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진혈왕자 (4)
궁왕 엘레노아는 엘프들의 함성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고위급 뱀파이어.
그들이 얼마나 흉악한 존재인지 알고 있으므로.
촤아악.
실제로 젊은 뱀파이어는 폭풍의 화살에 전신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나, 수초 내에 복구했다. 그제야 조용해지는 엘프 피난민들.
젊은 뱀파이어는 붉은 눈을 번뜩인다.
“······확실히. 궁왕 엘레노아. 넌 다른 엘프들과 격이 다르군.”
사내는 양손을 펼쳐 든다. 그러자 양손에 보글보글 붉은 핏방울이 모여든다.
콰아아아!
또다시 붉은 기둥이 작렬한다.
이번엔 동시에 두 개의 광선이 ‘X’자로 크로스하면서 날아갔다.
콰아아앙!
일대를 휩쓸어버린다.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태워버리는 혈마법. 엘프 피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다시 대피한다.
궁왕 엘레노아 또한 회피기동한다.
“나보고 곧 죽을 녀석이라더니. 이리저리 피하는 것 밖에 못하는 것이냐?”
콰아아아!
진혈의 뱀파이어는 쉼 없이 몰아붙인다. 기존보다 몇 배는 지독하게 마력을 분출한다. 주위 일대를 집어삼킬 법한 혈운(血雲)을 형성한다.
광폭화 (Overdrive).
제 생명력을 불태워서 일정 시간 동안 몇 배의 화력을 가지는 것이다.
‘······진혈의 뱀파이어. 순혈의 뱀파이어보다도 한 단계 급이 더 높은 자라고 했지.’
콰앙! 콰아앙!
궁왕 엘레노아는 네일이란 인간에게 들은 충고를 떠올린다,
진혈의 뱀파이어.
이들은 혈마왕 블라디미르의 직계 혈통으로서, 다른 이들보다도 마력과 화력이 강한 족속들이었으므로.
파앙!
궁왕 엘레노아는 점프해서 피한다. 단순히 엘프의 근육 탄성으로 움직인 게 아니다.
쐐애액!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 엘레노아의 영혼의 파트너인 그 존재가 강력한 바람을 동원해서 뛰어 올려줬다.
그 결과 단순히 높게 뛰어오른 게 아니라, 1,000년 된 엘프목보다도 높게 날아오른다.
포물선으로 우아하게 떨어진다.
“나는 너희 흡혈귀 따위가 평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
쐐애액!
궁왕 엘레노아는 허리를 활처럼 휘며 자세를 고쳐잡는다. 머리부터 땅으로 떨어진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애병기에 화살을 얹는다. 아까의 폭풍 화살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강한 질풍의 화살이 맺힌다.
파아앙! 파앙! 콰앙!
땅으로 천천히 떨어지며 화살을 난사한다. 혈마법으로 만든 비눗방울 실드를 딱 깨뜨릴 만큼의 위력.
뱀파이어는 날렵하게 회피 기동하지만 그럼에도 정확하게 어깨와 이마에 화살이 꽂힌다.
궁왕 엘레노아가 그의 어깨와 다리 근육의 미동만 보고도, 앞으로 어느 곳으로 움직일지 예측했으니까.
“끄으윽······. 큭큭, 멍청한 년. 내게 그딴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아직 못 깨달은 거냐?”
“······.”
물론 이 진혈의 뱀파이어는 심장이 꿰뚫려도 살아남은 괴물. 이 정도 공격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궁왕 엘레노아는 아무런 대책 없이 이곳에 온 자가 아니었다.
‘드디어 가동됐군.’
번쩍.
오른쪽 손목에 차고 있던 보호대가 발동한다. 연녹색 옥으로 된 보물에 잠들어있던 막대한 마나가 깨어난다.
그리고 그 보물에는 연녹색 빛이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지나치게 눈부시지 않으면서도 일대를 감싸 안는 포근한 자연의 힘.
그 보물에는 고대 엘프의 언어로 ‘실피드’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진다.
자신이 엘프 최고의 궁수가 된 권능을 발현한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이시여.”
“!!”
고오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생성되는 토네이도. 기세만으로 광폭화한 진혈의 뱀파이어를 압도한다. 자연과 질서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이다.
“자연의 맹약에 따라 당신의 힘을 조금이나마 빌리오니.”
휘이이이이잉-!!
궁왕 엘레노아의 손짓에 그 토네이도는 한 점으로 응축된다. 한없이 작아지던 토네이도는 이내 엘레노아의 연녹색 고대 팔찌만큼 작아진다.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빨려 들어간다. 엘레노아의 핏줄이 굵게 드러난다. 평온하던 엘레노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린다. 온 신경을 집중한다.
“······이런! 이건 피해야. 헉?”
지이잉. 샤아아.
