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순례자의 길 (1) (수정)
대륙 최서단.
모래성처럼 허물어진 엘도라도 외성.
나는 용용이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다.
“우와아! 마신 문두스가 돌아왔다!”
“동부와 북부의 영웅! 대륙 절반을 구해냈다!”
“그 거대한 포를 막아내다니! 정말 이명대로 마법의 신이다!”
“······.”
날 보고 환호해주는 사람들.
그러나 나는 손을 흔들어줄 힘도 없었다.
‘겨우 살아남았군······.’
탐욕왕 엘드리치가 영혼을 걸고 발포한 메가 데스.
이는 도중 저지가 불가능했으므로.
블루번과 드래곤 블러드를 무리하게 발동해서 ‘블리자드 스톰’으로 정면에서 막아서느라 마나가 완전히 고갈된 거다.
따라서 나는 그저 침묵했다.
나를 부축해주는 베아트리체의 품에 실리듯 안겼다.
그녀가 용용이를 대신 조종하면서 아주 천천히 착륙한다.
다만 꼭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경이로운 업적! 탐욕왕 엘드리치를 영혼까지 소멸시키셨습니다!
-엘드리치는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 소속으로서, 대륙 서부은 물론, 전 대륙의 검은돈을 유통하는 거악이었습니다!
-대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향후 10년 간, 아르카나 대륙이 보다 번화합니다! 대륙 서부는 크게 번영할 것입니다!
.
.
먼저 엘드리치를 처치하니 막대한 양의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불사왕 데힐라칸과 설인왕 이미르는 강력한 힘과 달리 대륙 극지방에 숨어있었지만,
탐욕왕 엘드리치는 이미 전 대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막대한 양의 보상도 추가됐다.
-새로운 마법 ‘블리자드 스톰 lv1’을 습득했습니다!
-스킬 ‘아쿠아 lv5’가 lv6이 되었습니다!
-스킬 ‘바람의 길 lv4’가 lv5가 되었습니다!
-스킬 ‘아쿠아 스톰 lv2’가 lv3가 됩니다!
.
.
-스킬 ‘중력 제어 lv2’가 lv3가 되었습니다!
-스킬 ‘드래곤 피어 lv3’가 lv4가 됩니다!
스킬들이 수없이 레벨이 오른다.
하기야 탐욕왕 엘드리치와 동시에 최종병기 라퓨타까지 폭발시켰으니까.
라퓨타 안에는 아직 흑기사와 흑마법사가 다소 남아있었으니, 낙사시켜 죽인 놈들까지 합치면 폭발적인 레벨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5써클 5티어가 막대한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6써클에 도달합니다!
-최대 화력이 지금보다 15% 증폭됩니다!
무엇보다 써클이 오른다.
6써클.
대륙 공인 대마법사라는 5써클을 넘어선 경지. 그 차이는 인류의 한계에 버금가는 것이었으니.
6써클 블리자드와 아쿠아 스파이럴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한참 베아트리체의 부축을 받으며 걷자 누군가가 내게 다가온다.
“제 아들과 사이가 돈독하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요.”
“······!”
중년 사내의 중후한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든다.
동부의 패권자 엡실론.
내 아버지로서, 제 아들을 살피러 찾아왔다.
“귀공만 하겠습니까. 그저 제가 받은 빚을 갚았을 뿐입니다.”
베아트리체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덕담한다.
······물론 밀접하고 있는 나는 그녀가 평소보다 더 긴장했다는 걸 눈치챘다. 아무리 부축이라도 날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니.
“절 찾아오셨습니까?”
나는 괜히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이제 막 성인이 된 그녀에게 사교계에 이상한 소문이 돈다면 대단히 큰 실례일 것이므로.
“그래.”
엡실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확실히 강해졌더군.”
“······.”
“겨우 그 나이에 이미 나와 동급. 혹 그 이상이라니. 20년 후가 기대되는구나.”
“!”
엡실론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게 그렇게 말했다.
베아트리체와 북부 기사, 크라우드 가문 중진 마법사들까지 모두 숨을 헉 들이마신다.
동부 최강의 마법사.
이제 6써클을 뚫고 대륙 최고의 마법사 중 하나의 반열에 올랐거늘.
그런 그가 공식적으로 날 인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6써클의 벽을 허문 걸 눈치채신 모양이군.’
