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동부의 변 (3)
엡실론의 손짓에 강이 추락한다.
전장 전체가 수중에 잠긴다.
홀로 거대한 강을 옮기는 기적.
그 모습은 포르티스 요새 일대에 있는 모두가 목격할 수 있는, 대격변이었으니.
“바, 방금 뭐였어······? 그 거대한 강은?”
“엡실론 경께서 돌아오셨다! 동부 최강 마법사가 돌아오신 거야!”
성내의 사막 연합군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누구는 살았다고 말하고, 누구는 아무리 엡실론이라도 이 거대한 전장을 뒤바꿀 수 없으리라 말한다.
또 누군가는 엡실론은 아직 중앙에 있으며, 저자는 다른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그 수많은 웅성거림 속에, 엡실론은 고요히 서 있다.
“엡실론이 돌아왔다.”
“위대하신 다크 로드를 위하여.”
“······!”
그러자 검은 복면을 쓴 암살자 20명이 성벽 아래에서 일거에 뛰어오른다.
흑마법사들.
제 최우선적인 적 엡실론이 강림했기에 각자 필살의 주문을 읊으며 몸을 던진다.
너무나 경쾌한 속도에 원로 마법사들도 반응하지 못한다.
“아쿠아 월.”
이에 엡실론은 그저 한 손을 들어 올린다.
쿠과아아아!
일순 창으로 만든 벽처럼 일어나는 해자.
성문을 지키는 두꺼운 강이 성벽을 빼곡히 감싸고 있는 해골 병사들의 사다리를 모조리 박살 내며 기어오른다.
와르르 쏟아지는 수백 마리의 스켈레톤.
20명의 암살자는 물론, 성벽 근처에 있던 좀비 오크와 스켈레톤을 모조리 쓸어버린다.
모두 경악해 입을 쩍 벌린다.
단 한 번의 마법으로 자신에 향한 모든 의혹을 종결시킨다.
-끼아악!
-까아아악!
어두운 하늘에서 부서진 성곽만 노리던 익룡들이 목표를 바꾼다.
가고일.
악마의 익룡으로서, 몸이 단단해 화살조차 통하지 않는 괴물.
지긋지긋할 정도로 하늘에서 괴롭히던 익룡들이 엡실론에게 일제히 급강하한다.
-그우어어······.
-끼기긱······!
지상의 언데드 군단 또한 다시 성벽을 타고 오른다.
끝없이 부활하는 군단.
그들의 진격은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효과를 가졌으니까.
언데드들이 정면에서 성문을 때리고, 성벽을 타오른다. 동료의 시체를 계단 삼아 밟고 오른다.
일부는 엡실론에게 뼈 화살을 쏘거나, 제 동료를 집어던지기까지 한다.
성안 사람들이 헉, 숨을 삼킨다.
쿵.
그러나 엡실론은 그저 자신의 스태프를 꺼낸다.
푸른 눈의 스태프.
물의 명가 크라우드 최고 스태프로 평가받는 결전용 병기다.
고고고고!
푸른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마력석들.
악마처럼 생긴 3개의 마력석이 각자 찬란한 빛을 뿜어낸다.
엡실론은 무겁게 읊조린다.
“아쿠아 스톰.”
아쿠아 스톰.
물의 명가 크라우드에서도 오직 가주 엡실론만 익혔다는 비기.
무려 최소 시전 단계가 5써클인 상급 마법.
재앙을 일으키는 대마법이 이 자리에서 실현된다.
쿠구구구!
포르티스 요새에 있는 거의 모든 수분이 성문 앞으로 집결한다.
동쪽 성문 앞 드넓은 황야를 꽉 채우는 물이 합쳐지더니 거대한 물기둥을 만든다.
뼈 화살도, 스켈레톤도, 좀비 오크도, 가고일도 속절없이 빨려 들어간다.
콰아아아아-!!!
