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순례자의 길 (4)
나는 압도적인 마나만으로 도플갱어 권능을 가진 뱀파이어를 으깨버렸다.
통제되지 않는 마나.
마스터급 특성 드래곤 하트에 ‘6써클’까지 더해지니까 그 화력이 상상을 초월했으므로.
마법을 쓸 필요도 없었다.
압도적인 마나를 해일처럼 내려찍자 최하급 뱀파이어 따위는 그 압력만으로 육체를 붕괴시켰으니.
악룡의 힘을 일부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한 자를 내 손으로 죽이다니. 기분이 좀 찝찝하군.’
-lv35 최하급 뱀파이어 키예슬. (도플갱어.)
나는 망가진 뱀파이어를 내려다본다.
저자가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납치하고 흡혈하며 살생한 마귀라는 건 알고 있어도,
눈앞에 베아트리체가 피 흘리며 죽어가는 건 기분이 묘했으니까.
빨리 흙으로 묻어버린다.
-충격적인 경험! 밤의 귀족 뱀파이어를 순수한 마나의 힘으로 살해했습니다!
-파괴본능을 활용하여 마나의 폭주를 이용했습니다.
-스킬 ‘포스 lv1’을 습득합니다!
“······.”
이후 스킬을 습득한다.
포스.
무형의 힘을 폭력적으로 다루는 마법.
파괴본능이 상승할수록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는 힘이라고 한다.
‘악룡 니드호그가 사용했던 파괴 권능. 그 중 하나다······.’
나는 그 심각성을 깨닫고 있다.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가 ‘중력 마법’으로 생명체들을 군림했다면,
악룡 니드호그는 그보다는 ‘포스 마법’으로 지상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으니.
아직 파괴본능이 50% 안팎 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도,
마계의 악마급 거물인 뱀파이어를 포스 마법 하나로 뭉개버린 파괴적인 힘을 느낀다. 넘치는 힘에 정신이 충만 된다.
‘······아니, 악룡이 되면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다. 근처에도 가면 안 돼.’
다만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운다. 포스 마법을 잊는다. 이러한 힘에 취하면 안 된다.
악룡에 다가가는 길은 결국 파멸뿐이니까.
당장의 달콤한 꿀을 위해 절벽 아래로 내려갈 이유가 없는 거다.
“네카르 경, 베일에 있던 주민분들은 어떻게 할까요?”
마침 베아트리체가 머리에 묻은 찐득한 액체를 떼어내며 내게 묻는다.
주민이 다치지 않게 끈적한 액체를 잘라내느라 검은 로브에 다소 찐득이가 묻은 모습.
명예를 아는 귀족답게 땀 흘리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내게 맡겨라."
샤아아.
나는 성물 아가타의 성배로 성수를 뿌려 몸을 회복시켜준다.
“으으······? 여긴?”
“헉······! 어둠의 숲? 그렇다면!”
“프레야 사제님께서 저흴 구해주신 겁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기운 차리고 깨어난 하나단 주민들.
물론 성수를 뿌려줬음에도 아직 파리했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는 모양이다.
뱀파이어에게 붙잡힌 후, 꼼짝 없이 죽은 줄 알았는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린다.
'딱히 이들을 위해서 온 건 아니었다만.'
나는 성인 인간보다 큰 십자가를 보며 미소를 감춘다. 아이템을 확인한다.
[이름 : 타락한 순례자의 십자가 (ANCIENT.)]
[설명 : 고대 프레야 교도를 위해 순교한 성인의 힘이 담긴 십자가. 그러나 지금은 오랜 세월로 오염되어 타락한 힘이 넘실거리는 것 같다.]
[특수 효과 : 미개방.]
* 주의! 타락한 성물을 소유하고 있으면 불행이 더욱 늘어납니다!
* 특수한 방식으로 정화해야 원래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찾던 고대 성물이 맞았다.
고대 성물 순례자의 십자가.
마나를 불어넣으면 피를 신성력으로 바꿔주기에, 뱀파이어에게 천적 같은 아이템이다.
‘비록 가장 중요한 정화 작업은 이제 겨우 시작이지만······.’
