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마신강림 (魔神降臨) (2)
[이런······. 말도 안 되는······!]
세미 리치 데라한은 천년산성 위에서 나뒹굴어 설인들이 있는 눈밭에 처박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성벽 위를 올려다본다.
태양처럼 빛나는 광채로 뼈가 흐물흐물 녹은 상태로.
이에 천년산성에서 장미처럼 고고한 여인이 또각또각 앞으로 나온다.
성검 듀란달을 고쳐 쥔 채, 교리를 살벌하게 읊조린다.
“무질서로 변모한 자. 질서 위에서 사라져라.”
쏴아아아아-!!!
다시 한번 작렬하는 빛기둥.
이미 반쯤 녹아내린 데라한을 완전히 날려버린다.
설산검 레오파드에게 몇 번이고 파괴당해도 금세 수복됐던 세미 리치였지만, 신성력이 가득 담긴 공격 앞에서만큼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상성.
흑마법을 익힌 자에게 압도적인 힘을 내는 ‘대륙 7대 성인’.
거기에 ‘성검’을 가졌다는 어드벤티지를 가졌기에 속절없이 패퇴시킨다.
“데라한. 유언을 남겨라. 이단 심문관으로서 마지막 말은 들어주마.”
루크레치아는 마지막으로 데라한의 데몬 하트에 성검 듀란달을 겨누며 말했다.
전투 예복만 입고, 홀로 성벽 밖으로 나온 상황이지만, 전혀 위기감이 없었다.
[이까짓, 건방진 피조물에게 당하다니······.]
세미 리치 데라한 또한 자신의 최후가 다가왔음을 느낀다.
두개골에 뚫린 눈구멍으로 성녀 루크레치아와 그 뒤편을 바라본다.
어느새 북부 기사단은 물론, 프레야 성기사단과 용병단까지 몰려왔다. 빠르게 천년산성을 수복한다.
[설인왕 이미르 폐하께서 도착만 하셨다면······. 결과는 달랐을 거다······.]
턱뼈를 달그락거린다. 허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분했다.
자신은 이 힘을 갖기 위해 300년 이상 흑마법만을 정진했거늘.
경지를 높이기 위해 수많은 생명체를 해부하고, 인체실험하며 힘겹게 경지를 높였거늘.
저 대륙 7대 성인이라는 자는 태어날 때 운이 좋았다고, 자신을 압도하는 힘을 갖지 않았는가?
“남길 말은 그뿐이냐?”
물론 루크레치아는 그런 데라한을 경멸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다.
[잠깐, 설마······?]
꽈르릉.
그때 데라한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하늘을 자세히 바라본다.
비정상적으로 검은 하늘.
어느새인가 대륙 북부 전체를 드리운 먹구름에는 마계의 사악한 마력이 느껴졌으므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챈다.
설인왕 이미르.
파괴적인 군주 중 하나인 그는 약자들이 싸우는 걸 관망하는 게 취미였으니.
[큭, 큭큭, 크하하하핫-!!]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한다. 육체의 한계가 없는 리치인 만큼 사레들리지도 않고 광소한다.
“갑자기 실성이라도 한 거냐? 왜 웃는 것이냐?”
루크레치아조차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것조차 세미 리치 데라한에겐 큰 기쁨이었다.
[바보 같은 피조물아. 지금 무슨 상황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냐? 마계의 하늘이 이미 북부 전체를 드리웠거늘.]
“······!”
데라한은 검은 하늘을 향해 고함친다.
[설인왕 이미르 폐하, 이제 때가 되었으니, 그만 강림해주시옵소서!]
고오오오!
그와 동시에 검은 구름이 하늘을 완전히 드리운다.
밤하늘의 태양마저 가리는 검은 먹구름.
지상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북부 전체가 깜깜해진다. 빙하기가 드리운 듯 기온이 뚝뚝 떨어진다.
마계화.
본래 악마들이 자신의 미궁에서 본연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권능.
그 권능을 좁은 던전이 아니라 북부 전체에 시전한 것이다.
콰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굉음.
세상 종말의 날이 찾아온 듯 천년산성 하늘이 깨진다.
일그러진 하늘에서 붉은빛이 드리우고, 거대한 아공간 게이트가 열린다.
