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진혈왕자 (3)
황야의 엘프 부족.
촌장 ‘마르단’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비록 지금 그는 꼬부랑 할아버지지만, 마을 자경단원이자, 과거 최정예 레인저 대원으로서 전력을 다해 정령 화살을 날렸거늘.
상대 뱀파이어는 단 하나의 상처도 나지 않았으니까.
“커흑······.”
“끄아악! 내 다리. 내 다리!”
“······.”
반면, 아군들은 검붉은 장벽이 들이닥칠 때마다 떼죽음을 당했다.
‘고위급 뱀파이어는, 격이 다르다는 말을 들었어도,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희망이 없었다. 지금 엘프들로선 적에게 어떤 피해도 줄 수 없으니.
간신히 적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도 아군이 뛰어나서가 아닌,
저 철혈의 뱀파이어 머스트롬이라는 자는 후방에 아무도 넘어가지 못하는 걸 우선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오직 죽음을 기다리며, 자신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
마음이 꺾일 수밖에 없다.
‘만약 여기서 우리가 다 죽으면, 피난촌에 대피한 사람들도 전멸하겠지······.’
마음이 무겁다.
그는 이미 뱀파이어로부터 자식들을 모두 잃은 노년 부부. 비전투인원인 아내만 두고 나왔으니까.
앞으로 수십 년간 외로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알기에. 암울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르단님! 정신 차리십시오! 어서 피하세요!”
“!”
그렇게 상념에 빠졌을 때, 저 멀리서 거대한 철벽이 몰려온다.
철혈의 장막.
지금 마을에 쳐들어온 마초적인 뱀파이어가 사용하는 권능이다. 검붉은 장벽 같은 장막이 공간을 밀어버리며 들이닥친다.
‘······피하기 늦었다!’
아차,
싶었다.
계속된 전투로 나이든 육체가 고단한 데다가, 다친 동료들을 후송하며 계속 움직였기에 정신이 흐트러진 결과다.
애초에 마음이 꺾였으므로. 언젠가 벌어질 일이 일어난 것이다.
쿠과과광!
흙먼지가 일대를 집어삼킨다.
찰나의 순간, 마르단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정통으로 적의 권능에 직격당한다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으므로.
팔다리만 잃어서 전투 불능이 되면 젊은 대원들에게 민폐가 될 수 있으므로.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촤아아악!
“?!”
그때 이변이 일어난다.
황야를 개간하고 심은 수많은 엘프 목. 그 나무들에서 막대한 양의 물이 자신 앞에 모여들고 있으니까.
그리고 모여든 물은 저 고위급 뱀파이어에 버금갈 만큼 거대한 장벽으로 변하는 것이다.
콰아아아앙!
막대한 충돌이 벌어진다.
거대한 장벽과 장벽이 서로를 밀어낸다.
물론 저 철혈의 장막은 흑마법 중에서도 특히 파괴적이라는 혈마법. 막대한 피를 요구하는 대신, 일반 4대 속성 마법보다 한 단계 더 위의 파괴력이었다.
촤악.
“······!”
그러나 물의 장벽은 분명 버텨냈다.
물이 출렁이고 다소 흔들리며, 몇 걸음 물러났을지라도 철혈의 장벽이 진격하는걸 막아낸다.
이곳에 있는 수십 명의 엘프 대원이 모두 달려들었어도 불가능했던 성과다.
‘도대체 누가?’
촌장 마르단은 마법을 사용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린다.
······혹시 전설적인 영웅이신 궁왕 엘레노아께서 왕림이라도 하신 걸까?
하지만 궁왕 엘레노아께선 대륙 제일의 궁수일 뿐, 마법사는 아니셨을 텐데?
-키야아악-!!
그때 보인 건 황금빛 비늘이 번뜩이는 거대한 샌드 드레이크였다.
무너진 숲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샌드 드레이크의 포효.
헉, 공포에 질린다.
드레이크. 이는 용족의 피가 섞였다는 아룡족이었으므로. 드래곤을 두려워하는 엘프로선 그 드레이크의 피어에 본능적으로 두려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용용아. 더 빨리.”
