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중력 마법 (1)
북부 귀족 회담.
오르비스 공작 베르너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영주들의 경제 협력 회담이다.
······실상은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의 추종자들의 회의일 뿐이지만.
오르비스 내성 비밀 회의실에 모인 귀족들은 사각 책상에 앉아서 논의를 진행했다.
“······식량 통제는 잘 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과연 농노들은 개돼지입니다. 비루한 것들은 배만 굶겨두면, 레지스탕스고 뭐고 밥 생각밖에 못 합니다.”
그들의 주된 안건은 제 영지민 통제였다.
경제적 통제.
영지민들을 굶겨둬야 레지스탕스를 토벌하기 위해 집안을 들쑤셔도, 식량을 우선 배급하는 거로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으니까.
“이미르 폐하를 막는 설산검 레오파드에게 가는 보급품을 빼돌리게. 이를 우리 영주들이 영지민에게 베풀면서 민심을 사야 하네.”
더구나 설인왕 이미르의 군대를 막고 있는 북부의 장벽 ‘천년산성’을 고립시켜, 쓸쓸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블랙 이글루는 또 언제 열립니까?”
“저희 와이프도 어서 열리길 바랍니다. 이번엔 담비 가죽 겉옷을 갖고 싶다는군요.”
“······.”
그렇게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에게 충성을 한 대가는 달콤했다.
온갖 종류의 화려한 사치품.
추위와 이종족의 침략으로 사치품이 절대 부족한 북부 귀족들의 염원을 이뤄줬으니까.
만약 이 제안을 거부한 영주는 거의 다 암살됐으니, 이제 더이상 북부에는 정상적인 영주가 없었다.
"모두 주목."
다만 이들의 수장인 베르너 공작은 표정을 굳혔다.
“설인왕 이미르 폐하께서 특명을 내리셨다.”
“······!”
그 말에 들떴던 회의실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설인왕 이미르.
아무리 악의 교단 소속으로 들어갔더라도, 그 존재는 감히 눈도 마주치기 힘든, 원초적인 공포를 안겨주는 존재였으니.
“'모든 기사를 동원해서 레지스탕스를 전력으로 소탕하라. 제 영지가 파괴되더라도 지부를 무너뜨려라.' 그것이 명령이었다.”
“······!”
충격적인 명령.
모두가 당황한다.
아무리 영주들이 타락했다고 한들, 기사가 타락한 것은 아니었으니.
만약 자칫 잘못하면 민란이나 반역이 일어나 영주들조차 위험할 수 있었다.
“저, 그런 명령은 갑자기 왜 내리시는지······?”
한 영주가 물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동부의 구원자 네카르가 레지스탕스와 접촉했다. 아무래도 우리 북부 연합을 눈치챈 모양이지.”
“······!”
“이미 눈보라의 악마 니키타가 당했다고 한다. 이대로는 동부처럼 우리 북부 연합 또한 무너질지 모른다.”
베르너 공작은 그것으로 상황을 일축했다.
동부의 구원자 네카르.
그놈 때문에 또다시 디메토르의 계획이 무너지고 있다.
“따라서 거사를 앞당긴다. 서부를 지배하시는 제5군단장 ‘탐욕왕 엘드리치’께서 본래 데힐라칸에게 가야 했을 물자를 북부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
더구나 확실한 지원까지 약속됐다.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의 제5군단장 탐욕왕 엘드리치.
블랙 오아시스, 블랙 이글루, 블랙 아지트 등 전 대륙 암시장을 지배하는 ‘블랙 마켓’.
그 블랙 마켓의 주인.
사실상 전 대륙의 검은돈을 지배하는 자였다.
그러한 자가 동부 몫까지 북부로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을 한다고 선언했다니!
이는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흑기사단장 ‘다네스’.”
“부르셨습니까.”
“요툰헤임 산맥에 있는 하르모르 산 군단을 차출해달라고 요청해라. 만약 천년산성을 지키던 기사단이 남하하면, 곧장 기습한다.”
