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공중요새 라퓨타 (4)
지독한 열기로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용광로.
강렬한 열기 속에서도 등에 식은땀이 가득하다.
내가 아무리 워터 실드로 모든 열기를 차단했어도 후덥지근한 공기마저 막을 순 없었으므로.
‘더구나 폭왕 라이칸 슬로프가 버텨줄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무려 지옥의 용광로를 파괴하는 일.
공중요새 라퓨타를 움직이는 스페어 플랜마저 파괴하는 일이니까.
만약 탐욕왕 엘드리치가 눈치채고 강림하는 순간, 일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웨어울프들이 버텨줄 수 있는 시간도 한계가 있는 만큼,
최단 속도로 클리어할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른다.
[이 크리스탈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지옥의 용광로 대악마 아바돈이 마력이 뜯기는 고통에서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악물고 괴로움을 참는 모습.
나보다 신장이 두 배는 큰 키로 날 내려다본다.
붉은 눈을 번뜩이며 나와 눈을 마주친다.
[날 속이려고 하지 마라! 이 사악한 엘드리치의 개야! 내가 그따위 장난에 한 두 번 속을 것 같으냐!]
고오오! 화르르륵-!!
아바돈은 내 말을 믿지 못했는지 으르렁거린다.
용광로 구석에 있던 가마에서 용암이 솟구친다.
이 용광로는 대악마 아바돈의 영혼을 괴롭해서 뜯어낸 마력과 증오로 가동되고 있으므로.
과연 지옥 대악마답게 고함 한 번에도 무시무시한 권능이 발현된다.
“······.”
그러나 나는 침묵으로 대응한다.
지금 상황이 다급하다는 걸 알지만, 이 다혈질인 대악마에게 휘둘리면 더욱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최대한 차분히 접근한다.
“네 인생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에어 블레스트 lv2.】
나는 더욱 뜨거워지는 열기를 참으며 5써클 바람의 대마법을 발동한다.
쿠과과광-!!! 촤아아악-!!!
그리고 지옥의 용광로를 감싸던 강화 유리를 깨뜨린다.
유리 속에 있던 차디찬 냉각수, 천년빙정이 쏟아진다.
용암과 천년빙정이 직접 맞닿아 치이익, 불길한 소리를 낸다. 뿌연 안개가 용광로를 가득 메운다.
대악마 아바돈이 놀랐는지 붉은 눈을 번뜩인다.
“지금 막 공중요새 라퓨타가 가동됐다. 만약 내가 엘드리치의 하수인이라면, 이 중요한 순간, 고작 널 괴롭히기 위해 천년빙정을 파괴하겠는가?”
[······.]
그제야 정신 차린 아바돈.
내 진의를 파악하겠다는 듯 대악마의 눈빛을 뿜어낸다.
그러나 나 또한 물러서지 않고 그 눈동자와 마주한다. 안개 속에 붉은 점과 푸른 점이 번뜩인다.
[······계약 조건이 뭐냐?]
“영혼의 계약이다. 풀려나면 나와 내 동료들을 영원히 해치지 않겠노라고 맹세해라. 함께 탐욕왕 엘드리치와 맞서는 거다.”
영혼의 계약.
만약 어길 시 그 영혼이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계속 어길 시 결국 영혼이 바스라지는 계약이다.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계약.
[영혼의 계약을 어떻게 할 거지? 난 이미 육신이 녹아내렸다. 매개체로 할 피가 없는데.]
다만 문제는 계약을 성사시킬 방법이 없다는 거다.
영혼의 계약은 서로의 의사 말고도, 피와 마나를 필요로 하므로.
‘아마 탐욕왕 엘드리치도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아바돈의 육신을 용광로에 녹여버린 거겠지.’
그리고 이는 원작 <별들의 전쟁2> 개발진의 의도이기도 하다.
편법을 쓰지 못하도록. 레이드에 참가한 수많은 플레이어가 녹아 죽게 하려고 말이다.
“임시 육체로 ‘키메라 시체’를 빌려주겠다. 만약 영혼의 계약에 성사한다면 제대로 된 육신을 마련해주도록 하지.”
하지만 나는 이조차 파훼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일전 타이탄 영지에서 챙겨온 ‘키메라 히드라’의 시체.
