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진혈왕자 (5)
“······엄마. 정신 차려. 엄마!”
황야의 부족 피난촌.
어린 엘프 엘라힘은 태어나서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엄마의 죽음.
앞으로 수백 년간 평생 함께할 것 같았던 엄마 엘라임이 지금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으므로.
“누가 좀 도와주세요! 우리 엄마가! 엄마가 죽어가고 있어요!”
가족이 이혼하고 남은 유일한 가족.
엄마를 떠나보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이다.
“비켜라. 더 급한 사람이 많아.”
“응급지혈은 해주마. 성수는 아껴 써야 해.”
그러나 궁왕 엘레노아의 레인져가 엘라힘을 홱 뒤로 밀치며 지나간다.
‘아얏······?’
엘라힘은 바닥에 철퍼벅 자빠져서 엉덩이가 아팠다.
하지만 혹여 화를 내면 엄마를 응급치료도 안 해줄까 봐 항변조차 못 하고 눈물만 그렁그렁 맺었다.
콰아아앙!
그때, 저 멀리서 고막을 때리는 굉음이 들린다. 엘라힘과 레인저는 모두 고개를 홱 돌려서 그쪽을 바라본다.
“히, 히이익! 거대 뱀이다! 거대 뱀들이 쳐들어왔다!”
“!”
-취이이잇!
-하이, 엘프······. 찾으라 하셨다······!
그곳에는 수십 마리의 거대 뱀이 몰려오고 있었다. 뱀파이어의 권속인지 눈이 시뻘겋고, 파괴적인 힘을 넘실거리는 몬스터들.
그들이 피난민들을 향해 몰려든다.
엘프 레인져들은 비상사태임을 직감했다. 엄마를 치료해주다 말고 달려간다.
“바람 부족 레인져 부대! 고대용의 사원에서 구한 석궁 아티펙트를 발포하라!”
쐐애액! 파바바박!
-쿠에에엑!
최정예 레인져 부대는 과연 달랐다.
나무 활도 아닌, 기계식 활을 쏘았으며, 심지어 마법진이 번뜩여서 마법이 발동됐으니까.
막강한 화력으로 거대 뱀들을 처치한다.
······엄마도 저런 병기는 하나도 같고 있지 않았는데.
우물 안 개구리가 세상에 나와서 뱀이 독수리에게 먹히는 모습을 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제기랄! 수가 너무 많군!”
“모두 재장전을 우선시하라! 후퇴해!”
“꼬마야! 너도 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달아나!”
“!!”
그러나 전세를 뒤바꾸진 못했다. 거대 뱀은 수 없었고 엘프 레인져 부대는 피난민을 대피시키랴, 엄호하랴 정신없었으니까.
엘라힘은 현재 가장 강하고 믿을 수 있는 자를 바라본다.
마지막 희망 궁왕 엘레노아.
그녀는 최상급 뱀파이어들이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 후퇴.”
홱.
그때 엘레노아는 늙은 엘프 장로에게 아주 작은 보석을 집어 던진다. 늙은 장로는 겨우 받아낸다.
“인간 네일이 준 백금 배지다. 그걸 가지고 인간의 영역인 에니스 백작령으로 달아나라. 내가 시간을 끌겠다.”
“!!”
마지막 희망인 궁왕 엘레노아조차 긴장한 눈치다. 과연 천하무적이던 우리 엄마를 물리쳤던 적들이다.
“하, 하지만 전하! 차라리!”
“너희 따위가 돕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궁왕 엘레노아는 늙은 장로들을 묵살하며 말했다. 이윽고 벌어지는 전투.
쿠과과광-!!!
막대한 굉음이 난립한다. 피난민 일부가 휩쓸려 나간다. 4인 가족 여럿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걸 바로 앞에서 목격한다.
‘어째서······?’
어린 엘프 엘라힘은 엄마를 끌어안고 피난촌을 둘러본다.
수많은 이웃이 공포에 질려 달아난다.
자신들 대신 다른 가족이 거대 뱀의 타겟이 되길 바라면서.
지옥도.
이곳은 어린 그녀가 본 인생 최악의 지옥도였다.
‘분명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님께서 이곳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하셨는데.’
엘라힘은 피난촌에 올 때 엄마가 해준 말을 떠올린다.
고대용.
그들은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있어서, 먼 훗날에 벌어질 참극도 다 알고 있다고.
