의 고성.
와장창, 마계와 연결된 거울을 깨부순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허약한 몸에서 해방인가?”
-경고! 파괴본능과 정반대되는 속성을 가진 물약입니다. 정말로 마시겠습니까?
나는 꽤 떨어진 바위산 동굴로 가서 착지한다.
경고 문구를 무시하고 마신다.
비록 내가 악룡화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아직 선을 넘지 않았다.
아직 4대 속성의 힘을 더욱 사용하고 있으므로.
망설이지 않고 벌컥 마신다.
약은 쓰면 쓸 수록 몸에 좋다고 하던가? 오렌지 주스 색깔이었으나 제법 썼다.
‘······아니, 써도 너무 쓴데.’
-주의! 약효가 발동합니다. 몸에 있는 독소를 빼내고 재구성합니다! 잠이 몰려옵니다!
의식이 흐려지는 쓴맛.
수면제를 먹은 듯 정신이 아득해진다. 수초도 참지 못하고 수마(睡魔)에 빠진다.
‘내가 잠든 사이,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강림할 수도 있지만······.’
-페널티 특성 허약한 몸이 발동합니다. 더욱 깊은 잠에 빠집니다! 기존 12시간보다 2배 긴 24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집니다!
마지막까지 발동하는 페널티 특성 허약한 몸.
만약 그사이에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하이 엘프를 차지하면 위험하겠지만······.
그걸 대비해서 ‘마지막 비책’을 세워두고 왔으니 괜찮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다. 용용이의 똬리가 제법 따뜻하다.
깊은 잠에 빠진다.
***
8월 17일.
청소년 엘프 엘로힘은 오늘이 매우 기뻤다.
헤어졌던 가족의 재회.
아버지께서 이혼하신 후, 다른 숲으로 떠나셨던 엄마와 어린 동생을 다시 만나는 날이었으니까.
다그닥다그닥.
“······그간 많이 컸구나. 엘로힘.”
“어머니도 변함없이 젊으신 걸요.”
어색한 인사도 잠시뿐,
좁은 마차에서 4인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잡담을 시작한다. 아직 쑥스럽지만 다들 기쁜 기색.
“와! 엘로힘 오빠! 이제 나랑 키가 별로 차이 안 나네?”
어린 동생 엘라힘도 신이 나서 방방 뛰어다닌다. 쑥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나, 엘로힘 또한 반가운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그나저나 우리가 하이 엘프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아빠 사실 하이 엘프였어?”
“아마도.”
아버지께서 씁쓸하게 읊조렸다.
사실 정확한 사실관계는 부모님께서도 모르신다고 한다.
그저 오래전 조상 중에는 하이엘프와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극소수나마 혈육이 섞여 있을 것이므로.
아마 그중 우연히 피가 진한 이들끼리 인연이 닿아서 하이 엘프의 혈통이 전해졌을 것이라 추측할 뿐.
하기야 전 대륙에 엘프가 얼마나 많을 텐데, 이런 케이스가 아예 없을까 싶긴 했었다.
“헤헤, 그럼 앞으로도 우리 다 같이 지내는 거야? 우리는 하이엘프라서 한 곳에서 호위받아야 한다며!”
“······.”
“······.”
어린 동생이 신이 나서 멋대로 떠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침묵하신다. 그러나 두 분 다 쓴웃음을 지으시며 침묵할 뿐, 아예 싫진 않은 분위기.
하기야 서로 깊이 사랑했기에 다른 부족끼리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 가졌을 터이므로.
옛날만큼 친근하시진 않더라도, 어쩌면 옛날처럼 한 지붕 아래 지낼 수 있을지 모른다.
‘이미 끝난 인연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지만······. 우리 엘프는 기억력이 뛰어나니까.’
가끔은 망각의 축복이 있는 인간이 딱할 때도 있다.
사람 관계에서 싫었던 감정, 화났던 감정 또한 남아있지만 함께해서 좋았던 기억이 많으므로.
좋은 기억을 영원히 추억하며 재결합할 수도 있는 거다.
“······잠깐! 모두 조용히. 사악한 마력의 향기가 난다!”
그때, 그들을 호위하고 있던 엘프 레인져가 고함친다.
모두 입을 다문다. 마차가 멈춰선다. 말이 불안해서 우짖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젊은 청년 엘라힘은 가족들을 모두 가만히 있게 하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고오오오!
“!”
그러자 밖에 보인 건 어둠으로 가득 찬 숲이었다. 분명 방금전까지만 하더라도 푸른 하늘이 높은 낮이었이었거늘.
