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공중요새 라퓨타 (2)
또각또각.
나는 인피면구를 쓴 채, 검은 고성 내부로 들어간다.
‘······중세 영주의 성이라기보다는 마도 공학 공장 같은 곳이군.’
나 또한 현실에서 이러한 공간을 보는 것은 장관이었기에 곳곳을 둘러본다.
파랗고 빨간 마력석이 등불처럼 내부 곳곳을 빛낸다.
유압식 프레스가 철컥철컥 움직이고, 컨베이어 벨트에 톱니바퀴가 움직인다.
몇몇 인부들은 나사를 조이고, 컨베이어 벨트 끝에 쌓인 정체불명의 시약을 가져간다.
흑마법사들 또한 복도를 거닌다.
“어허, 저능한 이종족 새끼들아. 가만히 있어! 확 그냥 해부실에 집어넣기 전에.”
-크으으읏!
-취이익!
수레 감옥에 갇힌 몬스터와 이종족 실험체를 정신없이 옮긴다.
폭력적으로 채찍을 휘두르면서.
-끄아아아아악-!!!
저 멀리에선 끔찍한 비명도 들린다.
비록 멀리 떨어진 층이었으나, 발달한 신경에는 또렷이 들렸으니까.
-크르······.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거냐?
내 품에 숨어있는 라이칸 슬로프가 무의식적으로 울음을 흘린다.
라이칸 또한 사왕으로가 신경이 발달했을 테니.
아무래도 동족의 향기를 맡은 모양.
‘조금만 기다려라. 탐욕왕 엘드리치를 토벌하면 함께 사라질 일이다.’
나 또한 표정을 굳혔으나, 무엇이 더 중요한지 잊지 않는다.
지옥의 용광로.
공중요새 라퓨타를 띄어올릴 예비 전력을 파괴하러 들어온 것이므로.
현재 목표에 집중한다.
사왕 라이칸 또한 날 신뢰하기에 믿고 기다린다.
-······참으로 끔찍한 곳이군요.
페어리들은 한껏 경직된 표정으로 내 품에 매달린다.
하기야 수십 년간 숲에서만 산 페어리에겐 이 장소 자체가 지옥도나 다름없을 테니.
최선을 다하겠다고만 말한다.
그렇게 엘도라도 속 ‘엘드리치의 비밀창고’를 찾아 계단을 걷고 있을 때,
"잠깐. 거기 너. 잠깐 멈춰라."
또각또각.
그때 한 흑마법사가 날 불러 세운다.
날 알아본 듯 다가와 입을 연다.
“······‘파르’. 넌 전투 보조 아니더냐. 왜 성벽을 안 지키고 여기서 있는 거지?”
내게 살벌한 훈계를 한 건 흑마법사.
검은 로브로 몸을 전부 가린 여자였다.
그녀는 꽤 고위 흑마법사인지 3명이나 되는 제자를 끌고 다녔다.
‘아무래도 내가 인피면구로 따라 한 흑마법사의 상관인 모양이군.’
눈치껏 상황을 파악한다.
나는 이 고성으로 들어갈 때, 눈에 보인 흑마법사 하나를 제거하고 얼굴을 따라 했으니까.
아무래도 현재 내가 죽이고 인피면구로 변장한 흑마법사의 이름이 파르인 모양.
-lv35 고위 흑마법사 르네.
‘······르네? 르네라면 설마 10년 후, 서부 최악의 마녀가 되는 그 녀석?’
다만, 나는 시스템 창에 뜬 상대 이름을 알아보고 살짝 놀란다.
대마녀 르네.
그녀는 훗날 흑마도사 클라우스에 버금가는 괴물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기야 이곳은 탐욕왕 엘드리치의 본거지 엘도라도.
훗날 거물이 될 천재 흑마법사가 있는 게 이상하지 않다.
‘이용할 가치가 있겠군.’
예상외의 상황이지만 당황하지 않고 움직인다.
즉석으로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죄송합니다. 르네님. ‘주인님’께서 다급히 심부름을 시키셔서 왔습니다.”
나는 원작 <별들의 전쟁2>에서 흑마법사 직업 또한 마스터까지 키워봤기에, 이들의 생태계를 알고 있다.
따라서 현재 르네와 동급일 주인을 거론한다.
“네 주인? 아, 샤넬을 말하는 건가. 어디로 가려는 거지?”
