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진혈왕자 (7)
샤아아아.
정화된 순례자의 십자가가 찬란한 빛을 여전히 뿜어낸다.
성역 선포.
진혈의 뱀파이어를 무려 셋이나 동시에 소멸시킨 이 권능은 단발적인 힘이 아니라, 일정 시간 신성력이 머무는 능력이므로.
그 안에서 살아남은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치이이익, 소리를 내며 신체 겉 부분이 신성력에 타들어 가는 것이다.
“······내 부족한 결단력 때문에 혈족께서 돌아가셨구나.”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고요히 침묵한다.
바닥에 내려와 검은 재들을 살핀다. 눈을 감는지 붉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츠츠츳.
꿀렁꿀렁.
진혈의 뱀파이어였던 검은 잿가루가 부유한다. 타르에 범벅이 된 폐처럼 찐득한 핏덩이도 떠오른다.
그리고 발데마르의 혈마거인에 흡수된다. 마치 철가루들이 자석에 끌려오듯.
거대한 피의 괴물이 아직 남아있는 막강한 마력을 흡수하는 것이다.
‘드디어 혈마왕 블라디미르의 진정한 힘을 사용하는 모양이군.’
나는 안면 근육을 굳힌다.
혈마거인.
저 권능은 단순히 피를 거인으로 만들어서 육탄 전투를 하는 것이 그치지 않으므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제가 항상 장례식 복장 같은 검은 로브만을 입고 다니는지.”
쿠고고고.
그러거나 말거나 발데마르가 속삭인다.
새까만 잿가루를 흡수한 혈마거인이 한층 더욱 커진다. 아까보다 배는 사악한 힘을 뿜어낸다. 붉은 거인의 색깔도 검붉게 탁해진다.
무려 진혈의 뱀파이어 셋의 힘을 흡수한 만큼 또 한 번 격이 바뀌는 것이다.
네크로맨서가 시체의 질에 따라 힘이 달라지듯, 뱀파이어 또한 가진 피에 따라 격이 달라지니까.
“이 혈마거인은 그동안 죽어 나간 동족들의 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불로장생의 비약을 개발하기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피이지요.”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자신을 지키는 거대한 혈마거인을 어루만지며 엄숙하게 읊조렸다.
일족의 지도자로서 어깨에 막중한 책임감과 의무감이 담긴 모습.
그는 이미 수백 년을 살아온 만큼 수많은 희생을 겪었음에도.
그들의 피와 유해를 간직하며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다.
“범죄자들의 피 말이군.”
나는 한마디로 말을 자른다.
발데마르가 간직하는 유해.
이들은 뱀파이어들에겐 숭고한 영웅일지 모르겠으나,
다른 이종족에겐 생명체를 흡혈하고 강제로 인체 실험한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므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 그것이 내가 너희들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일축한다.
실제로 뱀파이어는 식용 트롤의 피를 흡혈하고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었으므로.
오직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스스로의 영생과 무한한 힘. 욕망을 위해 불로장생의 비약을 개발하는 것.
이를 포장하지 말라는 뜻이다.
“당신들이 보기엔 그럴 수도 있겠지.”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부정하지 않고 붉은 안광을 흉흉히 번뜩인다.
바닥에 피 웅덩이가 넓게 펼쳐진다. 마치 아까 죽은 혈궁의 뱀파이어 다이애나의 권능처럼.
“본래라면 복수를 포기했겠지만, 네 몸 상태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아무래도 당신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모양이니.”
“······.”
붉은 눈동자에 오롯이 내 모습을 담는다.
현재 내 몸은 무너지고 있으므로.
아무리 포커페이스를 유지해도 미세한 떨림과 창백한 안색까지 숨길 순 없는 거다.
“따라서 지금 기회에 반드시 처치하마. 설혹 그로 인해 내 몸속 피마저 신성력에 모두 타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발데마르는 그렇게 혼잣말을 읊조린다.
왕의 자질을 가진 자로서 감내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듯 말이다.
-쿠고고오오오-!!!!
그 말을 끝으로 혈마거인이 거칠게 포효한다. 드디어 죽은 진혈 뱀파이어들을 모두 흡수한 모양.
물론 이쪽으로서도 상대가 성역 안에 남아서 신성력에 타들어가고 있었으니, 기다려준 게 마냥 손해는 아니었다.
‘성역 안인 만큼 빠르게 끝내려고 하는 모양이군.’
나는 상대의 가치관과 패턴을 알고 있는 만큼, 작은 단서만으로도 앞으로의 일을 느낀다.
상대는 절벽에서 고꾸라지는 상황에서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이쪽도 속전속결을 환영하는 바다.’
-경고! 몸이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서둘러 전투를 멈추고 휴식하십시오!