다만 나는 내심 감회가 새로웠다.
6써클.
현재 엡실론이 이룬 경지로, 거대 리치로 강림했던 불사왕 데힐라칸과 같은 경지.
나 또한 방금 그 벽을 뚫었으므로.
콕 집어서 ‘동등’이라는 단어를 썼기에 이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지.”
엡실론은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 떠난다.
제 가신들과 마법사들을 데리고.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겠지만. 제 아들이 잘 지낸다는 걸 확인했으니 돌아간다.
베아트리체와 북부 기사들은 정중하게 그들을 배웅한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제 좀 쉬어도 되겠군.’
-블루번 지속시간이 지났습니다. 향후 한 달간 마나가 99% 폐쇄됩니다.
-드래곤 블러드가 종료됐습니다. 파괴 본능이 치솟습니다. 지친 몸이 긴 잠을 요구합니다.
.
.
그제야 나는 긴장이 완전히 풀린다.
블루번과 드래곤 블러드 때문에 무리하게 각성 상태를 유지했으니까.
스르륵, 쓰러진다.
“······앗, 네카르 경? 아직은 보는 눈이······. 헉. 잠깐만요. 네카르 경?”
베아트리체가 수초 후 놀라는 표정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는다.
임시 숙소로 실려 간다.
***
어두운 밤.
대륙 최서단 엘도라도 인근 바다.
누군가 새벽어둠을 위장색 삼아 마도공학 병기를 타고 움직인다.
혹여 프레야 교단 성기사단에게 들킬까 봐 숨죽여가며 서쪽 해안가를 밟는다.
“헉······. 헉······. 제기랄. 설마 엘드리치 폐하께서 패하시다니······.”
첨벙, 첨벙.
그 당사자는 다름 아닌 흑마도사 클라우드였다.
본래 타이탄 영지에서 클라우스가 죽은 후, 흑마법사 사령관이 된 최고위 간부.
엘드리치의 산하에서 마음껏 흑마법과 키메라를 연구하던 자였다.
만약 붙잡힌다면 화형과 교수형을 동시에 당할 중죄 범죄자이므로.
패전이 짙어지자마자 부하들을 버리고 부리나케 달아난 것이다.
“그래도 이 ‘골리앗’을 얻었으면 됐지. ······이게 설마 스페어로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내가 퇴직금으로 잘 써주겠어.”
위잉, 철컥, 위잉, 철컥!
다만 그가 타고 있는 마도공학 병기는 다소 특별했다.
골리앗.
탐욕왕 엘드리치가 사용하던 최종 병기. 전신이 아다만티움으로 장갑처리 됐으며,
엘드리치가 마신 문두스에게 패하자마자 그의 전용실을 뒤져서 얻은 병기였다.
······물론 아직 미완성인지 후면 장갑이 장착되지 않았지만.
클라우드는 그런 골리앗에 탑승한 채,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더구나 무려 ‘드래곤 하트’가 이 안에 있었다니! 만약 이걸 잘만 쓴다면······. 나는 엘드리치 폐하를 넘어설 수 있다!
조종석 옆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새하얀 보석을 살핀다.
드래곤 하트.
무한한 마나를 담고 생성한다는 용의 심장.
그 크기는 아직 헤츨링인 듯, 아기 손만큼 작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나의 농도가 골리앗에 버금갔다.
클라우드는 저 드래곤 하트를 인체 실험한 경험을 살려 제 심장에 박아넣을 생각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저쪽이다! 저쪽으로 흑마법사가 탈출한다!”
“프레야 교단 성기사단이여! 놓치면 안 된다!”
투두두두!
다만 꼬리가 잡혔는지 저 멀리서 백기사들이 달려온다. 풀 플레이트 아머가 달빛에 비치는 기사들.
“귀찮은 것들. 저리 꺼져라. 이제 나는 네놈들이 감히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지이잉, 콰아아아아-!!!
클라우드는 홧김에 광선포를 쏴버린다. 일직선으로 소멸하는 일대.
그 위력은 무려 작은 성을 일격에 반으로 갈라버릴 수준이었다.
“큭큭, 크하핫! 과연 골리앗이야! 엘드리치 폐하께선 이 절대 병기를 왜 임펫 부총관 같은 얼간이에게 선물하시려고 한 건지. 참. 이해할 수가 없어.”