그래서 그조차 막을 수 있는 결계와 방책을 세워둔다고.
혹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께서 직접 강림하실 수도 있다고.
‘도와주세요······. 정말로 실재한다면. 지금 이 상황까지 볼 수 있다면요.’
공포에 질려 흐느껴 운다.
그녀 또한 평생 일상처럼 모셨던 드래곤 족.
수백 년간 잠자는 종족이 이젠 깨어나 주길 바라는 것이다.
***
콰앙! 쿠광! 쿠과아아!
궁왕 엘레노아는 바람을 타고 초고속으로 회피 기동한다.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
반투명한 거대 늑대처럼 생긴 존재가 엘레노아를 지켜주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귀신처럼 하늘 높이 뛰어오르고, 허공 답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숲이 없는 곳에서 이 정도 움직임이라니.”
“과연. 혈포(血泡)의 뱀파이어 베블린이 당할 만 하군요.”
“진혈왕자 저하 말씀대로 한꺼번에 움직이길 잘했습니다.”
“······.”
그러나 이들에게 위기감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궁왕 엘레노아가 곡예에 가까운 회피 기동을 보여주며 가끔 반격하는 건 사실이지만.
결국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건 변함 없으므로.
더구나 무려 4명의 진혈 뱀파이어.
대륙 남서부를 지배하는 최고위 밤의 귀족이 한 자리에 뭉친 상황이다.
마치 하나의 사냥감을 지치게 몰아가는 사냥꾼들처럼.
꽤 까다로운 적을 발견하여 어떻게 처치할까를 궁리할 뿐, 공포감에 빠지진 않는 것이다.
반면 궁왕 엘레노아는 서서히 식은땀이 늘어간다.
‘마나가 말라간다······. 그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궁왕 엘레노아는 순풍을 타고 미끄러지듯 붉은 기둥을 피하며 생각했다.
뱀파이어.
이들은 자신이 그간 흡혈한 피를 근간으로 혈마법을 발동한다.
그런데 뱀파이어의 수명은 한없기에 그 피는 대단히 많이 쌓여있다. 수백 년간 생명체를 학살한 힘이 담긴 것이다.
단기적으로 맞붙는다고 해도 가능성이 승산이 한없이 낮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가능성이 아예 없었다.
‘더구나 저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젊은 뱀파이어도 문제다······. 아직 가만히 있는 모양이지만 느껴지는 마력은 나조차 모골이 오싹해질 정도니까······.’
궁왕 엘레노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진혈왕자 발데마르.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붉은 머리 뱀파이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버릴 정도였으므로.
마족들은 격이 높은 만큼 데빌 아이의 힘도 강해지는 걸 알기에, 그 존재를 계속 인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겠지.’
우우웅.
궁왕 엘레노아는 제 오른손에 장착한 고대 보물 아티펙트를 살핀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의 팔찌.
초대 엘프왕이 사용했다는 전설적인 보물. 이 팔찌를 발동한다면 한시적이나마 정령왕의 힘을 일부 빌릴 수 있으므로.
소닉붐.
토네이도를 일으켜 광역을 쓸어버리는 궁극의 화살.
궁왕 엘레노아가 할 수 있는 최강의 일격으로 단숨에 숨통을 끊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단 두 발이다. 아까 소닉붐을 사용했으니까. 앞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닉붐은 그게 한계야.’
그러나 실피드의 팔찌 또한 만능은 아니었다.
바람의 정령왕의 힘을 사용하려면 그만큼 많은 바람의 힘을 소모해야 하므로. 이는 최대 충전량이 고작 3회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남은 소닉붐은 단 두 발.
그 두 발 안에 4명의 뱀파이어를 모두 처치해야 한다. 여지껏 자신이 처치했던 가장 강한 적인 순혈 뱀파이어보다도 한단계 더 높은 진혈 뱀파이어를.
······그것도 혈마왕 블라디미르의 적통 후계자 발데마르까지 포함해서.
과연 할 수 있을까?
‘해보는 수밖에!’
결단이 선 만큼 몸을 날렵하게 움직인다.
우선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의 힘을 깨우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피해다니면서 힘을 모으면 들키는 게 당연지사.
“실레스틴!”
-아우우!
따라서 먼저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을 부려 최강의 힘을 아낌없이 쏟아낸다.
폭풍의 화살.