고오오오오-!!!
그 속에서 나온 건 단 한 명의 흰 설인이었다.
그러나 그 설인을 감히 경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콰아아앙!!
땅에 발 딛는 것만으로도 천지가 요동친다.
아무리 목 젖혀도 끝이 안 보이는 크기.
그 설인의 크기는 가히 산에 견줄 만했으므로. 천년산성 성벽보다도 10배 이상 큰 압도적인 크기였다.
그의 머리에는 마왕을 상징하는 숫양의 거대한 뿔이 달렸다. 그 뿔은 구름에 닿아 가려졌다.
-크오오오오오-!!!
설인왕은 흰 눈을 맞으며 거친 포효를 내뿜는다. 붉은 눈이 번뜩인다.
천년산성 쪽을 내려다본다. 오른쪽 주먹을 들어 올린다.
[모두들! 어서 피하십시오!]
그 모습에 설산검 레오파드는 긴급 통신 구슬로 다급하게 고함쳤다.
그 직후,
쿠과과과과광-!!!
거대한 굉음이 몰아친다. 설산이 놀라 흰 눈이 튀고, 갈색 흙이 드러난다. 인간이었던 고깃덩어리가 튄다.
모두가 멍하니 참담한 현장을 바라본다.
천재지변 같은 일격.
설인왕 이미르의 주먹이 천년산성의 성문을 뚫고 내성까지 관통해버렸으니까.
비명이 메아리친다. 너무나 상식 외의 상황에 머릿속이 하얗게 얼어버린다.
***
“저자가, 설인왕 이미르······?”
천년산성 사령관인 베아트리체는 몸이 경직된다.
그녀 또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숱한 거대 몬스터를 만나봤지만, 이번은 정말 차원이 달랐다.
무려 북부 최대의 요새인 천년산성을 그림자만으로 모두 드리웠으니까.
샤아아아아아-!!
그런 거인을 막아서는 건 태양처럼 찬란한 빛이었다.
신성력이 가득한 흰 빛과 붉은빛이 거대한 구체 모양으로 폭발한다. 이미르의 상체에 파괴적인 진동과 굉음이 전해진다.
프레야 교단 총사령관 루크레치아.
그녀가 성검 듀란달에 잠들어 있는 본연의 힘을 모두 깨운 것이리라.
-크오오오오!
콰아아앙!
그러나 이미르는 주먹을 휘둘러 그녀를 날려버린다. 신성 방패를 발동했는지 구체형 베리어가 펼쳐진다.
그러나 구슬처럼 작은 신성 베리어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고오오오!
[······모두 물러나라. 얼음으로 봉인하겠다!]
이에 설산검 레오파드가 비장한 목소리로 전력으로 검기를 뿜어낸다.
이후 보검을 거꾸로 잡는다. 온 힘을 다해 땅에 내리꽂는다.
쏴아아아아아-!!
일순 얼음 검기를 쏟아낸다.
온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여버리는 서리 검기.
이미르의 하반신을 얼려버린다. 자신의 이명이 왜 설산검(雪山劍)인지 증명해낸다.
[요툰헤임의 만년빙하에 비하면, 너무나 무르다!]
“!!”
쩌적, 와장창창!
그러나 설인왕 이미르는 이조차 일격에 깨버린다. 거대한 주먹을 후려쳐 레오파드마저 날려버린다.
[고작 이 정도인가. 날 흥분시킬 자는 이 세상에 정녕 없단 말이더냐!]
다른 손을 수직으로 내려쳐 인간 들을 뭉개 죽인다. 학살을 시작한다.
번쩍!
성녀 루크레치아는 이를 막기 위해 다시 섬광처럼 날아든다.
북부 최강검 레오파드 또한 초인적인 운동 신경으로 이미르에게 날아든다.
“아아······.”
그러나 이러한 노고에도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져만 간다.
쨍그랑······. 투두둑······.
무기를 떨어뜨린다. 손에 힘이 풀린다. 털썩, 무릎을 꿇는 병사도 있다.
함께 있는 베아트리체는 그 마음을 전적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그저 방해될 뿐인 건가······?’