“지하 3층. 흑마법 창고입니다. ‘전시 상황’이라 다급히 다녀오라고 하셨는데, 신분증이 없어 퇴짜를 맞았습니다.”
나는 전시 상황이라는 걸 강조한다.
쿠과광!
지금 성벽 밖에서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지고 있으므로.
전군이 비상인 만큼 서둘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심한 놈. 설마 신분증도 안 가져오고 온 것이냐?”
“적의 폭격에 가방이 휩쓸려 불타버렸습니다.”
“후,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군. 좋다. 내가 함께 가서 신분 보증해주지. 네 주인에게 오늘 일은 빚이라고 전해라.”
르네는 그렇게 말하고 지하 3층으로 날 데려간다.
덕분에 나는 편안하게 지하 3층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창고 앞에서 속삭인다.
“덕분에 신분증 있는 놈을 구태여 찾지 않아도 됐군. 고맙다.”
“뭐라?”
【에어 블레스트 lv2.】
콰아아!
나는 남들이 안 보고 있을 때,
르네를 비롯해 다른 흑마법사를 일직선으로 쓸어버린다.
즉발로 발동하면서도 굉장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바람 계열 대마법으로.
-미래의 대마녀가 될 르네를 지금 시점에서 죽였습니다!
-역사가 다소 바뀝니다! 지금 당신의 선택으로 미래가 1.5%가 바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습니다! 5써클 3티어에 도달합니다!
덕분에 쏠쏠한 보상까지 얻었다.
나는 남은 시체를 소형화로 깔끔히 정리하고,
빼앗은 신분증으로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아마 빙륜화(氷輪花)는 이 서랍 중 하나에 있었지.’
창고는 수백 개의 서랍으로 가득 찬 거대한 방이었다.
서랍이 1번부터 999번까지 있는 드넓은 창고.
나는 창고 관리인을 죽이고, 열쇠 꾸러미를 살피며 생각한다.
'아마 하나하나가 아공간 게이트로 연결된 창고였을 텐데.'
잘못 여는 순간 마계로 날아가 버릴 수 있는 서랍 창고 중 하나였다.
덕분에 함부로 서랍을 열 수 없는 곳.
하지만 나는 이 창고에서 쓸 만한 보물이 잠들어있는 번호를 알고 있다.
“726번. 여기군.”
달칵.
나는 곧장 726번 서랍을 연다.
휘이이이잉.
그 안은 혹한의 바람이 부는 설산(雪山)이었다.
마치 설인왕 이미르가 살법한 온도로 꾸며진 공간이다.
과거 눈보라의 악마 니키타가 마계화했던 것처럼 공간이 매우 넓어진 곳.
그러나 폭설이 쏟아지는 설산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었다.
“감정.”
[이름 : 빙륜화 (氷輪花). (SUPRER RARE.)]
[설명 : 마계의 최북부 지방에서만 자라는 아름다운 얼음꽃. 마나를 불어넣으면 폭발하며 주위를 극한의 온도로 얼려버린다.]
목표했던 보물을 찾았다!
빙륜화.
설인왕 이미르가 지배하는 혹한의 산맥에서만 자라는 희귀꽃.
건들면 폭발하며 절대영도를 발동하기에, 지옥의 용광로를 식히기 제격인 아이템.
그 꽃들이 수백 송이나 담겨 있었으니.
이 꽃들을 조심스레 따서 소형화로 담아둔다.
“슬슬 결전의 순간만 남았군.”
이것으로 지옥의 용광로 대악마를 상대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아직 소형화된 라이칸 슬로프가 조용히 속삭인다.
-용케 여기까지 잠입했군.
“그래, 용광로의 대악마 ‘아바돈’. 그 녀석을 얼려버리기 위해선 앞으로 너희가 나서줘야 한다.”
-······!
용광로의 대악마 ‘아바돈’.
마계의 악마 중에서도 거의 군주급에 도달한 존재다.
그만큼 일반 악마와는 차원이 다른, 상대하기 훨씬 까다로운 존재다.
‘아바돈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선 우선 실체화부터 시켜야 하니까.’
공중요새 라퓨타 내부에 있는 지옥 용광로에서 특정 물건들을 제 위치로 옮겨둘 때,
영혼체가 랜덤하게 나타난다.
내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료들.
“그렇군요. 저희가 패턴을 푼 사이, 네카르 경께서 지옥의 용광로 대악마를 상대하신다······. 알겠습니다.”