클라우드는 조종석에 새겨진 ‘임펫’ 이니셜을 보고 크게 웃는다.
이 골리앗만 있으면 세상 두려운 것이 없었으므로. 이것이 자신 차지가 됐으니, 차라리 최종요새 라퓨타가 산산조각난 게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찌지직, 쩌어억!
다만 이변이 생긴 것은 그때 무렵이었다.
클라우드 앞에 공간이 찢어지더니, 강제로 마계와 연결된다.
그 찢어진 공간에서는 흑발의 여인이 걸어 나온다.
흑발에 검은 망토로 전신을 가린 여인.
“탐욕왕 엘드리치가 당했는가.”
그녀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달팽이관에 쫙쫙 달라붙는 고혹적인 목소리.
그녀는 전체적인 체형이 메마른 자였다.
머리도, 어깨도, 가슴도, 골반도 사내처럼 평평한 여인.
‘······마, 왕?’
골리앗에 탑승한 클라우드는 그녀를 보고 침을 크게 꿀꺽 삼킨다.
얼핏 보기엔 단순히 절세가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나,
그녀의 머리에는 마왕임을 상징하는 거대한 숫양의 뿔이 무려 3개나 솟아있었으므로.
마계의 달처럼 새빨갛게 타오르는 동공에 감히 눈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드래곤 하트를 내놔라. 그건 너 따위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보물이 아니다.”
“!!”
그런 흑발의 여인은 골리앗조차 신경 쓰지 않고 명한다.
드래곤 하트.
클라우드가 탑승한 골리앗에 적재된 보물. 아무래도 마계의 군주가 이곳에 출몰한 이유는 이 보석 때문인 듯 했다.
“······하여간 마계 놈들은 허곤날 날 인간이라고 무시하는군.”
본래라면 응당 넘겼겠지만, 새하얗게 빛나는 보석이 너무나 탐스러웠다. 그 보석에 홀린 듯 욕망이 타오른다.
근거도 있었다.
지금 그에겐 엘드리치의 골리앗이 있었으므로.
“나는 차기 부유왕이다! 네년과 같은 마계의 군주가 될 몸! 감히 명령하지 마라!”
지잉, 콰아아아아앙-!!
광선포를 전력으로 쏟아붓는다. 흑발의 여인이 형체도 남지 않을 만큼.
“해치웠나!”
고고고!
흙먼지가 사방에 흩날린다. 그러나 이내 클라우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먼지 속에서 붉은 눈이 여전히 번뜩였으므로.
“차원검.”
지잉. 고고고고!
흑발의 여인이 읊조린다.
그와 동시에 가냘픈 손에서 검푸른 에너지가 뿜어진다. 마치 광선검처럼 보이기도 하는 정체불명의 검.
바라본 순간, 심연에 빨려 들어간 듯 정신이 아득해지는 검이다.
서걱.
흑발의 여인은 제 자리에서 그 검을 휘두른다.
물론 차원검의 사거리는 골리앗에 닿지 않았지만.
찌지지지직! 쿠과과광!
공간이 찢어진다. 여인이 벤 자리와 클라우드가 탑승한 골리앗이 깔끔히 두동강 난다.
마치 공간을 찢고 마계에서 아르카나 대륙에 강림한 것처럼.
장갑이 있는 정면부터 맞았으나 아다만티움이 너무나 깨끗한 단면으로 잘려나간 것이다.
‘어, 째서······?’
클라우드 또한 하바신이 두동강이 났기에 피를 토해내며 바닥에 쓰러진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다만티움은 가장 단단한 물질 중 하나일 터인데?
······아니, 분명 골리앗은 탐욕왕 엘드리치의 최종 병기. 이것을 케이크처럼 가르다니.
그렇단 말은 저 흑발의 여인이 무려 마계의 군주조차 압도하는 존재란 말인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치직.
[제1군단장 심연왕(深淵王) ‘프로세피나’. 물건은 되찾았나.]
“!!”
그때, 흑발의 여인에게 통신 구슬이 울린다. 흑발의 여인에게 ‘프로세피나’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 말에 클라우드는 경악한다.
‘시, 심연왕 프로세피나 폰 이슈타르······. 마계 서열 1위의 대군주다······.’
힘과 무질서의 교단 디메토르의 제1군단장.
심연왕 프로세피나 폰 이슈타르.
