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웨어울프 (2)
폭왕 라이칸 슬로프는 지하 감옥에서 풀려났다.
탐욕왕 엘드리치와의 계약.
아룡기사 네카르를 죽이는 대신, 웨어울프 일족 전체를 구할 해독약을 댓가로 받기로 했기에 일시적으로 풀려난 것이다.
[큭큭, 그래도 손발엔 아직 구속구가 채워져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내 마음만 먹으면 널 언제든 다시 처넣을 수 있으니.]
“······.”
철컹.
라이칸 슬로프는 팔목과 발목마다 붙어있는 칠흑 같은 구속구의 재질을 살핀다.
아다만티움.
마계에서도 극히 희귀한 특제 강철.
들끓는 용암에서 수십 시간 이상 푹 끓여야 겨우 녹는 물질로 묶어놨으니.
아무리 사왕(四王) 중 한 명으로 불리는 라이칸 슬로프라도 힘으로는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마계에서 튀어나온 구더기답게 별걸 다 만들어놨구나.”
그런데도 라이칸 슬로프는 통신 구슬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이름 모를 성에서 나왔을 때 보인 건 거대한 공사 현장이었다.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베어낸 민둥산.
수천 명의 노예가 그곳에서 검은 벽돌을 쌓아 올리는 중이었다.
몇몇 흑마법사는 흑요석과 마력석 등을 가져다 마법진까지 만들고 있다.
공중요새 라퓨타.
드디어 설계를 끝마친 궁극의 마도공학 병기를 띄워 올리기 위해 거대한 성을 만들고 있다.
‘이런 거대한 구조물이 하나가 아닌 건가?’
라이칸 슬로프는 짐승처럼 갈라진 눈으로 대포 하나를 살핀다.
우르반이라고 새겨진 마법 청동 대포는 하나를 옮기기 위해 소 50마리가 끌고 가고 있으므로.
지이잉, 콰아아앙!
목적지에 도착한 후, 정상적으로 가동하는건지, 무력 시위를 하는 것인지 사격한다.
숨이 턱 막히는 사악한 마력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굉음이 발생한다.
단 일격에 가까운 산봉우리 하나를 소멸시킨다.
그 모습에 환호하며 박수 치는 흑마법사들.
만약 저 마법 청동 대포가 실전에서 쏜다면 일격에 숲이 불타고, 인간들의 성조차 박살 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구조물의 크기를 보면 저런 대포가 한두 개가 부착되는 게 아닌 것 같다.
“······거악(巨惡) 엘드리치. 한 줌의 금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탐욕 때문에, 기어이 대륙 전체를 소멸시킬 병기를 만드는구나.”
라이칸 슬로프는 송곳니를 씹는다.
거악 (巨惡).
홀로 지역을 멸망시킨다는 마계의 악마 중에서도 왕으로 군림하는 자.
그 존재의 표독스러움을 여실히 체감했으므로.
“네놈. 지금 감히 엘드리치 폐하를 모욕한 거냐?”
“죄수 주제에. 천한 웨어울프 주제에 제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구나.”
그 혼잣말을 들은 인간 흑마법사와 흑기사가 환호를 멈추고 돌아본다. 그들의 충성심은 여실한지 진심으로 사악한 마력을 뿜어낸다.
라이칸 슬로프와 눈이 마주친다.
그 순간, 라이칸 슬로프가 사라진다.
서걱, 쫘아악! 쩌어억.
어느새, 그들 등 뒤에 나타난 라이칸 슬로프.
한 박자 늦게 흑마법사와 흑기사가 반으로 갈라져 죽는다.
이형환위 (移形換位).
지고한 경지를 뚫고 환골탈태를 겪은 초강자들만이 시전할 수 있는 비기.
4써클 일반 마법사의 폭격까지 막아준다는 흑기사의 갑옷조차 깨끗하게 잘려나간다.
주위에 있던 흑마법사들과 흑기사들이 기겁하며 달아난다.
땡, 땡, 땡 산맥 전체에 울리는 비상 종.
달려드는 시큐리티들까지 모조리 베어버린다. 우르반 청동 대포가 겨누기 전에 포구를 피한다.
[라이칸 슬로프.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지? 정녕 죽고 싶은 게냐!]
파치치지직!
그제야 다시 울리는 엘드리치의 통신.
손목발목에 부착된 아다만티움 구속구에서 검은 전격이 뿜어진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라이칸 슬로프.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살기 어린 눈을 뜨며 읊조린다.