“······!”
천년산성 기습.
인류의 최전선이자, 북부의 장벽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북부 최강검으로 꼽히는 설산검 레오파드가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을 침공한다니!
이는 전면적인 전쟁 선포였다.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킨다.
“하지만 요툰헤임 산맥 최전선인 하르모르 산이 텅 비면, 역공을 당할 수 있습니다.”
“멍청한 놈. 이미 천년 산성은 계속된 지원 감소로 반격은커녕 제 자리를 지키기도 어렵다. 그곳에 갈 병력 따위 없어.”
베르너 공작은 비릿하게 웃는다.
다름 아닌, 천년산성에 대한 지원을 전폭적으로 줄인 것이 그니까.
“아르펜 영주.”
“옛!”
“그대는 서부에 나가있다는 마탑의 흙의 마법사들을 불러라. 어스퀘이크 집단 마법이 가능한 초고위 자들로 엄선하라.”
“!”
마탑의 마법사.
이들은 중앙의 마법사로서, 대단히 실력이 뛰어나지만, 역으로 악의 교단을 들킬 수도 있는 자였다.
“그, 그들은 왜?”
“일전 셰어드 산 지하에서 레지스탕스의 본거지를 찾았다. 그러나 강물이 방향을 틀어서 수몰시키지 못했지.”
“!”
베르너 공작은 잔혹한 미소를 짓는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부수면 될 일. 물이 없으면 흙 마법으로 지진을 일으켜서 본거지 레지스탕스 놈들을 일거에 소탕하면 될 뿐이다. 알겠나?”
***
하늘이 얼어붙는다.
먹구름들이 새하얗게 변해버리고, 두꺼운 함박눈을 하염없이 내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살아남은 건 오직 새하얀 눈 뿐.
모든 생명체는 눈의 일원이 돼서 색깔을 잃고 새하얗게 변모한다.
‘더럽게 춥군.’
【바람의 길 lv3.】
쐐애액.
나는 그러한 요툰헤임 산맥 속 하르모르 산을 향해 초고속으로 비행했다.
칼날처럼 파고드는 추위에 허약한 몸을 떨면서도 은근한 미소를 짓는다.
과연 동부 사막 최고의 포식자 중 하나인 샌드 드레이크.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눈보라 속에서도 미친듯한 속도로 질주하고 있으니까.
어느새 인류 최전방이자 북부의 장벽이라고 불리는 천년 산성을 넘어, 설인왕 이미르가 있는 요툰헤임 산맥이 보인다.
“그런데 오늘따라 적들이 잘 안 보이는 것 같군.”
-크롸.
시스템 창에 설인들의 창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르모르 산 일대가 텅 비어있다는 뜻.
나는 묘한 이상함을 느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설산에 설인들이 가득했다면, 숨어서 가야 하기에 시간이 지체될 뿐이니까.
목적지 하르모르 산으로 직행할 뿐이다.
‘마지막 용의 구슬. 그 보물이 있는 위치는 이미 알고 있다.’
드래곤 윙즈, 중력 마법을 얻기 위한 마지막 퍼즐.
나는 이미 원작 <별들의 전쟁2>에서 있는 모든 몬스터를 잡아보면서 그 위치 또한 꿰뚫고 있었다.
‘빙조 흐레스 벨그의 둥지. 그곳에 있다.’
빙조 흐레스 벨그.
얼음 심장을 가진 그 존재는 용용이와 마찬가지로 무려 상급 비행 몬스터다.
그 크기도, 권능도 용용이에 꿀리지 않으며, 오히려 설산이라는 지형 특성상 더욱 강력한 힘을 내는 괴물.
굳이 싸우기보다는 빙조가 먹이를 찾아 자리를 비웠을 때, 최단거리로 돌파해서 다녀오는 게 최선이다.
‘문제는, 그 빙조의 둥지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는 건데······.’
-크릉?
당연하지만 게임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유저에게 드넓은 필드를 계속 걷게 하면 스트레스를 받기에, 게임적 허용으로 크게 단축돼 있으니까.