정석대로 프레야 사제들과 파티로 진입하면 뱀파이어에게 도플갱어 능력으로 난입 당해 끝없이 농락당하고,
마을 주민을 인질로 삼아 인간 방패로 삼는다는 걸 생각하면 일단 구하기는 매우 쉽게 한 것이었다.
‘혈마왕 블라디미르. 그 자를 상대하기 위해선 이걸 정화함은 물론, 다음 용의 유산까지 모아둬야 겠지.’
나는 품속의 ‘용의 뿔’을 만지작거린다.
불로장생의 비약을 개발하기 위해 수십 종의 종족들을 생체 실험하는 거악.
혼자서 수천 명의 피를 동시에 흡혈할 수 있는 뱀파이어의 왕이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아무리 파괴 본능을 최대한 자제한다고 해도, 상대할 때는 써야 한다.
특히 악의 교단 제4군단장 블라디미르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거주한지 상대적으로 매우 오래된 인물.
이전 거악들과 달리 본체의 힘을 거의 다 쓸 수 있는 괴물이니까.
“이제 돌아가지. 구할 것도 다 구한 것 같으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는 순례자의 십자가를 페어리 펜던트로 소형화하고 품에 넣는다.
미리 소형화해뒀던 말을 타고 돌아간다.
마을 주민들은 소형화해서 데려갔지만.
베아트리체는 내 등을 끌어안고 함께 간다.
‘······잠깐. 그러고 보니 하나단 마을에는 마녀 사냥이란 질 나쁜 풍습이 있었는데.’
투두두.
찬바람이 부는 밤, 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말을 몬다.
하나단 영지에 막 도착했을 때 벌어진 일을 떠올린다.
마녀 사냥.
이는 증거도 없이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악질 재판이므로.
더구나 이 먼 길 와서 고생해준 베아트리체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다.
그녀는 최고위 귀족. 공명정대한 업적을 이룰수록 평판이 오르기 마련이니까.
‘기왕 여기까지 온 거 깔끔히 처리해야 겠군.’
아무리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오래 걸리지도 않는 일인데, 마지막 작업까지 마무리하는 것이다.
***
하나단 남작령의 골목대장 ‘파르’는 이른 새벽부터 영주성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영지의 기사들에게 하소연한다.
“······아까 그 노란 머리 이방인이 뱀파이어인 게 분명하다니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살기를 어떻게 뿜어내냐고요!”
파르와 깡패들이 한 일은 간단했다.
고자질.
숨은 뱀파이어를 찾아내는 마녀사냥은 결국 정치질이 핵심이므로.
판결하는 기사와 영주만 설득하면 되기 때문이다.
파르의 부하들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속삭인다.
‘형님, 이거 맞습니까? 만약 아니기라도 하면······.’
‘시끄럽다. 그럼 그런 살기를 뿜어냈던 게 인간이겠냐? 그런 실력자가 왜 이런 황무지로 와?’
파르의 주장은 나름 타당했다.
대륙 서남부에 있는 하나단 영지는 아무런 경제적 이점이 없는 곳이다.
가끔 프레야 교단에서 순례자들이 들리는 정도의 작은 남작령.
그런 곳에 따뜻한 신성력을 가진 사제가 아니고서야 거물급 인사가 올 리가 없으니.
자신들을 공포에 젖게 했던 황금빛 머리의 사내가 뱀파이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다.
‘더구나 만약 이번 일을 이대로 넘어간다고 생각해봐라. 마을 사람들이 앞으로 우릴 두려워하겠냐?’
‘······!’
파르는 실질적인 이유로 제 부하들을 다그쳤다.
하나단 영지 깡패들은 마녀사냥을 핑계로 과부와 노인들을 죽이고, 그들이 남긴 재산을 나눠먹고 있었으므로.
만약 더 이상 하나단 영지민들이 깡패들에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살길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라마크 기사 형님! 저희가 어떤 사이입니까? 같이 염소 고기와 맥주도 나눠먹던 사이 아닙니까? 이 동생 말을 정말로 못 믿어주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다만.”
더구나 파르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하나단 영지 기사들.
