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환상의 숲 테레이아 (3)
무거운 침묵이 공간을 짓누른다.
중력 제어를 풀어준 후에도 페어리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페어리들도, 날 변호해주던 페이도, 페어리 여왕 티타니아도 입을 쩍 벌릴 뿐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저 침묵.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지, 한참이나 멍하니 날 바라볼 뿐이었다.
“······흠흠, 저, 정말로 대단한 자로군. 설마 이 정도 실력일 줄이야. 의심해서 미안하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역시 여왕 티타니아였다.
나름 여왕이자 가장 높은 레벨의 소유자로서, 헛기침하며 날 치하한다.
그러나 미세하게 떨리는 동공.
본능적으로 무언가 두려움을 느끼는 모양이다.
“사악한 돌이 있다는 마을은 어디입니까?”
“바로 저쪽일세. 그보다 잠시 기다려보게. 여왕으로서 약속한 마법 가루를 선물해줘야 하니.”
티타니아의 손짓에 페어리 근위병 하나가 마법 가루를 가져다준다.
마법 아티펙트를 강화할 때, 대단히 유용한 아이템.
그러나 당장 쓸 보물은 아닌 만큼 감사히 받아두고, 곧장 마정석이 있다는 페어리의 원래 마을로 향했다.
‘제5군단장 탐욕왕 엘드리치가 나서기 전에 구해야 한다······. 그 녀석이 군단을 보내면 끝이니.’
나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
탐욕왕 엘드리치.
그가 서부에 숨겨둔 군대는 무궁무진하니.
그들은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다.
공중요새 라퓨타의 완전한 강림을 막기 위해서는,
그가 마정석 위치를 알아차리기 전에 최대한 빨리 수거해야 한다.
또각또각.
페어리의 여왕 티타니아가 목적지로 안내한다.
결계로 봉인한 마을.
그런데도 사악한 기운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현재 다크 님프만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다크 님프. 심지어 님프왕 ‘오베론’도 있던 곳이었지.’
나는 표정을 굳힌다.
원작 게임에서 그곳에 있던 필드 보스 또한 만나봤으니까.
님프왕 오베론.
페어리 여왕 티타니아가 환술의 대가라면, 그는 물리적으로 숲의 정령과 동식물을 지배하고 강화하는 권능을 가진 존재.
수천 마리의 다크 님프를 부리는 필드 보스다.
환술이 통하지 않는 내게는 안 그래도 티타니아보다 훨씬 위협적인 존재일 텐데, 거기에 마정석의 힘으로 강화까지 됐을 테니까.
아무리 나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바로 갈 건가?”
페어리 여왕 티타니아가 말한다.
당연히 함께 따라오려는 눈치. 본래 자신들 일인 만큼 내게 홀로 맡길 생각은 없어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페어리 군단을 이끌고 초록색 결계가 펼쳐진 곳으로 향한다.
공중요새 라퓨타의 핵심 동력이 되는 마정석이 있는 곳으로.
나는 소형화 마법을 풀고 엄지공주만 한 페어리 수백 마리의 호위를 받으며 결계 문을 연다.
지이잉.
-경고! 이 결계 안은 마계 급으로 지독한 마기가 넘실거리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진정 안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과연 공기부터 남달라서 그럴까.
시스템 창이 먼저 날 마중한다.
나는 남몰래 고개를 주억거린 후, 안으로 한 걸음 내디딘다.
바스락.
고오오.
땅을 밟는 순간, 바싹 메마른 나뭇잎이 느껴진다.
다음 걸음에는 첨벙, 움푹 빠지는 촉감이 느껴진다. 바닥에는 검은 물이 가득 고여있으니까.
다다음에는 질겅, 거리는 썩은 나무뿌리가 밟힌다. 그다음 걸음에는 몰캉, 죽은 동물이 밟히는 느낌이 전해진다.
키 높은 나무들이 햇빛을 가리면서도 죽어 있어 더욱 기괴한 냄새를 풍긴다.