“우리 웨어울프들은 흑기사와 흑마법사들이 접근하는 걸 막아주면 된다 이거지.”
페어리와 웨어울프 모두 제 역할을 이해한다.
“작전 개시는 언제지?”
“······아직이다. 우리가 먼저 나서다간 성안에 대기하고 있는 엘드리치 군단에게 포위당한다. 그건 자살행위지.”
나는 차분히 말한다.
이번 작전의 성패로 대륙 서부에 있는 수많은 생명체의 생명이 걸려있으므로.
작은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다.
급할수록 돌아간다.
“그럼?”
“따라서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를 기다린다. 그녀가 당도한 순간, 탐욕왕 엘드리치 또한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으니.”
“······!”
나는 최종 작전을 설명하고 대기한다.
대륙 7대 성인 루크레치아.
프레야 여신의 화신이자, 피보다 신성력이 더 많은 자로서 마계의 존재에게 천적 같은 전투 성인.
만약 적들이 끝까지 방치한다면 정문으로 엘도라도를 뚫고 들어올 테니 오히려 좋다.
따라서 루크레치아가 도착할 때까지 잠시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한다.
***
은빛 늑대 용병단장 ‘맥스’.
그는 서부 연합군에 포함돼 최서단 엘도라도까지 당도했다.
원래는 영지 내전 따위 참전할 생각이 없었지만, 대륙 서부 전체가 멸망할 위기라는 소식을 듣고.
동부에서 나타났던 흑마법사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기왕 용병일을 할 거면 이런 곳에 참전하려고 말이다.
‘······후, 부디 이번 전쟁에서도 동료들이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맥스는 그간 활약과 공로를 인정받아 후방을 지키는 정예 군단으로 배속됐다.
“은빛 늑대 용병단 분들! 여기 붕대 좀 빨리 가져다주세요!”
“맥스씨! 여기 빨리 강신초 좀요! 빨리!”
“······예! 갑니다!”
덕분에 겸사겸사 부상병들을 돌보는 치유사를 도우며 굵은 땀을 훔친다.
은빛 늑대 용병단 또한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제 임무가 아니라며 모른 척 하지는 못하는 이들이므로.
그를 비롯한 용병단원들, 그리고 제나와 제논도 이미 흰 옷이 누런 옷이 되도록 흙바닥을 뛰어다니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비롯한 수많은 치료사가 분주히 뛰어다님에도, 병상은 빠르게 부족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쏴라! 쉴 틈 없이 쏴! 화약을 아끼지 마라!”
“적들의 청동 대포는 식을 때까지 못 쏜다! 최대한 교대하면서 집중 포격해야 해!”
쿠광! 콰앙-!!
먼저 서부 연합군.
대륙 서부에서 으뜸이라는 라흐 대영주와 니케 대영주가 손을 잡았다.
3만이라는 막강한 군대가 힘을 합쳐 포격한다.
아무리 포격전만 한다지만 포병만 3천 명이 넘었다.
지이이잉, 쿠과과과광-!!!
그리고 검은 고성 엘도라도 측.
수성하는 상대방은 성벽에 장착한 초대형 청동 대포를 쐈다.
그 화력은 아군 철제 대포의 10배나 되는 힘.
한번 발포될 때마다 수십 명의 아군 포병들이 볼링공에 쓰러지는 핀처럼 쓸려나간다.
팔다리가 깨끗하게 날아간 병사들.
치료사들은 이들을 지혈하고 의족을 달아주기 바쁜 것이다.
“그나마 청동 대포는 한번 발포하면 3시간 가까이 식혀야 한다는 걸 알아서 다행이지. 청동 대포 한 쪽에만 있으면 되니까.”
“누가 아니래. 만약 평소처럼 군대를 펼쳐놨다면 각각 한발씩 맞으며 전멸할 뻔 했다.”
“그보다 마신 문두스님께선 그걸 어떻게 아신 거야? 설마 적군 측에서 활동하신 건······?”
“이 사람. 입조심하게! 그분은 수틀리면 귀족이든 뭐든 다 죽이는 거 몰라?”
“······.”
맥스는 병사들을 단순한 소모품처럼 여기는 서부 귀족들을 바라본다.
서부는 풍요로운 만큼 세수도 많아, 귀족과 평민의 격차가 매우 심했으니까.
