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핏빛 군주 (3)
대륙 남서부 최후이자 최전선 요새.
에니스 백작령.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는 굳게 닫힌 성벽 위로 오른다.
현재 성벽의 구역을 각 영웅이 나눠서 맡기로 합의했으므로.
에니스 백작령에 살았던 병사들과 프레야 사제들 또한 굳은 표정으로 무기를 든다.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
“앗, 저기!”
엘프들이 지키는 성벽 쪽에서 먼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에클레시아 또한 시선이 엘프 궁수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향한다.
삐이이익-!
그곳에는 수많은 새가 날아오고 있었다.
대륙 남서부에 서식하던 모든 새가 날아오는 듯한 착각이 드는 숫자. 그들은 무언가에 쫓겨 달아나고 있었다.
‘드디어 왔군요.’
그런 소란에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는 미리 가져온 초대형 망원경을 꺼낸다.
3단으로 이어져 있어서, 과장 보태서 밤하늘의 달도 관측할 수 있다는 최고급 망원경.
고오오.
망원경에 눈을 가져다 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혈무(血霧)였다.
에니스 백작령 이남의 땅을 뿌옇게 집어삼킨 붉은 안개.
성서에 나온 그대로다. 하늘이 붉어지고 짙은 피 냄새가 대륙을 뒤덮는다. 마치 앞으로 닥칠 일을 예견하듯 피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쿠에에엑!
-취이잇!
그리고 그 속에서 뛰어오는 피조물들.
피부도 없이 오직 근육과 핏덩어리로 되어 있는 피의 괴물들이 달려온다. 성서에 기록된 종말의 날에 나타날 괴물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끔찍한 모습.
무려 3만 명의 붉은 군대가 다가온다.
고오오.
그리고 그들에게 붉은 마력을 나눠주는 한 여성이 고상한 마차 위에 걸터앉아있다.
머리에 거대한 뿔을 가지고 있으며, 뱀파이어 특유의 박쥐 날개를 가진 존재다.
뱀파이어 중에서도 정점에 속하는 최상위 뱀파이어. 진혈의 뱀파이어가 붉은 눈을 빛낸다.
새빨갛고 고운 입술을 움직인다.
‘하찮은 인간들이 감히······?’
에클레시아는 진혈의 뱀파이어가 움직이는 입 모양을 따라 한다. 붉은 눈과 마주친다.
콰아아.
그 즉시, 진혈의 뱀파이어 주위에 거대한 피의 파도가 휘몰아친다. 이는 공중에서 빠르게 회전하더니 이내 응축하여 바늘처럼 얇아진다.
고고고!
새하얀 정장을 입은 진혈의 뱀파이어는 거기에 검은 마력을 덧입힌다.
망원경 렌즈를 향해 초고속으로 날아온다.
쨍그랑! 쿠과과광-!!
“큭?”
에클레시아의 신성 결계를 뚫고 들어온다.
다급하게 얼굴을 뗀다. 검붉은 폭풍이 볼을 스친다. 초대형 망원경이 산산이 조각난다.
프레야 사제와 병사들이 경악한다.
“에클레시아 예하!”
“······괜찮아요. 볼을 스친 것뿐이에요.”
에클레시아는 서둘러 자리에 일어난다. 현재 그녀는 지휘관. 그녀의 두려움은 병사들에게 전염되므로.
엉덩방아를 찧은 치마를 털고,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는 거다.
‘방금 그 검은 마력은, 단순히 뱀파이어만의 것이 아니었어.’
다만 마음속 떨림은 진정시키지 못했다.
마치 맹수와 눈이 마주친 토끼처럼. 방금 진혈의 뱀파이어와 눈이 맞자 죽음의 공포에 빠져든 거다.
[대악마, 그 존재의 마력이다.]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 또한 상대를 알아보고 통신한다.
방금 그 일격은 죽음의 힘이 서려 있다.
진혈의 뱀파이어가 대악마와 계약까지 해서 더욱 강력한 힘을 내는 것이다.
“······하이 엘프 분들은 다른 곳으로 잘 대피시켰겠죠?”
에클레시아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하이엘프.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진정한 힘이 각성하기 위한 마지막 두 재료 중 하나이므로.
혹여 전장에 휘말려 불로장생의 비약에 채집될 수 있기에 다른 곳으로 따로 대피시킨 거다.
[물론입니다. 에클레시아 예하. 믿을 만한 자들이 중앙으로 대피시켰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루크레치아는 그렇게 말하고 침묵했다.
에클레시아는 그 침묵의 의미를 눈치챘다. 지금 문제는 남아있는 자신들이었으니.