페어리들이 돌봐서 항상 4계절이 가득할 정도로 생명력이 가득한 환상의 숲 테레이아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검은 환경.
그것도 결계 안으로 몇 걸음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런 풍경이다.
“네일······!”
검은 숲에서 풍기는 사악한 힘을 느낀 걸까?
두려움에 질려서 내 가명 네일을 부르는 페어리 페이.
하지만 두렵다고 하여 아군 사기를 꺾을 필요는 없는 법.
나는 겉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계속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나는 이미 수많은 악마와 악의 군단장들을 상대한 몸.
더구나 앞으로 가야 할 길은 훨씬 고된 가시밭길일 터이니.
이 정도로 멈춰설 수 없다.
***
페어리 소녀 페이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이건 도대체······?’
현재 페어리 일족은 네일이라는 인간 사내 하나를 따라가고 있다.
오직 한 사내.
황금빛 머리카락에 깊은 푸른 눈을 가진 젊은 인간. 그의 그림자를 뒤따른다.
쐐애액!
그때 날아온 가시넝쿨들. 수십 가닥의 넝쿨이 날아든다.
숲에 숨어있던 다크 엔트가 외부 생명력을 느끼고 썩은 넝쿨을 쏘아낸 거다.
촤아아악! 팅!
이에 허공에서 즉시 물의 방패가 형성된다. 암흑의 힘에 강화된 썩은 넝쿨을 모조리 막아낸다. 송곳처럼 날아드는 나무 파편 또한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인간 사내는 다크 엔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계속 걷는다.
‘부, 분명······. 마법이란 건 영창을 해야 시전할 수 있는 거 아니었나?’
그녀가 알고 있는 상식이 깨진 상황.
페이를 비롯한 페어리 모두가 납득되지 않은 표정이지만, 일단 굳게 따라간다.
그때,
펄럭펄럭, 펄럭!
-lv27 님프. (암흑 조종.)
-lv24 님프. (암흑 조종.)
.
.
검은 요정이 하늘을 떼로 뒤덮는다.
아직 태양이 떠 있음에도 밤처럼 변해버리는 기과한 숲.
페어리와 인간을 빼곡히 포위한다.
님프는 체격이 페어리보다 몇 배는 큰 만큼 본능적으로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고고고고! 쐐애애액!
그러한 다크 님프들이 일제히 흑마법의 창을 만든다.
썩은 숲에 넘실거리는 사악한 힘을 한 점으로 모아, 일직선으로 날린다.
“헉······?”
페어리들은 모두 식겁한다.
한 발 한 발이 죽음의 광선. 저것들이 덮쳐지는 순간, 자신들은 전멸할지도 모르므로.
페어리가 님프와 대등했던 이유는 환술 덕분이지 물리적인 힘이 아니니까.
고오오.
그러나 사내는 그저 품에 들고 있던 붉은 눈의 스태프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붉은 눈의 스태프가 새빨갛게 타오른다.
사악한 힘에 지배당한 다크 님프조차 흠칫 놀랄 만큼 형형한 빛.
마치 악마처럼 빛나는 구슬이 뜨겁게 타오른다.
스태프에 걸린 푸른 에메랄드가 박힌 왕관 또한 시퍼런 한기를 머금은 새하얀 빛을 뿜어낸다.
촤아아악-!!
그와 동시에 솟아난 물의 벽.
물의 중급 방어 마법 ‘아쿠아 월’이 하늘 높게 치솟는다.
아치를 만들어서 사악한 숲 정중앙으로 들어가는 길 전체를 감싼다.
수백 개의 암흑의 창을 모조리 막아낸다.
“굉장해······.”
페어리 페이는 솔직하게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단 한 번의 마법으로 전황을 뒤바꿔버리다니.
페어리 여왕 티타니아를 비롯하여 장로와 근위병 모두 감탄하는 눈치.
이윽고 마을 핵심부로 도착한다.
고고고고고-!!!
