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격동하는 대륙
2차 성창 폭발 이후, 거악 이미르가 깨끗이 소멸했다.
이후 쳔년산성에 있던 수많은 용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참 침묵한다.
이윽고 검은 하늘이 개고, 푸른 구름이 돌아오고서야 모든 일이 끝났다는 걸 체감한다.
누군가의 함성을 시작으로 모두가 고함친다.
“우와아아아아-!!! 정말로 초대형 거인을 물리쳤다!”
“네카르 경께선 신의 대리인이시다! 프레야 여신의 기적을 실현했다!”
“동부의 구원자, 아룡기사 네카르가 북부 또한 구원했다!”
광기에 가까운 함성.
사람들은 흥분이 주체 되지 않는지 끝없이 소리쳤다.
주저앉아 우는 자도 많았다.
공포스럽던 전투. 계속된 난전에 육체가 너무나 지쳤으므로.
하염없이 흐느끼는 자들도 많았던 것이다.
“······네카르 경? 괜찮으십니까!”
그때, 베아트리체는 균형을 잃고 휘청이는 네카르에게 달려간다.
그녀도 강철실을 잡아당기느라 흙먼지를 뒤집어썼지만, 네카르의 상태는 훨씬 심각했다.
화력을 과하게 출력했는지 각혈하는 모습.
마나 혈관이 터졌는지 오른손에서도 붉은 피가 흥건했다.
황급히 달려가 안아 든다. 그제야 조용해지는 전장.
“베아, 트리체······.”
힘겹게 입을 여는 네카르. 맞닿은 살결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당장이라도 눈을 감을 것 같지만, 억지로 힘겹게 입을 연다.
“······!”
베아트리체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여 지금 이것이 영웅의 최후일까 봐. 유언을 남기는 것일까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마저 자신을 떠나갈까 봐 두려웠다.
“예, 네카르경······. 어서 말씀하십시오.”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참는다. 마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모습이 떠올라서.
허전할 그의 빈 자리가 상상돼서.
가슴 품에 와락 끌어안는다. 혹여 마지막이 될 수 있을 그의 따뜻한 체온을 온몸으로 느낀다.
자신이 얼마나 네카르를 소중히 생각했는지 새삼 체감한다.
“보상······. 챙겨라······. 요툰헤임 산맥에, 쌓여, 있다······.”
“?”
다만, 네카르가 남긴 말은 다소 의외였다.
그 말을 마지막을 눈을 감는다. 새근새근 잠든다. 죽음과는 영 거리가 멀다.
“······.”
베아트리체는 잠시 침묵한다. 안도감 후에 드는 묘한 배신감.
슬며시 목 젖혀 하늘을 올려다본다. 터질 것 같던 눈망울을 달래고 무표정을 되찾는다.
“······오르비스 기사단.”
척!
이후 북부의 지배자답게 담담하게 명한다.
그녀 휘하 직속 기사단이 일제 차렷한다.
“북부의 영웅을 안으로 모셔라.”
그 명령에 경례하는 기사단. 이후, 들것을 가져와서 네카르를 실어나른다.
다 무너진 천년산성에서 남은 침대를 찾는다. 베아트리체와 함께 오르비스 대영지로 돌아간다.
“네카르 경께서 지나가신다! 뒤로 물러서!”
“모두 길을 비켜드려라! 생명의 은인께서 돌아가신다!”
척, 척, 척.
눈의 평원에는 수많은 전사로 인산인해였으나, 병사들이 스스로 길을 열어주었다.
일사분란하게 비켜주는 기적.
그 덕분에 빠른 속도로 호송될 수 있었다.
다만 프레야 교단 이단심문관들은 조심스럽게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를 부른다.
“······루크레치아 예하. 어찌하시겠습니까?”
마신 문두스.
대륙 최악의 공적 중 하나. 북부를 구원한 네카르는 현재 그를 사칭했으니.
“이미 늦은 것 같군.”
다만 루크레치아는 피식 웃는다.
굳이 오르비스 기사단과 충돌하여 베아트리체와 충돌할 필요 없으니까.
대륙에서 가장 발전한 서부가 최악으로 치닫는 만큼 향후 북부의 도움이 절실했으니 말이다.
물론 광신도에 가까울 정도로 신실한 이들이 그런 이유만으로 물러나는 건 아니었다.
“프레야 여신님께서 친히 기적을 내려주셨다. 이를 거역하는 것은 여신님의 뜻에 반하는 것일 터.”
루크레치아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간다.
어차피 네카르와 직통 연결되는 통신 구슬이 있으므로.
부상병들만 치유하고 서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각자 뿔뿔이 흩어진다.