가까이 간다면 흐레스 벨그의 둥지임을 알아채겠지만, 온통 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여 있는 산맥에서 어디가 흐레스 벨그의 둥지인지 알 길이 없다.
“일단 숨어서 살펴보자.”
-크릉.
나는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엄폐물 삼아 숲 바로 위로 초저공 비행한다.
죄다 눈산이기 때문에 하르모르 산이 정확히 어디인지도 불분명하니까.
목적지를 찾은 뒤, 초고속 비행으로 정면돌파할 생각이었다.
쿠과광.
그런데 저 멀리서 소란을 느낀다. 눈 내리는 산 일부가 와르르 무너진다.
눈사태.
산에 눈이 너무 많이 쌓이다 못해, 그 무게를 못 이겨 무너지는 현상.
북부 최북단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다.
“으아악!”
“커헉······!”
-lv16 북부 장벽 십인장 아슬란.
-lv13 북부 장벽 병사 파티마.
“?”
그런데 문제는 그쪽에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천년 산성을 지키는 북부 병사들.
그들이 설산에서 내려오다가 눈사태에 휩쓸린 것 같았다.
‘탈영병인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나 탈영병이라고 한다면 굳이 만년설이 가득한 산맥에 왜 오겠는가?
“길이나 한번 물어보러 가야겠군.”
-키약!
나는 용용이를 타고 그쪽으로 급강하한다.
사실 탈영병이든 뭐든, 상관 없다. 내가 북부 군 지휘관도 아닌데 무슨 오지랖을 부리겠는가?
그저 하르모르 산맥 길이나 알아볼 생각이었다.
***
3일 전.
천년산성 소속 척후병 십인장 ‘아슬란’은 끝없는 눈발에 벌벌 떨었다.
그는 설산검 레오파드의 명령으로 최북단 ‘요툰헤임’ 산맥에 파견이 됐다.
최근 10년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설인의 침공.
이로 인해 설인으로부터 1천 년 간 북부를 지켜온 천년 산성조차 무너지고 있었으니.
그 원인과 심각성을 알려서 베르너 공작에게 더 많은 지원을 받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많다······.’
아슬란은 요툰헤임 산맥 최전선 하르모르 산에 도착한다.
얼음 바위 뒤에 숨어서 그 아래를 내려다본다. 침을 꿀꺽 삼킨다.
새하얀 눈발만큼이나 수 없는 설인들.
이곳에 보이는 놈들만 최소 1만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최전선이자, 가장 좁은 땅인 하르모르 산이 정도인데······.
만약, 진짜 요툰헤임 산맥의 가장 큰 산인 ‘우트가르다’로 가면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설인이 잠들어 있을까?
어쩌면, 매해 겨울이 길어지던 이유와 관련이 있는 걸까?
‘이건, 어서 설산검 레오파드 공에게 알려야 한다!’
어찌 됐든 10명의 대원을 데리고 후퇴한다.
천년산맥의 사령관 설산검 레오파드.
자신들의 대장이자 북부 최강검. 무려 6클래스 ‘대기사’인 그라면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니.
척후병들은 그리 굳게 믿고 하르모르 산 아래로 내려갔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 천년산성으로 향한다.
그렇게 3일째 되던 날,
“우왁!”
“기, 길이 무너진다! 모두 피해!”
쿠과과광!
한참 잘 가던 눈길이 무너진다.
얼음 위에 뒤덮여 있던 눈들이 삽시간에 치워지고, 얼음길 사이에 끝없이 떨어지는 죽음의 틈이 드러난다.
크레바스.
눈이 녹지 않고 계속 쌓여 얼어버린 얼음 덩어리들의 틈을 뜻한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 푹 꺼지는 땅속.
다른 곳이었으면 당연히 피했겠지만, 끝없는 눈에 숨겨져 있었기에 크레바스를 밟아버린 것이다.
“버텨! 안으로 떨어지면 안 돼!”