수명이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서로 일족의 운명이 걸렸기에 어차피 물러날 수 없는 싸움.
몸과 영혼이 너덜너덜해져서 휴식을 원하고 있다.
빨리 끝내야 한다.
【기간테스의 힘 lv3.】
지이이이잉!
따라서 나는 화이트홀을 동시에 3개나 연다.
절대반지 기간테스의 힘이 스킬 레벨이 3이 된 이후, 새로 열린 능력.
-그오오오오오!
세 개의 화이트홀에서 고대 거인 기간테스의 신체 일부분이 튀어나온다.
새하얀 털과 푸른빛으로 무장한 거대한 거인.
머리를 중심으로 한 듬직한 어깨와 거대한 양팔.
비록 상반신 일부분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진혈의 뱀파이어를 흡수하고 더욱 커진 혈마거인과 맞먹는다.
나는 진혈왕자 발데마르와 눈을 마주한다.
기간테스 거인 또한 혈마 거인과 눈을 마주한다.
신호를 주고받은 것도 아님에도 동시에 주먹이 교차한다.
대난투를 시작한다.
***
투두두두두!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는 백마를 타고 질주한다.
자신의 직속 휘하 부대인 에인헤랴르와 세인트 발키리들을 이끌고.
마신 문두스가 강림했다는 대륙 남서부 지방으로 질주하는 것이다.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 예하께서 말씀하셨다. 현재 마신 문두스가 흡혈귀들과 대대적인 전쟁을 시작한 것 같다고.’
루크레치아는 성기사단을 이끌며 과거를 회상한다.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
그녀는 루크레치아 또한 인정하는 선인 중 한 명이므로.
과거 함께 순혈의 뱀파이어 노스페라와 릴리스를 토벌하러 간 적도 있는 만큼, 에클레시아는 늘 신중하고 허언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에니스 백작령을 포위하던 순혈 뱀파이어를 두 마리 전부 처치하다니. 이건 틀림없는 마신 문두스야.’
현재 대륙 곳곳에서 마신 문두스를 사칭하는 도적 떼가 많다.
그러나 순혈 뱀파이어 릴리스와 노스페라를 둘 다 처치한건 결코 사칭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대륙 7대 성인 중 전투 성녀라고 불리는 루크레치아조차 이루지 못한 업적이므로.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에게 나타났다는 황금빛 머리의 사내가 마신 문두스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 마신 문두스가 지원 요청을 했다고.’
순혈 뱀파이어 두 마리를 처치한 직후,
에클레시아에게 지원 요청했다고 한다.
순혈 뱀파이어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가 오리라고.
혈마왕 블라디미르 폰 체페슈.
지금까지 대륙 남서부에 수백 년간 거주하고, 수십 년간 괴롭혀온 뱀파이어 전체보다 강한 마력을 가진 자.
7개의 거악 중 하나.
그자가 곧 강림한다고. 대규모 병력을 이동할 수 없다면 소수 정예라도 모조리 긁어오라는 전언.
이는 난생처음인 일이었다.
‘······설인왕 이미르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늘.’
루크레치아는 과거를 회상한다.
북부에 강림했던 초대형 서리거인 이미르.
숱한 전장을 겪었던 루크레치아가 상대했던 가장 강대한 단일적.
그런 존재를 상대할 때도 이토록 다급하게 지원 요청하진 않았다.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에클레시아 예하께서 말씀하셨지. 마신 문두스가 위태로워보인다고.’
루크레치아는 에클레시아가 말했던 전언이 생생했다.
그녀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마신 문두스 공께서 몸 상태가 좋지 않아보여요. 제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과도한 마나 사용으로 육체가 붕괴할 때 보이는 증상과 유사해 보입니다.]
루크레치아 또한 들은 적 있다.
마신 문두스의 오르비스 대학살.
그 이후 오랜 기간 잠적했다고.
‘어쩌면, 그자가 문득 잠적한 것도, 그때의 후유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빛과 그림자가 있으니.
막대한 힘에는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휴식을 마친 후.
불사왕 데힐라칸과 설인왕 이미르, 그리고 탐욕왕 엘드리치와 결전을 치렀다.
한 번, 한 번이 오르비스 대학살과 버금가는 대결전.
다시 마나 과부하에 걸려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은 전투들이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마신 문두스 없이 더 큰 악을 막을 수 있을까? ······아니, 폭주하는 문두스 하나라도 막을 수 있을까?’
최악의 가정이 떠오른다.
다시 한번 오르비스 대학살을 벌일 만큼 폭주하는 마신 문두스를 상정한다.
현재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보이는 길.
그 일이 만약 벌어진다면, 과연 자신이 막을 수 있을까?