마계의 7군주 중에서도 가장 높은 서열로,
‘대군주’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으며 태초에 무려 프레야 여신과 직접 겨뤘다는 악마 왕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 데힐라칸. 어린 드래곤 하트를 되찾았다. 역시 엘드리치가 가지고 있었군.”
프로세피나는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대답한다.
그 말에 클라우드는 죽어가며 다시 한번 경악한다.
불사왕(不死王) 데힐라칸.
그 존재는 화신체만으로도 대륙 동부를 멸망시킬 뻔했던 거악 중 하나이므로.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목표물을 찾았으니 더는 일 없다. 악신 디메토르의 그릇을 제작하기 위해 다음 목표를 찾을 뿐이다.”
“!!”
프로세피나는 가짜 마신 따위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녀의 목표는 오직 화이트 드래곤 실베스타 하나뿐인 듯 했다.
[그 얘기가 아니다. 제4군단장 혈마왕(血魔王) ‘블라디미르’가 영생의 비약을 만들기 위해 드래곤 하트를 요청했지 않은가.]
“······.”
제4군단장 혈마왕 블라디미르 폰 체페슈.
클라우드는 그 이름 또한 알고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 남서부, 지역을······. 지옥으로 만든 ‘흡혈귀의 왕’ 말인가······.’
흡혈귀의 왕 혈마왕 블라디미르.
그 존재는 마족 중에서도 ‘밤의 귀족’이라고 불리는 뱀파이어 일족의 왕이었으니.
한꺼번에 세계 최흉의 거물들이 여럿 언급되니 도무지 사태 파악이 되지 않는다.
프로세피나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혈마왕 블라디미르. 하기야 그 녀석이 디메토르 교단에 입교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
프로세피나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다만 어느새 품에 쥔 새하얀 보석을 놓아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아무런 사유 없이 드래곤 하트를 넘길 순 없다.”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물을 넘겨라. 그럼 넘겨주도록 하지.”
······보물?
드래곤 하트에 버금가는 보물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마정석.”
프로세피나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읊조린다.
최종병기 라퓨타의 본래 원동력이었던, 마계의 최고 보석 중 하나.
“그 보물을 찾아서 내게 넘겨라. 마정석은 악신 디메토르를 제작할 때 필요한 보물 중 하나니. 드래곤 하트를 넘겨주마.”
***
한편, 같은 시각, 대륙 남서부.
모래 먼지가 황량하게 흩날리는 이 초원에는 거대한 성이 지어져 있다. 성당처럼 뾰족한 첨탑으로 된 성.
그러나 성스러운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성의 색깔이 검고 붉은 색에 사악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으므로.
1층에는 수백 개의 해골이 돌무더기처럼 덧없이 쌓여 있는 것이다.
“······부유왕 엘드리치가 당한 건가.”
그 을씨년스러운 첨탑 꼭대기 옥좌에 앉아있는 붉은 머리의 중년 사내가 중얼거렸다.
마왕임을 상징하는 거대한 숫양의 뿔.
핏빛처럼 새빨간 머리카락과 흡혈귀 특유의 박쥐 날개, 고풍스러운 귀족 정장은 그의 품위를 돋보여주었다.
힘과 무질서의 교단 제4군단장 혈마왕(血魔王) ‘블라디미르 폰 체페슈’.
마주족 중에서도 특히 파괴력이 강한 흑마법을 과시하는 뱀파이어 종족. 그들의 왕이다.
블라디미르는 커튼으로 태양의 빛을 전부 가린 중앙홀에서, 붉은 눈을 번뜩인다.
“······‘불로장생의 비약’이 거의 다 연구됐거늘. 설마 마지막 단계에서 마신 문두스가 훼방을 놓을 줄이야.”
그러나 그의 붉은 눈은 불길하게 흔들린다. 마치 생명을 잃어가는 것처럼.
뱀파이어는 본래 마계의 종족이지만, 수명이 존재하는 몇 안되는 자들이므로.
특히 프레야 여신의 가호가 서린 태양 빛을 오랫동안 접했기에 불로불사(不老不死)라는 악마의 특성이 깨져서 유한한 수명을 갖게 된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님’. 고대 레시피에 따르면 이제 고작 ‘하이엘프’와 ‘드래곤’의 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그 두 개의 피만 더 수집하면 불로장생의 비약을 제조할 수 있습니다.”