고오오.
-크오오오!
혈무가 다가온다.
그곳에서 튀어나오는 붉은 군대. 미리 만들어둔 방책을 뚫고 초고속으로 날아온다. 콰직, 박살 난다.
“우리가, 막아낼 수 있을까요?”
한 유약한 병사가 자신 없는 소릴 한다.
그 말을 필두로 성벽 위에 있던 모든 병사가 에클레시아를 바라본다. 이들에게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는 일평생 믿어온 신앙이자 희망이므로.
“······곧 네카르 경께서 돌아오실 거에요.”
차마 죄악 중 하나인 거짓말은 하지 못하고 다른 희망을 고한다.
아룡기사 네카르.
마신 문두스라고도 알려진 젊은 사내를 기다린다.
비록 그는 대륙 수배범이자 오르비스 대학살을 벌인 대역죄인이지만.
에니스 백작령에겐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때 나타난 구원자이므로.
믿고 기다린다.
***
밤의 고성, 거울 속 세계.
나는 으슬으슬한 마계의 공기를 느낀다.
이곳은 검은 잎을 가진 나무들의 숲,
생명의 온기가 없는 이곳은 바람의 길을 쓰고 초고속으로 비행할 때보다 더욱 싸늘했으니.
차디찬 추위가 들숨을 타고 들어와 심장까지 얼려버린다.
[클클, 인제 보니 어린 드래곤이었구나. 하기야 그쯤은 돼야 이토록 오만방자하지.]
내가 거울 속 세계로 들어오자 두개골에서 검은 연기를 흘리며 웃는 대악마.
아무래도 마계에 들어오자 내 몸속 드래곤 하트를 느낀 모양이다.
[클클, 이 어리석은 어린 용족아. 주변에서 만물의 영장이니, 질서의 수호자니 하며 떠받들어주니까, 정말 혼자서 세상을 다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았느냐?]
킬킬킬.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의 읊조림에 숲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수없이 메아리친다.
마치 바람이 새는 듯한 웃음들.
죽은 숲에 숨은 망자와 하급 악마들이 동조하는 것이다.
‘하기야 위리놈쯤 되는 대악마는 마계가 아니라, 아르카나 대륙으로 가도 드래곤에게 밀리지 않는 존재니까.’
반쯤 사실이다.
마계는 마나가 아니라, 마력으로 구성된 곳이니까.
내가 제 발로 마계로 들어왔으니 오만함을 비웃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다들 위리놈의 파훼법을 모를 때 통용되는 얘기고.’
악마는 특정 조건이 모두 달성되지 않는 한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알지 못하는 용족과 다른 이종족들이 미처 소멸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나야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의 공략법조차 알고 있다.
“뒷방 늙은이가 말이 많군.”
【아쿠아 lv6.】
촤아악!
따라서 나는 오른손을 들어 올린다.
그러자 사방에서 모여드는 거대한 물줄기. 내 머리 위로 죽음의 숲에 있던 습기가 모여든다.
“네가 그토록 대단했으면 대악마가 아니라, 거악으로 군림했겠지.”
【아쿠아 레인 lv3.】
나는 상대를 일부러 깔보며 오른손을 내리친다. 거대한 물줄기가 수백 조각으로 쪼개져서 검은 숲에 내리꽂힌다.
촤아아악-!!!
콰직, 쨍그랑!
-lv??? 영혼의 구슬. (파괴.)
-lv??? 영혼의 구슬. (파괴.)
죽은 나무 속에 숨겨져 있는 ‘영혼의 구슬’을 정확하게 저격한다.
영혼의 구슬.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이 망자들을 부리기 위한 흑마법 아티펙트.
죽은 나무 속에 숨겨둔 장치다.
망자를 부리기 위해선 너무 멀리 숨겨둘 수 없으니까.
투둑, 투두둑······.
실제로 일대에 있던 영혼의 구슬이 파괴되자, 날아들던 망자들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흙바닥에 힘없이 쓰러진다.
날 비웃던 망자의 웃음소리가 멎는다.
죽음의 숲에 스산한 바람 소리만 들린다.
[······과연. 정말로 영혼의 구슬을 연구하고 온 모양이구나.]
그 모습에 위리놈은 뚝, 비웃음을 멈춘다.
자신이 평생 숨긴 비밀이 들켰으니까.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색한다.
[네놈은 곱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육체가 썩어가는 고통을 생생히 느끼게 해주마. 어떻게 나에 대해 알게 됐는지 낱낱이 밝힐 때까지 계속될 것이야.]