그 안에는 거대한 돌이 있었다. 숲의 상징이자, 가장 큰 나무인 ‘어린 세계수’에 박힌 사악한 돌.
페어리 마을로도 모자라, 환상의 숲 테레이아 전체를 어둠으로 뒤덮으려는 돌이다.
마정석.
분명 인간 사내는 저 돌을 그렇게 불렀다.
“······저분은?”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정석을 지키고 있는 건 훤칠하게 생긴 중년 사내였다.
님프의 왕 오베론.
비극의 시작되기 전까지, 페어리의 여왕 티타니아와 둘도 없던 연인이었던 사내.
그러나 사악한 돌을 정화하겠다고 홀로 떠난 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은 왕이었다.
-크르, 크아아아!
“······!”
타락 님프가 된 오베론은 페어리의 여왕 티타니아를 알아보고 포효한다.
그의 포효에 검은 숲 전체가 출렁이며, 숲의 모든 나뭇가지가 인간 사내를 겨눈다.
턱.
-크으으······!
그러나 오베론은 흑마법을 시전하려던 오른손을 제 반대 손으로 붙잡는다.
본능을 억제하기 힘든지 몸을 부르르 떤다.
“오베론······.”
페어리의 여왕 티타니아 또한 그런 오베론을 알아보고 입을 틀어막는다. 자신의 연인이 검게 변해버린 모습을 바라만 본다.
“오랜만이구나. 오베론.”
다만 먼저 걸어가던 인간 사내는 마치 옛 친우를 만난 듯 입을 열었다.
“널 처음 봤을 땐, 그토록 두려웠거늘.”
쿠과아아!
하늘 높이 올리는 왼손.
그와 동시에 오베론이 하늘 높은 곳으로 끌려간다. 덮쳐오던 사악한 나무줄기도 그대로 멈춰버린다.
“이제보니 사정이 딱하구나.”
사내는 그렇게 읊조리고 다시 뚜벅뚜벅 걷는다.
‘주, 중력 마법······? 그렇단 말은?’
페이는 방금 사내가 시전한 마법을 알아본다.
중력 마법.
물체는 하늘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가장 기본적인 아르카나 대륙의 법칙조차 거스르는 궁극의 권능 중 하나.
이것이 가능한 존재는 아르카나 대륙에 단 한 종족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드, 드, 드래곤······?’
온몸이 떨린다. 심장박동이 뛴다. 스스로 떠올린 그 이름이 너무 무거워 받아들이기 힘들다.
드래곤.
만물의 영창이자 질서의 수호자.
홀로도 세상을 평탄하게 만든다는 존재.
그러나 분노할 경우, 숲은 물론, 대륙 전체를 멸망시키려는 악룡이 되기도 한다는 존재.
고대 용의 시대를 끝으로 멸족했다고 전해졌거늘.
살아남은 용족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
-마정석을 정화하셨습니다! 주위로 발산하던 사악한 힘이 멎어 듭니다!
-마정석 조각을 총 2개 모으셨습니다! (현재 2/4)
* 다음 마정석 조각은 ‘웨어울프의 굴’에 보관돼 있습니다!
나는 시스템 창이 뜬 것을 보고 마정석에서 손을 뗀다.
성물 아가타의 성배를 통해서 끝없이 성수를 퍼부은 결과, 역시 마계 최고의 보물 중 하나라는 마정석조차 성스러운 힘에 잠식됐다.
‘후, 그보다 죽는 줄 알았군······.’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아무리 나라도 타락한 숲에서 다크 님프 부족 전체를 상대하는 건, 그것도 일방적으로 방어만 하는 건 대단히 고된 일이었으므로.
-lv50 님프의 왕 오베론. (타락화.)
페어리의 여왕 티타니아보다 레벨이 무려 5단계나 높은 괴물 오베론을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해야 하는 일이었다.
마법사로 따지면 흑마법의 강화를 받은 4써클 5티어 마법사를 안전하게 제압해야 하는 일.
