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 (2)
나는 황야에 숨어서 지상을 내려다본다.
오랫동안 뱀파이어들에게 포위된 에니스 백작령.
그 주위는 이미 황폐해지고 동물 사체가 굴러다닌 지 오래됐지만.
그 죽음의 땅을 향해 힘차게 달려오는 마차 무리가 있다.
성기사단과 순례자들.
오직 신앙심 하나로 먼 길을 달려온 사제들이다.
‘이대로라면 아마 저들 중 태반이 죽겠지.’
-lv50 거대 트롤 (혈마법 강화.)
하지만 나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상황을 둘러 본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거대 트롤.
일반 트롤만 해도 한 숲의 지배자로서 홀로 순례자 무리와 맞먹거늘. 강화까지 된 것이다.
‘······더구나 에니스 백작령에는 아마 흑마법 결계가 펼쳐져 있었지.’
고오오.
더구나 악재는 또 있다.
환영의 권역.
환영의 뱀파이어 릴리스가 수년간 시전한 결계 마법이다.
에니스 백작령 일대에 발 딛는 순간, 끔찍한 환영과 공포심에 집어 삼켜지는 흑마법.
휘이이잉, 고고고고!
실제로 저 멀리서 거친 모래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환영과 세뇌의 뱀파이어 릴리스.
그녀의 환영 혈마법이 시작하려는 전조다.
'하지만 저들을 구해야 내가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에게 마음의 빚을 지울 수 있다.'
다만 나는 그럼에도 물러설 생각은 없다.
순례자의 십자가.
그 고대 성물을 정화하기 위해선 성녀 에클레시아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차후 순혈의 뱀파이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저들을 구해야 한다.
더구나 나는 저 환술을 어떻게 파훼해야 하는 지 안다.
‘‘마력석’. 땅 속에 숨어져 있는 흑마법 장치를 깨뜨려야 한다.’
마력석.
환영의 흑마법을 유지하는 핵심 장치다. 그것들을 모두 파괴하면 모든 환영이 사라진다.
다만 지금까지 그게 가능했던 사제는 없었다.
불어닥치는 모래 폭풍과 끔찍한 비명 메아리, 그리고 황야의 지배자 트롤까지 들이닥치는데,
어떻게 마력석까지 찾아내서 파괴하겠는가?
'물론 나는 사제가 아니지.'
쐐애액!
나는 피식 웃으며 용용이를 몬다.
【드래곤 아이 lv2.】
-lv??? 환영의 권역 마력석. (은신.)
먼지에 둘러쌓일듯 초저공 비행하면서 곧장 마력석을 찾아낸다.
드래곤 아이.
이는 질서의 수호자이자 만물의 영장인 용족의 힘이 담긴 권능.
이미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의 데빌 아이를 견뎌 보인 적 있는 눈이다.
드래곤 피어가 담긴 이 눈이 거악급 대악마도 아닌, 마족에게 공포에 질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므로.
【워터 소드 lv4.】
촤아악, 콰아앙!
곧장 마력석들을 파괴하며 용용이를 타고 쾌속 질주한다.
순례자들을 구하러 간다.
***
30분 전, 순례자 무리.
지원군 대표 '보나파르' 주교는 마차를 멈춰 세우고 마지막 정렬을 시작했다.
환영의 권역.
예니스 백작령에 가기 위해선 뱀파이어의 환술 권역을 돌파해야 했으니까.
최후의 점검을 하는 것이다.
“······많이 드십시오. 지금 이 식사가 마지막이 될 수 있으니.”
그 때문에 보나파르 주교는 그동안 아끼던 구호물자를 한껏 풀었다.
물론 마음 편히 먹는 자는 없었다. 식사 시간 동안 대화가 한 마디도 없었다.
‘하기야 최근 환영의 권역이 매우 짙어졌다고 하지······.’
보나파르 주교 또한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근 에나스 백작령으로 향했던 순례자들이 떼죽음 당했다는 걸 그도 익히 들었으니까.
그러나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가지 않으면 보급이 떨어진 에나스 백작령이 허물어질 게 분명하기 때문에.
선과 질서를 추구하는 프레야 사제로서,
평생 믿어온 거룩한 가치와 먼저 용기를 낸 선배를 지켜내기 위해 반드시 가야 했다.
‘더구나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님께 ‘또다시’ 버려지는 기억을 남겨드릴 수 없다······. 그분은 내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이니까.’
보나파르 주교는 눈을 감는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다들 축제 준비를 하느라 방심했을 때, 순혈의 뱀파이어가 쳐들어온 적 있었다.
에니스 백작령의 첫 비극.
그날 대화재가 발생하고, 아비규환이 되었기에 누구도 알지 못했다.