팔다리를 잃고 애통해하는 병사들의 곡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저 귀족 새끼들은 우릴 쓰다 버릴 도구로 보는 건가? 그분이랑은 정말 다르네."
입이 걸걸한 제나 또한 남몰래 욕짓거리를 내뱉는다.
부상병들을 돌봐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들과 소수의 치료사 뿐.
그마저도 힘이 부쳐가고 있었다.
‘지금은 포격만 하고 있지만······. 만약 이대로 적군과 정면충돌한다면, 과연 전부 돌볼 수 있을까?’
벌써부터 끔찍했다.
수없이 실려 오는 부상자. 그리고 치료할 시간이 없어서 죽게 되는 사람들이 상상됐으니까.
그 비참한 미래를 알고 있으나,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게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
그렇게 일주일간 포격전이 이어졌을 때였다.
“저, 적들의 구원군입니다! 흑기사 군단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습니다!”
“뭐, 뭐야? 척후병들 뭐했어! 왜 그걸 지금 말해!”
“모두 전투 준비! 대열을 맞춰라!”
“!”
뿌우우우.
비상용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진다.
눈 좋은 한 병사가 고함치자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연합 사령부.
서부 귀족들이 허둥지둥 대며 쉬고 있던 병사들을 집합시킨다.
“위대하신 마계의 군주 엘드리치 폐하를 위하여!”
“아르카나 본부의 엘도라도를 구원하리라!”
투두두두두.
그러는 사이, 저 멀리 평야에서부터 질서정연하게 달려오는 흑기사들.
수천의 기사단이 달려오고 있거늘, 질서에 흐트러짐이 없다.
어떤 함성도, 잡담도 없이 오직 철저한 군기 하나 만으로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달려온다.
서부 연합군 병사들이 그 군기만 보고도 질겁하여 전투 의지를 상실할 정도로.
머릿수는 서부 연합군이 훨씬 많았지만, 질적인 측면이 차원이 달랐다.
“튜턴 기사단! 너희가 가서 막아라. 대형 방패를 사용해서 수비에 능하다면서!”
“뭐야? 왜 우리 기사단에게만 나서라고 해! 너희 기사단도 나서!”
“포병! 포병들이 원거리에서 쓸어버리자.”
“죄송하지만 성벽을 계속 포격하며 부수느라 현재 화약이 부족합니다!”
“제기랄! 스테파노 기사단! 우리 진형은 우리가 지킨다!”
반면 서부 연합군은 제대로 된 지휘 체계도 갖추지 못해 뿔뿔이 흩어져서 싸웠다.
대륙 서부는 전통적으로 나약한 영지가 잡아먹히는 곳.
대부분 영주들이 자신의 병력이 큰 피해를 입는다면,
훗날 다른 영주들에게 크게 밀릴 것을 걱정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으니까.
더구나 라흐 연합과 니케 연합이 서로 반목하며, 아직 믿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합심해서 막아내도 모자랄 판에 분열하고 있는 거다.
'큰일이다! 이대로면 전선이 흩어지겠어!'
잔뼈 굵은 용병인 맥스는 급박해지는 전황이 눈에 확 보였다.
전선.
이것이 파괴되는 건 대단히 위험했다.
아무리 아군 병력이 몇 배는 많더라도 전선이 무너지면 대회전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
일반 보병들은 대부분 강제 징집된 농노.
제 목숨 살기 바쁜 자들이므로.
전선이 무너지는 순간, 사방으로 달아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곳에 버려진 부상병들은 흑기사의 말발굽에 짓밟혀 전멸하고 말겠지.’
보병들을 붙잡고 싶다면,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싶다면,
그리고 살아남고 싶다면 그만한 용기와 리더십이 필요했다.
맥스는 제 고용주인 니케 대영주에게 달려간다.
“대공 저하! 지금은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흥! 천한 용병단장이 어딜 감히 여기로 들어오느냐! ······그러니까 우리 측에서도 구출 기사단이 나설 테니, 라흐 쪽에서도 새벽 기사단이 나서란 거 아니오!”
“그건 급이 맞지 않잖소! 새벽 기사단이 아니라 바위 기사단으로 합시다!”
“······.”
그러나 서부 귀족들은 끝까지 흥정을 할 뿐이었다.
마치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흥정하는 듯한 모습.