“으아아악! 떨어진다!”
다른 대원들은 반사신경으로 벗어났지만, 8명의 척후병은 크레바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빙판길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서로 몸을 묶고 있었기 때문에, 4명이 떨어지자 묶여있던 모두가 떨어진 것이다.
“커헉? 살았다?”
떨어진 척후병에겐 기쁜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이 하나가 있었다.
기쁜 소식은 그가 빠진 크레바스는 그리 깊지 않았다. 얼음 아래에서 무사히 생존했다.
하지만 나쁜 소식은······.
“구해주기엔······. 너무 깊다.”
“야! ‘배너’! 밧줄 내려줄 테니, 손 뻗어봐라! 어서!”
척후병 십인장 아슬란은 크레바스 위에서 가방을 꺼내 내려보낸다.
하지만 밧줄보다 아슬아슬하게 낮은 크레바스 지대.
아무리 손을 뻗어봐도 틈 속 척후병들의 손이 닿지 않았다.
막내 병사 지니는 벌벌 떨며 아슬란을 바라본다.
“대, 대장······. 이 경우엔······.”
“······.”
구조할 수 없다.
지나친 추위에 두 입술이 얼어붙은 걸까? 그 말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천년산성은 오랫동안 북부에서 버려진 성. 주로 범죄자나 연고자 없는 자가 오는 곳.
다들 한 가족 같은 자들이니.
“먼저 가십시오! 좁아서 아득하니 눈보라도 버틸 수 있겠습니다!”
얼음 틈에 버려진 척후병 배너는 억지로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천년산성까지 이곳까지 거리가 한참 떨어져 있으니.
아마 구조대가 오기 전에 눈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가려질 것이다.
땅에 갇힌 배너는 이미 자신이 틀린 걸 알기에, 어서 가라고 하는 것이다.
“뭐하시는 겁니까? 어서 설산검 레오파드 경께 그간 보고 들은 것을 보고하셔야지요.”
“······배너.”
척후병 십인장 아슬란은 착잡한 눈길로 제 부하를 바라본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거라. 곧 구조대를 데려올 테니.”
주먹을 꽉 쥔 후 억지로 뒤를 돈다. 그들은 척후병.
죽음을 각오하고 온 자들이니.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다해야 하므로.
아슬란은 고개를 하늘 높이 젖힌다. 눈물을 억지로 삼킨다.
그리고 천년산성으로 뛰어간다. 혹여 있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살리기 위하여.
구조대가 당도할 수 있는 확률이 아예 0%는 아니니까.
그렇게 눈길을 막 달리려 하는데.
쐐애애액-!!
거센 강풍이 휘몰아친다. 장성한 나무들이 흔들리고 쌓인 눈이 꽃잎처럼 흩날린다.
“크읏······! 이건?”
아슬란은 왼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강풍의 정체를 살핀다.
펄-럭!
새하얀 눈길. 그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날아온다.
거대한 비행 몬스터.
엄청난 크기의 그림자가 다가온다. 아무리 다가와도 끝없이 커지는 존재감.
홀로 장성한 나무 5개를 통째로 짓밟아버릴 비정상적인 크기.
그 몬스터가 자신들을 발견하고 초고속으로 날아오고 있다.
“이, 이건 설마······!”
“빙조 흐레스 벨그······?”
크레바스 속에 갇힌 척후병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빙조 흐레스 벨그.
그 크기가 매머드만하며, 날개짓만으로 눈보라를 일으키는 거대 새.
분노하면 홀로 작은 산을 통째로 얼려버릴 수 있다는 전설적인 존재를 말이다.
콰아앙!
거대한 생명체가 얼음길 위에 쾅 내려앉는다.
아슬란은 경악해 무기를 들고 그 존재를 올려다본다.
그러나 무기를 휘두르진 않았다.
그 거대한 존재 위에는 한 사내가 앉아있었으니.
동부 귀족들이 입는다는 고급스러운 모포를 두른 사내. 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아니,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