천년산성 병사들은 각 근무지로 돌아간다.
북부 영주 군대는 각 영지로 돌아간다. 프레야 교단 또한 중앙 본부로 돌아간다.
제 목숨을 걸고 맞선 만큼, 명예와 신앙, 동료를 모두 지켜낸 체 가족들에게 돌아간다.
사실.
그들을 구해준 마신 문두스. 그를 뇌리에 떠올리면서.
실상은 네카르가 거짓 사칭을 한 것이지만 그들에게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그들이 감사하는 대상은 북부에 강림한 사내였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가족들에게 그 존재의 무용담을 전하며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
한편, 니케아 제국 황궁 회의실.
빈센트 후작은 실무자들이 바친 보고서에 공포에 질렸다.
대한파.
몇십 년마다 주기적으로 혹한과 설인이 밀려 내려온다는 시기.
이번엔 가히 ‘북부의 변’이 일어날 만큼 수만의 설인이 내려왔다는 점.
심지어 덩치가 설산에 비견된다는 설인왕 이미르가 강림했다는 소식은 가히 충격이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인 점은 따로 있다······.’
침을 꿀꺽 삼킨다.
보고서에 따르면 절체절명의 순간, ‘마신 문두스’가 강림했다고 하니까.
그것도 지난번과 달리 소문 따위가 아닌, 모두의 앞에서 중력 마법을 실현한 존재.
일격에 천년산성을 관통한 거인을 힘으로 제압하고, 심장을 터트린 위대한 존재가 나타났다고 각 세력 정보국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전 대륙 최고 영웅만이 할 수 있는 기적.
그 누구도 사칭할 수 없는 업적이라고.
그리고 이 경우, 대륙의 가장 지고한 존재가 결코 넘길 리가 없다.
끼이익.
“폐하께서 어전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실제로 회의실에 내관이 들어온다.
빈센트 또한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일어난다.
칩거한 황제의 귀환.
과거 ‘오르비스 대학살’ 사건 이후, 그 어떤 업무도 보지 않던 황제가 돌아왔으니.
쿠구구궁.
모두 황궁의 대문으로 집결한다.
여명의 궁.
대륙 중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궁궐. 흔히 태양의 궁이라 불리는 곳이다.
사계절에 피는 꽃들이 골고루 장식돼 있어 언제나 화려한 꽃들이 피며, 제국이 선포된 이후, 가장 먼저 등불을 밝힌 곳이다.
그리고, 황제의 칩거 이후 오랫동안 불이 켜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빈센트를 비롯한 대신들은 레드카펫을 따라 금으로 장식한 용 조각 사이로 들어선다.
복도에 전시된 붉은 망토의 기사가 그들을 반긴다.
그 안으로 들어가, 어전 회의실에 직급에 맞게 3열로 선다.
‘······폐하께서 갑자기 무슨 바람이신 겁니까?’
‘나도 모르네. 하지만 또 피의 숙청을 하실 수 있으니, 일단 몸을 사려야 하지 않겠나?'
아직 사안을 듣지 못한 늙은 대신들이 잡담하는 소리가 들린다.
황제의 저의를 모르는 만큼 아직 긴장하고, 불안한 분위기. 그러나 그러한 속삭임도 얼마 지나지 않아 멎어 든다.
“황제 폐하 납시오!”
한 대관의 다급한 호령이 전해졌으니까.
중앙 관료, 황실 기사, 대영주, 대주교까지 모두가 고개를 조아린다.
어전 회의실이 고요해진다.
끼이이익.
그와 동시에 열리는 대문.
또각, 또각.
발밑 아래에 다이아몬드로 된 구두가 들어온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발걸음.
그와 함께 시녀들이 붙잡아주는 긴 새하얀 드레스가 보인다.
마치 모두를 내려다보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풀거린다.
자신과의 격의 차이를 느끼라는 듯 의도적으로 천천히 들어온다.
신하들은 지고한 존재가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낀다.
니케아 제국 최고 영주와 중앙 관료를 하찮다는 듯 내려다보는 자. 그 존재는 한 명밖에 없다.
“어전회의를 시작하지. 짐에게 긴히 들어온 급보가 있으니.”
니케아 제국 황제 ‘세실리아 드 니케아’.
그녀는 신성한 혈통인 만큼 칩거한 지 이미 십수 년이 지났으나 전혀 늙지 않은 모습으로 옥좌에 앉는다.
윤이 나는 황금빛 머릿결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
그녀는 그간 칩거에 대한 해명 따윈 하지도 않은 채 신경질적으로 입을 연다.