고대용의 사원을 지키던 파수꾼 골렘조차 단 일격에 파괴한 바람 부족 엘프의 비기. 이를 동시에 3번이나 연사한다.
“온다.”
“맡겨만 주십시오. 아가씨.”
물론 이 진혈 뱀파이어들은 팀합조차 잘맞았다. 다들 최정상급 귀족이므로, 서로 특정 분야에 권위자로서 인정하는 거다.
콰아아앙!
한 기사 같은 뱀파이어가 혈마법으로 혈갑과 방패를 만들어서 막아낸다.
그 뒤에서 다른 진혈 뱀파이어는 파괴적인 권능을 발동할 준비를 한다.
“솟아나는 덩굴.”
“?!”
촤좌좍.
그러나 폭풍의 화살의 목표는 저들의 처형이 아니었다.
엘레노아는 혈마법 실드가 깨지자마자, 곧장 숲의 마법으로 땅에서 나무 덩굴을 급성장시켜서 뱀파이어들의 발목을 잡고 넘어뜨린다.
파괴력이 특출난 마법은 아니었으나, 사용하는 자에 따라서 그 활용도가 달라진다.
진혈의 뱀파이어들이 아뿔싸 급히 일어나려고 할 때,
“다행히 일직선으로 계속 서있구나.”
“!!”
궁왕 엘레노아는 파리한 안색으로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마치 숲의 신께서 자신들을 보우하신다는 듯.
고오오오-!!!
거대한 토네이도가 회오리친다. 순식간에 엘레노아의 오른손으로 빨려 들어간다.
소닉붐.
순간 순혈의 뱀파이어조차 안색이 창백해질 만큼 막대한 양의 마나. 질서와 자연의 힘을 발현한다.
--!!
정통으로 맞는다.
피할 틈 따위 없었다. 진혈 뱀파이어들이 각자 실드를 펼쳤지만 무리였다.
일부긴 해도 정령왕의 힘은 막강했으며, 상성상 비슷한 수준의 힘이라도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질서의 힘이 압도했으므로.
신성력에 준하는 치사율을 갖는 것이다.
“헉······. 헉······. 해치웠나.”
폭풍이 회오리치며 사라진다.
궁왕 엘레노아는 10여 초간 가만히 서서 흙먼지가 가득한 곳을 바라본다.
최대한 예민하게 신경을 세우지만 어떤 미동도 포착되지 않는다.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모든 것이 끝났다.
하기야 아무리 진혈의 뱀파이어라도 소닉붐을 정통으로 맞고 살아남았을 수는 없으니.
운이 좋았다.
만약 진혈의 뱀파이어들이 하나씩 따로 나타났다면,
아니, 뿔뿔히 흩어져 산개하기만 했더라도 패배하는 것은 궁왕 엘레노아였을 터였다.
그렇게 기분 좋은 탈력감과 함께 자리에 철퍼덕 쓰러지려던 찰나,
푸확!
“······?!”
무언가 붉은 것이 엘레노아의 배를 꿰뚫었다.
엘레노아는 무게 균형을 완전히 잃고 한쪽 무릎을 꿇는다.
탈장한 고통을 견디며 붉은 것이 날아온 방향을 살핀다.
“과연. 사왕 중 한 분은 격이 다르시군요.”
흙먼지 속에서 들려온 것은 진혈왕자 발데마르의 목소리였다.
흠칫,
놀라 몸을 떨어버린 엘레노아.
“설마 진혈 뱀파이어분들께서 3분이나 계신데, 저까지 나서야 할 줄이야,”
고오오오.
진혈왕자의 몸에서는 거대한 피가 뿜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피는 한 덩어리로 뭉쳐서 붉은 거인 모습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혈액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거인.
그 신장이 무려 5m에 달하는 모습.
저 괴물이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의 힘을 막아낸 것이다.
“이건?”
“‘혈마 거인(血魔 巨人)’. 제 아버지 혈마왕 블라디미르 폐하께 물려받은 권능입니다.”
“······!”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이것만큼은 자랑스럽게 밝힌다.
혈마왕 블라디미르 폰 체페슈.
그는 발데마르의 친부이자, 뱀파이어 일족에게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이룬 영웅이었으므로.
그의 권능을 이어받은 유일한 자손이라는 데 자부심을 감추지 않는다.
촤르륵.
