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결급 특성으로 대마법사-53화 (53/140)

53. 동부의 변 (5)

현자 카나단은 첨탑에 서서 흔들리는 시선으로 전장을 내려다본다.

“오, 어떻게 이런 일이······.”

불과 몇 시간 전.

엡실론이 등장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카나단은 감격과 희망에 차올랐었다.

물의 명가 크라우드 가주이자 동부 최강 마법사.

동부의 꿈을 상징하는 자.

그가 일격에 강을 들어 올려 언데드 군단을 쓸어버리는 모습은 물 속성 마법사의 진수였으니까.

그러나 감격으로 부풀었던 감정도 잠시일 뿐, 지금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가주님.”

성문에 처박힌 엡실론.

끼기기긱.

그를 날려버린 건 움직일 때마다 불길한 뼈 소리를 내는 리치였다.

동부 사막 전체를 어둠으로 물들인 악마.

-엡, 실론······.

그것이 붉은 눈동자를 번뜩인다.

데힐라칸의 영혼이 강림했음에도 자칼의 이성이 남아있는지, 엡실론을 알아보고 증오를 드러낸다.

-동부, 최강의 마법사라고······?

뚜두둑.

리치는 오른손을 들어 올린다. 그러자 뼈 지팡이가 생성된다. 그 끝에 매달린 10개의 두개골이 붉은 안광을 뿜어낸다.

-나는, 대륙 최강이다······!

지팡이를 땅에 쿵 내리친다.

쿠구구궁!

그와 동시에 포르티스 요새 일대가 뒤흔들린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가뭄이 든 것처럼 쩍쩍 갈라진다. 와해한 성벽이 반쯤 함몰된다.

“으아아악! 궁수 탑이 무너진다!”

“피하셔야 합니다! 첨탑도 위험합니다!”

“······!”

꾸웅! 쿠과광!

1, 2차 성벽으로 보호받던 궁수 탑과 첨탑마저 가라앉는다. 흙먼지가 나부낀다. 요새가 흔들리는 진동과 함께 수많은 사람이 깔린다.

또한.

드넓은 황야에서 수천 마리의 백골이 튀어나온다.

-끼기긱······.

-그오오······.

수백 년 된 유해 무더기.

이 요새를 공격하다가 죽은 뒤, 땅속에 묻혀있던 옛 악의 병력들.

고오오오!

이미 수백 년간 퇴적된 뼈들이었으나, 데힐라칸이 흩뿌린 먹구름에서 뿜어지는 마력이 그것들을 휘감자 다시 걷기 시작한다.

뚜둑, 뚜두둑······!

또한, 일부 스켈레톤은 조각조각 분해되더니 한데 뒤엉키며 기괴한 모습으로 합체한다.

몬스터와 인간의 뼈가 갑주가 되어 그것들의 몸뚱이에 엉겨 붙고, 누군가의 척추뼈가 긴 창 되어 그것들의 손에 쥐어진다.

이어서 해골마가 흙을 뚫고 일어서니.

히히힝!

그렇게 탄생한 데스 나이트들.

인간, 오크, 트롤 등 다양한 체격을 가진 채, 완전무장한 죽음의 기사들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홀로 남은 엡실론을 포위한다.

콰앙!

수백 마리의 데스 나이트가 일제히 땅을 박차고 달려든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다.

“······큿!”

벽에 처박혔었던 엡실론은 황급히 물의 보호막을 펼친다.

“아쿠아 스핀.”

콰아아아!

구체형 보호막이 초고속 회전한다.

뿌드드득!

그것에 닿는 순간 튕겨 나가는 데스 나이트들.

이어서 엡실론은 그 강력한 물회오리를 몸에 두른 채 리치 데힐라칸에게 돌격하여 타격을 입힌다.

- 가소롭구나.

데힐라칸이 지팡이를 바닥에 한 번 내리치는 순간.

지면에 붉은 마법진이 피어오른다.

주문 해체.

엡실론을 두르고 있는 마나의 흐름이 단절되고, 그것들이 엮고 있던 물의 장막이 흐트러진다.

그 찰나의 순간을 데스 나이트들은 놓치지 않았다. 사방에서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며 암흑 검기를 뽑아내 내리친다.

콰아앙!

무시무시한 굉음.

엡실론은 또다시 날아간다. 바닥에 처박힌다. 머리에 피가 주르륵 흐른다.

-어리석은 것. 성검조차 내게 제대로 타격을 입힐 수 없거늘.

데힐라칸은 가혹했다.

-이리도 나약해서야. 수백 년 전만 못하니, 멸족되어도 억울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지이이잉, 고오오오······!!

양손에 어둠의 구체를 모은다.

그것이 나타나자 일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공기의 흐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 사악함은 일격에 포르티스 요새를 무너뜨린 것에 비할법했다.

꽈아아아앙-!!!