아무리 내가 시스템의 힘과 용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이는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오베론······!”
님프의 왕 오베론에게서 사악한 힘이 사라지자, 페어리의 여왕 티타니아가 당장 와락 안긴다.
물론 서로 크기 차이가 있지만, 티타니아가 ‘거대화’ 권능으로 오베론의 크기에 맞춘다.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는다.
“여긴······? 잠깐. 너는, 티타니아······?”
오베론 또한 자신을 부축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반색한다.
쌓인 감정이 있었는지 마찬가지로 티타니아를 끌어안고 운다.
‘하기야 저 둘은 원작 <별들의 전쟁2>에서도 몇 안 되는 연인 보스였지.’
지금보다 10년 후인 원작에서는 티타니아 또한 타락화하여 사이좋게 숲을 지켰으니까.
비록 그땐 마정석은 이미 회수됐는지 없었지만, 이런 사연이 있었는 줄은 나도 몰랐다.
‘그런데, 이 거대한 나무는 설마?’
나는 마정석이 박혀있었던 거대한 나무를 살핀다.
1,000년 묵은 엘프목보다 두 배는 커다란 나무.
숲 밖에서도 보여서 영지민들이 ‘악마의 나무’라고 부르던 나무였다.
심지어 괴조 카디악처럼 ‘X’문양의 검은 반점. 탐욕왕 엘드리치의 암흑 인장이 새겨진 나무.
샤아아아!
마정석이 정화되고 성수가 뿌리에 가득 뿌려지자 이 나무 또한 찬란하게 빛난다. 이윽고 그 빛은 환상의 숲 테레이아 전체를 뒤덮는다.
-정화! 어린 세계수가 완전히 타락하기 전에, 사악한 힘을 제거하셨습니다!
-아르카나 대륙 전체의 생명력을 2% 증폭합니다!
-생명의 힘이 당신을 축복합니다! 정령들이 당신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어린 세계수.
인간들에게 ‘악마의 나무’라고 불리던 이 거대한 나무가 바로 어린 세계수였다.
환상의 숲에 왕성한 생명력과 자연의 축복을 전해준 나무.
샤아아아아.
그 나무가 힘을 되찾고 빛이 난다.
검게 드리웠던 페어리 마을과 님프의 숲을 포근한 녹색 빛으로 감싼다.
그러자 놀랍게도 죽어가던 나무들이 되살아난다. 이미 죽은 나무들은 빠르게 분해돼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 생명이 꽃핀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지이잉.
-사아아.
-시이이이!
하늘에서 열린 수십 개의 포탈. 차원 게이트가 열린다.
그리고 그 게이트에서는 수백 마리의 정령이 튀어나온다.
정령계.
자연의 4대 속성을 관장하는 정령들이 어린 세계수의 부활을 느끼고 돌아온 것이다.
-우우움~!
나와 계약한 흙의 하급 정령 노움도 제 친구를 찾았는지 반갑게 손을 흔든다.
그러나 곧 수십, 수백 마리의 정령이 나와 노움을 감싸자 대단히 당황한 눈치.
정령들이 감사를 표하며 우리를 축복한다.
번쩍!
그와 동시에 빛을 번뜩이는 노움.
-흙의 ‘하급’ 정령 노움이 정령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충분한 경험으로 영혼이 고양돼있는 상태입니다! 정령의 격이 한층 승격됩니다!
-정령 승급! 흙의 ‘중급’ 정령 노움이 되었습니다!
-중급 정령치고 가진 힘이 지나치게 강합니다! 흙의 정령왕 ‘노아스’가 주목합니다.
노움에게서 풍기는 힘이 급속도로 강해진다.
중급 정령이 되자 기존보다 생김새도 다소 바뀌었다.
일전보다 황소 같은 뿔도 생기고 생김새도 나름 날렵해졌다. 물론 아직도 어린 애 같은 티가 남아 있지만.
과거엔 귀엽기만 한 어린아이 같았다면, 지금은 중학생에 도달한 청소년 같았다.