키메라 중에서 대악마 아바돈의 영혼이 강림할 수 있는 정확한 체질을 알고 있으므로.
임시로 대체할 육신을 빌려주는 것이다.
[······좋다.]
그 말에 비릿한 미소를 짓는 대악마 아바돈.
[어디 한번 해보아라. 건방진 인간. 이곳에서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테니!]
계획에는 합의했다.
그러나 대악마 아바돈은 아직 비웃음을 머금었다.
마계에서 가장 하찮은 계급 중 하나인 인간이 이 모든 일을 이루는 게 불가능하다고 무의식적인 생각이 들은 모양이니까.
“티타니아 전하. 시작해주십시오.”
하지만 나는 불가능하다면 시작하지도 않았다.
미리 언질한 대로 통신구슬로, 티타니아와 요정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러자 관리실에서 굳은 표정으로 움직이는 페어리들.
철컥, 쿠구구궁······!!
그들은 관리실에 있는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천장에서 숨겨졌던 창고가 내려온다.
-크르르르······.
-그아악. 꺼내줘! 나는 죽을죄까진 짓지 않았다고!
전부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감옥.
강철실과 도르래를 이용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게 만든 감옥이다.
지옥의 용광로 대악마 아바돈이 제대로 마력을 끌어내지 못했을 때, 불구덩이에 집어넣기 위한 불쏘시개다.
철컥, 철컥. 지이이잉.
티타니아는 또 다른 버튼을 눌러서 그 흑요석 창살 감옥을 천장에서 움직인다.
왼쪽, 왼쪽, 위쪽, 오른쪽, 아래.
특별한 의미가 있는 움직임은 아니다.
단지,
고오오오오!
비밀 코드가 숨겨져 있을 뿐.
정확히 내가 명령한 대로 코드를 움직이자, 지옥의 용광로에 변화가 생긴다.
용광로에서 더 이상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지 않는다.
검은 크리스탈이 대악마 아바돈의 마력을 빨아들이지 않고 작동을 멈춘다.
비상 정지.
탐욕왕 엘드리치가 비상시에 지옥의 용광로를 수리하기 위해 만든 숨겨둔 코드인 것이다.
지이이잉.
그리고 용광로 곳곳에 등장하는 새하얀 봉인구.
용암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새하얀 보석들이 보인다.
[저, 저건······!!]
대악마 아바돈은 마치 제 영혼의 반쪽처럼 새하얀 봉인구들을 바라본다.
무려 8개의 봉인구.
아마 막 봉인 당했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을 것 봉인구이므로.
‘이것들을 파괴하면 대악마 아바돈을 꺼낼 수 있었지.’
【기간테스의 힘 lv2.】
지이이잉, 고오오오-!!
나는 초장부터 전력을 다한다. 붉은 눈의 스태프가 안광을 형형이 빛낸다.
이제 곧 지옥의 용광로에 있던 숨은 시큐리티들도 등장할 것이므로.
처음부터 최강의 일격을 날리는 것이다.
쿠과과과광-!!
꽈직.
아공간 게이트가 열린다. 그곳에서 뻗어 나가는 기간테스의 주먹.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진다. 한 방에 터져나간 봉인구.
그러나 이제 겨우 8개 중 하나를 파괴했을 뿐이다.
나는 당장 다음 일격을 준비했을 때,
[위험하다!]
부글부글부글!
대악마 아바돈이 고함친다.
내 등 뒤로 용암이 파도처럼 일어났음으로.
【아쿠아 스톰 lv2.】
촤아아악! 치이이이익!!
나는 뒤로 물러나며, 천년빙정의 물을 끌어다가 용암의 파도를 막는다.
얼음물과 용암이 서로 맞부딪혀 물보라를 일으킨다.
용암의 파도가 일어난 곳을 바라본다.
“꺄하핫,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인가 했더니. 반역자가 들어왔었네?”
-lv55 화재(禍災)의 악마 ‘아테’. (영혼체.)
용암 쪽에서 나온 건 머리에 작은 뿔이 난 여성 악마였다.
긴 주홍빛 머리카락에 2차 성징이 오지 않았는지 몸매 굴곡은 두드러지지 않은 악마.