“너와 언약한 건, 네카르를 죽이고 해독약을 받는 것 뿐. 그 외의 시간 제약도 없으며, 네 부하들을 공격하면 안 된다는 조항도 없다.”
[뭐라?]
“네놈이, 굳이 나까지 불러서, 부탁한 거라면 정말 다급한 상황이겠지.”
파치직.
라이칸 슬로프는 검은 전격 속에서도 일어선다.
왕이라는 이명이 붙은 만큼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다.
“날 죽일 테면 마음대로 하거라. 나는 부러질지언정 굽힐 생각 없으니.”
콰앙.
앞으로 걸어가며 모든 것을 파괴한다.
배짱 싸움.
누가 더 급한지 대결해보자는 것이다.
탐욕왕 엘드리치 또한, 아룡기사 네카르를 죽이고 마정석을 되찾아야 하므로.
[······길을 비켜 줘라. 굳이 이 이상 손해를 볼 필요는 없을 테니.]
따라서 탐욕왕 엘드리치가 명령한다. 그제야 포위했던 흑기사와 시큐리티들이 물러난다.
라이칸 슬로프는 갈라진 길을 따라 달린다. 지급 받은 마력 탐지기를 따라 이동한다.
그 또한 동족이 죽어가고 있기에 시간이 촉박하므로.
투두두두.
끝없이 흙길을 밟는다.
라이칸 슬로프는 본능적으로 익숙한 길이란 걸 깨닫는다.
웨어울프의 굴.
자신의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으므로.
“······일족의 무덤인가.”
그 와중에 쌓여있는 돌무더기를 발견한다. 웨어울프의 발톱 자국이 남아있는 돌무더기.
라이칸 슬로프는 눈을 감는다. 어깨가 축 처진다.
해독제를 구하고 돌아오겠노라고 각오하고 떠났거늘. 빈손으로 먼저 돌아오게 되었으니.
우연일지 필연일지 모를 운명에 씁쓸함을 곱씹는다. 일족의 왕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그와 동시에 지급 받은 의뢰서를 펼쳐본다.
“······네카르라고 했나? 이럴 수밖에 없는 날 원망하거라. 일족을 구하기 위해선 악마라도 될 터니.”
그저 고요히 묵념하며, 결전을 대비해 긴 손톱을 갈고 닦는 것이다.
***
나는 웨어울프들과 함께 질주한다.
태양의 돌.
그 돌만 있으면 웨어울프들의 광랑병을 극복할 수 있으므로.
최대한 빨리 발굴하기 위해 찾아가는 것이다.
‘다행히 인근에 도시가 있어서 다행이었군.’
나는 노예들을 풀어주고 믿을 만한 상단에게 뒷일을 맡겼다.
황금 상회에게 지급 받은 막대한 투자금이 있으니.
적들의 시체는 웨어울프들이 잔뜩 훼손했으니, 뒤탈도 없겠지.
그렇게 한참 달리자 웨어울프 십인대장 바르셀이 묻는다.
“······어르신께서는 왜 저희를 도와주시는 건가요? 우리 종족과 전혀 연관이 없으실 텐데?”
-lv21 웨어울프 십인대장 바르셀. (나약화.)
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 공손히 묻는다.
심지어 나를 반로환동의 대마법사로 여겼는지 어르신이라는 존칭까지 붙인다.
‘왜 연관이 없어? 태양의 돌과 너희 마정석을 교환해야 하는데.’
마정석.
그것을 빼앗으면 엘드리치가 복구하는데 수많은 악마와 흑마법사를 희생시켜야 하므로.
웨어울프에겐 아무것도 아닌, 오히려 숲을 오염시키는 돌과 교환하려고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윈윈 교환.
‘더구나 웨어울프는 전투 종족. 거기에 엘드리치에게 강한 반감을 가진 종족이니까.’
향후 대결전 때, 함께 맞설 세력으로 구한다.
물론 웨어울프들은 속물들을 매우 싫어하는 종족.
대놓고 그렇게 말하진 않는다.
“먼 옛날, 웨어울프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적이 한 번 있다.”
따라서 적당히 거짓말한다.
아직 저들이 잔뜩 경계하고 있으므로.
웨어울프의 굴 근처까지 날 들여도 될지 걱정하지 않도록, 나름 사연을 지어내서 안심시킨다.
“지금은 죽은 내 벗이지. 너흴 돕는 건 순전히 그 녀석이 떠올라서이다.”