현재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와 설산검 레오파드조차 제대로 된 타격을 못 입히는 상황이니까.
설인왕 이미르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과자처럼 허무하게 부서지는 인간 병사들.
그들이 쥐고 있는 무기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아냐, 분명 네카르 경께서 말씀하셨어. 설인왕 이미르를 막기 위해선 우리 북부 군단이 꼭 필요하다고.’
다만 입술을 잘근 문다. 차갑게 식은 심장에 열꽃이 피어오르고, 작은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루크레치아와 레오파드.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둘 다 지쳐 쓰러질 터.
네카르가 돌아올 때까지, 그녀가 나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이 무엇이고, 기세에 질린 아군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아버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게 지혜를 주세요.’
치이잉.
베아트리체는 설화검 손잡이에 박힌 보석을 이마에 댄다.
스며드는 찬 기운을 느끼며 방법을 강구한다. 천천히 눈을 뜬다.
“북부 용사들이여. 프레야 사제들이여. 들어라.”
먼저 사기를 고양할 연설을 시작한다.
지금부터 할 작전은 모두가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니.
“혹여 내가 너희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부디 못난 날 용서하거라. 지금부터 내릴 명령은 어떤 사심도, 악감정도 없이 명하는 것이니.”
무표정 속에 전사의 기백을 담는다.
제 곁을 지키는 병사 한 사람 한 사람과 담대하게 눈을 마주한다.
“혹한의 전사라면 죽음으로서 지켜야 할 네 가지 가치가 있다. '가족'과 '동료', '명예'와 '신앙'이다.”
북부 전사들이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지금 저 거대한 대악마는 그 모든 가치를 짓밟으려 하고 있다.”
크아아악, 쿠과과광!
저 멀리 보이는 설인왕 이미르를 가리킨다.
저 악마는 천년산성을 무너뜨리고 북부 전체를 멸망시키려고 하므로.
“이를 막기 위해선 우리가 해내는 수밖에 없으니.”
샤아아······!
이미르의 주먹에 날아가는 루크레치아와 레오파드를 보여준다.
자신들의 우상이었던 자들이 바닥에 구르고, 흙먼지에 더럽혀지며, 피에 젖고 있음을 몸소 보여준다.
“이것들을 위하여 오늘 생명을 바치자.”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
이를 넘어서라 명한다.
"방법이 있습니까?"
한 기사가 묻는다. 떨리는 손, 그러나 힘겹게 용기를 낸 목소리.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인다.
추상적인 가치만이 아닌, 물리적으로 설인왕 이미르를 상대할 방법을 강구한다.
“강철실을 동원하라. 설인들을 막기 위해 성벽 앞에 설치했던 실들. 그 실들로 저 거구 악마의 발목을 묶어라.”
“!!”
강철실.
북부 특산품인 질 좋은 강철을 길고 얇고 뽑은 것.
특수한 마법 아티펙트 과정을 거쳐서 거구의 설인이 발 걸려 넘어져도 절대로 끊어지지 않은 수성용 병기다.
투두두두-!!
수백 명의 기사가 강철실 장치를 가지고 일제히 돌격한다.
설인왕 이미르의 두 발목을 묶고 포위하듯 칭칭 감는다.
마나를 쓰는 기사들이 괴력을 발휘하자 태산 같은 거인이 흔들린다.
[크읏? 네놈들. 귀찮은 짓을!]
콰앙!
두 발이 한데 묶인 설인왕 이미르는 진노하여 기사에게 주먹을 내리친다.
짓밟고, 내리치고, 뭉개버린다. 피로 눈밭이 얼룩진다. 역으로 기사들이 강철실에 질질 끌려다닌다.
기사들은 바로 옆에서 동료들이 핏덩이가 되는 걸 본다.
“제기랄, 한꺼번에 당겨! 강철실이 점차 풀린다!”
“끄으윽······!! 강철실이 장갑을 뚫고 손을 벤다!”
그러나 기사들은 결코 놓는 법이 없다.
이것이 풀리는 순간, 더 이상 방법이 없기에.
정말로 북부의 멸망이 드리운다는 사명감에 강철실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손에 피가 나고, 이미르가 내리쳐 속 터진 개미 꼴이 되더라도.