-우우움~!
성장했다며 우쭐거리는 노움.
포도를 좋아하는 것까지 똑같다. 외형만 바뀌었을 뿐, 성격까지 바뀌는 건 아닌 모양이다.
“정말 고맙습니다. 드래······. 아니, 네일 경. 페어리 일족의 여왕으로서 이번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페어리 여왕 티타니아가 다가와 내게 꾸벅 감사를 전한다.
아무래도 날 완전히 드래곤이라고 오인했는지 안 쓰던 존댓말까지 쓰는 모양.
다만 굳이 오해를 정정할 필요는 없어서 적당히 웃어 받는다.
그러자 님프의 왕 오베론 또한 사정을 들었는지 내게 다가온다.
“네일 경이라.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정도 경지를 이루다니. 참으로 자연의 축복이로군.”
오베론은 숲의 잎사귀를 모은다. 그리고 내 가슴에 부착된 페어리 펜던트에 님프 모양의 그림을 새겨둔다.
“나 오베론 또한 오늘 경의 구원을 잊지 않을 것이오. 님프의 왕의 이름을 걸고 그대를 님프의 벗으로 공인하지.”
그와 동시에 정신 차린 수백 마리의 님프가 오베론 곁을 지킨다.
오베론은 손가락을 탁 튕긴다.
쿠구구궁.
그러자 땅바닥에서 급속도로 자라나는 나무줄기와 과일들.
마치 식탁과 의자처럼 펼쳐진다. 그 숫자는 끝없다. 님프들이 주위에서 과일 따온다.
“내 벗에게 큰 빚을 졌으니 갚아야 하겠으니. 부디 내 축제를 즐기고 가시게.”
님프의 왕 오베론은 내게 호의를 보이며 축제를 연다.
‘이런.’
물론 나는 표정이 어색하게 굳는다.
페어리의 만찬은 해봤자 과일과 채소가 전부라는 걸 아니까.
하루 종일 풀떼기만 먹이다니!
육식주의자인 나로선 고문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님프의 왕이 이토록 성대하게 초대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성대한 만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인다.
***
축제는 반나절 내내 계속됐다.
나는 내가 염소인지 인간인지 구별이 안 되었다.
과일도 한두 개가 맛있지, 하루종일 풀과 과일만 먹고 있으니 마음까지 염소가 되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고 요정족 왕이 계속 말 붙이며 붙잡는데 만찬에서 편식하거나 달아날 수도 없는 노릇.
어떻게 해야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꺄악!"
그때 저 멀리 있는 숲에서 한 페어리의 비명이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다.
-lv17 인간 밀렵꾼 버리.
-lv19 인간 해결사 카나하.
'······저놈들은?'
나 또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상황을 살핀다.
밀렵꾼.
이 직업을 가진 자가 하는 일은 정해져 있었으니.
“노움.”
-우움!
흙의 중급 정령 노움을 불러 그들을 끌고 오게 한다.
노움은 볼을 부풀리며 두 주먹으로 땅을 내리친다.
쿠과과광.
“우아아악! 이, 이게 뭐야!”
그러자 저 멀리서 흙으로 된 밧줄에 묶여서 이곳까지 하늘로 날려오는 밀렵꾼들. 거미줄 같은 포망에 페어리 몇 마리가 담겨있었다.
다행히 노움이 속도 조절하는지 천천히 땅에 떨어졌다.
나는 그들 목에 물의 검을 겨누며, 냉랭하게 말했다.
“네놈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궁금한 것은 하나였다.
환상의 숲 테레이아. 이곳은 환각 가루가 가득한 곳이라서 특별한 방법이 없으면 인간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므로.
밀렵꾼들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파악하기 위함이다.
“그, 그게······. 해결사분께서 향수를 구해주셔서······. 이걸 뿌리고······.”
밀렵꾼은 벌벌 떨며 말했다.
해결사?
그러고 보니 밀렵꾼과 함께 의외의 직업이 하나 있었다.