중앙홀 레드 카펫 위에 서 있던 최고위 뱀파이어들이 그를 위로했다.
아버님.
이들은 모두 혈마왕 블라디미르의 혈족이었으므로.
뱀파이어는 얼마나 고귀한 피를 받고 태어났는지가 강함의 척도이기에,
혈마왕 블라디미르의 자녀들이 최고위 작위를 모두 차지한 것이다.
보글보글.
실제로 중앙홀 주위에는 탐욕왕 엘드리치가 선물한 이종족 캡슐이 가득했다. 수많은 노예가 캡슐에 갇혀 있다.
인체 실험.
오랜 시간, 엘드리치와 협력하여 불로불사의 비약을 준비했다.
“······그래, 날 비웃던 마계의 대악마놈들을 모조리 처형할 날이 머지 않았구나.”
블라디미르는 붉은 눈을 살기 어리게 빛낸다.
전통적으로 뱀파이어들은 마계의 악마들과 사이가 나빴다.
특히 수명이 무한한 대악마들은 은근히 뱀파이어 종족을 깔봤다. 힘만 강한, 천한 종족이라고.
물론, 과거 혈마왕 블라디미르가 ‘피의 대숙청’을 일으켜 대거 처형해버렸지만.
지금은 그럴 수명도 아까웠다.
“‘영원한 수명’. 그것만 이루면 된다. 우리 밤의 귀족이 전 차원을 지배할 힘을 가질 수 있음이야.”
블라디미르는 타는 목마름을 느끼며 말했다. 수명이 줄었어도 포악함은 그대로이니.
모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블라디미르는 못 미더웠으나 더 따지진 않았다.
제 가족들 또한 수명에서 자유롭지 못한 만큼 각오를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제1군단장 심연왕 ‘프로세피나’에겐 소식이 없느냐. 그녀가 ‘드래곤 하트’를 차지했다고 들었거늘.”
블라디미르는 다시 신경질적으로 붉은 눈을 번뜩인다.
“예. 아버님. 탐욕왕 엘드리치가 잃어버린 ‘마정석’을 되찾아 온다면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마정석.
마계에서 최상급 보물로 취급되는 보물로,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머금고 있는 보석이다.
무한한 마나를 가졌다는 드래곤 하트와 비슷한 보물.
“마정석의 위치는 찾았느냐.”
“엘드리치가 사용하던 마력 파악 기계를 사용 중입니다. 곧 좋은 소식이 들릴 것입니다.”
자녀들은 다소 움츠러든 상태로 눈치를 보며 말했다.
고오오오!
촤아아악!
그 말에 블라디미르는 피가 들끓는지 마력으로 포효한다.
첨탑에 쌓여있던 시체들에게 마력을 뿜어낸다.
수많은 시체가 피가 한 방울 없이 바싹 마른 시체가 된다. 모래 바람처럼 황량해진다.
“서둘러라. 너희들의 피까지 흡수해버리기 전에. 누구든 마정석을 찾아내라.”
***
나는 비몽사몽 정신을 되찾는다.
낯선 천장이 보인다. 왠지 익숙해져 버린 상황.
천장에는 프레야 여신이 그려진 화려한 그림이 가득했다.
“아, 깨어나셨어요?”
내가 일어나자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베아트리체가 다가온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인형 같은 무표정을 깨고 밝은 미소를 짓는 소녀.
오랜 벗처럼 반갑게 맞아준다.
‘날 또 간호해줬나 보군.’
나 또한, 그런 친절에 감사한다.
하기야 무려 오르비스 공작이다. 아무리 편하게 친우를 만들려고 해도 다들 말실수할까 두려워할 테니.
어릴 적에도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느라 평범한 친구를 만들기 힘들었을 만큼, 마신 문두스로 알려진 내가 동등한 지위의 친구인 것이다.
“내가 쓰러진 지 얼마나 됐지?”
“음, 아마 25일 12시간 정도 됐어요. 저도 요즘 일이 많아서 체내 시계가 정확하진 않네요.”
“······.”
베아트리체는 눈을 잠깐 천장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확실히 그녀가 앉아있던 책상을 보니 보고서가 수북하긴 했다.
‘그보다 25일이라고? 그럼 준비 기간이 끝난 시점이잖아.’