당연히 신경 쓰라는 의미다.
아무 댓가를 바라지 않고 돕는다는 은유적인 표현.
“나는 그 녀석과 ‘피의 맹세’를 했으니까. 동족을 도울 의무가 있다.”
“!”
더구나 웨어울프만의 풍습을 일부러 언급한다.
피의 맹세.
웨어울프는 진정 동료로 여기는 자와 서로 손바닥에 피를 내서 피를 교환하는 의식이다. 웨어울프는 같은 피가 흐르는 동족을 매우 아끼므로.
다른 웨어울프가 나를 그 정도로 믿었다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러자 바르셀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 숙인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말씀해주신 태양의 돌만 구해주신다면 평생 공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살겠습니다.”
됐다!
나는 1차 목적을 이뤄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웨어울프. 이들은 은인이나 원수를 잊지 않기 위해 제 몸에 문신으로 새기는 풍습이 있으니.
각골난망(刻骨難忘)하겠다는 건 동족 이상으로 여기겠다는 뜻이다.
“슬슬 아르타 영지로군.”
【바람의 길 lv4.】
다만 나는 겉으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아르타 영지까지 달린다.
다행히 나는 말을 타고 있고, 웨어울프들은 숲의 종족인 만큼 달리기가 말처럼 빠른 덕분이다.
“태양의 돌은 어느 쪽입니까?”
“세 개의 큰 바위. 근처에 계곡이 있는 지형이다.”
나는 원작 <별들의 전쟁2>에 보였던 지형을 언급한다.
물론 이 정도 설명은 숙련된 길잡이도 이맛살을 찌푸릴 만한 짧은 설명이지만.
평생 이 숲에서 살았던 웨어울프들은 간절함 속에 대략적인 지점을 찾아낸다.
빠른 속도로 계곡 쪽을 둘러보며 용의선상을 지워나간다.
“저건?”
“······자이언트 베어다.”
-lv31 자이언트 베어. (암흑 강화.)
물론 이 숲은 인간의 손길이 잘 닿지 않은 땅. 강력한 몬스터 또한 있었다.
마정석이 근처에 있기 때문인지 어둠의 힘으로 평소보다 훨씬 강화된 몬스터들.
“은공께서는 계속 수색해주십시오. 저 괴물은 저희가 처치하겠습니다.”
-lv25 웨어울프 베오. (늑대화.)
-lv29 웨어울프 십인대장 바르셀. (늑대화.)
이에 흰 털을 길게 뽑으며 늑대처럼 변신하는 웨어울프들.
인간형으로 여리 여리했던 웨어울프들이 순식간에 포식자로 모습을 변신시킨다. 레벨도 거의 10단계 가깝게 오른다.
-캬오오오오-!!
그리고 나서는 집단 사냥.
아무리 자이언트 베어가 레벨이 더 높아도, 그 수 차이가 막대하니.
무리 사냥을 하여 급소를 노리니 순식간에 처치 당한다.
‘······아군으로 둬서 다행이군.’
그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저런 웨어울프가 한 둘이 아닐 테니까.
만약 엘드리치가 저들을 흑마법으로 완전히 세뇌해서 적으로 마주해야 했다면, 대단히 곤란했을 거다.
압도적인 기동력을 가진 집단 게릴라 부대로서 맹활약했을 테니.
‘일반 십인대장이 이 정도니까, 폭왕 라이칸 슬로프가 그렇게 괴물 같은 놈이었겠지.’
나는 저런 웨어울프들의 정점을 떠올린다.
폭왕 라이칸 슬로프.
무려 거악 엘드리치의 군단을 상대로 이틀이나 버틴 괴물이다.
아무리 엘드리치가 직접 전투에 특화되지 않은 군주라고 해도, 이는 가히 위대한 전과.
같은 사왕 중 하나인 ‘검왕(劍王)’이 현재 니케아 제국 최고 기사이자, 황제 세실리아를 지키는 ‘로얄가드의 수장’이니 그 강함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만약 태양의 돌을 구하면 어쩌면 그와 동맹을 맺을 수도 있을 터.’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지금은 원작과 달리 폭왕 라이칸 슬로프를 비롯한 웨어울프들이 완전히 타락하지 않은 상태니까.
‘더구나 내겐 요정의 마법 가루와 아다만티움 수갑을 풀 방법도 있으니.’
영 불가능한 건 아닐 것이다.