화재의 악마 아테.
재앙을 일으키는 불행의 악마.
대악마 아바돈에 비하면 월등히 격이 떨어지지만,
무려 엘드리치가 지옥 용광로의 보안을 맡긴 마계의 악마다.
‘더구나 이곳은 지옥의 용광로. 주로 불 속성을 사용하는 아테에게 대단히 유리한 환경이지.’
나는 붉은 눈의 스태프를 고쳐 쥐며 생각했다.
이곳엔 천년빙정의 얼음물도 있지만, 딱히 내게 유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귀찮아. 빨리 끝낼래.”
-lv55 유빙(流氷)의 악마 ‘스킬라’. (영혼체.)
쏴아아! 쩌저적!
화재의 악마 아테 쪽에서 그녀와 꼭 닮은 소년 악마가 함께 튀어나왔으니까.
유빙(流氷)의 악마 ‘스킬라’.
머리카락이 푸른빛이란 것만 빼면, 변성기가 오지 않은 목소리의 소년 형태의 모습.
마찬가지로 탐욕왕 엘드리치의 수하로, 빙하를 다루는 악마다.
그가 권태로운 표정으로 차디찬 천년빙정을 파도로 일으킨다.
[쌍둥이 악마 년놈들. 날 배신하고 엘드리치 쪽에 붙더니, 끝까지 방해하는구나······!!]
용광로의 대악마 아바돈은 그 둘을 알아보고 악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직 검은 크리스탈에 갇힌 만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
‘지금부터는 탐욕왕 엘드리치도 문제가 생겼다는 걸 파악했을 거다.’
【워터 실드 lv5.】
나는 물의 방패로 막아내며 생각했다. 쌍둥이 악마 아테와 스킬라.
저 둘은 지옥의 용광로에 특별한 문제가 생겼을 때만 나서는 중급 악마이므로.
심장 고동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머릿속에서 타이머가 째깍째깍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는 쌍둥이 악마부터 상대하고 봉인구를 파괴하겠지만.’
원작 플레이어들은 다수의 모집원을 구해서 마계의 악마부터 상대하는 걸 선호했다.
마계의 악마는 하나하나가 지역 최악의 존재들.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간 부대가 전멸할 것이 불 보듯 뻔하므로.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다간 탐욕왕 엘드리치가 먼저 강림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현재 공중에 떠오른 ‘공중요새 라퓨타’는 고작 ‘프로토 타입’이라는 걸.
아직 본체 성능의 반의반도 나오지 않았다는 걸.
지금 지옥의 용광로를 제대로 파괴하지 않으면,
지상에 있는 수많은 연합군이 전멸할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속도를 낼 수밖에 없다.
【소형화 해제.】
따라서 봉인구 파훼법으로 미리 숨겨둔 ‘빙륜화(氷輪花)’를 발동한다.
8개의 봉인석.
그것들이 어디에 숨겨져 있었는지 모두 외우고 있었기에.
타오르는 용암 속에 수백 년간 잠겨 있어, 극한의 빙결에 취약하다는 걸 알기에.
폭발할 때, ‘절대 영도’를 발동하는 빙륜화를 미리 묻어둔 것이다.
쩌저정, 촤좌좌좌좍-!!!
“!”
“!!”
소형화가 끝난 빙륜화가 폭발한다.
그와 동시에 깨져나가는 봉인구들.
나머지 7개의 봉인구도 모두 파괴된다.
쌍둥이 악마의 표정이 살벌하게 바뀐다.
“······여유부릴 상대가 아니었네?”
화르륵.
화재의 악마 아테가 용암을 몸에 두르고 육탄 돌격해온다.
유빙의 악마 스킬라는 원거리에서 거대한 유빙을 응축해서 고드름을 만들어 쏜다.
【바람의 길 lv4.】
나는 검은 크리스탈에 봉인된 대악마 아바돈에게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마지막 조건으로 검은 크리스탈을 파괴하기 위하여.
대악마 아바돈을 완전히 해방하기 위하여 말이다.
***
북부 공작 베아트리체는 설화검을 고쳐 쥔다.
숨을 헉헉 몰아쉰다. 차디찬 검기가 뿜어지고 있거늘. 몸에 열이 난다.