나는 벌써 한 달 가까이 됐다는 소식에 정신이 번쩍 든다. 한 달이면 악의 교단 디메토르에서도 대응책을 낼 수 있는 시간이니까.
마음이 갑자기 조급해진다. 지금이라도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하므로.
그러나 몸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런데 이건 왜 묶어 놨지? 그만 풀어주지?”
나는 내 몸이 침대에 강철실로 단단히 묶여 있는 걸 확인하고 정색한다.
현재 나는 마치 누에고치마냥 옴짝달싹 못 하게 묶여 있으므로. 마나가 폐한 이상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안 되요. 당신은 풀어주면 제 발로 위험한 곳으로 갈 거잖아요?”
“······.”
베아트리체는 내 행동과 패턴을 다 파악했다는 듯 말했다.
나는 저 표정의 베아트리체는 아무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베아트리체는 어릴 적 아버지를 떠나보낸 게 트라우마가 됐는지, 동료들의 안전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했으니까.
‘이거 야단났군.’
······물론 풀어주면 곧장 위험한 곳으로 직행할 생각이긴 했다.
‘노움. 날 도와줘.’
-움? 우움~?
나는 마음으로 정령인 노움을 부른다.
그러나 노움은 묶여있는 날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뭘 도와달라는지 모르는 표정.
“어머, 노움 왔니? 이거 먹으렴. 마음껏 먹어도 돼.”
-우우움?!
이때 베아트리체는 기다렸다는 듯 과일 바구니에 있던 포도를 꺼내준다.
당장 눈이 돌아가 베아트리체에게 직행하는 노움.
일을 잘 할 때마다 한 알씩 주던 나와 달리 바구니에 포도를 가득 담아서 주니 더 이상 내 얘긴 듣지도 않는다.
“용용아. 그래도 너는······.”
-키야악. 와삭와삭.
믿었던 용용이마저 날 배신했다.
소형화되어 있는 용용이 또한 베아트리체가 먹여주는 사과를 여의주마냥 입에 물고 신이 나서 천장을 힘차게 날아다닌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며칠 뒤면 북부 기함 바다의 군주를 타고 돌아갈 거예요. 그렇게 오르비스 대영지로 돌아가면 풀어드릴게요.”
“······.”
베아트리체가 승리의 미소를 배시시 짓는다. 뱃멀미하는 사람을 항해 내내 묶어두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하면서.
외통수다. 방에 들어오는 사람도 철저히 통제되는 만큼 날 풀어줄 사람은 없다.
“그보다 노움이 뭔가 챙겨오지 않았나? 탐욕왕 엘드리치를 물리치고 말이야.”
“······!”
나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에 물었다.
탐욕왕 엘드리치.
그자는 막대한 자산과 인력으로 대륙 서부에 있는 거의 모든 보물을 갈취했으므로.
지금 시점에도 ‘그 보물’이 있을까 확인해보는 것이다.
내 말에 ‘아, 맞다.’ 손뼉을 치는 베아트리체.
“노움이 엘드리치 비밀 창고에서 이걸 가져왔어요. 일전에 오색빛깔 비늘과 비슷한 건가요?”
“!!”
나는 베아트리체가 내미는 ‘두꺼운 뿔’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물건은 내가 찾던 바로 그 보물이었으므로.
‘감정.’
[이름 : 용의 뿔 #1. (NEW, MASTER.)]
[설명 : 고대 시대부터 드래곤 족을 상징하는 권능은 ‘용의 숨결’이었다. 용의 숨결을 사용하기 위해선 성체가 되어야 한다. 용의 큰 뿔은 성체가 되었다는 상징이다.]
[특수 효과 : (미해금).]
* 만약 용의 뿔을 모두 모으면 특별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1/3.)
-우움!
노움이 포도를 먹다 말고 ‘나 잘했지?’라는 포즈를 취한다.
이제 대도(大盜) 정령이 된 만큼 값진 물건을 알아보는 모양.
-용의 유산을 모두 모으면 특별한 힘을 깨울 수 있습니다.
-다음 용의 유산은 ‘ㄹ. 드래곤 소울’로, ‘용의 숨결’을 익힐 수 있습니다!
“!!”
용의 숨결······?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용의 숨결이라면······. 헤일스톰에 버금가는 드래곤의 궁극의 권능 중 하나다······.’