해결사.
현재 내가 사용하고 있는 가짜 신분으로, 검술 혹 마법 등 실력이 뛰어나 영주에게 비밀 의뢰를 받고 활동하는 자들을 말한다.
“아하하······. 저는 전~혀 페어리를 납치하는 데 관여한 적 없습니다~. 저는 의뢰에 따라 오직 ‘월광석’을 찾다가 이들과 만났을 뿐이에요!”
······월광석(月狂石)?
의외의 물건이 언급됐다.
월광석은 말 그대로 달빛을 머금은 돌.
원래는 관상용 보석이라서 희귀할 뿐, 해결사를 고용할 만큼 그리 귀하거나, 예쁘진 않다.
애초에 월광석의 용도는 오직 하나.
‘웨어울프. 그들을 미치게 만드는 용도였을 텐데?’
보름달을 보면 늑대의 모습으로 변하는 웨어울프들.
그들을 강제로 각성시키는 용도였으므로.
‘더구나 웨어울프라면 설마?’
마침 떠오르는 것도 있다.
* 다음 마정석 조각은 ‘웨어울프의 굴’에 보관돼 있습니다!
새로 얻은 마정석 파편이 다음 행선지를 ‘웨어울프의 굴’이라고 알려줬으니까.
‘본래 서부 웨어울프는 엘드리치의 하수인들이었는데, 아직 아닌 건가?’
웨어울프.
의리와 동족애가 대단한 숲의 신사. 그러나 한번 폭주하면 악마처럼 난폭한 괴물들이다.
원작에서 엘드리치는 공중에서 라퓨타를, 바다에서는 씨 드레이크와 크라켄을, 육지에서는 웨어울프와 이종족 몬스터 군단을 몰고 대륙 서부를 멸망시켰으니까.
‘······더구나 웨어울프 중에는 ‘사왕(四王)’도 있었지.’
사왕(四王).
니케아 제국에 거주하는 네 명의 초월자 중 한 명으로, 한 명 한 명이 대륙 최강자급인 존재들.
프레야 교단의 성인에 맞먹는 자들이다.
비록 사왕은 성인들과 달리 서로 연대하지 않지만······.
그 위명만큼은 성인과 동급인 강자들이다.
어쩌면 그들과 연루될 수도 있는 노릇.
붙잡은 해결사에게 묻는다.
“누가 널 고용했지?”
“헤헤······. 의뢰인은 말씀드릴 수 없다는 거 다 아시면서······. 블랙 아지트 쪽이라는 것만 말씀드려요~.”
블랙 아지트.
블랙 오아시스와 블랙 이글루와 마찬가지로 탐욕왕 엘드리치가 운영하는 대륙 암시장 중 하나다.
아마 거부 엘드리치가 웨어울프를 강제로 편입하기 위해서, 막대한 돈을 뿌려서 해결사들을 모집하는 모양.
‘역시 그렇게 된 거였군.’
일이 다급해짐을 느낀다.
지금은 원작보다 약 10년 전. 탐욕왕 엘드리치가 대륙 서부에 거주하던 이종족들을 모조리 포섭하던 과정인 모양이므로.
‘그들을 포섭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럼 그만큼 적을 처치하는 것과 같은 효과이니.’
공중요새 라퓨타의 가동을 막을 겸, 그들 또한 구하는 것이다.
“헤헤······. 그럼 저와 관련 없는 밀렵꾼들은 알아서들 처리하시고. 저는 이만 물러나도 될까요? ”
해결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일어난다.
“아니.”
서걱.
나는 물의 검으로 목을 벤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해결사 머리가 땅으로 떨어진다.
이 녀석 또한 엘드리치의 의뢰를 수주한 하수인.
더구나 밀렵꾼들에게 향수를 전해서 페어리를 납치하려고 하는 걸 도운 자니까.
모든 밀렵꾼을 처형한다. 그들의 목을 요정들에게 바친다.
이후 곧장 웨어울프의 굴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