“마신 문두스. 그동안 모습을 비치지 않았던 대륙의 공적이 돌아왔노라.”
세실리아는 자신의 비서장 빈센트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말한다.
일전 북부에 마신 문두스가 강림했다는 얘기에 빈센트가 헛소문이라고 보고했으니.
빈센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인다.
어전회의에 불린 중앙 관료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경직된다.
“폐, 폐하, 북부에 파견된 기사들이 하나 같이 마신 문두스를 보았다고 전합니다.”
“맞습니다. 프레야 교단 사제들이 일제히 성서에 손을 올리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겪은 것은 분명 중력 마법이라고 합니다.”
“······.”
세실리아는 옥좌에 수없이 쌓인 상소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신 문두스에 대한 보고서만 받아 읽는다.
“······동부의 구원자 네카르. 아룡기사라고도 불리는 자가 유력한 용의자라고.”
쨍그랑.
세릴리아는 매우 길게 관리한 손톱을 깨뜨린다.
흔히 알려진 마신 문두스의 외형과는 전혀 다른, 젊은 사내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폴리모프.
마신 문두스는 제 모습을 마음대로 바꾸며 목소리도 바꿀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붉은색 마력석 3개를 박은 스태프를 사용한다는 점, 중력 마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미 확신한다.
“그자가 진정 마신 문두스라면, 전 대륙이 위험합니다!”
“맞습니다! 그가 보여준 권능은 가히 경천동지. 설혹 마신 문두스가 아니더라도 황실에 크나 큰 위협을 가진 수준입니다!”
“마땅히 조치를 취하셔야 할 것을 아룁니다!”
대신들이 황제의 눈치를 보며 다급히 고한다.
실상 사실이기도 했으므로.
“그 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 그것이······. 대한파 이후, 천년 산성에서 사라졌다고······.”
콰드득!
내관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황제가 무의식중에 손아귀에 힘을 줘서 팔 거치대를 부숴버렸으니까.
무려 옥좌가 부서진 상황.
어전회의에 모인 모든 자는 황제의 진노를 느낀다.
“비서장 빈센트 드 발루아.”
“······예. 폐하.”
“오르비스 공작 ‘베아트리체’에게 책임지고 찾아내라고 전하라.”
“명 받잡겠나이다.”
황제는 명령한다.
일전 빈센트가 베아트리체의 협박에 굴복한 것은 황제가 칩거해, 고위 기사단을 움직일 수 없을 때 얘기.
아무리 북부가 강대한 들, 결국 대륙 귀퉁이 하나. 감히 니케아 제국 황제에게 거역할 수 없으므로.
“또한, 동부의 지배자 엡실론을 황궁으로 소환하라.”
연거푸 대륙을 놀라게 할 행보를 명한다.
그의 자식임을 추궁하고, 생포에 협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로얄가드."
최후의 병기를 부른다.
총 12명의 황실 수호 기사. 오직 황제에게만 충성하는, 니케아 제국의 절대 힘.
"북부로 집결하라. 문두스를 생포하라."
한 명 한 명이 설산검 레오파드에 준하는 기사단을 출격한다.
“······다만, 문두스를 생포하는 게 불가능할 경우 전하라.”
착 가라앉은 목소리.
황제는 요동치는 제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운지 한참이나 침묵한다. 대소신료들 앞에서 어렵게 고운 입술을 연다.
“빈자리는 영원히 비워둘 터이니 돌아와달라고······. 기다리겠노라고 말이다.”
만물의 지배자이자, 전 대륙에 모든 것의 군주. 그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는 니케아 제국 황제.
그런 그녀가 애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치 옛 연인을 부르듯 슬픔과 비애, 그리움이 깃든 목소리로.
그 목소리에 어전 회의실에 모인 모두가 침묵하는 것이다.
***
한편, 이름 모를 고성.
흑마법을 연구하는 듯 메케한 연기와 시체 썩은 냄새, 마도공학품이 가득 보관된 방.
그곳은 고풍스러운 방 구조와 수천 년 된 최고급 엘프 목으로만 만들어진 책상이 있었다.
하나하나가 수억 페니를 넘어, 돈으로 가치가 환산이 안 될 골동품들.
그 책장에 쌓인 최고급 통신 구슬 중 하나가 울린다.
[······제5군단장이자 마계의 위대한 군주 ‘엘드리치’ 폐하. 현재 설인왕 이미르 폐하께서 승하 되신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통신 구슬 속 존재는 자신의 군주를 ‘엘드리치’라고 칭한다.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
제5군단장을 맡은 탐욕왕 엘드리치.
마계 제1의 거부이자, 아르카나 전 대륙 검은돈까지 장악한 군주 '황금 고블린'의 이름을 칭하는 것이다.