그리고 이어지는 2차 회전.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물기둥 속에 정반대로 회전하는 또 다른 토네이도를 일으킨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토네이도는 기존 토네이도와 충돌에 막대한 마찰열을 발생시킨다.
치이익······!!
물회오리 속에서 연기가 뿜어진다. 그 속에서 녹아내리고 있는 스켈레톤과 좀비들.
사악한 힘에 지배당하던 시체들이 깨끗이 정화된다. 처연한 달빛에 찬란한 무지개를 꽃피운다.
사아아······.
그렇게 소멸해버린 아쿠아 스톰.
포르티스 요새 앞을 새까맣게 메웠던 언데드 군단이 텅 비듯 소멸한다.
“이것이······.”
“아버지의, 아쿠아 스톰······?”
네하린과 네하드람은 일전 네카르가 시전했던 아쿠아 스톰과는 또 다른 경지라는 걸 직감했다.
단순히 질량의 힘만으로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마찰열로 물을 순식간에 기화시켜서 마치 폭발처럼, 연달아 기압이 터진다.
그 진가를 꿰뚫어 본 것이다.
동부 사막 귀족들과 마법사들 또한 함성을 지르지 않았다.
“대······. 마법사······.”
그저 멍한 표정으로 첨탑 꼭대기에서 군림하는 엡실론을 바라봤을 뿐.
엡실론은 강림 직후부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주문을 읊조리고 쓸어버릴 뿐.
새삼 동부 최강 마법사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6써클을 목전에 둔 마법사.
이른 시간 내에 동부 최강이 아닌, 대륙 최강의 마법사가 될 존재.
엡실론의 압도적인 마법 실력에 경탄한다.
우와아아아-!!
포르티스 요새에 있는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이제 전쟁이 끝났노라고.
드디어 살았노라고. 얼싸안고 우는 자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번쩍.
흑마법사 측에서 엡실론을 향해 검은빛이 번뜩인다.
쿠과과광-!!!!
검은 광선이 일직선으로 작렬한다. 1차 성벽, 2차 성벽을 꿰뚫고 첨탑 위까지 녹여버리는 사악한 광선.
방금 엡실론이 선보인 5써클 아쿠아 스톰에 버금가는 흑마법이다.
“······!”
일대 모두가 놀라서 고요해진다.
물론 엡실론은 이미 회피 기동한 상태였다.
하지만 포르티스 요새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움직여서 피했다.
“너는.”
엡실론이 검은 광선이 날아온 것을 향해 눈매를 부라린다.
흑마법사 무리 속에서 자신과 동급인 존재를 발견한다.
터벅. 터벅.
홍해처럼 반으로 갈라지는 흑마법사 무리.
갈라진 길에서 검은 머리 사내가 걸어 나온다.
“네가 크라우드 가주로구나.”
피부는 젊지만, 그 속은 오래돼 썩어 문드러진 젊은 사내.
머리에는 검은 왕관을 쓰고 있고, 몸에는 용이 그려진 검은 옷을 입은 흑마법사의 왕.
반로환동의 흑마법사가 포르티스 요새에 있는 엡실론과 눈을 마주친다.
“나는, 동부의 왕이다.”
쿠과과과!
검은 마력을 줄기줄기 내뿜는다. 하나하나가 살인적인 광선. 엡실론을 향해 숱하게 뿜어진다.
촤아아악!
엡실론 또한 푸른 눈의 스태프를 고쳐 쥔다. 물의 명가 크라우드를 상징하는 물이 곁을 지킨다.
검은 광선과 푸른 물이 뒤엉긴다. 두 세계가 충돌한다.
“······마력이 줄어들지 않는군.”
엡실론은 상대를 꿰뚫어 본다.
같은 5써클 마법사.
그러나 자칼은 마경으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의 손아귀. 그 악의 힘이 자칼에게 끝없이 힘을 공급해주고 있다.
같은 써클이라도 상대는 마나가 무한인 셈.
엡실론조차 스태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수십 년 만의 제 적수를 만났다.