그러나 샌드 드레이크 목에 안장을 차고 타있는 인간을 발견하고 이성이 다소 돌아왔다.
인간.
본래 불편한 존재지만 그들 또한 뱀파이어에게 습격당하는 피해자이므로.
본능적으로 두렵긴 해도, 아군이라는 걸 직감한다.
“물어.”
콰아아아아!
실제로 그가 몰고 있는 샌드 드레이크는 철혈의 뱀파이어에게 용의 숨결을 작렬한다.
일대를 움푹 파이게 만드는 극독.
산불처럼 숲을 붉게 물들이는 철혈의 장막을 잠재운다.
급한 불을 끈다.
***
치이이익······.
황야의 부족 엘프 숲에 흙이 타들어가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상처를 입은 엘프들도, 두 눈 질끈 감던 레인저들도, 철혈의 뱀파이어 머스트롬도 모두 날 바라본다.
새로운 강자의 출현.
진혈의 뱀파이어가 엘프들을 학살하는 판에서 기존 틀을 깰 법한 강자가 느닷없이 출몰했으니까.
내가 도대체 누구인지,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 궁금해할 터다.
“당신은······?”
엘프 레인저 부대원은 황급히 물러나며 날 돌아본다.
방금 내가 용용이를 부려서 머스트롬을 덮쳤기에, 철혈의 장막을 급히 방어용으로 써서 살아남았으니까.
본능적으로 아군이란 걸 직감한 거다.
“나는 궁왕 엘레노아가 보낸 지원군이다.”
“!!”
나는 아까처럼 엘레노아가 선물한 나무패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궁왕 엘레노아라는 말에 크게 반색하는 눈치. 이 나무패를 생각보다 요긴하게 써먹는다.
“움직일 수 있는가?”
“······예.”
“물러나라. 너희가 상대할 수 있는 적수가 아니다.”
그제야 번뜩 정신 차리고 물러난다. 부상병을 부축하고 치료하러 간다. 남아 있어봐야 자신들이 방해만 된다는 걸 눈치챈 거다.
“······인간? 큭큭, 꽤나 희귀한 핏덩이를 타고 왔군.”
다만 철혈의 뱀파이어 머스트롬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게걸스럽게 웃었다.
샌드 드레이크.
평소 맛보지 않았던 피를 경험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다. 저들에게 피는 곧 식사. 희귀한 피는 미식이었으니까.
“오늘은 참 운도 좋군. 하이 엘프는 물론, 용의 피가 섞였다는 아룡 샌드 드레이크까지 발견하다니. 그 피에서 드래곤의 피를 추출할 수 있는지 실험해봐야겠어.”
그러면서 멋대로 용용이를 보면서 입맛을 다진다. 마치 이미 잡아놓은 고기라는 듯.
‘아직 내가 누구인지는 모르는 모양이군.’
쿵, 쾅, 쿵, 쾅.
-블루번, 드래곤 블러드를 동시에 사용한 페널티로 앞으로 24일간 최대 마나가 50% 감소합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우스울 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몸 상태가 나빠서 최대 마나가 감소했어도, 결국 드래곤 하트는 드래곤 하트.
무한한 마나는 반으로 줄어도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미 순혈의 뱀파이어 릴리스와 노스페라를 피 말려 죽인 적 있으니까.
‘역시 하이 엘프를 찾아낸 건가?’
다만 상대의 대화를 듣고 상황을 유추한다.
하기야 진혈의 뱀파이어나 되는 거물이 이곳에 길을 막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으므로.
‘······잠깐. 이 녀석이 길을 막고 있다면, 하이 엘프를 찾는 쪽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지? ······설마?’
아마 자존심이 고고한 진혈의 뱀파이어라면 최소 동급인 진혈의 뱀파이어가 찾고 있을 것이다.
비록 피난촌이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만든 작품이라는 건 알지만.
아무리 그의 결계라도 마계의 대악마 바로 다음 가는 서열인 진혈의 뱀파이어라면 능히 뚫어낼 수 있으므로.