고개를 쉽사리 끄덕일 수 없다.
따라서
“대성자 ‘파울리노’님께 전언드려라. 에니스 백작령에 추가 지원 부탁드린다고.”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의 결단은 간결했다.
마신 문두스.
그자가 완전히 미쳐버리기 전에 돕는다. 오르비스 대학살 같은 비극이 도래하기 전에 바로잡는다.
황제와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와 맞선 것을 보아 본래 악인은 아닌 듯 하므로.
삐, 삐, 삐, 삐!
마력 탐지기가 울린다.
대륙 최남단까지 와서야 울린 물품. 적의 탐지기를 빼앗은 결과다.
쿠과광.
“저쪽이다!”
저 멀리 영지만 한 숲에 흙먼지와 사악한 마력으로 뒤덮인 걸 발견한다. 막대한 굉음까지 울려 퍼진다.
황야의 엘프 부족을 발견한다.
말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
황야의 부족 어린 엘프 엘라힘은 공포에 질렸다.
프레야 교단 백금 배지.
궁왕 엘레노아 전하께서 장로님께 주신 보물.
그 보물을 믿고 엄마를 모시며 급히 인간의 땅으로 달아나고 있거늘.
쿠광! 쿠과과과광-!!!
저 멀리서 벌어지던 굉음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 설마······. 고대용의 후예께서······.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께서 밀리신다고······?’
어린 엘프 엘라힘은 다친 어머니를 이끌다 말고 망부석처럼 얼어버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현재 마신 문두스와 진혈왕자 발데마르. 그 두 존재는 1,000년 묵은 엘프목보다도 거대한 거인을 꺼내서 혈전을 벌이고 있으므로.
그들이 팔을 한 번 내지를 때마다, 주먹이 부딪힐 때마다 막대한 충격파와 굉음이 발생하고 있으므로.
어느 쪽이 밀리는지 멀리서 육안으로도 보이는 만큼, 새하얗고 푸른 고대 거인 만큼이나 피난민들 안색이 창백해질 수밖에 없다.
[이 힘은, 방금 네가 죽인 뱀파이어의 권능이다······!!]
촤아아악, 고오오오!
심지어 진혈왕자 발데마르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숲에 메아리친다.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뿜어진다. 그와 동시에 생겨나는 수십 개의 흑마법진.
그것들에서 각각 붉은 창이 날아든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마신 문두스에게 쫓아간다.
“헉······?”
엘라힘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마신다.
마신 문두스.
저 고대용은 자신이 간절히 소망하여 강림한 위대한 존재이므로. 저 자가 당장이라도 격추돼 떨어질 것 같아서 심장이 콩알만 해지는 것이다.
촤아악! 콰앙! 쾅! 콰아앙!
물론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신 문두스는 하늘을 날아오르며 막대한 양의 물을 모아 난사했으니까.
어찌나 마법 운용이 뛰어난지 날아드는 수십 개의 흑마법을 일일이 다 맞추며 떨어냈다.
엄청난 마법 영창 속도와 적중률은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엘라힘조차 ‘와······.’ 절로 탄성을 짓게 했다.
[과연. 역시 마신을 마법으로 죽이는 건 어렵겠군!]
“······!”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혈마거인을 운영하던 뱀파이어가 그 모습을 보더니 마신 문두스를 더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엘프 피난민 쪽으로 날아들었으니까.
어린 엘프 엘라힘이 있는 곳으로 정면으로 날아드는 것이다.
“헉. 혈마거인이 이쪽으로 온다!”
“모두 도망쳐! 휩쓸리지 않게 흩어지십시오!”
엘프목보다도 거대한 핏빛 거인이 하늘에서 그림자를 드리우자 혼비백산하는 엘프들. 각자 짐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나 어린 엘프 엘라힘만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다친 엄마를 부축하고 있으니까. 안 그래도 청소년인 엘라힘으로는 엄마를 부축하며 달릴 수가 없는 것이다.
“찾았다······!”
이에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붉은 눈을 번뜩인다. 혈마거인이 거대한 팔을 뻗는다.
악마의 손길이 다가온다.
“물러나라! 어린 엘프에게 손대지 마라!”
쐐애애액! 파아앙!
이에 멀리서 폭풍의 화살을 쏘는 궁왕 엘레노아. 뻗어오던 혈마거인의 손아귀를 한번 막아낸다.
“엘프 따위가. 소용없다.”
지이잉.
그러나 발데마르는 가소롭다는 듯 곧장 혈마법으로 베리어를 만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엘라힘에게 손을 뻗는다. 다가오는 거대한 손아귀에 엘라힘은 풀썩, 엄마를 부축한 손에 힘이 풀린다.