***
나는 검은 고성 속 거대한 문을 열어젖혔다.
늪지대의 악마 레비아노가 깃들어있는 방.
방안은 마계 화가 되어있었다.
마치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의 미궁처럼 공간이 끝없이 확장된 모습.
정글에 들어온 것처럼 드넓은 늪지대가 펼쳐있고, 그 안에 거대한 호수가 놓여있다.
물이 탁하고 깊어서 속이 비춰 보이지 않는 호수.
용용이를 타고 그 호수 위를 활공한다.
‘아마 이 아래에 레비아노가 잠들어있겠지.’
-lv45 늪지대의 악마 레비아노. (화신체.)
나는 드래곤 아이로 그 호수 속을 꿰뚫어 본다.
차원의 틈에서 기어 나온 마계의 악마.
저 악마를 죽이고 차원의 틈을 부수지 않는다면, 동부는 확실히 멸망할 것이다.
차원의 틈은 악마 소환도 문제지만, 다크 로드 자칼에게 끝없이 마력이 공급해주니까.
아무리 엡실론이 자칼과 같은 5써클 마법사라고 해도, 상대가 무한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길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엡실론이 자칼에게 패배한다면, 포르티스 요새와 동부 사막 전체도 멸망하겠지.
결전의 마음을 다잡는다.
-그르르르.
이에 호수 속에서 기묘한 울음이 울려 퍼진다.
인간계에서 쉬이 듣지 못해 신비로우면서도, 소름 끼치는 소리.
그런 소리가 마계화 된 방에 웅장하게 울린다.
그때 순식간에 솟구치는 검은 형체. 마치 고래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덩치가 깊은 심연에서 튀어나온다.
촤아악! 터업!
나를 향해 포탄처럼 날아드는 초대형 악마. 덩치에 비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날 삼켜버리려고 한다.
【바람의 길 lv2.】
나는 시스템으로 악마가 다가오는 걸 보고 있었기에, 재빨리 가속해서 피한다. 아슬아슬 이빨을 벗어난다.
‘······순간 속도는 용용이를 능가하는군.’
식은땀이 느껴진다. 저 치악력에 물리면 즉사다.
그제야 호수 위로 나온 악마와 맞닥뜨린다.
그 모습은 고래의 몸에 악어의 입과 4개의 다리를 붙인 것과 같았다.
악마의 뿔이 박혀 있지 않았다면 수중 거대 생물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생김새.
-기이이익.
붉은 눈을 번뜩이며 날 올려다보는 거물. 머금은 물이 이빨 사이로 질질 흘러나온다.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와는 크기부터 성격, 취향까지 완전히 정반대인 녀석.
고오오오오!
머리에 붙은 커다란 뿔 하나에서 시커먼 마력을 뿜어낸다.
물을 좋아하여, 늪지대에 서식하는 악마인 만큼 호수에 있는 물을 끌어모은다.
-우우움!
우우웅. 파아앙!
정신이 아찔해지는 마력에 매직 오브가 스스로 달려들어 공격을 난사한다.
그러나 피부에 생채기도 나지 않는 레비아노.
콰과과과과-!!!
뿔에 모은 호수의 물을 일직선으로 뿜어낸다. 거대한 호수가 순간 심하게 낮아지는 수압.
나는 감히 맞서 싸우지 않고 계속 피하기만 한다.
그러자 들려오는 통신 구슬 소리.
[하하! 멍청한 침입자놈. 하필 들어간 방이 레비아노님께서 계신 방이었느냐?]
검은 고성을 관리하는 흑마법사로 추정된다.
[미안하지만 레비아노님께선 고대 시대 늪지대의 신으로 추앙받으신 존재시다! 다크 로드께서 친히 소환하신 악마시지!]
“······.”
[5서클 화염 계열 마법사가 아니라면 생채기조차 낼 수 없으신 분이시란 말이다!]