“찾았습니다! 바위 세 개에, 계곡이 흐르는 지형!”
“······!”
그렇게 하루종일 숲을 돌아다닌 결과 원하는 지형을 찾았다.
나는 원작 게임 속 화면과 똑같은 장소에 확신의 미소를 짓는다.
“노움.”
-우우움~!
쿠구구구!
당장 노움을 동원해서 흙을 모조리 뒤엎는다. 1초 만에 마치 운석이 떨어진 듯 파인다.
그리고 흙 속에 숨겨져 있던 태양 같은 보석을 발견한다.
‘감정.’
[이름 : 태양의 돌 (SUPER RARE.)]
[설명 : 고대 하이 엘프가 제작한, 태양의 힘이 간직된 돌. 발동 시 주위를 환하게 밝히며, 다른 모든 빛을 몰아낸다.]
* 주의! 월광석과 함께 사용 시, 태양의 돌이 우선됩니다! 달빛의 힘을 제거합니다!
찾던 보물이 맞다!
대륙 서부 히든 퀘스트.
보름달의 힘이 담긴 월광석을 통해 웨어울프들을 폭주시킬 것인지, 태양의 힘으로 그들을 구원할 것인지 고를 수 있는 아이템.
그중 웨어울프 일족을 구원할 보석을 드디어 찾았다.
***
대륙 서부 ‘큰 바위’ 웨어울프 부족의 굴.
족장 ‘베르무스’는 임시 굴속에 숨어서 달빛을 피한다.
광랑병.
그 저주받은 질병 때문에 이젠 달빛만 봐도 공포감이 드니까.
실제로 보름달 빛을 본 동족들이 떨어진 낙엽처럼 흙바닥에 쓰러져있으니.
어린 동족이 오들오들 떨며 색색 숨을 쉬는 걸 볼 때마다 마음에 멍이 하나씩 느는 듯 했다.
“조금만 참어라. 오늘밤만 지나면 정말 괜찮아 질 테니······.”
그녀가 이번 주에만 몇 번 씩이나 속삭인 말.
성체 웨어울프들이 흰 털로 포근하게 안아주지만 달빛을 본 어린 것들은 오한이 멈추질 않는다.
베르무스는 어린 것들의 찐득한 땀을 닦아주며 속삭였다.
‘달이시여. 어찌 저희에게 이리 큰 시련을 주십니까?’
광랑병.
단순히 보름달이 뜨는 동안만 몸을 숨기면 되는 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웨어울프의 굴에 ‘사악한 돌’이 떨어졌으니.
그 사악한 검은 돌은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더럽게 만들고, 제 동족마저 못 알아보는 안하무인으로 만들었다.
‘물론 우리들은 큰 굴을 빠져나와 임시 굴로 대피했지만······.’
지능 없는 몬스터들은 대피하지 못하고 폭주했으니.
임시 굴까지 부수며 덤벼드는 상황에서 맞서 웨어울프로서도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인간 밀렵꾼들은 보름달에 약하다는 걸 눈치채고 지독하게 보름달만을 노렸으니.
그 과정에서 하나 둘씩 광랑병에 감염됐다.
‘이젠 슬슬 한계다······. 위대한 왕 라이칸 슬로프이시여. 도대체 언제 돌아오십니까?’
호흡이 과다하다. 폐가 찌르는 듯 아프다.
지독한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웨어울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 라이칸 슬로프.
광랑병의 치료제를 찾아오겠노라고 말한 그 영웅이 자신들을 잊는 악몽.
이는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 저버리는 꿈이었으니.
남몰래 손을 꾹 주먹 쥔다. 힘줄이 곤두선다.
“베르무스님! ‘바리’ 상태가 심각합니다! 고열에 의식을 잃은 것 같아요!”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 웨어울프 사내가 고함쳤다. 베르무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린 웨어울프 ‘바리’.
베르무스 또한 친자식처럼 키웠던 아이.
정식으로 양자로 들인 건 아니지만, 부모가 일찍 죽었기에 특히 신경 써서 키운 아이다.
베르무스의 남편 또한 일찍 죽었으므로.
그런 아이가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고 한다. 황급히 달려간다.
“정신 차려라. 바리. 넌 라이칸님처럼 위대한 전사가 되기로 하였잖느냐. 이겨내야 해!”
베르무스는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삼킨다.
품에 안은 아이는 초점 없는 눈으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목 말라······. 목······. 목이 너무 말라요······.”
바싹 마른 입술.