‘아마 저 손아귀에 붙잡힌 순간, 몸이 터져 죽거나 인체 실험장으로 끌려가겠지.’
1초도 안 되는 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비록 엘라힘이 어린 엘프지만 그녀 또한 소문으로 익히 들은 것이 있으므로.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엄마를 힘껏 밀쳐서 함께 휩쓸리진 않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
그런데 그때 변수가 발생한다.
수초나 지났으나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힐끔,
실눈을 떠서 정면을 바라본다.
“이, 이건?!”
그때 보인 것은 충격적이었다.
하늘에서 덮쳐오던 혈마거인.
그 거대한 거인이 시간이 정지한 듯 공중에 멈춰있었으므로.
콰아아앙!
심지어 시간이 역행하듯 뒤로 잡아당겨진다. 당장 마신 문두스 앞으로까지 끌려간다.
콰아앙!
물론 혈마거인은 끌려가는 가속력을 이용해서 거대한 주먹을 날린다. 마신 문두스를 지상으로 처박고 그쪽으로 날아든다.
[중력 마법! 네놈. 제 생명력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면서. 고작 저깟 엘프 하나를 위해 용의 권능을 쓴 거냐.]
“!”
중력 마법······?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언가 분위기가 느껴졌다.
용의 권능.
이름만 들어도 강력하면서도, 막대한 페널티가 느껴졌으니까.
[······네놈 또한 그깟 하이엘프 피와 드래곤의 피를 얻기 위해 수많은 동족을 잃지 않았느냐.]
마신 문두스의 목소리가 텔레파시로 울린다.
그가 한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지만, 어린 엘프 엘라힘조차 흠뻑 느낄 수 있었다.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저자가 대륙 남서북 엘프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다 죽어가는 몸으로도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서 강림해줬다는 걸 유추한다.
[네놈도 감정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면서 그딴 말 하지 마라. 날 척살한다는 건 핑계고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는 게 느껴지니까.]
그때 마신 문두스가 발데마르에게 말한다.
하기야 뱀파이어 또한 가족과 혈족이 있으니까. 제 동족을 아끼는 건 마찬가지인 것이다.
[······부정하진 않지.]
콰앙!
발데마르는 입술을 씹는 듯 새는 발음으로 말한다.
[나 또한 네 신성력으로 다 죽어가는 몸. 이제야 당신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군.]
치이이익······.
실제로 혈마거인은 마치 불길에 타버린 짐승처럼 타들어가고 있었다.
신성력.
일대를 장악한 신성력이 사악한 힘을 겉에서부터 새하얗게 태워버리고 있었으니까. 타들어가는 장작처럼 죽어가는 것이다.
[차라리 후련하군. 당신이라면, 이대로 함께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발데마르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혈마거인의 오른팔이 새까맣게 변하도록 사악한 힘을 모으면서.
어찌나 새까만 마력인지 세상의 모든 그림자가 모여드는 것 같았다.
촤아아아악.
고오오오.
이에 마신 문두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또한 오른손에 거대한 물줄기를 모은다.
모여든 물은 강력한 회전력과 함께 차디찬 얼음 결정으로 가득 찬다.
푸른 주먹을 만든다.
서로를 고요히 노려본다.
엘프 피난민 또한 침을 꿀꺽 삼킨다.
모두 침묵을 지킨다.
누군가 입 밖으로 소리를 내면, 이를 신호로 서로 맞붙을까 봐.
서로의 주먹이 심장을 교차하여, 마신 문두스가 죽음에 이르게 될까 봐.
숨소리조차 참는 것이다.
타앙.
그러나 그러한 노력도 무색하게 일순 서로 전력으로 날아간다.
땅이 뒤흔들릴 만큼 강한 반동.
눈 깜짝할 순간에 서로에게 당도한다. 방어 따위 하지 않고 내지른다.
끔찍한 상상에 모두 눈을 뜨지 못할 때,
번쩍-!!!
느닷없이 강렬한 빛이 뿜어진다. 광원이 뿜어진다.
[너는······?!]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제 등에 칼을 꽂은 인간을 노려본다. 태양처럼 붉은 기가 맴도는 머리카락에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인간.
대륙 7대 성인.
프레야 여신에게 선택받은 존재가 성검을 내리꽂고 있었으니.
“내가 너무 늦지 않게 왔구나.”
샤아아아!
발데마르의 심장에서 강렬한 빛을 뿜어낸다.
절체절명의 순간, 혈마거인의 최후 일격을 불발시킨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앙-!!!
고대 거인의 푸른 주먹이 혈마거인의 심장을 앞으로 꿰뚫는다. 쩌저저적, 혈마거인 전체가 얼어붙는다.
와장창창, 산산히 조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