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눈보라의 악마 (1)
셔우드 산.
풍경이 바뀐다. 산 전체를 관통했던 푸른 동맥 같은 강이 방향을 바꾸고 내려온다.
막힘 없이 내려오는 물줄기.
방향이 잘못돼서 산속에 있는 나무와 생명체를 떼 죽임 할 수도 있을 법하거늘.
마치 원래 강 길이 이쪽이었다는 듯 아무런 붕괴 없이 가지런히 내려온다.
‘······.’
베아트리체는 네카르가 떠난 이후로도 그 산맥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상대가 동부의 구원자이자 아룡기사로 유명한 네카르라는 건 알았다. 거악 데힐라칸을 홀로 죽였다고.
하지만 그 말만으로는 체감이 덜 됐던 것 같다. 이제야 소름이 돋는다.
‘상식을 초월하는 자······.’
인간이 할 수 없다고 분류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할 수 있는 자.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버렸다.
마치 자신을 압도하는 고결한 존재가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는 북부 최강검이자 설산검 레오파드 경을 처음 만났을 때 단 한 번 느낀 감정이거늘.
‘더구나, 중급 정령이 달아난다고······?’
정령들조차도 쳐다도 보지 못하는 분위기.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엘프 몸에 착 달라붙었다.
혹시 아까 흙의 정령. 상급 정령, 그 이상의 존재인 건가? 정령 친화력이 없는 그녀로선 알 수 없었다.
“동부의 구원자······. 만약 이자를 포섭할 수만 있다면······. 정말 베르너 공작과도 해볼 만할지도 모르겠군요.”
“맞습니다. 이자를 놓치면 안 됩니다. 반드시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몇몇 대원이 말했다. 다들 격하게 동의하는 분위기.
베아트리체 또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부 엘프와 드워프가 몇 마디 더 붙인다.
“마신(魔神) 문두스······. 그자가 떠오르는 사내로군요.”
“홀로 자연경관을 바꿔버리는 대마법과 붉은색 마력석으로 된 스태프를 사용하는 점. 끝없는 바다 같은 눈동자까지······. 정말 마신 문두스와 전승되는 바가 같습니다.”
베아트리체는 그 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붉은색 마력석 스태프요? 마신 문두스에 대한 정확한 인상착의가 기록돼 있습니까?”
“예, 아무래도······. 저희 엘프는 인간보다 수명이 길지 않습니까? 하하.”
레지스탕스 대원 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대단히 오래된 일이지만 기억하는 분위기.
“저도 직접 만나 본 건 아니지만, 실제로 만나봤다는 분을 만나 뵌 적은 있습니다.”
“저도요. 성격도 대단히 자비로우셔서 오르비스에서 대학살을 벌였다는 사실을 아직도 못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오르비스 대학살을 벌이셨던 것도 사악한 북부 귀족들을 벌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
오르비스 대학살.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르는 자가 없는 역사적 대사건이다.
전 대륙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이끌었다는 마신 문두스가 어느 순간, 돌변한 사건이었으니.
그 날을 기점으로, 북부의 시간이 얼어붙고, 황제가 칩거했으며, 전 대륙의 악이 들끓기 시작했으니, 역사학자들과 중앙 관료들이 두고두고 회자할 수밖에 없었다.
베아트리체가 표정을 굳힌 채, 묵묵히 듣고 있자 다른 대원들이 눈치를 봤다.
“엇, 죄송합니다. 아가씨가 사악한 북부 귀족이라고 모욕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대단히 미안해하는 엘프들.
다만 그녀는 북부 귀족이 사악한 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타락한 북부 귀족이나, 제 아비를 죽인 자 앞에서도 냉철히 이성을 유지하는 딸이나 정상인일 리 없으니.’
자기 혐오가 짙어질 뿐이었다.
‘잡생각 버리자. 지금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베아트리체는 차분히 눈을 떴다. 지금 중요한 건 새로운 협력자를 구워삶는 것.
동부의 구원자 네카르 폰 크라우드.
그가 자신들의 구원자 또한 될 수 있었으니.