더구나 마침 떠오르는 자도 있었다.
“철혈의 뱀파이어 머스트롬.”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상대 이름을 고한다.
아직 밝히지도 않았음에도 내가 이명과 이름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눈썹이 꿈틀하는 머스트롬.
“너 따위는 내 상대가 아니다. 네 ‘주군’은 어디에 있느냐.”
“······!”
나는 강압적으로 묻는다.
물론 이는 반쯤 허세였다.
아무리 6써클에 오른 나라도 페널티까지 있는 상태에서 마계의 대악마 다음 가는 서열인 진혈의 뱀파이어를 쉬이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단지 ‘진혈왕자 발데마르’.
혈마왕 블라디미르 바로 다음 가는 서열의 그 괴물이 지금 이 참극에 직접 관여하는지 떠볼 뿐이다.
“허 참나, 설마 너 혼자 날 상대한다는 말이냐? 네가 무슨 마신 문두스라도 되느냐?”
“······.”
쿠고오오오!
그러자 어이없다는 듯 제법 분노하는 머스트룸. 드래곤 피어에 버금가는 살기를 뿜어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혈의 뱀파이어.
이들은 고고하기로 유명한 밤의 귀족 뱀파이어에서도, 최상급 귀족. 혈마왕 블라디미르와 직계 혈통이라는 데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자들이거늘.
인간 따위 수백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코웃음 칠 판인데 혼자서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진혈왕자 발데마르는 뱀파이어 종족 모두에게 존경받는 왕족이니까.
“오만의 대가는 죽음뿐이다. 그분께서 하시는 대업을 방해할 생각 따위 꿈에도 꾸지 마라.”
쿠고고고!
머스트롬은 자신의 권능인 ‘철혈의 장막’을 전력으로 휘두른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혈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나 또한 소름이 끼친다.
‘······진혈왕자 발데마르가 온 게 확실하군.’
물론 다른 이유로.
진혈왕자 발데마르.
혈마왕 블라디미르의 장남이자, 뱀파이어 일족의 차기 후계자인 그는 혈마왕의 권능을 이어받은 유일한 진혈 뱀파이어.
그는 가히 ‘작은 혈마왕’이라고 부를 만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화한 순례자의 십자가를 지금 썼으면 큰일 날 뻔했어······.’
[이름 : 정화한 순례자의 십자가. (ANCIENT).]
[설명 : 고대 프레야 교도를 위해 순교한 성인의 힘이 담긴 십자가. 과거 사악한 힘에 오염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깨끗이 정화된 상태다.]
[특수 스킬 ‘성역 선포’ : 지정한 곳에 있는 모든 피를 신성력으로 전환한다. (쿨타임 : 24시간.)]
나는 품속에 있던 순례자의 십자가를 도로 집어넣는다.
성역 선포.
순례자의 십자가가 뱀파이어 종족을 하드 카운터하는 권능.
순혈의 뱀파이어 릴리스와 노스페라로부터 수많은 에니스 백작령 주민을 지켜준 힘이 깃들어있지만.
그러나 이는 딱 한 곳만이 발동 가능하므로.
진혈왕자 발데마르와의 결전까지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확실히. 오만의 댓가는 죽음뿐이긴 하지.”
-경고! 무리한 마나 사용으로 심장에 무리가 갑니다!
막대한 마나를 일으킨다.
순례자의 십자가 없이도 철혈의 뱀파이어 머스트롬을 상대해야 하므로.
“미안하지만, 나는 철 따위가 아니라 아다만티움조차 뚫어냈다.”
“!!”
【기간테스의 힘 lv2.】
지이이잉-!!
화이트홀을 연다. 공간이 쩍 갈라지고 고대 거인의 주먹이 튀어나온다. 처음부터 최강의 일격을 준비한다.
절대반지 기간테스의 힘.
이 힘은 탐욕왕 엘드리치가 탑승하고 있던 아다만티움 골리앗조차 힘으로 부숴버렸으므로.