그들에게 언제나 마녀사냥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을 나눠주었으므로.
사실상 결탁한 것이나 다름없는 만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엇! 저기. 노란색 머리 사내! 저 자가 아까 그 이방인입니다!”
“!”
그때, 파르의 부하 중 한 명이 성문을 향해 삿대질한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노란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나타났다.
어젯밤 뱀파이어를 죽이고 오겠다고 한 뒤, 단 하루 만에 돌아온 것이다.
“흥, 그럼 그렇지. 무슨 이방인 주제에 기사님들도 상대 못하는 뱀파이어를 무슨 수로 상대해?”
"하룻밤만에 꽁지 빠져라 달아났나보군."
투두두.
기사들 또한 별 일 아니었다고 생각이 들었기에 안도한다.
마녀 사냥으로 몰아 돈을 벌 생각에, 말을 몰고 제빨리 달려간다.
“······?”
그러나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길가에 있던 다른 주민이나 도착한 기사들이 일순 얼어붙는다.
지금 노란 머리의 이방인 사내가 들고 있는 물건은 말 그대로 충격적이었으므로.
“약속대로 ‘뱀파이어의 머리’를 잘라왔다. 이것이라면 우리가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겠는가?”
“······!”
사내는 손에 들고 있는 일그러진 머리를 척 앞으로 내민다.
······두개골이 너무 끔찍하게 박살나서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뇌수가 질질 흘렀다.
이게 진정 뱀파이어의 머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머리에 마족의 상징인 ‘작은 뿔’이 있었다.
뱀파이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마, 말도 안 되는? 이건 가짜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훼손시켜서 가져올 리가 없잖습니까!”
파르는 안색을 파리하게 띄며 기사들에게 말했다. 만약 정말로 뱀파이어가 사라진다면 그들의 일거리가 사라지므로.
“······혹시 순례자이십니까? 프레야 교단 소속 어디이신지?”
그러나 일단 기사들은 정중하게 이방인에게 신분을 묻는다.
뱀파이어를 단 하룻밤 만에 사냥할 만한 실력자.
마계의 악마와 거의 동급으로 여겨지며,
하나단 영지 기사단조차 몇 번이나 토벌에 나섰으나 전부 실패한 흡혈귀를 잡아왔으니까.
그러나 상대방의 신분은 그들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나는 북부 오르비스의 귀족 ‘베아트리체 폰 오르비스’다.”
“!!”
먼저 검은 로브를 쓴 젊은 여인이 냉랭하게 읊조린다.
인피면구를 벗는 동시에 아름다운 푸른빛 머리카락과 함께 주위 이목을 확 잡아끄는 빛이 서린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하였고, 목소리에는 차가운 분노가 서려있었으니.
‘오, 오르비스 귀족 베아트리체······? 서, 설마 북부의 패자이자, 서부 연합군의 임시 사령관 베아트리체 공작을 말하는 건가!’
그녀의 명성은 대륙 남서부 속 한량인 파르조차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품에서 내미는 신분증을 보고 숨을 헉 들이마시며 기함하는 기사들.
“······위, 위대하신 분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철컹.
믿어지지 않는지 몇 번이고 신분증을 확인하더니, 일순 한꺼번에 무릎을 꿇는다. 바닥에 철갑옷이 부딪치는 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진다.
“어······. 어······?”
눈치 없는 부하들은 영문 모를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서부 고위 귀족이나, 유명 기사도 아닌 북부 최고 패권자라니?
하나단 영지에서 가장 신분인 영주조차 감히 알현하지 못하는 신분이라는 말에 사고가 정지한 것이다.
“네놈들! 감히 오르비스 공작 저하를 알현하고도 계속 서있을 것이냐!”
“!”
하나단 기사가 호통친다.
평소에 준 뇌물이고 뭐고, 지금은 자신들의 목숨이 걸려있으므로.
그제야 겨우 풀썩 무릎을 꿇는 깡패들. 멍하니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본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
그런데 인형처럼 감정 없어 보이는 여인이 같잖다는 듯 입술을 뗀다.
그녀의 존댓말에 모두가 다시 한번 숨을 헉 들이마신다.