죽음으로서 제 명예를 지킨다. 장렬하게 산화한다.
“······.”
“······.”
그리고 천년산성에 남은 일반 보병들은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본다.
막연하게 패배를 떠올리고 있던 자들.
그들의 눈앞에 모두가 살아남을 방안이 보인다.
그리고 이를 위해 조금 전까지 목숨을 걸고 성벽을 함께 사수한 동료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꽈르릉!
검은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친다.
태양조차 빛을 잃은 검은 하늘.
마치 세계 종말의 날이 도래한 것 같아서.
현실에 굴복하고 비겁함에 얼룩진 대륙을 징벌하려는 여신의 심판 같아서.
같은 프레야 교단을 믿는 신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제 가슴속 심장박동 소리를 느끼는 것이다.
우오오오!
하나둘 씩 나서기 시작한다.
기사들을 따라 강철실을 당기러 간다.
어느새 구름처럼 몰려온 천년산성의 대군.
그들은 기사보다도 훨씬 쉽게 죽는다. 깡그리 터져 죽는다.
하지만 끝없이 빈자리를 메운다.
개미 떼도 그 수가 많다면 거인 하나를 물어뜯을 수 있으므로.
한 자리에 뭉친 제 동료들을 보면서, 자긍심과 용기를 얻는 것이다.
쿠우웅······!
그렇게 기어이 설인왕 이미르를 눈밭에 쓰러뜨린다.
막대한 환호 소리도 퍼진다.
“루크레치아 예하!”
“······알고 있다!”
번쩍!
그리고 그때, 베아트리체가 마지막 사력을 다해 고함친다. 광원을 몰고 달려오는 루크레치아.
지금은 돌아올 수 없는 기회.
설인왕 이미르가 움직임이 봉쇄된 상황이기에, 목에 성검을 꽂아 넣기 위해 이 악물고 달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루크레치아가 땅을 박차고 공중에 뛰어올랐을 때,
[······이런. 건방진, 프레야의 피조물들이······!!]
바닥에 쓰러진 이미르가 진노한다.
쿠고고고고고-!!!!
이미르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진다.
근육이 팽창하고, 사악한 마력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뒤덮인다. 붉은 갑주를 입은 듯, 마력을 둘러서 흰 털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요툰모드.
이미르 종족인 서리 거인이 가진 종족 특성. 진정으로 분노하게 되면 본연의 힘 이상으로 힘을 끌어내는 권능이다.
[너희의 어떤 희생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지어니······!]
콰아아아아-!!!
사방으로 충격파를 발산한다. 병사들이 매달린 채 강철실이 공중에 나부낀다.
거룩한 빛을 이끌고 오던 루크레치아가 저 멀리 있는 설산까지 튕겨 나간다.
마지막 희망이 꺼진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심판의 날을 맞이하라!]
콰직.
이미르는 양손으로 제 발목에 매달려 있는 강철실을 들어 올린다.
수천 명의 병사를 하늘 위로 한꺼번에 집어 던진다.
으아아아아아-!!!
하늘로 흩날리는 병사들은 압도적인 힘에 전율한다. 수많은 비명이 메아리치고 뒤섞인다. 절망 섞인 흐느낌이 들린다.
'이것조차 통하지 않는 건가······.'
모든 것이 끝났다.
베아트리체는 구름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며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사실 마음의 준비는 오래전 했다.
설인들이 눈보라처럼 내려왔을 때,
세미 리치 데라한이 성벽 위로 올라왔을 때,
설인왕 이미르가 막 강림했을 때,
······레지스탕스 근거지 알바헤임이 무너지고, 아이들과 생매장될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홀로 밤을 청했을 때.
그때마다 기도했었다.
때론 베르너 공작에게 복수할 때까지만 살려달라고,
때론 아이들만은 살려달라고,
때론 설인 군단을 막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자비로우신 여신께선 그 모든 소원을 이미 들어주셨다.
동부의 한 사내를 내려보내 주셨으니까.
따라서 미련은 없다.
그저 마지막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병사들에게 죄책감을,
이제 곧 북부에 들이닥칠 비극이 떠올랐기에 절망감을 느낄 뿐.
