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대한파 (1)
산맥도, 성벽도, 들판도 온통 새하얗게 표백된 성이 쓸쓸하게 눈을 맞는다.
대륙 최북부 ‘천년 산성’.
북부 군단이 설인(雪人)들로부터 인간들의 땅을 지키는 인류 최전선이다.
지어진 지 무려 1천 년이 지났기에 천년 산성이라고 불리는 곳.
‘······하지만 그것도 이제 마지막인 것 같군.’
천년산성의 사령관 설산검(雪山劍) ‘레오파드 폰 랭커스터’ 후작은 무거운 입김을 내뱉었다.
대륙 최강 기사단 중 하나인 ‘로얄 가드’의 전대 수장.
북부 최강검이라고 불리는 그는 이명에 맞지 않게 무거운 한숨을 삼킨다.
그는 두려움에 질린 병졸들의 시선 속에서 근엄한 눈매로 성벽 아래를 내려다본다.
투두두두두두-!!
쿵, 쿵, 쿵, 쿵!
새하얀 눈밭이 흔들린다.
거센 눈보라에도 가려지지 않는 거대한 눈발이 천년 산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설인(雪人).
덩치가 무려 3m짜리에, 전신을 흰털로 뒤덮은 괴물.
천년산성 이북을 장악한 종족이다. 그들이 단단한 나무 몽둥이를 가지고 눈의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속도.
온몸이 근육질로 되어 있는 만큼 오래된 성이 덜덜 떨릴 만한 진동을 전한다.
그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은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식은땀을 흘린다.
“사, 사령관님······.”
“······.”
부관이 설산검 레오파드를 올려다본다.
그는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씁쓸한 눈매로 자신이 관리하는 천년산성을 내려다본다.
천년 산성은 이미 멀쩡한 성벽이 거의 없었다.
바람을 막아줄 초소는 이미 옛 저녁에 무너졌고, 궁수를 지켜줄 성곽마저 재건할 벽돌이 없어서 나무로 보강했다.
지독한 추위 탓에 통신 구슬마저 고장이 나는 곳.
그 위를 지키는 병사들은 모닥불조차 쬐지 못해 눈에 젖은 몸을 가엽게 떨고 있다.
인류 최전선으로서, 그 어느 곳보다 성곽이 단단해야 할 곳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게 위태로웠다.
-쿠오오오!
-크아아아!
반면 현재 설인들의 사기는 최고조.
맹목적으로 움직이던 놈들이 기어이 ‘왕’이라도 생긴 건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물론 그렇다고 인간처럼 영리하게 움직이진 못했지만.
당장 눈앞에 3,000마리가 넘는 설인이 하나의 명령 체계 하에 따른다는 건 대단히 무서운 일이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성벽을 힘으로 부수려 드는 놈들이라면 더더욱.
‘동부의 변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설인들의 공세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기존 병력으론 도저히 막을 수 없을 만큼.’
레오파드는 추가 보급을 요청했으나 받지 못했다.
베르너 공작이 의도적으로 천년산성을 보급하지 않았으니까.
표면적 이유는 레지스탕스의 약탈로 여분의 물자가 부족하다는 것이지만······.
설산검 레오파드는 오랜 경험 끝에 알고 있다.
실상 이유는 악의 세력과 결탁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노라고.
북부 영주 중 일부. 아니, 어쩌면 대부분이 타락했을지 모른다고.
‘더구나 현재 북부는 혼란기라고 하니.’
그가 내륙에서 들은 마지막 통신.
이는 베르너 공작이 마신 문두스에게 처형당했다는 소식이었으니.
북부가 난리가 났을 것이 예상이 된다. 자신들은 신경도 쓰지 못할 정도로.
따라서 지원군은 없다. 언제나처럼.
‘하지만 기사는 어떤 전장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법.’
그런데도 레오파드는 보검을 뽑는다.
주인은 개를 버리더라도, 개는 주인을 버리는 법이 없으니.
북부는 자신들을 버렸더라도, 자신들은 북부의 용사로서 끝까지 싸울 생각이었다.
그것이 임무이고, 용맹이며, 기사도니까.
천년산성이 뚫리게 되면 주민들에게까지 설인이 침공하게 되니까.