베르무스는 당장 가져다주려 했으나, 임시 굴에 물이 다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충분히 떠놓았으나, 광랑병을 앓는 환자가 원체 많았으니.
한 웨어울프가 황급히 달려나가지만, 샘물은 멀리 있다. 이대로는 물을 떠오기 전에 바리의 숨이 끊어질 터.
“물이, 마시고 싶어요······. 무울······.”
마지막 목소리마저 쇠약해진다. 체온이 너무 뜨겁다.
베르무스는 직감했다.
단, 3분.
기적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
이 아이에게 남은 시간은 길어야 3분이리라.
‘나는, 족장으로서, 이 아이의 마지막 유언조차 들어주지 못하는 건가······.’
무력함을 느낀다.
이 어린 것의 작은 유언조차 들어주지 못하다니.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족장일 터다.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든다.
“앗, 베르무스님!”
푹.
한 동족이 뾰족한 비명을 지른다.
베르무스가 긴 손톱으로 제 손바닥을 찔렀으니.
뜨거운 피가 흘러나온다.
바리의 바싹 마른 입술에 가져다댄다.
“그래······. 여기 물이란다······. 어서 마시렴.”
베르무스는 어린 동족이 제 손바닥을 혀로 핥는 것을 느낀다.
그녀 또한 광랑병에 죽어가고 있지만.
제 자식 같은 아이를 위하여.
기꺼이 피를 나눠준다.
“물······. 목이 말라요. 더, 더 주세요······.”
초점 없는 아이는 금세 마르는 손바닥을 핥으며 울먹인다.
이에 베르무스는 자상하게 속삭이며 말한다.
“그래, 아이야······. 물은 여기 더 있단다······. 마음껏 마시렴······.”
피가 마른 손은 아이의 눈을 가린다.
혹여 아이가 진실을 봐버릴 까봐.
그 또한 베르무스를 어미처럼 따랐으므로.
마지막까지 죄책감이 들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임시 굴에 두 가지 소리만 울린다.
하나는 아이가 달콤한 물을 삼키는 소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 소리.
광랑병에 걸린 웨어울프도, 그들을 간호하던 웨어울프도 혹여 아이가 눈치 챌까 숨죽여 꺽꺽 우는 것이다.
“······엄, 마.”
그리고 수초 후,
아이의 눈을 가린 손에 물기가 묻는다.
베르무스는 순간 경직된다.
“고마워요······.”
모든 힘을 쥐어 짠 한 마디.
하지만 그 한 마디에 족장 베르무스는 와락 끌어안는다.
소리 내어 울었다.
광랑병을 원망한다. 보름달을 원망하며, 이 와중에도 아름답게 흩날리는 수풀을 원망한다.
서사시를 보면 슬픈 일이 있을 때, 함께 울어준다면서.
왜 자신들의 일엔 함께 울어주지 않느냐고.
왜 자신들에게만 이토록 혹독한 거냐고 말이다.
샤아.
“······?”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희미한 빛이 다가오는 걸 느낀다. 태양 같은 빛이 달려온다. 임시 굴까지 빠르게 다가온다.
“······어?”
그와 동시에 광랑병에 앓던 바리가 열이 내려간다. 다른 광랑병 환자들도 서서히 통증이 완화되는 걸 느낀다.
놀란 토끼 눈이 된다.
‘······설마 왕께서?’
베르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벅찬 감동을 느낀다.
자신들의 위대한 왕 라이칸 슬로프.
그분께서 드디어 돌아오신 줄 알고.
번쩍!
또각또각.
그러나 임시 굴에 들어온 건 인간 사내였다. 황금빛 머리카락에 깊은 푸른 눈을 가진 사내.
어쩐지 차가운 눈매를 가진 사내가 임시 굴을 훑어본다.
“아이가 아픈 모양이군.”
콸콸콸.
그는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서 아이 입술에 붓는다. 그와 동시에 터져나오는 성스러운 빛.
튄 물방울만으로도 베르무스의 상처까지 완벽히 치유된다.
그걸 보고 베르무스는 나이가 지긋한 전사인 만큼 눈치챘다. 저것이 얼마나 귀한 성수인지.
그러나 막상 당사자는 무심하게 읊조린다.
“전사는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들었는데.”
태양처럼 빛나는 돌을 더욱 번쩍인다.
“눈에 먼지라도 들어간 모양이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빛.
찬란한 빛에 광랑병이 소멸한다.
기적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