“가죠.”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없앤다.
다시 혼자 남는다는 상상. 이는 결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으니.
네카르와 약속한 스코틀린 빙산으로 향할 뿐이다.
***
나는 셔우드 산의 물길을 바꾼 후, 텅 빈 마차를 타고 북부 중앙에 있는 스코틀린 영지로 향한다.
레지스탕스는 비밀 결사대.
도로를 따라 최단거리로 스코틀린 영지까지 가기 부담스러울 테니.
먼저 가서 준비하기로 한다.
“저기로군.”
나는 노예 마부가 말을 이끄는 방향을 바라본다. 서서히 목적지가 보인다.
휘이이잉······.
스코틀린 영지는 새하얀 곳이었다.
숲도, 건물도, 사람도 눈보라에 파묻혀서 새하얗게 표백돼버린 영지.
한 치 앞도 안 보일 만큼 눈보라가 365일 몰아치는 곳이다. 심지어 그 눈보라가 점차 쌓이며 더욱 눈발이 강해지고 있는 곳.
아무리 혹한의 땅 북부라도 비정상적인 날씨다.
“저, 저, 정말 저기로 들어가시는 겁니까······?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는 곳을요······?”
“그래.”
노예 마부는 겁이 많은지 내게 재차 묻는다.
그러나 나는 이미 각오한 상태다. 저 안에 숨겨져 있는 지하 얼음 던전을 파괴하기로.
그 안에 숨겨진 ‘눈보라의 악마’를 처치하기로 말이다.
‘눈보라의 악마 ‘니키타’. 훗날 닥칠 대한파 때 호응하기 위해 얼음 병사들을 계속 만들고 있었지.’
스코틀린 지하 던전.
원작 <별들의 전쟁2>의 유저들이 흔히 ‘얼음왕궁’이라고 불렀던 지하 던전이다.
그 안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궁전과 병사들이 가득했으니.
아마 설정상 북부 드워프 왕족이 살던 땅이었으나, 현재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가 된 곳일 터.
‘동부 사막으로 따지면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 같은 놈이다······. 살려두면 끝없이 힘을 회복해 향후 거악처럼 군림할 놈. 반드시 미리 처리해야 한다.’
찬 바람을 맞고 있지만, 식은땀이 난다.
악마가 지독하리만큼 까다로운 이유.
본체는 마계에 있어서 특정 조건을 만족하지 않으면 데미지는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데, 각종 권능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파훼법을 모르고 있다면 아무리 4써클에 오르고, 드래곤 하트까지 가진 나라도 한 끼 식사밖에 되지 않을 존재.
그나마 막 강림했다면 차원 이동으로 힘이 극도로 약해졌겠지만, 베르너 공작의 보호 아래 너무 오랫동안 스코틀린 영지에서 거주한 탓에 힘을 상당히 회복한 모양이다.
병력이 더 쌓이기 전에, 힘을 더 회복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게 옳다.
‘더구나 나로서도, 이 녀석을 죽이고 용의 보주를 모아야 하니까.’
용의 보주.
다음 마스터급 특성 드래곤 윙즈를 얻는 데 필요한 조각들이다.
‘드래곤 윙즈를 얻어야 베아트리체와 반란에 성공할 가능성이 열린다.’
베아트리체를 차기 공작으로 올리기 위해선, 악과 파괴의 교단 제6군단장 설인왕 이미르와 암흑 계약한 베르너를 죽여야 한다.
북부의 패자 베르너 공작.
그의 레벨은 무려 다크 로드의 대리인 카넬과 동급인 49이다.
이는 과거의 엡실론 레벨보다 고작 3단계 낮은 수준.
더구나 그는 북부 최대 도시 오르비스를 필두로, 수많은 도시를 지배하는 대영주.
그의 휘하로 수많은 기사단과 군단이 따르고 있으니.
‘그들 전체를 힘으로 상대할 수 없다. 중력 마법으로 오르비스 대학살의 악몽을 떠올리게 해야 해.’
중력 마법.