휘이잉.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다.
공중에 떠오른 베아트리체와 사람들.
하늘에서 떨어지던 눈송이마저 멈춘다. 온 세상이 구름처럼 두둥실 떠있는 것 같다.
위치가 다르면 풍경이 달라 보인다고 하던가?
머리부터 떨어지며 세상을 내려다본다.
탁 트윈 전망과 눈보라, 땅이 하늘에 붙어있는 세계.
그 속에 빼곡한 설산과 천년산성, 그리고 북부의 도시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기에 미처 보지 못했던 전경들이다.
온 세상이 아름답다.
신에게 감사드린다.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해줘서.
······이렇게 멋진 장면을 그 사람도 함께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쿠고고고.
그와 동시에 아공간 게이트에서 거대한 거인의 손이 튀어나온다.
아공간 게이트가 공중에 떠 있는 사람들에게 향한다.
이제 곧 저기서 이미르가 주먹을 내리쳐 모두를 없애버리겠지.
두 눈 천천히 감는다. 임종을 받아들인다.
콰아아아아앙-!!!!
굉음이 작렬한다. 고막이 다 담지 못할 굉음.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흔들린다.
고통 없이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커헉?!]
태산처럼 거대하던 설인왕 이미르의 외마디 비명이 들린다.
깜짝 놀라 눈을 뜬다.
눈떠보니 실로 엄청난 장면이 보인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초대형 거인 이미르.
그가 거대한 흙먼지와 함께 저 멀리 설산까지 처박혔으니까.
아공간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거인의 손이 예상과 달리 이미르를 내리친 것이다.
[······네놈은.]
이미르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하늘에서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본다.
땅으로 떨어지던 베아트리체 또한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어 태양이 있던 하늘을 올려본다.
-키야아아아악-!!!
‘!!’
다시 제대로 보이는 검은 하늘.
그곳에는 황금빛 샌드 드레이크가 포효하고 있었다.
그 위에는 빛과 어둠의 가면을 쓴 사내가 타고 있다.
깊은 푸른 눈, 고급스러운 검은 로브. 오른손에 낀 절대 반지.
그리고 마신 문두스의 전승처럼 새빨갛게 타오르는 스태프를 든 사내.
붉은 스태프의 빛이 역광이 되어 그의 검은 실루엣만을 비춘다.
그럼에도 베아트리체는 그 사람이 누군지 한 눈에 알아본다.
‘······아?’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다.
시간이 멈춘 게 아니었다.
주마등처럼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줄 알았는데, 제 치맛자락이 바람에 흩날려 나폴거리니까.
마치 세상 모든 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기본 법칙만 지워진 것처럼.
정말로 모두가 구름처럼 두둥실 떠있는 것이다.
“이, 이건······?”
“중력 마법······?”
공중에 두둥실 떠있던 사람 중 누군가가 이 현상의 정답을 고한다.
중력 마법.
북부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마법이다.
한때 대륙의 희망이었던 존재의 시그니쳐 마법. 그러나 현재는 오르비스 대학살을 자행한 마법으로 더 알려진 궁극의 권능.
그 마법을 재현해 모두를 구원한 사내를 일제히 올려다본다.
"당신은?"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묻는다.
공중에서 떨어지던 수천 명의 사람이 목숨을 구원 받았기에, 기쁘고, 감사하고, 불안하고,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마신 문두스.”
이에 젊은 사내는 중저음 목소리로 읊조린다.
정체를 묻는 질문에 가면을 쓴 자는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한다.
모두가 경악한다. 설마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대륙 공적이라고 밝히다니.
그러나 아무도 부정하지 못했다.
마신 문두스의 권능 중 하나라는 중력 마법. 그 덕분에 모두 구원 받고 있으니.
번쩍! 꽈르르릉!
사내는 푸른 눈을 번뜩인다. 폭풍우가 몰려온다.
검은 하늘에 벼락이 거미줄처럼 쏟아진다. 어둠과 빛이 끝없이 반전된다. 마치 신의 대리인이 강림한 것처럼.
이 전쟁을 끝내고, 모두를 구할 희망이 강림한다.
그 속에서 가면을 쓴 자는 확언한다.
"너희들의 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