두 다리가 없어서 환자를 대피시키지 못하는 수녀가 불타는 성당에 남아있었다는 걸.
모두가 제 살기 위해서 달아났을 때, 홀로 전염병 환자들과 함께 불길 속에 남아있었다는 걸.
비록 기적적으로 폭우가 쏟아져 살아남았기에, 다들 여신의 축복이라며 칭송했지만.
‘······그날 이후, 아직도 불타 죽는 악몽을 꾸신다고 하셨지.’
보나파르 주교는 알고 있다.
당사자인 에클레시아는 끔찍했다며 그때 일을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아 했다.
현재 대륙 7대 성인으로 각성한 이후로도 말이다.
‘그때 성녀님께 치료받았던 나병 환자가 나니까.’
젊을 적, 보나파르 주교가 프레야 교단의 큰 사랑을 받았던 일.
그날 받았던 은혜와 가르침은 오늘날 보나파르 주교를 형성한 가치관이었다.
설혹 자신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를 움직이는 것이다.
“너무 두려하지 마십시오. 이미 대륙 곳곳이 평화를 되찾고 있습니다. 곧 교단 본부에서도 대륙 남서부에 지원을 집중할 것입니다!"
보나파르 주교는 최대한 밝게 말했다.
그제야 사제들은 주먹을 꼭 쥐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우리는 프레야 여신님의 교리에 따라 악을 물리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사제인 우리가 두려워한다는 건, 영지민분들은 더욱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순례자들은 합장하며 기도했다.
오직 신앙심 하나를 위해 대륙 남서부까지 온 자들.
신앙심과 헌신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자, 다들 일어납시다! 모두 마차에 신성력을 두르십시오! 단번에 돌파합니다!”
“알겠습니다!”
사기를 되찾은 순례자와 성기사단은 모두 자리에 벌떡 일어나서 출발한다.
두려워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노라고 결의를 다지면서.
비장한 각오를 되새긴다.
그리고 그때,
휘이이이잉-!!!
쿠고오오-!!
저 멀리서 황야의 모래 폭풍이 불어 닥친다.
모두 자세를 낮추며 양팔로 얼굴을 가린다.
“큿······?”
“콜록, 꺄악······?”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속도.
정오의 쨍쨍하던 태양 빛을 가려 보이는 먼지 폭풍이다. 숨을 참는다. 켁켁, 호흡을 다진다.
샤아아.
보나파르 주교는 신성 보호막을 펼친다. 모두를 보호한다.
그렇게 버티던 도중, 모래 폭풍이 멎은 듯하여, 보호막을 푼다.
그 순간,
“······!!”
모두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푸른 하늘이 몽환적인 분홍빛으로 변했으니까.
분명 정오였음에도 불구하고 달이 떠있다. 마계의 달이라는 피처럼 붉은 달.
더구나 아까까지만 해도 듬성듬성 나무가 있는 초원과 황야였거늘.
지금 보이는 건 난생처음 보는 키 큰 나무가 빼곡하게 솟아 있어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어둠의 숲 내부였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환영의 권역? 벌써 환영에 걸렸다고?”
프레야 사제들은 경악했다.
설마 마차에 전부 신성력을 둘렀거늘, 이토록 빨리 환영에 사로잡히다니.
언젠가 걸릴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빠른 속도였다.
순혈의 뱀파이어.
마계에서도 상위 계급이라는 마족들과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낀다.
[깔깔깔~.]
[키득키득~.]
잔뜩 긴장한 프레야 사제들을 비웃듯 환영의 숲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귓가에 대고 웃듯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는 목소리.
메아리쳐서 몇 번이나 울린다. 찬 바람을 타고 와서인지 피부가 오싹하다.
“괘, 괜찮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긴 했지만, 우리 이 정도는 각오했지 않습니까! 결국, 환영은 가짜. 두려움만 이겨내면 됩니다!”
“······.”
보나파르 주교는 주위 동료들을 격려했다. 자신도 두려웠지만, 두려움은 전염되므로.
더구나 그는 이들의 대표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어린 사제들 앞에서 체면을 잃을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마음 잡으며 버틴다.
‘······환술은 마력이 많이 소모된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 없을 거다.’
눈앞으로 식은땀이 굴러 떨어진다. 머리를 최대한 차갑게 식힌다. 스스로에게 억지로 속삭인다.
적들이 자신들을 바로 죽이지 않고 굳이 환술을 쓰는 건 그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다시 한번 모두를 격려하려할 때,
“······꺄악?”
“펜네 수녀님?!”
갑자기 한 수녀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두 놀라 펜네 수녀 쪽을 돌아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습. 땅에 지옥의 문 같은 홀만 남았을 뿐이다.
쐐애액!
곧 완전무장하던 성기사도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빨려 들어간다.