“······힘의 제왕 이미르가 패배하다니. 이건 계산에 없던 결과인데.”
탁, 탁, 탁, 탁.
그 보고에 황금 고블린은 마계의 마법공학으로 만든 골렘을 탄 채, 심각한 표정으로 읊조린다.
손에 들린 '인과율 계산기'를 두드린다.
“마신 문두스······. 그 이름이 다시 거론되다니. 이제 우리 교단의 최흉의 적은 오직 ‘검신(劍神) 카를 폰 프란츠’ 뿐인 줄 알았거늘.”
엘드리치는 그렇게 말하며 끌끌 혀를 찼다.
"이대로는 내 '블랙 매스' 프로젝트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거다. 대비책이 필요하군."
황금 고블린 엘드리치는 계산이 매우 빨랐다.
동부 사막의 불사왕 데힐라칸과 설인왕 이미르가 당했으니, 향후 프레야 교단의 전력이 그가 있는 서부로 집중될 거란 걸 직감한다.
탁, 탁, 타다닥.
“하지만 망국의 황제 세실리아는 마신 문두스를 찾기 바쁘겠지. 그녀는 이미 무너진 상태니.”
따라서 조심할 것은 오직 서부 군단과 프레야 교단, 그리고 아룡기사 뿐이다.
"그렇다면 일이 간단해진다. 나는 서부의 지배자. 육해공군 모두를 압도하니까."
그는 자신의 방에 있는 수백 개의 통신 구슬을 둘러본다.
서부 수많은 영주와 이종족 수장들, 흑마법사들과 연결된 통신들.
마계에서도 제1거부(巨富)인 엘드리치가 막대한 돈으로 고용하고, 지배하며, 이간질시켜서 구축한 세력이다.
그의 영향력은 서부 영토 뿐만 아니라, 바다와 하늘까지 닿는다.
“우선 북부의 변화가 서부까지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씨(sea) 드레이크’. 해적들과 함께 그 놈을 부려서 북부를 습격해 베아트리체의 발을 묶는다. 이러려고 막대한 돈을 들인거니까.”
결론이 떨어진다.
역시 막대한 돈 앞에 안 되는 건 없다며 자화자찬한다.
이에 통신 구슬 속 임프 부총관이 조심스럽게 충언한다.
[폐하······. 심연왕 ‘프로세피나’ 폐하께서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너무 의존하진 마시라고 전하신바 잊으셨습니까?]
“흥, 돈으로 해결 못 할 일이 있다고? 정말 돈이 많은 게 맞나? 돈이 충분한 게 맞는지 다시 확인해보라고 전해라.”
그러나 풋 웃는 엘드리치.
그는 곰방대를 뻐끔거리며 비웃었다.
자신 앞에서 돈에 대해 논하는 것이 우스운 것이다.
"어차피 내 마도공학 최종 병기 '공중 요새 라퓨타'만 완성될 때까지 버티면 된다. 그 후엔 그 누구도 두렵지 않으니."
최종 결말을 전한다.
프로젝트 '블랙 매스.'
악마가 죽은 이를 위로하는 장례식.
최종 병기 라퓨타를 강림시켜서 대륙 서부는 물론, 프레야 여신을 믿는 아르카나 대륙 전체를 멸망시킨다는 계획이다.
하찮은 아르카나 족속들은 감히 궁극의 마도병기 '공중 요새'에 대항할 수단이 없으므로.
그때까지만 규모의 경제로서, 시간을 끄는 것이다.
***
나는 비몽사몽 정신을 차린다.
피를 많이 흘려서 어지러움을 느낀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번에도 베아트리체의 침대다.
어째서인지 데자뷰처럼 느껴지는 상황.
아무래도 기절한 사이, 베아트리체가 오르비스 대영지로 데려온 모양이다.
“이제 일어나셨습니까?”
이전처럼 베아트리체가 내 곁 의자에 앉아있다.
남들 몰래 웃는 베아트리체. 나에게만 보여주는 포근한 미소. 남에게는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기에 특별 대우를 받는 기분도 들었으나.
“앗, 일어나지 마세요. 당신은 안정이 필요하다니까요.”
“이제 괜찮다.”
"아뇨. 자기 객관화가 부족하시군요. 앞으로 경의 건강 관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
문제는 침대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면 정색하고 힘으로 막아버린다는 점이다.
심지어 더 일어나려고 하면 밧줄로 묶어버리겠다고 살벌한 협박까지 한다.
-파괴 본능이 26%입니다!
-강력 경고! 파괴 본능이 100%에 도달하는 순간, 악룡이 돼버립니다!
