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동부의 변 (2)
물의 명가 크라우드 차기 가주 네하린은 포르티스 요새에 도착했다.
총 1만여 명의 동부 최대 규모 병력과 고위 마법사들을 데리고.
마경의 몬스터와 언데드 군단을 막기 위해 동부 최고 요새로 입성한다.
쿠구궁.
다리가 내려온다. 네하린은 백마를 몰아 성문 안으로 들어간다.
병사들의 환호성 속에 말발굽 소리를 맞춰 유지한다.
‘······하지만 괜찮을까? 언데드 군단은 통상적인 군대가 아닌데.’
다만 네하린은 걱정이 앞섰다.
언데드 군단은 죽음을 초월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속성의 군대.
안 그래도 불리한 전력인데, 그들을 인간 군대 상대하듯 준비한다면 참패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주들은 노회한 인물들. 첫 정계 진출한 날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을 거야.’
그러한 상황에서 내부 단결도 제대로 될지 의문이다.
각 영주는 전쟁이 끝난 후, 자기 군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악을 쓸 테니까.
적과 최대한 싸우려는 게 아니라, 적당히 넘어가고 싶어 할 영주도 있을 테니.
과연 자신이 그들을 통솔해 적들을 막을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어서 오십시오. 누님.”
“네하린 공. 먼 길 오셨군요.”
첨탑에 도착하니, 마중을 나온 임시 사령관 네하드람과 현자 카나단.
네하린은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최고 사령관으로서, 인수인계를 받는다.
“?”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수북한 보고서.
네하린은 의자에 앉아 묻는다.
“혹시 내부에 무슨 분란이라도 있었습니까?”
“흠흠, 그럴 리가요. 누가 지휘하는데 누가 감히.”
네하드람이 콧방귀를 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네하린은 놀란 시선으로 요약본을 읽는다.
“성벽에 올라오는 언데드들을 밀어내기 위해서 전용 병장기와 끓는 물 대신, 언데드를 녹일 기름과 불화살을 준비했다니······. 네하드람, 정말 고생이 많았구나.”
솔직한 감탄.
방어 체계를 위해 분주히 준비한 기록들. 심지어 언데드를 막기 위한 전용 대비도 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쭐거리는 네하드람.
“누구 명령인데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다른 영주들은 반발이 없었니?”
“처음엔 다소 있었는데······. 네카르, 그 녀석이 다가간 후, 거의 사라졌습니다.”
“네카르?”
네하린은 의외의 이름이 나오자 또다시 놀란다.
현자 카나단이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준다.
네카르가 동북부, 동남부 영주들의 지지를 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언데드의 습성과 상대법을 가르쳐주었다고.
그로 인해 동부 영주들이 분란 없이 이를 따르고 있다고 말이다.
‘네카르······. 그 녀석은 도대체······.’
도대체 밖에서 무엇을 하고 다니기에 이러한 일을 벌인단 말인가?
‘설마, 차기 가주 직도 포기한 이유가 바로 이때를 위해서?’
하기야 먼 옛날, 네카르는 몬스터 군단이 쳐들어온다면 자신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달라고 전한 적이 있다.
대견한 동생이 보고 싶어졌다.
똑똑똑!
“네하린 공! 여기 계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적들이 도착했습니다! 성벽으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때 들려온 급보.
네하드람과 카나단이 놀라 네하린을 쳐다본다.
“올 것이 왔구나.”
네하린은 천천히 일어나 성벽으로 향한다. 호위 기사와 마법사의 안내를 따라 적을 맞이하러 간다.
성벽에 도착하자 선명하게 들리는 아군 병사들의 대화.
“저, 저게 다 몬스터라고······?”
“말도 안 돼······.”
포르티스 요새 앞은 깨끗한 황야였다. 보다 정확하게는 거대한 바위 산맥 사이에 있는 유일한 황야.
그 덕분에 이곳만 틀어막으면 혹여 마경에서 강력한 몬스터 무리가 쳐들어와도 동부 사막 내부로 들어오지 못했기에 성을 지었던 것이었는데.
“······!”
모래바람이 휘날리던 주홍빛 사막이 푸르게 물들었다.
거대 늑대, 코볼트, 오크로 구성된 1차 마경 몬스터 무리. 육안으로 보기에 끝이 없이 펼쳐진 푸른 무리.
마치 마경 전체를 통째로 사막에 옮긴 듯한 착각이 들었다.
“카나단 경.”