그러한 모습은 마치 악마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틀렸다······. 내가 마신 문두스도 아니고, 이들이 내 말을 들을 리가 없다······.’
그 모습에 맥스는 낙담했다.
정작 이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온 마신 문두스는 자리를 비운지 일주일이나 됐다.
홀로 활동하겠다는 이유로.
황제의 친위대 로얄가드가 추격해오기 시작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크아아악! 사, 살려줘! 난 죽고 싶지 않아!”
“왜 내가 귀족들을 위해 고기 방패가 돼야 해! 으악!”
그러는 순간에도 죽어나가는 병사들.
맥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그저 망연자실하게 검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검은 하늘.
태양마저 빛을 잃어버린 서쪽 하늘.
그 모습은 마치 여신께서 추악한 인간들의 행태를 눈뜨고 보지 못하는 듯 보여서.
······먼 옛날, 트롤이 날뛰던 검은 숲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처럼.
이 전황을 끝내줄 영웅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뿌우우우-!!!
무너지는 전장에 이변이 일어난 건 그 무렵이었다.
‘네카르 경?’
맥스는 혹시나 싶어서 확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상대는 네카르는 아니었다.
[······과연. 네카르 말대로 전속력으로 달려온 보람이 있구나.]
“!”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백마를 탄 기사단이 나타난다.
흑기사들과 정반대되는 백갑옷을 입은 성기사단.
그들은 프레야 교단임을 알리는 성스러운 깃발을 나부끼며 달려왔으니.
[나는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 프레야 교단 총 사령관으로서 명한다.]
“······!”
태양처럼 빛나는 여인이 신성력과 살기를 동시에 번뜩인다.
루크레치아.
그녀의 이름은 일개 용병단장인 맥스 또한 익히 들었다.
계속된 내전과 불행으로 찌든 대륙 서부를 수년간 중재하며 평화를 인도해온 전투 성인이었으니.
[지금부터 프레야 교도들은 모두 나를 따라라. 악의 교단과의 전쟁에서 탈영은 곧 죄악일 지어니.]
모든 프레야 교도는 자신을 따라라.
아르카나 대륙은 모두 프레야 교단을 믿었으므로.
전 병력보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는 말이었다.
“루크레치아 예하! 당신이 뭔데 우리 군대의 지휘권을 강탈합니까?”
“맞습니다! 당신이 권한 대행으로 나설 수 있을 때는 오직 지휘할 영주가 전멸했을 때 뿐. 월권행위 하지 마십시오!”
물론 제 이익 지키기 바쁜 영주들은 반발한다.
그러나 루크레치아는 프레야 교단의 가장 잘 드는 칼.
수십 년간 영주와 악마를 처단한 전투 성녀였다.
이 정도에 굴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짙은 살기를 내뿜는다.
[내가 정녕 너희 목을 전부 베어버리고 나서야 권한대행으로 인정하겠느냐.]
살벌한 한마디.
모두가 입을 닥친다.
지금 전황은 급박하며, 힘으로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를 막아설 수 없으므로.
오합지졸의 귀족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총 지휘에 나서는 것이다.
[모두 창을 고쳐들어라. 신께선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시니.]
번쩍! 투두두두.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가 쥔 성검 듀란달이 찬란하게 빛난다.
그녀를 뒤따라서 달려오는 백기사단.
쿠과과과광-!!!
루크레치아의 신성 검기가 사방으로 분출된다. 횡으로 날아드는 검기가 몇 번이고 난폭하게 흑기사단을 물어뜯는다.
그리고 일대 전체를 감싸는 광원.
일대 흑기사단을 쓸어버린다.
우와아아아아-!!!!
맥스를 비롯한 서부 연합군은 자신들도 모르게 힘껏 함성을 지른다.
죽음의 사신처럼 달려오던 흑기사단.
그들마저 물리치는 프레야 구원군이 도착했으므로.
프레야 여신께서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음을 자각하는 거다.
[물러서지 마라. 지금 이건 성전(聖戰)이다.]
루크레치아의 지휘 아래 드디어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를 치룬다.
사방을 둥글게 빛내는 빛 속에서 격렬한 전사들의 전투가 벌어진다.
서부 연합군은 창을 들고 흑기사단의 진격을 막는다.
성기사단은 서부 연합군을 덮치느라 등을 보인 흑기사단을 역으로 덮친다.
하나의 신앙, 하나의 마음으로.
전세를 뒤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