실제로 혈마 거인은 소닉붐으로 당한 상처를 수 초 만에 모두 수복한다. 아무리 일부라지만 무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의 힘이 서린 일격을 완전히 무효화한다.
콰아아아앙!
혈마 거인이 전방으로 내지른다.
충격파만으로 황야가 갈라지고, 엘프 최정예 레인저들이 사방으로 날아간다.
직접 닿은 피조물들은 깨끗이 생명력이 빨려 들어간다.
항거할 수 없는 힘.
막대한 양의 피가 응축되어 있었기에 그 질량 또한 엄청났으므로.
단순한 공격조차 파멸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커헉······!”
궁왕 엘레노아 또한 바닥에 머리부터 바틀린다. 내상을 심하게 입어서 피를 토한다.
일대 전체를 충격파로 날려버리기에 회피 기동 따위 의미 없는 거다.
“네놈······. 그 괴물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이냐······!!”
궁왕 엘레노아는 파리한 안색이었으나 메마른 입술을 뗀다. 뱀파이어의 주 사냥감은 엘프였으므로. 분노라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더구나, 네놈, 정도 되는 놈이라면 더 이상 살생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어째서, 이 평화로운 숲까지······!”
엘레노아는 피를 토하며 묻는다.
진혈 왕자 발데마르는 잠시 침묵하더니 무겁게 입을 연다.
“저야 젊기에 아직 괜찮지만. 이미 수명이 다해가는 웃어른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뭐라?”
“불로장생의 비약. 이를 만들기 위해 희생된 분들의 피를 기억하는 게 제 최선일 테지요.”
발데마르는 거대한 핏덩이로 이뤄진 혈마 거인 속에서 숨겨진 유해를 꺼낸다. 뱀파이어의 뿔을 가지고 있는 시체들. 그리고 각 이종족의 대표적인 시체들이 가득했다.
발데마르는 오랜기간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었지만, 방해하는 자는 전부 죽였으므로.
그들의 피만으로도 이 거구의 혈마 괴물을 형성할 수 있던 것이다.
“또한, 저는 뱀파이어 일족의 지도자. 흡혈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분들을 모시는 자입니다. 백 명의 엘프를 희생시키더라도 단 한 명의 뱀파이어를 살리는 것이 저의 의무. 당신들께는 미안하게 됐습니다.”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죽은 이들을 향해 묵례하며 말했다.
그의 복장은 화려한 장신이 없는 장례식 복. 발데마르가 왜 하필 검은 정장만을 입고 다니는지 깨닫는다.
“마침 하이엘프 또한 찾은 듯 하군요.”
“······!”
발데마르의 손짓에 붉은 박쥐 한 마리가 어린 엘프 둘을 물고 온다.
엘레노아의 시종 엘로힘과 동생 엘라힘.
그들은 이미 제압당했는지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하이 엘프가······!’
그제야 궁왕 엘레노아는 낯빛이 완전히 흙색으로 바뀐다. 지금 뱀파이어들의 목표가 하이엘프라는 걸 알기 때문에.
불로장생의 비약만 제조되면 대륙 남서부는 물론, 대륙 전체의 생명체에게 피바람이 분다는 걸 알기에.
전투는 물론, 전쟁마저 패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저희도 불로장생의 비약을 개발하기 위해선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한지라. 어쩔 수 없군요.”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둘씩이나 되는 하이엘프를 납치해가며 공손히 꾸벅 허리 숙인다.
궁왕 엘레노아는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가증스러운, 예의 따위 집어쳐! 넌 결국 학살자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고오오오!
엘레노아는 마지막 마나를 쥐어짜서 다시 한번 정령왕의 팔찌를 발동한다. 그나마 저 헐마 거인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공격은 이것이 유일하므로.
콰아앙!
그러나 발데마르가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그 전에 혈마 거인의 팔을 휘둘러 엘레노아를 저 멀리 날려버린다. 저 멀리 바위 끝에 처박힌다.
“곤란합니다. 궁왕 엘레노아. 당신의 힘은 우리 뱀파이어에게 너무 큰 위협이 되는군요.”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쓰러진 엘레노아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온다.
예의 바른 말과 달리 붉은 눈을 번뜩인다. 살기를 흉흉히 내뿜는다.
“이만 사라져주셔야겠습니다.”
쿠고오오!
혈마 거인의 형체를 다시 한번 다 잡는다. 이후 주먹을 내리치는 혈마 거인.