상대가 대악마에 버금가는 진혈의 뱀파이어라고 하지만, 나는 대악마보다도 강력한 거악을 무려 세 번이나 물리친 자였으니까.
‘최대한 빨리 뚫어내야 한다. 안 그러면 하이 엘프가 위험하다!’
물러서지 않고 속전속결로 처리한다.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내지른다.
***
한편, 황야의 부족 피난처.
어린 엘프 ‘엘라힘’은 동굴 내부를 살핀다.
이곳은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직접 설치해줬다는 마법 결계가 있는 곳이라지만,
실상은 내부가 텅 빈 동굴일 뿐이므로.
이곳에 모인 어른들의 눈치를 살핀다.
“······어른 분위기가 아까보다 더 심각해진 눈치네.”
지금 어른들은 안색이 창백해진 체 고함치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사태가 심각하다는 건 직감할 수 있었다.
타다다다.
그때 저 멀리서 한 여인이 달려온다.
어린 엘프 엘라힘도 낯이 익은 중년 여인이다.
“여러분! 모두 들으십시오! 지금 뱀파이어가 이쪽으로 오고 있답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이곳을 버리고 대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마을 자경단 복장을 한 중년 여인은 피묻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달려와서 고함쳤다.
그 말에 크게 웅성거리는 사람들.
이에 엘라힘도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 엄마? 옷이 왜 그래! 설마 크게 다쳤어?”
엘라힘의 어머니 ‘엘라임’.
그녀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달려왔으니까.
“사랑하는 우리 딸. 다행히 아직 무사했구나.”
“엄마 다쳤냐니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란다. 어서 대피해야 해!”
“!”
엘라임은 평소와 달리 강압적으로 말했다.
그제야 사색이 되는 엘라힘. 겨우 엄마의 피가 아니라 동료의 피라는 것만 확인한다.
지금 보통 사태가 아니란 걸 직감한다.
“엘라힘, 가라드! 너희도 와서 도와라. 지금 몸 불편하신 어르신께서 많으시니까!”
“응!”
“······예!”
엘라임의 다급한 고함에 엘라힘과 가라드 또한 무거운 짐을 나른다.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부축해서 대피실을 빠져나간다.
“윽. 왜 이렇게 무거워?”
“어르신들! 천천히! 다음 동굴로 이동하실 게요!”
물론 대피 속도는 느렸다.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식량 포대도 많았고,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기준으로 움직여야 했으니까.
그렇게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일 때,
꿍······!
“?”
저 멀리서 땅이 뒤흔들리는 진동이 전해진다. 지팡이를 의지하며 걸어가시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일제히 넘어지신다.
모두의 시선이 진동이 전해진 쪽으로 향한다.
“다들 짐을 버리고 움직이세요! 결계가 완전히 깨지기 전에 대피해야 합니다!”
이에 엘라임은 사색이 돼서 고함쳤다.
엘라힘은 난생처음 보았다. 제 엄마가 저토록 목청 터져라 고함치는 모습은.
그 모습에 무거운 말린 과일 포대를 버리고 막 뛰어나가려는 데,
콰앙! 와장창창!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이 완전히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숲 공간을 깨부수고 들어온 정체불명의 사내.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그자가 참으로 귀찮은 걸 만들어놨군.”
“!”
그곳에서 저벅저벅 들어온 건 정체불명의 젊어 보이는 사내였다.
머리가 검붉고, 피부는 좀비마냥 푸른색이었으며, 어딘가 태만하고, 무료해보인다. 시시껄렁해 보이는 인상이다.
······머리에 최상급 마족의 상징인 커다란 수소의 뿔이 박힌 것만 제외하면.
“그래도 혈청이 이쪽으로 향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거 같네.”
그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는다.
마치 쓸만한 가축을 발견한 도살자 같은 미소.
고오오오오!
그는 양손을 모아 앞으로 뻗는다. 그러자 사방에서 모이는 붉은 피. 너무나 새빨간 피가 허공에서 보글보글 튀어나온다.
신비로웠다. 너무나 영롱하여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 뭐해. 멍청아! 빨리 엎드려!”
“가라드?”