엡실론이 서 있던 땅이 지워지고, 성벽의 서쪽 끝이 증발하고, 포르티스 요새를 에워싸고 있는 협곡에 구멍을 뚫는다.

기적적으로, 엡실론은 아쿠아 부스터로 몸을 날려서 피했지만······.

-히히힝······!

-진격, 하라······!

-불사의 군주, 데힐라칸, 님을 위하여······!

그러나 엡실론이 밀려나자 데스 나이트들이 무너진 포르티스 요새로 침투한다.

“크아악!”

“저 데스 나이트를 막아라! 모두 방진을 펼쳐야······. 으아악!”

쿠과과광!

그들이 검은 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무너진 성벽을 헤집고 다닌다.

“으아아아!”

“도, 도망쳐!”

아비규환.

동부 사막 연합군이 초토화된다.

그리고.

치지직······.

-사령부, 들리십니까······? 현재, 성녀 루크레치아 예하께서······. 동부로의 행군을 멈추시기로 하셨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비보가 전해졌다.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

악의 심판자이자, 성검을 가진 그녀조차 동부를 포기했다는 뜻이었으니.

그 어떤 기적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동부의 모든 희망이 꺼졌다.

[······카나단.]

엡실론이 통신 구슬을 꺼내 명령한다.

카나단은 황급히 통신을 받았다.

“예! 가주님. 하명하십시오!”

[다음번에 큰 마법을 시전하겠다. 프레야 교단 사제들에게 모든 신성력을 쏟아부어 축복하라고 전해라!]

즉,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카나단은 이견 없이 명에 따른다.

프레야 교단 사제들을 곧장 집결시킨다.

다만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의혹.

‘······과연 다음 일격으로 저렇게 강력한 리치를 물리칠 수 있을까?’

카나단은 기껏 모은 프레야 사제들을 살핀다.

그린달 주교가 이끌고 온 축복 사제들과 네카르 도련님이 데려온 세인트 발키리들.

이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언데드의 천적이라고 불리는 신성력으로 포르티스 요새가 위기일 때마다 몇 번이나 구해냈으니까.

그러나 전체 판도를 뒤바꾸지는 못한다. 애초에 그 수가 너무 적었으니까.

마치 산불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우물물을 끌어다 쓰는 격이었다.

‘그래도 가주님의 아쿠아 스톰에 저들의 신성력을 부여한다면 유효한 일격이 될 수 있겠지만.’

데힐라칸, 저 불가해의 악마에게도 유효할지는 의문이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

[······카나단.]

엡실론이 신호한다.

“지금입니다! 가주님의 마법에 신성력을 쏟아주십시오!”

고오오!

푸른 눈의 스태프가 뜨겁게 불타오른다. 제 주인의 마음을 대변하듯 비장하면서도 격렬하게 빛을 뿜어낸다.

촤아아악!

전력을 다해 물을 끌어모은다.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응축된 마나.

엡실론의 목에 굵은 핏줄들이 곤두선다.

그 위로 프레야 사제들의 축복이 깃든다.

그런데.

“가, 가주님!”

카나단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엡실론이 시전한 것은 거악을 쓰러뜨리기 위한 최후의 일격이 아니었으니.

[아쿠아 월.]

포르티스 요새를 감싸는 물의 벽.

쿠과광! 히히힝!

그것은 데스 나이트의 진격을 막아내는 해자가 되고.

샤아아아!

더 나아가서 리치 데힐라칸이 줄기줄기 내뿜는 어둠의 힘을 막는 신의 방패가 된다.

“설마······?”

남은 모든 마나를 끌어내서 시전한 것은 공격이 아닌 방어 마법.

현자 카나단은 그 의도를 깨닫고 엡실론을 바라본다.

[시간을 끌 테니, 후퇴해라.]

자신이 평생 모셔온 주군의 명령.

[지금쯤 전투 성녀 루크레치아가 마리우나 산맥에 방어선을 펼쳤을 것이다. 그곳으로 주민들을 대피시켜라.]

그러면서 홀로 거대 리치를 올려다보는 엡실론.

물의 명가 크라우드의 가주.

가문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는 자리이자, 동부의 운명을 결정하는 통솔자일지니.

침몰하는 배를 지키는 선장처럼 쓸쓸히 가라앉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아버지······!”

네하린이 애타게 소리쳤다.

지금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그녀지만, 이성의 끈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듯한 몸짓에 현자 카나단은 그녀와 네하드람을 끌어안고 밖으로 나간다.

눈시울을 붉힌다. 시간이 촉박하다.

“성문을 열어라! 대피를 시작한다!”

각 영주가 각자의 병력을 이끌고 탈출한다. 기사는 무너진 성벽을 부수고 또 다른 길을 만든다.

엡실론의 희생을 담보하여 대탈출을 감행한다.

‘여기까지인 건가······.’

현자 카나단은 겉으로는 태연히 사람들을 대피시키지만, 마음이 뿌리째 뽑히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후퇴한다면, 남아있는 동부는 주춧돌까지 완전히 파괴되겠지.’