으아아아아, 점점 멀어지는 우렁찬 비명이 실시간으로 들린다.
다들 두려움을 가지고 밑바닥을 경계하지만, 속절없이 빨려들어 간다.
“오, 이런······!”
그리고 몇 분도 되지 않아 모두 빨려 들어갔다.
검은 어둠의 숲에 남은 사람은 오직 한 명.
보나파르 주교 하나뿐이었다.
홀로 남으니 더욱 차오르는 두려움. 허례허식이 사라진다. 끝없이 넓은 어둠의 숲을 혼자 가야 한다는 상상이 물씬 든다.
이미 동료를 잃었다는 생각에 큰 벌을 받으리란 죄책감이 드리운다.
목소리를 쥐어짠다.
“거기······. 누구 없습니까······? 펜네 수녀님······? 하이너 성기사단님······! 들리면 대답하십시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쏴아아아아, 비가 오기 시작한다. 추위 때문에 하얀 입김이 분다.
몸이 참을 수 없게 떨리기 시작한다.
“흐, 흐아아아악?”
“······하이너 성기사단장님?”
그때, 어둠의 숲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하이너 성기사단장.
이번 순례자의 행렬에서 가장 강한 성기사로, 개인적으로 보나파르 주교가 가장 믿는 사내였다.
아직 남아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과연 하이너 성기사단장인가?
불길하면서도 들뜬 마음을 가지고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격한다.
꽈득, 꽈드득.
“······.”
숲의 지배자 트롤이 하이너 단장을 다리부터 으적으적 씹어먹고 있는 장면을.
일반 트롤보다도 덩치가 두 배는 큰 분홍색 트롤이 씹다 남은 투구를 퉤 뱉는 모습을 말이다.
쿵, 쿵, 쿵, 쿵.
심지어 그 분홍빛 트롤이 끝도 아니었다. 저 멀리서 큰 진동과 함께 또 다른 트롤들이 모이고 있었으니까.
숲이 나무로 빽빽하고 어두워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두 세 마리는 아니었다.
땡강.
보나파르 주교는 힘이 빠진다. 다시 들린다. 힘줬던 눈썹이 풀리고, 손가락이 스르륵 펴진다.
자기도 모르게 메이스를 떨어뜨린다.
최강이라는 하이너 성기사단장조차 아무 생채기 없이 잡아먹는 분홍빛 트롤.
그런 트롤이 몇 마리나 쌓여있는 상황.
감히 늙은 자신이 전장을 변화시킬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마음 깊은 곳의 전의가 꺾이는 것이다.
‘······분명, 트롤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분명 보고에 따르면 이곳에 거주하는 몬스터는 극소수. 대부분 뱀파이어에게 피 뽑혀 죽었다고 들었다.
더구나 에니스 백작령으로 가는 성기사단은 나름 교단내에서도 정예. 트롤 한 마리가 나타나도 능히 버틸 수 있는 전력이었음에도.
완전히 갈기갈기 찢긴 것이다.
[깔깔깔~.]
[키득키득~.]
귓가에 아까 들린 기괴한 웃음소리가 다시 들린다. 책임자인 자신을 비웃는 듯한 메아리.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을 다 죽일 힘이 있음에도, 이런 환술을 쓰고 있다고.
단지 무료함에 자신들을 가지고 노려고 이런 환술을 쓰는 거라고 말이다.
쿵, 쿵, 쿵.
-그워어어어-!!
분홍빛 트롤이 다가온다. 눈동자마저 선홍빛은 거대 트롤. 보나파르 주교의 상체보다 큰 주먹을 들어 올린다.
‘······이번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군요······. 에클레시아 수녀님.’
죄책감에 젖어 동공이 풀린다.
광휘의 성녀 에클레시아.
그의 은인이기도 한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거늘. 이번에도 그는 그저 짐밖에 되지 않았기에.
에클레시아가 악몽을 꿀 만큼 끔찍한 상황에서도, 짐덩이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엔 에클레시아 성녀님께서 모르신다는 걸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목적지였던 에니시 백작령 근처에도 못가고 죽는 것이.
만약 백작령 바로 앞에서 죽었다면 또다시 그녀에게 큰 트라우마를 줄 뻔하지 않았는가?
-키야악!
분홍빛 하늘에서 거대한 익룡이 날아다닌다.
샌드 드레이크.
황량한 모래지대에서 산다는 전설적인 상급 대형 몬스터.
하늘의 폭군이라는 와이번조차 잡아먹는 적수가 없는 괴수다.
그 익룡이 하늘을 빙빙 돌고 있다. 마치 좀 더 분발해보라는 듯. 이대로는 재미없다는 듯 악의적으로 말이다.
‘어차피 트롤을 뚫고 피해갔어도 저 괴조에게 당해 죽었겠군.’