이는 북부의 역사를 30년 이상 후퇴시켰다는 ‘오르비스 대학살’을 연상시키는 궁극의 마법 중 하나일 지어니.
원작보다 10년이나 빨리 베르너 공작을 죽이는 만큼, 최강의 패 또한 추가 마련하는 게 옳다.
절대적인 머릿수로 흑마법사를 압도했던 동부와는 달리, 이번엔 정반대로 내가 소수 정예로 활약해야 하니까.
그렇게 눈보라 속 영지에 도착한다.
가까운 나무 아래에 황금상회의 마법 촛불로 모닥불을 켜고 숨는다.
“여기서 대기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
노예 마부는 혹시 자신을 데려갈까 전전긍긍했는지, 벌떡 일어나며 힘차게 대답한다.
‘괘씸하긴 한데, 생각해보면 처지가 딱하니······.’
제 주인이 죽을 곳으로 가자고 하면 죽어야 하는 인생.
한마디 하려다 참는다.
휘이잉.
그렇게 혼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으로 들어간다.
사실상 길을 보지도 않고 걷는 수준이다. 순식간에 눈사람이 된다.
-살이 에는 추위! 몸이 벌벌 떨립니다. 체온이 빠르게 감소합니다!
-뼈가 시립니다. 가만히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치명적인 동상에 걸릴 것입니다!
.
.
순식간에 경고 시스템 창이 나타난다.
황금상회에서 특수 제작한 최고급 모포를 몇 겹으로 두르고 있음에도 뼛속까지 떨린다.
비정상적인 추위.
바람은 막을 수 있지만, 공기마저 꽝꽝 얼어버린 한기는 막을 수 없으니까.
이건 페널티 특성 허약한 몸 때문만은 아니다.
눈보라의 악마 니키타.
그 존재가 내가 다가오는 눈치채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니. 더욱 차가운 눈보라를 내뿜는 것이다.
【바람의 길 lv3.】
쏴아아.
나는 바람의 길로 눈보라를 사방으로 흩날린다.
눈이 대충 날아간 길에서 따뜻한 등불을 꺼낸다.
뽀독뽀독.
나는 등불에 의지하며 계속 걷는다. 털을 뺏긴 양처럼 오들오들 떨면서도, 쉬지 않고 걷는다. 추위를 극복한다.
‘왔군.’
그렇게 걷다 보니 찾고 있던 사람이 나타난다.
덜컹. 쨍그랑, 와르르.
땅속에서 눈길이 쑥 꺼진다. 땅바닥 얼음을 깨고 누군가 나타난다.
“뭐하냐? 네가 베아트리체 영애께서 말씀하신 네카르라는 녀석이냐? 빨리 안으로 들어와!”
-lv17 레지스탕스 드워프 대원 다윈.
그 안에 있는 건 꾀죄죄한 드워프였다.
고작 키 100cm 정도에 매부리코를 가진 까무잡잡한 사내.
옷에 묵은 때가 가득하고, 가슴 털과 구레나룻이 수북한 자가 마중 나왔다.
베아트리체가 스코틀린 영지 지부에서 근무 중인 레지스탕스 대원에게 미리 통신해 뒀으니까.
나는 그의 말대로 땅굴 안으로 들어간다.
“아이구. 아주 그냥 조금만 늦었어도 죽을상이군. 손발 떨리는 것 좀 봐. 고생 안 해본 귀족 놈이 뭔 배짱으로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
투덜투덜하면서 따뜻한 차를 건네는 녀석.
······드워프인데, 현재 레지스탕스 광물이 부족한지 녹이 슨 철잔이다.
나는 쇠 맛이 나는 차로 몸을 데운 후, 말했다.
“스코틀린 산은 어느 쪽이지?”
“뭐? 그 빙산은 왜 찾나? 설마 거기로 갈 건 아니겠지?”
“내부에 있는 지하 던전을 공략할 거다.”
담담하게 목적을 말한다.
그러나 다윈은 기가 차는지 버럭 화를 낸다.