목 아프게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본다.
설인왕 이미르가 강림했을 때처럼 검은 하늘.
검은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괴수 떼가 있으니.
-까아아아악-!!
-카고오오오-!!!
다크 와이번.
큰 비계만큼이나 포악한 습성을 가진 괴물.
하나하나가 작은 배를 앉아서 침몰시킬 수 있을 법한 크기다.
거기에 흑기사들이 탑승해 집단으로 조종한다.
그들이 북부 연합 함대를 향해 급강하한다. 발톱을 들이민다.
“······함포를 가져와서 하늘을 향해 조준하라. 일제 포격!”
쿠과과광!
이에 베아트리체는 즉석으로 대응한다.
군함에 장착되어 있던 함포를 선상으로 가져와서 일제 포격한다.
하늘을 향해 포격하는 것은 점 단위 공격. 명중률이 형편없을 수밖에 없으므로.
수십 개의 대포를 사방으로 일제 포격하여 급강하하는 적들을 요격하는 것이다.
“베아트리체 저하! 포탄이 다 떨어졌습니다! 더 이상 함포 사격할 수 없습니다!”
“보급함이 격침당했습니다! 기사들도 슬슬 한계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한계가 찾아왔다.
군함에 있는 모든 대포를 연거푸 포격하는 일.
이는 포탄을 급속도로 소모하는 일이다. 배에 적재할 수 있는 물자의 양은 정해져 있으므로.
포탄이 부족한 군함들부터 차근차근 잡아먹히는 것이다.
‘헉······. 허억······. 이런. 공중요새 라퓨타가, 재장전하기 전에, 견제도 해야 하는데······!’
지잉, 고고고.
베아트리체는 숨을 몰아쉰다.
검은 하늘에 군림하는 ‘공중요새’ 또한 문제였다.
그림자만으로 북부 연합 함대 전체를 가리는 엘도라도.
그곳에 부착된 초대형 청동 대포들이 서서히 열기를 식히고 재장전하고 있으므로.
저것이 재포격하기 전에 함포 사격으로 견제해야 하거늘.
실상은 다크 와이번으로부터 버티는 것조차 벅찬 것이다.
번쩍!
샤아아아아!
서부 연합군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다.
다크 와이번 떼의 습격에 프레야 성기사단과 사제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
도움을 청할 수 없다.
‘마법사가 너무 부족하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베아트리체는 이 상황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의 부재.
이렇게 먼 거리에 떨어진 몬스터를 물리치려면 마법사가 꼭 필요하거늘.
북부와 서부 연합군에는 마법사가 거의 없었다.
궁핍한 혹한의 땅도, 내전의 서부도 마법사들이 찾아오기엔 적합하지 않았으니까.
‘네카르 경······. 네카르 경께선 어디로 가버리신 걸까? 먼저 와서 기다리신다고 하셨는데······.’
베아트리체는 그리운 얼굴을 떠올린다.
탐욕왕 엘드리치를 막겠다며 북부를 떠난 사내.
대륙 서부로 가는 대신, 매일 밤 연락하기로 하기로 하였거늘.
어디론가 잠입하겠다며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나중에 도착한 그녀를 바닷바람을 맞히고 있는 것이다.
‘혹시 잠입하시다가 일이 잘못된 걸까? 만약 탐욕왕 엘드리치에게 들키신 거라면?’
두려운 생각이 스멀스멀 차오른다.
네카르 폰 크라우드.
그는 결코 그녀를 버릴 사람이 아니므로. 다른 이유를 떠올린다.
그렇게 순간 잡념에 사로잡혔을 때,
“베아트리체 공! 위험합니다!”
“!”
베아트리체 바로 얼굴 앞에 다크 와이번이 당도했다.
호위 기사의 뾰족한 고함에 정신 차린다.
‘······늦었다!’
베아트리체는 설화검을 꽉 붙잡으며 이를 악문다. 피곤하다.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장장 몇 시간째 계속된 전투로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이다.
서걱! 촤악!
물론 그럼에도 베아트리체는 배를 박차며 다크 와이번을 베어낸다.
그녀는 북부 최강검 레오파드의 수제자.
차기 북부 최강검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임기응변으로 극복한 것이다.