“제군들. 모두 무기를 들어라!”
채앵! 챙! 채앵!
그래도 그간 분전한 성과는 있는 걸까?
레오파드의 명령에 모두 무기를 들었다. 다들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 달아나려는 자는 없다.
레오파드는 이를 자랑스러워하며 전투태세를 다잡는다.
“우리는 인류의 최전선이다. 우리의 패배는 곧 인류의 위기. 결코, 물러설 수 없다!”
“······.”
“마지막 생명까지 불살라라. 내륙인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그래야 우리의 희생이 후대까지 빛날 것이다!”
레오파드의 호령에 추위에 떨고 있던 자도 몸을 단단히 굳힌다. 모두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천년산성.
이곳은 대륙 최변방. 인류의 최전선인데도 모두에게 잊힌 자들이니.
우와아아아-!!!
함성을 내지른다. 설인들이 당도한다.
병사들은 성벽 아래로 창을 내리찍고, 기사들은 전신 무장한 채, 검기를 휘두른다.
비록 압도적인 전력 차에 패배 직전이지만.
이 정도면 인류의 최전선으로서, 부끄럽지 않았다.
고오오! 쿠과과광-!!
-쿠에에엑!
사령관 레오파드 또한 성벽 아래로 내려가서 차갑게 벼린 검기를 뿜어냈다.
그가 한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기 폭풍이 회오리친다. 황금빛 검기가 하늘 높이 솟구쳐서 거대한 설인을 대여섯 명씩 잘라버린다.
6클래스.
북부 최고 경지. 이미 오래전부터 곪아온 천년산성을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었으니.
-키야아아악-!!
그때 하늘에서 거대한 포효가 울려 퍼진다.
정체된 전장을 한 번에 뒤바꿀 거대 몬스터의 울음.
“드레이크······?”
레오파드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보라 속에는 황금빛 비늘을 가진 초대형 익룡이 날아오르고 있다.
드레이크.
용이 퇴화했다는 아룡족으로서, 다른 몬스터와는 격이 다른 위력을 뽐내는 존재.
그 존재가 눈 덮인 고성(古城)을 내려다본다.
“이런!”
고고고!
레오파드는 보검에 시퍼런 검기를 뿜어낸다.
지금 분전하는 것은 결연한 사기로 인한 것이니.
만약 저 아룡에게 시선이 쏠려 사기마저 떨어진다면 더 버틸 재간이 없다.
이에 검기 폭풍을 하늘로 날려, 저 익룡을 떨어뜨리려는 것이었다.
“엇, 저건······?”
“인간이다! 샌드 드레이크 위에 인간이 타고 있다! 설마?”
그때 일부 눈 좋은 척후병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레오파드가 무언가 의아함을 느꼈을 때,
후우우웁, 콰아아아아-!!!
하늘의 아룡이 저공비행을 하며 용의 숨결을 작렬한다.
단지 그 방향이 몰려드는 설인 쪽이었을 뿐. 수십 마리의 진격을 막아내는 극독을 쏟아낸다.
천년산성의 병사들이 예상외의 사태에 두 눈을 부릅뜬다.
설인들조차 예상 못 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할 때,
뿌우우우우-!!!
저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들린다.
쿵. 쿵. 쿵.
시선을 돌려보니 수많은 군단이 다가오고 있다. 설인이 아닌 인간의 군단.
그것도 가지각색의 색깔이 담긴 깃발들이 말이다.
“우와아아-!! 북부 귀족 연합이다! 우릴 잊지 않고 지원군을 보냈다!”
“오르비스 대영지 문양이다! 공작 저하께서 친정을 나오신 거다!”
“!”
공작의 친정이라는 말에 레오파드가 깜짝 놀란다.
베르너 공작.
그는 끔찍하리만큼 북부 군단에 투자하지 않았으니까. 마치 북부를 설인들에게 팔아넘기려는 것처럼.
설마 이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이었을까?싶었을 때.
히히힝!
“오랜만이시군요. 스승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레오파드는 ‘오르비스 대공작’을 상징하는 깃발과 함께 기사단을 이끌고 오는 한 여인을 살핀다.