“야, 이 미친놈아! 땅속은 덜 추워서 괜찮은 줄 알아? 동부 사막 촌놈이라 모르는 모양인데, 이건 정상적인 추위가 아니야! ‘눈보라의 악마’. 아무래도 마계의 존재가 깃들어 있는 것 같다고!”
“······.”
“원래 ‘드워프의 성지’가 있어서 고대 물자라도 얻으려고 들어왔는데, 외벽에 서식하는 얼음 병사들에게 학살당하고 쫓겨났다고. 너 같은 온실 속 화초는 관광이나 하고 돌아가!”
다윈은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쏟아냈다.
계속 된 자금난을 해결하려고 고대 드워프 성지를 발견해서 왔다가, 레지스탕스 동료 대원들을 잃으면서 감정이 격해진 모양.
“그 말은 이미 뚫어둔 길이 있다는 거군.”
물론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뭐, 임마? 너 내 말들을 귓등으로 들었어?”
“이쪽인 모양이군.”
“귀먹었냐? 멋대로 가지 말라고. 야!”
나는 땅굴 통로에 뚫린 길로 들어갔다.
주위 몬스터가 있는 방향으로 시스템 창이 보이는 만큼 길 찾기는 쉬웠다.
곧장 빙산으로 도착한다. 통로 끝에 얼음벽이 보인다.
드워프의 섬세한 착공 기술이 없으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얼음 벽.
그곳에 거대한 철문이 보인다. 손잡이가 꽁꽁 얼어있다.
“마지막 경고다. 뒈지기 싫으면 그 문에 손대지 마라. 원래라면 그냥 죽게 내버려 뒀겠지만, 베아트리체 대장이 중요한 거래처라고 해서 특별히 말해주는 거다.”
“그거참 고맙군.”
콰앙!
워터볼로 강철 문을 부순다. 스코틀린 얼음 던전으로 들어간다.
“야, 이 새끼야! 내가 키 작다고 무시해? 너 같은 애송이는 들어가면 10분 안에······. 히이익!”
다윈은 강철 문 안에서 엿보이는 얼음 병사를 보고 신음을 흘렸다.
-lv25 프로즌 워리어.
-lv24 프로즌 아처.
마치 얼음으로 드워프 형체를 조각한 듯한 괴물이 빙산 내부를 걸어 다닌다.
얼음 군단.
일반 레지스탕스 대원의 평균 레벨이 11.
정예 레지스탕스 대원의 평균 레벨이 19정도라는 걸 감안한다면 거의 격이 다른 존재.
마법 써클로 따져도 초급 마법사와 중급 마법사와의 격차다. 실로 아득한 수준.
【워터볼 lv3.】
촤악.
따라서 남들에게 기대하지 않고 내가 직접 나선다. 다행히 얼음 또한 수분.
주위에 수분은 충분한 만큼 막대한 양의 물을 응축한다.
“이런! 바보야. 도망쳐! 저 녀석들은 얼음 재질이라 그런 초급 마법 따위가 통하지 않는다고! 제기랄, 내가 일단 시간을 끌 테니까······!”
다윈이 당장 품에서 망치를 꺼내며 고함친다.
드워프들은 친해지기 어렵지만, 일단 친분을 쌓으면 배신하지 않으니까.
아마 베아트리체와의 친분 때문에 날 포기하지 못하는 거겠지.
물론 시답지 않은 걱정이었다.
콰아아아앙-!!!
일격에 프로즌 워리어와 아처를 동시에 부숴버린다.
거의 아리우스 학파의 집단 마법 워터 캐논급으로 물을 응축했기에 발생한 파괴력.
애초에 마계의 악마를 몇 번이나 상대했던 나로선, 이 정도 수준의 적에겐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어······?”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다윈은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런 털복숭이 드워프에게 말했다.
“스코틀린 영지를 관광만 하고 가라고 했나.”
조금 전, 드워프가 내게 온실 속 화초라며 했던 말.
“얼음 던전으로 안내해라. 중요 명소를 둘러보지.”
현지인의 안내에 따른다.
어차피 눈보라의 악마를 상대하는 방법을 아는 만큼 거리낄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