그러나 보나파르 주교는 마음을 접는다.
이미 승산이 없는 상황이므로. 뱀파이어들의 장난감이 되어 추하게 발악할 바엔 차라리 이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려는 것이다.
비록 누구도 장례를 치러줄 수 없는, 뱀파이어의 권역 안이라고 하더라도.
혹여 자신의 우상에게 마음 아픈 소식을 전해주지 않으리란 것에 감사한다.
그렇게 막 눈을 감았을 때,
콰아앙!
바로 눈앞에서 막대한 굉음이 들렸다.
거친 흙먼지와 함께 뜨거운 체액이 전신을 때린다. 아픔과 동시에 전해지는 따뜻한 감각. 도대체 무슨 일일까? 슬며시 눈을 떠본다.
“?!”
눈떠보니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먼저 흙바닥. 조금 전까지 압도적으로 군림했던 분홍빛 트롤이 나자빠져 있었다.
······그것도 온몸이 압도적인 중력에 터져버린 모습으로. 마치 개구리를 밟아 터트린 듯 끔찍한 몰골로 즉사했다.
-키야아아악-!!!
그리고 그러한 분홍빛 트롤을 짓밟고 있는 건 아까 봤던 샌드 드레이크였다.
그 덩치가 거대 트롤보다도 1.5배 거대한 대형 몬스터. 거의 용족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초대형 크기다.
전설상에 기록된 샌드 드레이크보다 더한 크기.
그러나 보나파르 주교가 숨을 헉 들이키고 말 한마디 못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저, 저 가면은······!!’
샌드 드레이크 등 뒤에 타 있는 빛과 어둠의 가면을 쓴 사내.
그의 인상착의와 샌드 드레이크에 대해선 익히 들었다.
아룡기사 네카르 폰 크라우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거악 중 하나, 불사왕 데힐라칸을 물리친 동부의 구원자.
······그리고 실상은 대륙 공적 취급받았던 ‘마신 문두스’라고 밝혀진 자.
그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
최근 전 대륙을 구원하고 있다는 대마법사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트롤 피를 묻으면서까지 급강하하다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다.
“유일하군.”
“······!”
그의 짙은 푸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환상이 깨진다.
분홍빛 하늘이 깨지고 푸른 하늘로 돌아온다.
마계임을 상징하는 붉은 달이 사라지고, 눈부신 프레야의 태양이 돌아온다.
울창했던 어둠의 숲이 사라지고, 나무 한 그루 없는 황야로 돌아왔다.
······비록 눈앞에 에니스 백작령 요새와 성벽 위 병사들이 보였지만.
황야에 박살 나 있는 마력석과 박쥐 떼도 보인다.
샌드 드레이크 등 뒤에 타 있던 황금빛 머리칼의 사내가 말한다.
“에니스 백작령에 끝까지 도착한 자는 네가 유일했다.”
“!!”
마신의 인정에 그제야 보나파르는 뒤를 둘러본다.
한참 뒤에는 수많은 사제와 성기사가 쓰러져 있었다.
마치 끔찍한 악몽을 이겨내며 달려 왔는 듯 고통스러운 표정.
일렬로 오듯 순서대로 누워있다. 그러나 달아난 이는 없었다.
······아무래도 극심한 공포에 정신력이 다해서 쓰러지는 모습이,
환술 속에서는 땅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으로 보인 모양이다.
-그르으······?
-그워어어-!!!
“!”
물론 아직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분홍빛 거대 트롤.
그들만은 환영이 아닌지, 무려 4마리나 이 근처로 도착했으므로.
“저, 저건······!”
“······.”
에니스 백작령 성벽 위 병사들이 삿대질한다. 이제 곧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리란 직감.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도 무려 혈마법으로 강화된 거대 트롤을 4마리나 동시에 처치할 수 없으리란 공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나파르 주교는 달아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사내. 마신 문두스라고도 불리는 대륙 제일의 대마법사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서있으므로.
“용용아.”
실제로 사내는 중저음으로 제 샌드 드레이크를 쓰다듬는다. 서슬 퍼런 목소리로 의외의 명령을 내린다.
“물어.”
후우웁, 콰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작렬하는 에시드 브레스.
귀여운 명령과 달리 물지 않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극독을 쏟아붓는다. 그 범위는 분홍빛 거대 트롤 4마리를 모두 덮어버리고도 남는다.
-그워어어······!!
고통스러워하며 녹아내리는 트롤.
보나파르는 난생 처음 보았다. 저토록 거대한 트롤이 실시간으로 녹아 없어지는 모습을.
치이이익, 고기 굽는 소리와 함께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난다. 마치 트롤이 존재했다는 것도 환상이었다는 듯.
악몽과 함께 사라진다. 함성이 터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