진혈의 뱀파이어는 피하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아까 정통으로 박아둔 은화살들.
이 은화살들은 공격용이 아니라 속박용이었으므로. 정령의 힘이 뱀파이어를 옭아맨다. 찰나나마 뱀파이어의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이는 사왕급 실력자들의 결투에서 치명적이었다.
톡.
엘레노아는 천천히 활시위에 손을 뗀다. 붙잡는 힘이 사라지자 공간을 찢으며 날아드는 화살. 어떤 소리도 고막에 전해지지 않는다.
소닉 붐.
음속을 뛰어넘은 속도로 날아든 거다.
--!!
그와 동시에 젊은 뱀파이어가 사라진다. 더 정확하게는 소닉붐에 맞고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날아간다.
그리고 폭발하는 2차 폭발.
하늘과 땅을 토네이도가 잇는다. 광폭화했던 진혈의 뱀파이어를 압도한다.
더는 들려오는 소리는 없다.
“에, 엘레노아 전하? 방금 그 힘은······?”
“······.”
피난촌에 있던 황야의 부족 엘프들은 난생처음 보는 힘에 경악한다.
정령왕의 힘.
이는 말 그대로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권능이었다.
“······헉. ······헉. 무리했군.”
궁왕 엘레노아는 이마에서 굵은 땀을 흘린다.
정령왕의 힘은 그녀 본연의 마나를 쓰는 건 아니지만. 그걸 버티기 위해선 육체에 막대한 무리가 가므로.
말과는 달리 광폭화한 진혈의 뱀파이어를 처리하기 위해선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보다 레인저 부대들은 부상자들을 대피시켜라. 네일에게 받은 성수를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전투가 소강된 만큼 궁왕 엘레노아는 후처리를 명했다.
마침 인간에게 선물 받은 성수도 여러 병 있으므로. 아직 죽지만 않았다면 수많은 동족을 살릴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모두 안도하고 방심했을 때였다.
와장창창!
“······?!”
저 멀리서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의 결계가 완전히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궁왕 엘레노아와 최정예 레인저 부대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무려 4명의 뱀파이어가 있었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머리에 우람한 소의 뿔을 달고 있는 자들. 최상급 뱀파이어들이다.
“······늦고 말았군.”
결계를 부순 건 붉은 빛 머리카락을 가진 뱀파이어였다. 마치 일국을 책임지는 현왕처럼 표정 곳곳에 근심과 위엄이 동시에 서려 있는 자.
그의 오른손에는 붉은 피가 넘실거리며 거대한 주먹을 만들고 있다. 아마 저것으로 결계 전체를 깨부순 모양.
‘방금 그 진혈의 뱀파이어조차 결계는 일부 구멍밖에 뚫지 못했거늘.’
궁왕 엘레노아조차 저 거대한 핏덩이에 괴기한 공포를 느낀다.
“네놈은 누구지?”
궁왕 엘레노아는 당장 손이 활시위에 오른다.
“저는 혈마왕 폐하의 장자이자, 진혈왕자 발데마르입니다.”
“!!”
상대는 공식적으로 자기 소개했다.
진혈왕자.
그 말에 궁왕 엘레노아는 소름이 돋았다.
‘······네일이 말했던 자다. 만악의 근원인 혈마왕의 후계자.’
궁왕 엘레노아 또한 알고 있다.
뱀파이어들은 혈통에 따라 그 힘과 권능이 천차만별로 다르다는 걸.
그런데 혈마왕 블라디미르의 정식 후계자라니.
꿀꺽.
침을 삼킨다.
일반 진혈의 뱀파이어 단 한 놈 상대할 때도 무리해야 했거늘.
그 상위의 존재를, 그것도 다른 뱀파이어까지 한꺼번에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손가락 끝에 굵은 땀 한 방울이 흐르는 것이다.
***
-전무후무한 결과! 놀랍게도 당신은 제4군단장 혈마왕 블라디미르의 직계혈통인 진혈의 뱀파이어를 홀로 처치했습니다!
-혈마왕 블라디미르의 최대 마력이 1.1% 감소합니다! 당신의 활약을 인지합니다!
나는 철혈의 뱀파이어 머스트롬을 처치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철혈의 뱀파이어 머스트롬.
이자는 진혈의 뱀파이어로서, 방어력 하니만큼은 마계의 대악마급 마족이었으므로.
이 뱀파이어를 완전히 처치하려면 절대 반지 기간테스의 힘을 쉼 없이 난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만······.’
-스킬 ‘기간테스의 힘 lv2’가 lv3가 되었습니다.
-이제 두 팔은 물론, 고대 거인의 상반신 전체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6써클 3티어에 도달했습니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시스템 창을 살핀다.
절대 반지의 스킬 레벨이 한 단계 올랐다는 문구가 나타난다.
그러나 쉴 틈이 없다.