-파괴 본능이 처음으로 25%를 넘겼습니다!
-히든 퀘스트 ‘마신(魔神)으로 다가가는 길 (3)’에 도달합니다.
-패시브 스킬 '끓어오르는 피'를 획득합니다. 폭주 상태를 더욱 즐기게 될 것입니다.
하기야 침대가 피로 흠뻑 젖었으니 할 말도 없다.
더구나 설인왕 이미르와의 결전 때, 중력 권능을 너무 많이 써서 몸에 부하가 치밀고 있었으니까.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걸로 합의했다.
“그보다 내가 부탁한 건?”
“네? 아, 그보다 요툰헤임에서 특별한 물건을 찾긴 했어요. 막대한 마나를 가진 물건인데 도통 알아볼 수가 없어서······.”
베아트리체는 설인왕 이미르의 근거지인 요툰헤임 산맥에서 찾았다는 보물을 가져온다.
그것은 거대한 비늘이었다.
오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비늘.
파충류의 것 같기도 하지만, 특정 종족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깔이 담긴 비늘이다.
‘이건?’
[이름 : 용의 비늘 (NEW, MASTER.)]
[설명 : 용의 급소를 가리는 비늘. 다른 비늘과 달리 거꾸로 달려있어서 ‘역린’이라고 부른다. 만약 이 조각을 모두 모으면 매우 특별한 힘이 깨어날 것 같다.]
[특수 효과 : (미해금.)]
* 만약 용의 비늘을 모두 모으면 특별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1/3)
“······!!”
그것은 무려 마스터급 보물 중 하나였다.
다음 용의 유산 ‘드래곤 블러드’를 얻기 위한 재료.
그 재료 중 하나가 설인왕 이미르에게 있던 것이다.
“그보다 큰일입니다. 며칠 뒤, 황제의 사찰단이 여기까지 들이닥칠 겁니다.”
다만 베아트리체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녀가 숨겨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으므로.
“레지스탕스와 함께 지하 기지로 대피하시거나, 다른 섬으로 숨어계셔야 할 것 같아요.”
다만 날 결코 포기하진 않는다. 애틋하고 안타까운, 아쉬운 눈으로 바라볼 뿐.
설혹 이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결코 팔아넘기지 않는다.
레지스탕스의 철칙.
가장 힘들어할 때 도와준 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그녀와 북부를 포기하지 않은 만큼, 그녀 또한 날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있을 대륙의 파장이 걱정되는군.’
다만 나는 황제의 특성을 알고 있기에 그것이 단순히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안다.
마신 문두스라면 전 대륙을 뒤엎어서라도 찾아낼 인물이란 걸 알기에.
니케아 제국의 국력을 총동원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잠깐. 그러고 보니 이 오색의 비늘.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디로 숨을까 고르던 도중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서북부 흑해(黑海) 부근 ‘아르타’ 섬.
엘드리치의 ‘씨 드레이크(=해룡)’가 침공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그곳에 보상으로 드랍됐으니까.
'앞으로 상대해야 할 건 탐욕왕 엘드리치의 공중 요새다. 그건 어지간한 화력으로 부술 수 없다.'
나는 알고 있다. 탐욕왕 엘드리치.
그 존재는 개인 자체는 별 무력이 없으나, 그가 가진 무구와 보석, 마도 공학 병기가 문제였으니.
훗날 절대 방어 결계가 펼쳐진 '공중 요새'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용의 유산 '드래곤 블러드'를 반드시 얻어놔야 한다.
따라서 그곳으로 숨는다.
다음 용의 유산을 찾을 겸 말이다.
“아르타 섬이요? 아, 들어보긴 했습니다. 해룡의 잦은 침공으로 계속 도움 요청을 하던 영지였지요.”
마침 베아트리체 또한 그 섬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원작보다 10년 전인 만큼 아직 멸망하지 않은 모양.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네카르 경의 강함은 의심할 생각 없지만,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씨 드레이크는 흑해 전반을 지배하는 해양 상급 몬스터에요."
다만 베아트리체는 걱정한다.
씨 드레이크의 강함.
이는 가히 샌드 드레이크의 강함에 비견되니까.
'엘드리치의 '씨 드레이크'가 아무리 강력한 몬스터라고 해도, 결국 용용이의 먼 사촌일 터.'
하지만 나는 떠오르는 해결책이 있다.
과거 이 비슷한 경우 때도 드래곤 아이로 용용이를 회유했으니까.
오히려 악마처럼 비릿하게 웃는다.
“아니, 그곳으로 대피하도록 하지. 마침 얻을 것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