그때, 소꿉친구 가라드가 엘라힘을 자빠뜨렸다. 흙바닥에 턱부터 찧어 굉장히 아팠다. 무릎도 아파 자연스레 손이 가면서 버럭 화를 내려고 할 때,
쿠과아아아아-!!!
머리 위로 새빨간 광선이 스쳐 지나간다. 마치 1,000년 묵은 엘프목이 화살처럼 날아가면 이렇게 될까? 붉은 기둥이 스쳐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꼬부랑 할아버지할머니였던 새까만 잿가루를 제외하면.
죽음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경기를 일으키며 달아나는 주민들. 몸이 불편한 노인도 다리 불편한 줄 모르고 달린다.
“······! 진혈의 뱀파이어. 여긴 네가 흡혈할 곳이 아니다!”
“!”
쐐애애액!
그런 상황에서, 등 뒤에서 엘라임이 고함친다.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서 강풍을 만든다. 활시위에 담에서 날린다.
‘······맞아! 여긴 우리 엄마가 있었지!’
엘라힘은 제 엄마인 엘라임을 바라본다.
그녀가 아는 한, 마을에서 제 엄마보다 강한 존재는 없었으므로. 저 뱀파이어에게 부상당할 수야 있겠지만 필히 복수해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것이다.
콰앙! 팅······.
“어?”
그러나 그런 바람도 잠시.
그토록 강력해보였던 엘라임의 강풍 화살이 뱀파이어의 붉은 비눗방울에 쉬이 튕겨져 나간다.
아까 뱀파이어가 보인 일격에 비해 너무나 초라했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닫는다.
“어리석은 것. 하여간 엘프놈들은 멍청한 건지, 아니면 독한 건지. 안 될 걸 알면서도 달려든다니까.”
쿠과광!
뱀파이어는 쯧 혀를 차며 가볍게 한 손을 뻗는다. 그러자 강력한 폭발이 일어난다.
“······컥?”
한평생 최강인 줄만 알았던 엄마인데.
너무나 힘없이 당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엄마!”
“에, 엘라힘······. 어서 도망쳐······. 어서······.”
피투성이가 된 엄마가 읊조린다. 장기가 새어나오는 걸 손으로 겨우 막는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모습. 공황상태에 빠진다.
“하, 하지만 엄마가······.”
“멍, 청아! 엄마 말 들어······!!”
“!”
엄마가 버럭 화를 낸다. 정신이 번뜩 든다.
“오호? 혈청이 갑자기 반응하는군. 설마 저 아이가?”
“!”
그러거나 말거나 뱀파이어는 고개를 돌려 이번엔 엘라힘을 바라본다. 어린 엘프를 보며 입꼬리 찢어지게 마귀처럼 웃는다.
“찾았다. 녹색 눈의 엘프. 네가 하이엘프였구나.”
“?!”
뱀파이어는 정체불명의 말을 내뱉는다.
······하이엘프?
수백 년 전, 멸족했다는 엘프? 그게 나라고?
엘라힘은 혼란스러웠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엄마와 아빠는 둘 다 녹색 눈이 아닌, 평범한 엘프였으므로.
가끔 농담 삼아 나무 밑에서 주워왔다고 듣긴 했는데, 설마?
‘······아, 아니지. 지금은 복수를 해야, 아니, 엄마를 구해야······. 헉?’
보글보글.
잡생각이 많은 건지, 몸이 얼어버린 건지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검붉은 비눗방울이 엘라힘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속절없이 끌려간다.
엄마를 날려버린 젊은 뱀파이어한테로.
“저기! 진혈의 뱀파이어가 쳐들어왔다!”
“막아라! 마을 주민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
“!”
저 멀리서 엄마의 동료들이 마을 자경단이 다섯 명이나 달려왔다.
물론 뱀파이어는 지겹다는 듯 혀를 찼다.
“쯧, 귀찮게.”
쿠과과광!
소름이 돋았다.
뱀파이어가 손가락을 튕긴 것만으로도 엄마와 같은 복장을 한 레인저들이 사정없이 바닥을 굴렀으므로.