진혈왕자 발데마르.
그의 힘을 알고 있으니까.
소형화로 미리 가져온 마나 큐브들을 꺼낸다.
-경고! 현재 허약한 몸이 계속된 무리로 인하여 무너지는 상황입니다.
-이후 육체가 붕괴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정말로 마나 큐브들을 파괴하시겠습니까?
황금 상회의 재력으로 구한 50개의 마나 큐브.
이것들을 손에 쥐니 흉악한 경고 문구가 나타난다.
헛웃음이 나온다.
“마약 중독자 같군.”
-블루번과 드래곤 블러드를 동시에 사용한 페널티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앞으로 24일간 최대 마나가 50% 감소합니다!
-악룡화! 파괴 본능이 60%에 근접했습니다! 끓어오르는 힘이 통제되지 않기 시작합니다!
.
.
이미 만신창이가 돼 버린 내 육체.
하기야 최근 지나치게 혹사하고 있었다.
동부의 변을 일으켰던 불사왕 데힐라칸부터, 대한파를 불어닥친 설인왕 이미르, 그리고 제 어머니를 되살리기 위해 공중요새 라퓨타를 띄어 올린 탐욕왕 엘드리치까지.
하나 같이 나보다 강력한 존재였으므로.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한계 이상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여야 했다.
······어쩌면 내게 스스로를 더 소중히 여기라고 잔소리하던 베아트리체가 옳았을 수도 모른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버틴 것도 과거 베아트리체가 정성껏 돌봐주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 세계관은 그런 식으로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니까.’
다만 알고도 그러지 못했다.
진 엔딩.
원작 <별들의 전쟁2>의 최종 결말을 막아내기 위해선 모두의 힘이 필요하니까.
······아니, 그런 계산적인 생각은 집어치우더라도.
당장 앞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걸 아는데 가만히 방치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그것을 막을 수 있었고, 실제로도 이뤄냈으니까 더욱 스스로를 혹사시킨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나중에 ‘환골탈태’하는 수밖에 없겠지.’
-우움?
다만 나는 아무 보험도 없이 나선 건 아니었다.
환골탈태.
지고한 영혼의 격에 어울리도록 육체를 재구성하는 행위.
페널티 특성인 ‘허약한 몸’와 그동안 쌓인 과부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훗날 육체를 재구성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혹사를 용인한 것이다.
콰직!
따라서 나는 손에 쥔 마나 큐브를 터트린다.
소형화돼있던 50개의 마나 큐브가 동시에 푸른 빛을 발한다.
-강력 경고! 마나 과잉!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마나를 흡수하셨습니다!
-일시적으로 추가 마나가 500% 충전됩니다! 이 넘치는 마나는 빠르게 증발할 것입니다.
-폭주 상태에 빠집니다!
.
.
온몸에서 푸른 에너지가 방출한다. 하늘에서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돼서 군림한다.
먼 옛날 설인왕 이미르를 상대했을 때처럼. 막대한 마나가 내 혈관 속에서 소용돌이친다.
“크으윽, 하아압!”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이겨낸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이보다 훨씬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들뿐이니.
【프로즌 모드 lv1.】
심지어 그 정도로도 멈추지 않는다.
진혈왕자 발데마르.
그는 혈마왕 블라디미르와 동일한 권능을 가진 자, 그에 준하는 힘을 가진 후계자라는 걸 알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권능까지 발동한다.
고오오······.
프로즌 모드를 발동하자 내 주위의 기온이 급속도로 내려간다. 내 몸 주위로 차디찬 마나가 뭉쳐서 서리 결정이 모여드는 것이다.
-프로즌 모드 lv1가 발동했습니다!
-모든 물 속성 마법에 빙결계 축복이 부여됩니다!
-얼음 결정들이 당신을 고대 왕의 후계자로 인정합니다!
입에서 한기가 서슴없이 뿜어진다. 내 몸을 지키는 딱딱한 얼음결정들은 마치 프리즘처럼 빛을 사방으로 난반사한다.
차오르는 힘을 느낀다. 당장이라도 폭주할 것 같지만, 혀를 피나게 씹으며 정신 차린다.
"용용이는 나가 있어."
-키야악?
나는 용용이를 다른 곳으로 숨겨둔다.
혹여 뱀파이어와의 전투에서 죽으면 마음이 아프므로.
【드래곤 윙즈 lv3.】
직접 드래곤 윙즈를 쓰고 날아오른다.
저 멀리 흙먼지가 일어나는 곳으로 향한다.
‘저기군.’
-lv64 진혈왕자 발데마르 폰 체페슈.
그리고 곧이어 발견한다.
무려 레벨 64의 괴물.
악의 교단 제5군단장이자 거악인 탐욕왕 엘드리치가 레벨 65였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저 강함을 느낄 수 있다.
각오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