푸른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인.
과거엔 제자로 검술 훈련시켰으나, 어느새 제 주군임을 상징하는 오르비스의 눈꽃 반지를 낀 대영주.
베아트리체가 전신 갑옷을 입은 채, 백마를 타고 다가온다. 성곽 앞에서 레오파드와 정면으로 마주친다.
“위험하다! 어서 물러나야!”
-크오오오!
레오파드는 당황해 당장 베아트리체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레오파드의 몇 안 되는 제자이자, 북부의 패자이므로.
설인들의 돌진에 기함하는 거였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위기감 없이 답했다.
쏴아아아!
그와 동시에 아룡의 그림자가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다.
그 위에서 뿜어지는 대량의 마나.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사내가 거대한 마법을 일으키고 있었으니.
쿠과과과광-!!!
천년 산성에 있는 눈이 모인다.
그 눈들이 한데로 휘몰아쳐 설인들을 쓸어버린다.
아쿠아 스톰.
물의 명가 크라우드를 대표하는 5써클 재앙류 대마법. 눈 또한 수분이었으니, 사방에 널린 눈으로 일대를 뒤집어놓는 것이다.
레오파드는 그제야 하늘에 군림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눈치챈다.
베아트리체는 무표정을 깨고 싱긋 웃는다.
“이제 반격에 나설 차례입니다. 레오파드 경.”
***
천년산성 구원은 순조로이 끝났다.
과연 베아트리체를 데리고 북부 기사단부터 진격한 건 잘한 일이었다.
설인왕 이미르가 제 충신인 베르너 공작을 잃고 분개하여, 대군을 보낸 모양이니.
막 차기 공작으로 수여된 직후, 다른 북부 영지들을 단속할 겸, 천년산성까지 친정한 것이다.
‘겸사겸사 타락 영주들도 처형하고 말이지.’
-크르르~.
나는 용용이에게 간만에 사과 간식을 주며 생각했다.
북부 타락 영주들.
제 딴엔 정체를 숨기고, 증거도 없앴겠지만, 시스템 창이 있는 내겐 별 의미 없는 짓이었으니.
일단 죽이고 프레야 사제에게 감별 맡기는 것으로 정리했다.
이는 숲에 숨어있던 용용이가 날 먼저 찾아오는 일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너는 자꾸 날 어떻게 찾는 거냐?’
-크릉?
나는 눈발에 젖은 용용이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일전에야 발자국과 체취로 찾아왔다고 한들, 이번엔 분명 눈보라가 이는 북부이거늘.
무슨 수로 찾아왔을까?
참으로 자연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어쩐 일로 이 머나먼 변방까지 친정에 나서셨습니까?”
그때 회의실에서 노기사 레오파드는 베아트리체에게 경어를 쓰며 말했다.
공녀 시절엔 스승으로서 반말했을 테지만, 지금은 제 주군을 대하는 일이니.
더구나 막 공작위에 오른 그녀에게 권위를 세워주는 일이기도 했다.
“‘대한파(大寒波)’. 북부를 위협하는 설인들을 격퇴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베아트리체 또한 경어로 답한다.
언제나처럼 단아한 말투.
이전과 같은 무표정이었으나, 묘하게 안정감을 되찾은 모습.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앞으로 나선다.
간단하게 상황 정리하고 결론만 말한다.
“설인왕 이미르. 그자가 성물 기간테스의 힘을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깃든 마력은 가히 운석 소환에 비견될 만한 것. 북부의 멸망을 막기 위해선 그 본거지로 쳐들어가 막아야 합니다.”
“······.”
내 말에 설산검 레오파드는 눈을 감고 침묵했다.
2m나 되는 거구가 가만히 서 있자 마치 벽처럼 느껴진다.
연륜만큼이나 수많은 생채기와 잔주름이 많은 사내.
이윽고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 또한 척후병들에게 들었네. 북부 설인들이 구심점을 만들고 움직인다는 걸. 언젠가 설인들과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걸 말일세.”
그는 담담하게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만 문제는 그리 쉬운 게 아닐세. 지금까지 천년산성을 끼고 싸웠어도, 설인을 막기 힘든 상황이었네. 그런데 아무리 증원이 왔다고 해도 성 이북으로 진격하는 건 대단히 위험하네.”