한순간에 밤으로 뒤바뀐 것이다.
“고작 이따위 호위인가? 무려 하이 엘프를 지키는 자들이 이따위라니. 저들은 사태를 파악할 줄도 모르는군.”
“사왕(四王)도, 대륙 7대 성인도 없다니. 참 맥이 빠지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사신님?”
“······.”
저 멀리서 세 명의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
다들 복면을 쓰고 있기에 누군지는 알 수 없었으나, 머리에 커다란 뿔과 박쥐 날개를 가지고 있는 자.
무려 순혈의 뱀파이어 둘에, 진혈의 뱀파이어 하나.
최상급 뱀파이어들이다.
“네놈들은?”
궁왕 엘레노아가 함께 보낸 엘프 최정예 레인저 부대가 화살을 꺼낸다. 인간 사제도, 성기사도 신성력을 빛낸다.
“알 것 없어.”
촤아악!
그러나 순혈 뱀파이어들은 격이 달랐다.
그들의 번뜩임 한 번에 엘프의 팔다리가 손톱 모양으로 찢겨나간다.
“······이런!”
중무장한 인간 기사 또한 다급하게 무기를 휘둘러보지만 속도면에서 따라갈 수가 없다.
신성력 포격 따위 가볍게 피해버리고 갑옷 사이의 틈을 노린다. 겨우 막긴 했지만 끝없이 유린당한다.
‘이런! 왜 갑자기 엘레노아 전하께 긴급 통신이 안 되는 거지?’
엘라힘은 품에서 다급하게 통신 구슬을 꺼낸다. 그러나 장치가 먹통이다. 아무리 마나를 불어넣어도 작동되질 않는다.
그제야 엘라힘은 통신 불가 또한 뱀파이어들이 벌인 짓이란 걸 깨닫는다.
“포기해라. 지금 당장 궁왕 엘레노아가 출발한다고 해도 도착할 리 없으니.”
“크악!”
순혈 뱀파이어들은 비웃는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이미 에니스 백작령에서 꽤 멀리까지 떨어져 나왔으므로.
‘······이런. 이제야 겨우 온 가족이 모였는데······!’
엘라힘은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엘라힘의 오랜 꿈. 온 가족이 한 지붕 아래에서 다시 모여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코앞이거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이 분한 것이다.
“오, 오빠······.”
“······.”
어린 엘프 엘로힘이 벌벌 떤다. 어느새 그녀의 품에는 독약이 쥐여져 있다.
자결.
최악의 경우, 먹고 자결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이걸 지금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니, 조금만 더 기다려.”
엘라힘 또한 청소년이지만 억지로 용기를 낸다. 벌벌 떠는 손을 감춘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내 가족은 내가 지킬 테니까.”
그 이후, 독약을 먹어도 좋다.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뱀파이어들은 비웃었지만.
억지로 용기를 내서 마차를 박차고 나가려고 할 때,
번쩍! 콰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막강한 황금색 빛이 뿜어졌다.
오직 순수한 경지만으로 내뿜은 황금빛 검기.
검은 숲을 날려버린다.
“저, 저건······!”
“로얄가드! 니케아 제국 최고 기사단이다!”
“!”
모두 놀라서 검기가 날아온 곳을 바라본다.
저 멀리에서 커다란 깃발이 휘날리며 투두두두, 땅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황금빛 테두리에 황실을 상징하는 사자와 붉은 방패가 그려진 깃발.
로얄가드.
이는 오직 아르카나 대륙의 황제 세실리아를 지키는 최강 기사단 중 하나를 뜻하는 깃발이므로.
“사태 파악을 못 한 건 너희들이다.”
“!”
저 멀리서 금발의 중년 사내가 초고속으로 도착한다.
그 기세나 위압감이 감히 궁왕 엘레노아와 비견되는, 아니, 그 이상의 존재.
“이곳에 사왕이 한 명도 없다는 건 틀린 말이니.”
콰아아아!
저 먼 거리에서 수초 만에 도착하여 다시 검기를 빛낸다.
“······검왕(劍王) 알렉스.”
그제야 지금껏 침묵하던 진혈의 뱀파이어가 입을 뗀다.
그 이름과 위명은 청년 엘라힘 또한 알고 있었다.
검왕 알렉스 드 라피스.
다른 사왕 전체를 합친 것 같은 힘을 가졌다고 평가받으며, 대륙 제일의 기사이자 황제 세실리아의 힘이라고 불리는 중년 사내.
그가 현재 수많은 기사를 이끌고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