북부 최고 공작 베아트리체 폰 오르비스.
황제 바로 다음 가는 최고 귀족으로도 명성 높은 그녀가 존댓말을 쓴다니?
그럴만한 상대가 과연 존재는 한단 말인가?
‘······잠깐? 붉은색 마력석이 3개나 박힌 스태프는? 서, 서, 설마!’
그제야 파르는 발견한다.
베아트리체 공작과 함께 온 사내가 등에 매고 있는 붉은 눈의 스태프.
하나만 박혀도 자살테러 병기라는 붉은색 마력석을 무려 3개나 박은 병기를 사용하는 대마법사.
그리고 최근 북부 오르비스에 강림하여 설인왕 이미르와 탐욕왕 엘드리치를 물리쳤다는 역대 최고의 마법사.
마신(魔神) 문두스.
사칭이 아닌 한, 이는 단 한 명밖에 없으므로.
“이곳 영주와 프레야 주교는 어디에 있지?”
젊은 사내는 의혹 어린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확실히 듣던 소문대로 이제 겨우 20대에 황금빛 머리카락, 그리고 깊은 푸른 눈을 가진 사내. 하나단 영지 기사를 노려보며 자연스레 하대한다.
“그들을 이 광장에 데려와라. 지금 당장.”
마신 문두스의 명령에 황급히 말을 모는 기사들.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은 순간 저항 따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곧이어 도착한 영주와 프레야 주교는 식은땀을 흘린다.
“오, 오르비스 공작 저하께서 이 머나먼 변방까지 무슨 일이신지······?”
월권이고 뭐고 압박감에 눈치를 살핀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우므로.
“당신들에게 묻겠다.”
젊은 사내는 무겁게 읊조린다.
“뱀파이어에게 동조하여 사람을 무고하게 죽이거나, 남은 재물을 훔치는 자들은 원래 어떻게 하지?”
“그, 그야 물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국법에 따라 처단해야 하지요! 뱀파이어와 동조한 자는 마찬가지로 화형하며, 도둑질한 자는 유가족에게 두 배로 변상하거나, 노동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프레야 교단에서도 십계명을 어긴 자는 파문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내는 기존 영지의 규율을 묻는다.
······정확히 파르가 저지른 마녀사냥을 저격하는 질문.
파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식은땀을 흘린다.
"그런가."
사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품속 네잎 클로버 모양의 펜던트를 꺼낸다.
번쩍!
그러자 강렬한 빛과 함께 작았던 생명체들이 커진다.
마을 광장을 가득 메워버릴 기세로 백 여 명의 사람이 튀어나온다.
“헉······?”
“이, 이 사람들은?!”
파르와 깡패, 기사들은 그 사람들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로 돌아왔다! 하나단 영지로 돌아왔어!”
“프레야 여신님의 구원이시다!”
“엇! 네놈 파르! 감히 우릴 뱀파이어라고 거짓 재판했겠다! 우릴 흡혈귀에게 팔아 넘겼지!”
“기사 라마크! 네놈이 묵인해줬었지? 그러고도 기사야? 명예를 아는 기사냐고!”
“······!”
마녀사냥의 피해자들.
지금까지 파르가 기사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강제로 마귀로 몰아갔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왔으니까.
“이들의 주장이 모두 일치하는 데, 이 경우 영주와 주교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군.”
“!!”
젊은 사내는 파르를 노골적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파르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베, 베아트리체 공작 저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마신 문두스이시여!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 가슴 깊이 반성합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눈치 빠른 파르와 수하들은 그제야 일이 심각해진다는 걸 눈치 채고 머리를 조아린다.
몇몇은 공포에 질려 손을 싹싹 빌거나, 머리를 쿵쿵 찍거나, 우는 놈도 있었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그만한 벌을 받아야지.”
“!!”
그러나 젊은 사내는 냉랭하게 읊조린다.
가증스러운 연기 집어치우라는 듯 명백한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한다.
"문제가 있으면 지금 말해라. 나는 너희와 달리 멋대로 재판하진 않으니까. 혹 너희는 마귀 편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