브레스.
이는 만물의 영장이자 질서의 수호자인 용족이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권능 중 하나.
실제로 원작 <별들의 전쟁2>에서 보스 레이드 컨텐츠로 나온 악룡 니드호그는 브레스 하나로 작은 촌락 전체를 불태워 죽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 단, 용의 숨결은 성체 드래곤으로 각성해야 사용 가능합니다.
* 히든 퀘스트 ‘질서의 수호자’와 ‘마신(魔神)으로 드리우는 길’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 두 가지 길 중 어떤 것이든 완전히 클리어하면 용의 숨결을 시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지에 따라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는 크게 갈릴 수 있습니다!
그제야 나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히든 퀘스트 ‘질서의 수호자’.
불, 바람, 물, 흙 4대 속성을 모두 모으는 이 퀘스트는 만물의 영장으로서 각성하는 ‘성인식’의 개념도 포함되는 모양이다.
‘다만 나는 느긋하게 4대 속성을 모을 시간이 없는데.’
나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아직 블루번의 페널티가 남아있기도 하거니와, 탐욕왕 엘드리치 다음으로 나설 군단장을 알고 있으므로.
‘제4군단장 혈마왕 블라디미르 폰 체페슈. 그자는 엘드리치와 협약해서 ‘불로장생의 비약’을 얻으려는 자다. 그 시간을 주면 안 돼.’
나는 블라디미르의 사정을 알고 있다.
뱀파이어는 수명이 무한하지 않으니까. 삶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녀석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완전체가 된다면 정말로 아무도 막을 수 없게 되니까······.’
혈마왕 블라디미르 폰 체페슈는 원작에서도 밸런스 논쟁이 많았던 자다.
피를 흡혈해야 마력을 회복하는 뱀파이어에게 수천 명을 동시에 흡혈하는 경악스러움을 보여줬으니.
만약 그에게 시간을 줘서 모든 피를 모으게 해준다면 말 그대로 아르카나 대륙에 피바다가 불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블라디미르 또한 뱀파이어다. 종족의 페널티를 가지고 있지.’
그러나 나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나는 원작 <별들의 전쟁2> 최고 고인물. 독고다이로도 해결한 적이 많았으니.
‘고대의 성물 ‘순례자의 십자가’. 뱀파이어의 천적인 그 성물부터 깨워야 한다.’
순례자의 십자가.
마나를 주입하면 핏물을 성수로 바꿔버리는 성물이다. 본래 교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성인의 힘이 담긴 보물이지만.
실상은 원작 개발진이 블라디미르를 상대할 때 사용하라고 몰래 숨겨둔 히든 아이템이다.
······물론 구하기가 더럽게 까다롭고, 정화하기도 어려워서 아무도 쓰지 않았지만.
나는 그 공략법은 물론, 파훼법을 알고 있으니까.
‘질서의 수호자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겸, 순례자의 십자가도 구해야 겠군.’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정한다. 갈 길이 멀다.
“용용아.”
-······키약?
내가 중저음으로 부르자 날개를 펄럭이며 놀던 용용이가 내려온다. 베아트리체와 노닐던 것도 나와 친분이 깊다는 걸 눈치챘기에 가능했던 것이므로.
내 명령에 따라 이빨로 날 묶던 강철실을 물어뜯어버린다. 과연 샌드 드레이크의 치악력이다.
“······당신, 정말로 가야 하는 거예요?”
베아트리체가 염려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나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말했다.
“너와 단둘이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
베아트리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바다의 군주를 타고 오르비스 대도시로 돌아가려면 아직 며칠 남았다고는 하나, 그녀의 의사도 분명 중요하므로.
그녀가 바쁘다면 다소 오래 걸리더라도 홀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흠흠, 그런 거면 진작 말씀하시지. 어디로 가려는 건데요?”
“?”
베아트리체는 다소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갑자기 흠흠, 헛기침도 하더니 옷매무새도 정돈한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묘하게 기대하는 눈치.
‘하기야 베아트리체도 이제 막 스무 살이 될 텐데. 일만 하고 싶진 않겠지.’
나는 한 가득 쌓여있는 보고서를 보고 상대 입장을 헤아린다.
아무래도 베아트리체도 계속 업무를 처리하다보니 바람이라도 쐬고 싶은 모양.
함께 용용이를 타고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