흑마법사는 매우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하기야 대개 흑마법사는 악마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힘을 받는 족속들.
악마를 신으로 모시는 사제와 다른 바가 없으니까. 자신이 모시는 악마에 대해 자부심을 품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확실히. 상대는 물 속성 악마. 내가 익힌 마법들로 처치하기엔 상성이 좋지 않다.’
불의 정령에게 불 속성 공격을 하는 게 무용하듯.
레비아노에게 아쿠아 스톰이나 어스퀘이크는 별로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것도 모르고 이곳에 들어오진 않았다.
치잉.
나는 성물 아가타의 성배를 들고 호수 위로 초저공 비행한다.
마나가 허용하는 한, 잔에 담은 물을 성수로 바꿔버린다는 프레야 교단 성배.
용용이가 악마를 두려워 달아날 법도 하거늘, 용기를 내서 내 명령에 따른다.
“고대의 신이라.”
나는 아가타의 성배를 호수 속에 담근다.
악마의 마력에 탁하게 변해 버린 물속에서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성물을.
쿵, 쾅, 쿵, 쾅.
그리고 심장에서 성물에 마나를 불어넣는다.
호수 물을 꺼내 담은 것이 아니라, 호수 속에 담아둔 상태에서 성배를 발동한다.
샤아아아아!
검고도 탁한 호수 전체에 찬란한 빛이 뿜어진다.
검은 고성 전체를 빠뜨릴 수 있을 법한 호수가.
오직 악마 레비아노만을 위해 마력에 오염되고도 지저분한 물을 통째로 성수로 바꿔버린다.
-크아아아아!
온몸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레비아노.
호수 위에서 고통스럽게 울부짖는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던 괴물이 신성력은 통한다.
몸부림치며 뭍으로 빠져나오려고 한다.
“그렇게는 안 되지.”
고오오오!
그러나 나는 아직 마법을 쓰지도 않았다.
【아쿠아 스핀 lv3.】
늪지대의 악마 레비아노를 향해 읊조린다. 물의 명가 크라우드 가주 엡실론을 상징하는 비기 아쿠아 스톰.
그 혈통인 내가 신성력이 충만한 호수 물과 연계해 겉모습이나마 재현한다.
촤아아아아-!!
레비아노를 향해 수평으로 회오리치는 물의 토네이도.
무시무시한 굉음에 레비아노의 비명마저 들리지 않는다. 인간계에 강림한 화신체가 견디지 못하고 고깃덩어리가 된다. 완전히 소멸한다.
“크, 그래 이게 성배지.”
내 힘만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악마지만, 에이션트 등급의 성물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두 번째 악마 처치! 당신은 늪지대의 악마 레비아노의 화신체를 처치했습니다!
-이로 인해 레비아노의 영혼은 마계로 강제 송환됩니다. 최소 수백 년간 회복에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이윽고 레비아노를 완전히 처치했다는 시스템 창이 나타나고.
-이 사실을 프레야 교단에 알리면 막대한 공헌도를 인정받고, 지역 성인으로 추앙받을 수 있습니다!
-신성력과 마나의 융합! 마법 경지가 한단계 발전합니다! 3써클 5티어에 도달합니다!
마법 경지가 한 단계 더 상승한다.
이제 한 단계만 더 상승하면 4써클.
20대 최고 천재 중 하나라는 네하린을 넘어서서, 60대 지고한 현자라는 카나단과 동급인 경지.
단순히 뛰어난 후기지수가 아니라, 전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자 반열이 코앞이다.
[······무, 무슨······?]
통신 구슬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지 말을 떠는 흑마법사.
하기야 흑마법사들에게 살아있는 신처럼 추앙받는 자칼이 친히 소환한 악마가 깨끗이 소멸했으니까.
나는 그에게 들으라는 듯 읊조린다.
“뭐야, 고대의 신이라더니, 너무 늙어서 그런가.”
경비병이 사라졌으니, 차원의 틈을 박살 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