뚝,
마음이 꺾인다.
실로 압도적인 위용.
기습이나 전략 따위로 극복할 수 없는 격차이기에.
감히 어찌해볼 생각조차 들지 않는 것이다.
‘······이 자는, 고대용의 사원에서 대비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엘프 족에서 수백 년 만에 탄생한 천재라고 불리던 엘레노아였다.
그런 그녀가 정령왕의 힘이 담긴 고대 보물까지 사용해서 전력으로 쏟아냈거늘.
제대로 된 타격조차 입히지 못하다니.
정녕 엘프 족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말인가?
‘······악과 교단 디메토르와 진혈의 뱀파이어가 이토록 날뛰는 데도 가만히 있다니. 드래곤 족. 자칭 질서의 수호자라는 자들은 무얼하고 있단 말인가.’
이번 일이 엘프의 손을 떠났다는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럽게 용족을 원망하게 된다.
차라리 고대용처럼 완전히 멸족됐으면 미련도 없었을 것을.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마신 문두스라고도 불리는 그 자는 수백 년간 용족을 모신 남서부 엘프들을 버리고, 생판 남인 인간들을 위해 탐욕왕 엘드리치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하니까.
자신들을 버린 자들에게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앞으로, 대륙 남서부에 살아남을 엘프는 없겠지······.’
궁왕 엘레노아는 눈앞에 다가오는 붉은 주먹을 보며 주위를 둘러본다.
대륙 남서부의 엘프 부족 전체를 이끌던 임시 수장으로서 참담했다.
제 부하와 동족이 수없이 죽어 쓰러져 있으므로.
저승에서 과거 엘프의 숲을 번창시켰던 선조들을 무슨 낯으로 만나 봬야 할까?
비참함과 굴욕감, 그리고 죄책감이 한데 어우러져 그녀의 마음 한편을 시퍼렇게 멍들게 하는 것이다.
고오오오!
그때 저 멀리서 막대한 양의 마나가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혹시 진혈왕자 발데마르가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엘프의 숲을 눈에 담는다.
지이이잉!
그때, 화이트홀이 열린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거대한 팔이 튀어나온다. 혈마 거인의 주먹에 버금가는 새하얀 팔.
타아아앙!
“!!”
고대 거인의 팔은 손아귀를 펼친다. 그리고 시뻘건 혈마 거인의 주먹을 정면에서 잡아낸다.
엘레노아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힘겨루기를 한다. 그 틈에 하이 엘프를 구해낸다.
“이건······?”
엘레노아는 바닥에 쓰러진 채 고개를 돌려본다. 화이트홀을 연 마법사가 누군지 확인한다.
“내가 너무 늦었군.”
“!!”
그 상대는 엘레노아 또한 잘 아는 얼굴이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에 깊은 푸른 눈을 가진 젊은 사내.
탐험가 네일.
일전 고대용의 사원에서 던전 가이드를 해주었던 인간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등 뒤에 거대한 마나의 날개와 마나로 된 얼음 결정 갑옷을 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바보, 같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어서 도망쳐라······!”
물론 궁왕 엘레노아는 피를 토하며 말했다.
어차피 자신은 죽는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고작해야 백년 살이 종족.
평균적으로 엘프보다도 약한 자들이므로. 구태여 희생자를 늘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다.
그러나 진혈의 뱀파이어 측 반응은 격했다.
“너로구나.”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상대를 알아보고 존댓말을 집어치우며 읊조린다.
시종일관 우울함과 근엄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그가 강한 적의를 드러낸다. 붉은 눈을 번뜩인다. 극도로 경계한다.
“마신 문두스.”
발데마르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마신 문두스.
그 이름은 현시대에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드래곤. 악의 교단에서 최흉의 존재로 지목한 유일한 존재이므로.
“네가, 마신, 문두스라고······?”
궁왕 엘레노아는 믿기지 않아 혼잣말한다.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그 위대한 존재의 이명 중 하나이므로, 그동안 용족은 그들을 모셔온 엘프를 잊어버렸다며 원망했던 그녀의 과거를 깨부수는 상황이니 말이다.
펄럭.
그러나 황금빛 머리카락의 사내는 대답하지 않는다. 깊은 푸른 눈을 번뜩인다.
붉은 눈의 스태프를 휘두른다. 망토가 휘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