-카아아악!
-카고고고고!
하지만 하늘에서 다크 와이번이 수없이 덮친다. 슬슬 포탄이 떨어졌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급강하하는 적들.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저것들은 막을 수 없다.
인간의 한계.
체력적으로, 자원적으로, 정신적으로 마계의 군주를 상대할 수 없었으므로.
다가오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것이다.
‘보름달이 뜨는구나.’
치링.
베아트리체는 숨도, 마나도 부족했지만, 투기를 잃지 않는다.
그간 살아온 정신적 지주인 보름달.
저 달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므로.
설화검에 서린 아버지께.
그리고 레지스탕스를 구해준 사내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끝까지 항전하려는 것이다.
“와라. 길동무로 데려가 주마.”
그렇게 배를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오른 순간,
촤아아악-!!
“?!”
느닷없이 서쪽 바다에서 물보라가 친다.
수평선 위의 물이 용오름치며 한꺼번에 난동을 부린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회오리친다.
콰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터지는 물의 폭풍.
무려 세 개의 물기둥이 서로 교차해 수직으로 작렬한다. 수평선부터 검은 구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물줄기.
그 속에 있던 수많은 다크 와이번이 휘말려든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재가 되어 소멸한다.
“······네카르 경?”
베아트리체는 반가움에 뒤를 홱 돌아본다.
그녀는 저 마법이 물의 명가 크라우드의 비전 마법인 ‘아쿠아 스톰’이란 걸 알아보았으므로.
그 사람이 등 뒤에 와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진다. 없던 힘이 솟아난다.
투두두두.
실제로 저 멀리서 동부의 마법사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전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법사.
지금 전황에서 너무나 간절했던 자들.
그것도 물의 명가 크라우드의 깃발을 이끌고 온 지원군을 보고 안도한다.
“내가 너무 늦었군.”
“!”
그러나 그 무리에는 네카르가 없었다.
베아트리체는 그 무리를 이끌고 온 중년 사내를 발견했다.
만약 네카르가 30년쯤 나이가 든다면 저른 모습일 것 같은 사내.
네카르와 똑 닮은 황금빛 머리카락에 깊고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훨씬 연륜이 있었다.
이마에 주름이 쌓이고 눈매가 용처럼 고고한 중년 사내.
엡실론 폰 크라우드.
물의 명가 크라우드의 가주이자, 동부 최강의 마법사로 알려진 대마법사가 당도했다.
“세상이 동부를 버렸지만, 동부는 세상을 버리지 않았으니.”
촤아아악.
엡실론이 푸른 눈의 스태프를 들어 올린다.
베아트리체는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거대한 물기둥을 바라본다.
마치 태풍처럼 구름에서 휘몰아치는 거대한 물줄기.
그 물줄기는 재앙류 마법 중에서도 파괴력이 매우 강한 아쿠아 스톰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아쿠아 스파이럴.”
엡실론은 새로운 마법을 영창한다.
바다의 창은 기다린 창처럼 끝이 뾰족하다.
그 끝을 거대한 공중요새를 향해 겨눈다.
쿠과아아아아-!!!
거대한 물결.
하늘에 바다의 창이 내리친다.
서쪽 바다의 창. 북부 연합 함대가 뒤집힐 듯 출렁이는 파도를 일으킨 창이 공중요새를 내리친다.
막강한 충격으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굉음이 발생한다.
공중요새는 반투명한 방어막을 만들어 막았지만, 아직 불완전한지 완전히 막지 못했으므로.
파치지직. 쿠과광!
요새의 동쪽 성벽이 통째로 파괴된다.
무게 균형이 크게 기울어지고 비틀거린다. 푸른 정전기가 일어난다. 검은 연기가 사방에서 피어오르고, 청동 대포들이 반파된다.
쿠구궁······.
공중요새가 천천히 추락한다.
그 모습에 모두가 확신한다.
6써클.
소규모 재앙을 넘어서서 대규모 자연재해를 불러일으키는 대륙 최고의 경지.
엡실론이 그 벽을 허물었음을.
불사왕 데힐라칸을 상대한 후 막대한 깨달음을 얻었음을 말이다.
우와아아아아-!!!!
모두 함성을 지른다.
전장의 바람이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