번쩍! 쿠과광!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이 두개골에서 붉은 번개가 뿜어낸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사악한 마력을 뿜어낸다.
제 트라우마를 건드리자 과연 진노한 모습이다.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 저 대악마는 크게 두 가지 권능이 있었지.’
-영혼의 구슬을 파괴하셨습니다. (31/500.)
나는 드래곤 윙즈를 발동하고 자리를 피한다.
앞으로 부숴야 하는 영혼의 구슬은 무려 500개.
과거 눈보라의 악마 니키타가 프로즌 크리스탈이 50개였다는 걸 생각하면 격의 차이를 느낀다.
‘권능 중 하나는 망자화. 영혼을 죽이고 조종하는 능력이다.’
【아쿠아 스톰 lv3.】
콰아아아!
나는 재차 덤벼오는 망자들에게 물의 폭풍을 거칠게 휘두른다.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이 그동안 모은 망자는 수없이 많으므로.
무작정 방어하며 버티기보다는 공격적으로 영혼의 구슬을 파괴하는 데 집중한다.
‘또 다른 하나는 ‘즉사’ 권능이다. 위리놈을 지금의 권좌까지 올려준 궁극의 힘이지.’
즉사.
이는 말 그대로 대상을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궁극의 권능이다.
물론 대단히 까다로운 조건을 따지기 때문에 거악이 되지 못하고, 대악마로 남은 거지만······.
이것만큼은 7써클을 목전에 둔 나조차 대단히 경계한다.
‘‘데스 브레스’. 발동하는 조건은 상대가 위리놈의 마력에 충분히 잠식되는 거였나?’
-경고! 죽음의 힘이 당신 주위에 점차 쌓이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결말을 부를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나는 힐끗, 땅을 내려다본다.
땅속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가스들.
사악한 마력이 담긴 유독 가스들이 알게 모르게 내 몸에 엉겨 붙고 있다.
아마 이것이 죽음의 낙인이 되어, 일정량 이상으로 모인다면 ‘즉사’ 권능이 발동할 것이다.
-우움! 움! 움!
-lv70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 (본체.)
흙의 정령 노움 또한 불길함을 느꼈는지 내 앞에 소환돼서 열심히 움움 거린다.
옥좌에 앉은 위리놈과 땅속을 번갈아서 삿대질하는 노움. 나는 정령어는 전혀 모르거늘, 제발 알아채라는 눈치다.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의 뼈가 땅속까지 널리 뻗어있다는 거지?’
-우움?!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오히려 저 땅속 뼈가 나서길 기다리는 것이니.’
쿠과광!
나는 놀라는 노움을 달래며 영혼의 구슬을 더 부순다. 벌써 130개나 부순 영혼의 구슬.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준이 아니다.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 저놈도 살기 위해선 영혼의 구슬을 가장 안전한 곳에 뒀으니까.’
마지막 영혼의 구슬.
이는 내 기억상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의 목구멍에 있었다.
즉사 권능 ‘데스 브레스’를 발동하는 위치에 말이다.
‘그 때문에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을 처치하기 위해선 오히려 그 타이밍을 공략해야 하지.’
원작 <별들의 전쟁2>에서 정석적인 공략법은 몇 명을 희생양을 쓰거나, 종결급 사제가 촉복을 걸어 죽음의 낙인을 해소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지나치게 까다롭거나, 위험하므로.
혼자서 모든 컨텐츠를 종결한 나만의 방식으로 해결한다.
‘그러니까, 노움. 어서 마지막 용의 뿔 조각을 찾아와라. 죽음의 낙인이 쌓이기 전에 내가 먼저 드래곤 브레스를 터득해야 한다!’
-우움!
따라서 나는 노움에게 서둘러 마지막 용의 뿔을 찾으라고 명한다.
노움은 땅의 정령, 땅속 보물을 훔치는 데 일가견이 있으므로.
아무리 위리놈이라도 즉사 권능 데스 브레스를 발동하기 위해서는 입을 쩍 벌려야 하니까.
입속에 있는 최후의 구슬을 드러낼 수밖에 없겠지.
그 전에 나머지 499개의 영혼의 구슬을 파괴하고, 용의 숨결을 준비할 생각이다.
‘언제까지 옥좌에 여유롭게 앉아있을 수 있는지 두고 보지.’
나는 아직도 옥좌에 앉아있는 죽음의 대악마 위리놈을 노려본다.
아무리 날뛰어도 제 손바닥 안이라고 생각하는 대악마에게 진짜 천외천(天外天)을보여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