“안, 돼······.”
저 멀리서 엄마가 바닥에 쓰러져서 울고 있다. 그 슬픔에 전염돼서 저도 모르게 엘라힘 또한 울음이 나왔다.
“왜, 도대체 왜······?”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이 뱀파이어가 왜 이토록 학살하는지. 보통 뱀파이어는 흡혈하기 위해 상대를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이 뱀파이어는 그러려고 하는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피식 웃는 뱀파이어.
“영광인 줄 알 거라. 꼬맹아. 넌 선택받았단다. 하찮은 엘프 주제에 위대하신 혈마왕 폐하의 영생 재료로 간택 받은 거야.”
“?!”
혈마왕? 영생?
그딴 건 전혀 관심 없었다. 그저 현재 상황이 공포스러울 뿐.
“누가 엄마 좀······. 우리 엄마 좀 구해주세요. 제발!”
쾅쾅.
엘라힘은 비눗방울 밖에서 죽어가는 제 엄마에게 소리친다. 지금 사람들은 도망가고 대피하느라 정신없어서 엄마를 두고 가고 있으므로.
그러나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붉은 비눗방울을 두드려봐도 소용없다.
그저 무력하게.
눈앞에서 엄마가 죽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고오오오오······!!
전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 건 그 무렵이었다.
촤악!
“!?”
그때 엄마의 몸에 푸른 비눗방울 같은 실드가 펼쳐진다. 워터 실드. 4대 속성 마법 중 하나인 물 속성 마법이다.
엘라힘은 깜짝 놀라서 뱀파이어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 뱀파이어가 벌인 짓은 아닌 듯 했다. 그 또한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므로.
“너는.”
뱀파이어는 엄마의 뒤편을 노려본다. 붉은 눈을 번뜩인다.
자연스레 엘라힘 또한 그 시선을 따라 엄마의 뒤편을 바라본다.
쐐애애애액-!!!
그곳에서는 무언가 날아왔다.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골바람 소리.
아까 엄마가 발사했던 화살처럼 강풍이 담긴 화살이었다.
쿠과과과광-!!!
그러나 그 위력과 굉음은 차원이 달랐다.
방금 힘없이 막힌 엄마의 화살과 달리, 지금 화살은 핏빛 보호막을 뚫고 가볍게 뱀파이어의 심장을 날려버렸으므로.
마치 태풍처럼.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화살이 되어 강타한 것이다.
투두두두.
그곳에서 달려온 건 한 엘프 군대였다.
금발 머리에 화려한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
늠름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는 어린 엘프 엘라힘도, 엘프 모두가 아는 인물이었다.
"저, 저건! 미노타우로스의 뿔로 만든 각궁이다! 그렇다면?"
"우와아아! 궁왕 엘레노아께서 우릴 구하러 오셨다!"
궁왕 엘레노아.
아르카나 대륙에 단 4명 밖에 없는 사왕 중 하나.
그중에서도 대륙 남서부를 지키고 있으며, 현재 엘프 부족 연합의 임시 수장을 맡고 있는자.
엘프 부족에겐 전설적인 영웅으로서, 홀로 뱀파이어들을 격퇴하는 자.
그녀가 친히 나타났으니까. 살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심장이 꿰뚫린 뱀파이어 또한 믿기지 않는지 피를 토하며 중얼거린다.
“궁왕, 엘레노아······? 네가 어떻게? 분명, 고대용의 사원에 들어간지 며칠 안 됐을 텐데?”
"······."
상대는 잠시 침묵한다.
그저 냉혹하게 눈으로 뱀파이어를 노려보며 다음 화살을 장전한다.
"곧 죽을 흡혈귀가 궁금한 것도 많구나."
그녀는 입술을 지긋이 깨문다. 지금 이 곳에는 이미 죽어버린 피해자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 또한 분노하여 힘을 담아준다.
그리고 그녀가 활시위에 손을 뗀 순간,
쿠과과과광-!!!
다시 한번 태풍이 일어난다.
함성이 터져 나온다.
엘프들의 영웅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