그렇게 되면 동부의 꿈 또한 사그라지고 말 것이다.

‘죽기 전, 동부가 인정받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거늘······. 끝내 실패하고 말았구나.’

첨탑 아래 제 주군을 처연히 바라본다.

어릴 적부터 모셨던 엡실론.

동부의 꿈은 엡실론만이 꿈꾼 목표가 아니었다.

그는 심호흡하지만, 마음은 점점 뜨겁게 부풀어 올랐고, 결국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기사단장. 두 분을 모시고 가라!”

카나단은 탈출을 지휘하는 기사에게 소리쳤다.

“······현자님께서는?”

“나는 주군을 모셔야 한다.”

“!”

카나단은 네하린을 비롯한 젊은이들부터 내보낸다.

이번 세대의 실패.

그것이 다음 세대의 실패가 되진 않기 위하여.

카나단은 다시금 성벽의 난간 앞에 섰다.

이내 전장에 홀로 서 있는 엡실론의 뒷모습이 보였다.

단 한 번도 흐트러짐이 없던 사내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진이 빠진 자세로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 앞으로, 거대한 리치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지옥의 처형인처럼.

“아아.”

카나단은 심장이 쥐어짜지는 것 같았다.

힘이 빠져 성벽을 붙잡는다.

처연하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동부 대륙을 가득 메운 먹구름. 하늘조차 동부를 버린 기분이었다.

그런데.

“저건······.”

저 멀리, 지평선으로부터 한 줄기의 백색의 선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먹구름을 양단하며.

“대체······.”

그리고.

툭. 투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니.

카나단은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뻗어서 빗방울을 받았고, 그 안에 담긴 것을 느꼈다.

“신성력?”

그것도 아주 짙은 신성력이었다.

그 순간.

콰아아아-!!!

폭음과 함께 세상이 백색으로 반전된다.

카나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뜩 쳐들었다.

데힐라칸의 머리 위로 번개가 내리꽂혔다.

그 거구가 앞으로 휘청거리며 엡실론에게 향하고 있던 흑마법이 강제 불발되었다.

-그아아아!

분노를 담아 울부짖는 리치. 등뼈가 녹아내려 움푹 함몰된다.

놈이 뒤돌아 하늘을 돌아본다. 현자 카나단도 자연스레 그 시선을 따라간다.

쏴아아아아!

삽시간에 백색의 구름 떼가 몰려와서 장대비를 쏟아내는 게 아닌가?

“!”

“!!”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늘에 몰려온 빗방울에 닿은 가고일과 데스나이트들이 새까맣게 녹고 있었다.

마치 종이처럼 녹아버리는 언데드들.

-끄에에에!

엡실론의 아쿠아 베리어를 뚫고 암흑 검기를 날렸던 악마들이 힘을 잃고 쓰러진다.

마치 산불처럼 동부를 불태우던 언데드들이 재가 되어 소멸한다.

······어째서?

“이건!”

“성수다! 프레야 여신님께서 우릴 버리지 않으셨다!”

“루크레치아 예하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신 거다!”

포르티스 요새에 남아있던 프레야 사제들이 힘을 되찾고 고함쳤다.

성수.

그것이 하늘 위에서 폭풍우와 함께 쏟아지고 있었으니.

그 아래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는 언데드는 없으리라.

파치직······.

심지어 하늘을 뒤덮은 구름에 스파크가 튀긴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전운(電雲).

포르티스 하늘 일대가 모조리 새하얀 구름으로 뒤바뀌어 전기가 공명하고 있었다.

번쩍!

비구름으로 햇빛이 가려진 세상에 한 줄기의 빛이 내리꽂힌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황금빛 실처럼 떨어지는 벼락.

쿵! 쿠광! 쿠과광-!! 쿠과과광-!!!

그러한 벼락이 쉴 틈 없이 내린다.

빛과 어둠의 세계가 수도 없이 반전되며 지상을 회백색으로 물들인다.

천지개벽(天地開闢).

마치 하늘이 열린 듯, 수십 발, 수백 발, 수천 발의 벼락이 사막에 내리꽂힌다.

꽈르릉! 끼아아악!

그리고 그 벼락은 오롯이 포르티스 요새를 포위했던 언데드들에게 꽂힌다.

신성한 비로 유약해진 언데드들.

그것들의 육신을 다시 재로 되돌린다.

마치 신의 심판처럼.

그 순간, 카나단은 보았다.

백색으로 물든 하늘.

작렬하는 번개 장막 뒤편.

이곳으로 다가오는 하나의 형체를.

“저건······?”

현자 카나단은 멍한 눈으로 그 그림자를 쫓았다.

샌드 드레이크.

그것에 타 있는 사내.

카나단은 그가 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네카르 도련님······?”

동부의 마지막 희망이,

폭풍우를 몰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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