천년 산성이 왜 천년이나 인류의 최전선이었겠는가?
이는 인간의 육체로는 지키는 것조차 한계였기 때문이다.
“천년 산성 이남조차 이토록 눈바람이 불 거늘. 그 북쪽은 얼마나 더욱 강하겠는가? 인류가 왜 천년 산성을 끝으로 더 북진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네.”
맞는 말이다.
천년산성 이북은 도저히 보급 마차와 군용 식량이 이송될 수 없는 곳이니까.
말 그대로 눈보라 자체가 천혜의 요새인 것이다.
“만약 기적적으로 눈보라가 내리지 않거나, 이를 막을 방법이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적들이 타락 성물을 가져오더라도 천년산성에서 수성하는 게 나은 선택일 수 있네.”
따라서 레오파드는 신중한 결정을 내린다.
설혹 적이 더 준비해오더라도 수성전을 하자.
일부 북부 영주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답이었다.
‘아니, 그럴 수 없다. 기간테스의 반지는 그런 식으로 막을 수 있는 병기가 아니니까.’
물론 내게는 안 될 말씀이다.
그렇게 되면 단순히 기사단이 더 죽는 정도가 아니라, 북부 전체가 쑥대밭이 될 것이니.
더구나 프레야 교단의 성인들이 집결해야 함은 물론, 대성자의 희생이 불가피하니까.
베아트리체와 북부는 동부와 마찬가지라 가장 든든한 아군 세력.
향후 진 엔딩을 위해서라도 그 힘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눈보라를 피해갈 길이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말한다.
오직 고인물인 나만 가능한 방법을.
“눈보라를 피해갈 길이라니? 다른 길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1천년간 미지의 세계에 길을 낸 적 없는데.”
그 말에 레오파드가 의구심을 비춘다.
하기야 인류는 천년 산성을 지은 후, 단 한 번도 북진한 적 없으니.
눈보라를 피할 길은커녕 제대로 된 지도도 부족하다.
말 그대로 척후병들이 작성한 간이 지도가 전부인 것이다.
이에 나는 베아트리체를 바라본다.
베아트리체가 이어서 말한다.
“저는 이종족 연합체인 레지스탕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엘프와 드워프의 소식을 들었지요.”
본론이다.
베아트리체 또한 내 의견에 맞춰 적 본거지를 치기로 결심한 핵심적 이유.
“천년 산성이 지어진 후, 북부는 1천 년간 인간의 영토였으나, 반대로 말하면 그 전에는 이종족의 영토였습니다.”
“······!”
그녀의 말에 레오파드를 비롯한 북부 영주들 또한 깜짝 놀란다.
지금 베아트리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거다.
“허면······? 드워프들의 도움을 빌려서 땅굴을 뚫고 가자는 말씀이십니까?”
한 영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베아트리체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 드워프 왕국에서 건설했던 지하 갱도를 발굴했습니다. 이를 통해 요툰헤임 산맥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
일전 스코틀린 광산을 수복한 이후, 내가 말해준 지하 갱도다.
드워프는 대대로 광맥과 자원을 사랑하는 종족.
광맥은 주로 인적이 드문 곳에 숨겨져 있었다.
이는 원작 <별들의 전쟁2>를 개발한 개발진들이 플레이어에게 희귀한 자원을 쉬이 넘기지 않으려는 의도였으니.
스코틀린 지하 영지에 숨겨져 있던 고대 드워프의 왕국은 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땅속에 지내는 종족인 만큼, 지상의 추위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지하 갱도를 수없이 뚫어낸 거다.
‘그리고 이는 설인왕 이미르조차 모르는 길이지.’
그 갱도는 수없이 많고, 오래됐을 뿐더러, 블랙 이글루를 운용하면서 이종족들과 사이가 크게 벌어졌으니까.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한다.
“따라서 저를 비롯한 소수 정예 군단이 지하 갱도를 따라 적 본거지로 잠입합니다.”
그리고 성물 기간테스의 힘을 탈취한다.
북부 연합군은 그동안 천년 산성에서 수성하면서.
그것이 최종 작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