“알고 있습니다.”
카나단은 미리 준비한 새장에서도 독수리를 꺼내 드높은 구름 위로 날려 보낸다.
호크아이.
하늘의 왕이자, 창공의 지배자인 영장.
수백 미터 떨어진 지상까지 정확히 꿰뚫어 본다는 독수리의 눈으로 전황을 살펴본다.
“!”
이에 경악하는 네하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끝없는 푸른 숲이 끝나면, 새하얀 뼈가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동부 공동묘지를 전부 합친 듯한 유해들.
쿵, 쿵, 쿵, 쿵, 쿵!
히히힝!
심지어 그 뼈의 숲이 끝난다고 언데드 군단이 끝나는 게 아니었다.
검은 로브를 둘러싼 존재들.
칠흑 같은 말과 갑옷을 입은 데스 나이트와 흑마법사, 그리고 메시아 관을 쓴 검은 왕과 눈이 마주친다.
그때,
척.
검은 왕이 검지를 들어 푸른 하늘을 가리킨다. 날아가는 독수리에게 읊조린다.
무어라 말하는지 거리가 너무 멀어 듣지 못했지만, 입 모양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떨어져라······?’
번쩍.
그와 동시에 검은 빛이 빛나고.
쿠과과과, ■■■■-!!!
거대한 마력 줄기가 일직선으로 뿜어진다. 세상을 양분하는 듯한 검은 선.
무지막지한 굉음이 일어난다. 독수리가 새까만 재가 되어 소멸한다.
“큿?”
갑작스러운 패밀리어의 사망에 네하린까지 충격을 입는다.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네하린.
“네하린 공?”
현자 카나단이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한다.
불안에 젖은 병사들과 영주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제 사령관을 바라본다. 심지어 가문 사람들까지.
모두 한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아뇨.”
네하린은 그들의 마음을 읽은 듯 말한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한다.
“곧 가주님께서 돌아오실 거에요.”
엡실론의 부재.
그 전까지 버틸 수 있다는 각오를 다잡는다.
뿌우우우-
이윽고 비상용 뿔피리를 부는 포르티스 요새. 병사들이 완전무장한 채 제 자리를 지킨다. 성안 사람들이 바빠진다.
투두두두두!
쿵, 쿵, 쿵, 쿵.
몬스터 군단은 그 뿔피리 소리를 신호로 일제 돌격한다.
요새가 흔들릴 법한 거대한 진동. 그러나 그러한 진동이 끝없이 이어진다.
요새에 발을 맞댄 병사들은 온전히 그 진동을 느낀다.
“모두 전투 준비.”
“모두 전투 준비!”
처저적.
그러나 네하린의 통신 명령에 일제히 활시위를 잡아당기는 성벽 위 병사들.
궁수 탑에서는 발리스타도 준비되고, 공중에 물, 불, 바람 등 온갖 종류의 마법들도 떠오른다.
3초간 대기하는 총 4만의 사막 용사들.
적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하염없이 길다. 이마에 굵은 땀이 목덜미까지 내려오기 충분한 시간.
“발사.”
쿠과과과과-!!!
그 후, 내려진 명령. 숲처럼 다가오던 몬스터 무리가 일거에 쓸려나간다.
방금 검은 왕이 선보인 검은 기둥과 비견될 법한 일격.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적의 모습에 병사들은 용기를 되찾는다. 함성을 내지른다.
***
나는 카넬을 비롯한 흑마법사들을 치우고, 포르티스 요새를 떠난다.
충분히 쉬었는지 쌩쌩해진 용용이.
질풍처럼 구름을 가르며 저 멀리 보이는 마경 하늘로 들어간다.
‘차원의 틈. 그걸 부숴서 전쟁을 끝낸다.’
차원의 틈.
마계와 연결돼 악마를 소환하는 게이트다.
언데드들을 계속 부활시킬 마력을 공급하는 장치.
흑마법사 중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장치다.
내가 쳐들어오리라 상상도 못 했을 터니, 대비도 못 했을 터.
모든 병력이 포르티스 요새로 향했을 때, 빈집을 턴다.
-크르륵!
-카아아악!
물론 마경 내부에는 몬스터 무리가 일부 남아있었다.
나무 위로 날아오르는 흡혈 박쥐들.
【워터 소드 lv1.】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짙은 안개에서 습기를 모아 물의 검을 형성한다.
워터 소드.
3써클 이후 사용할 수 있는 중급 살상 마법 중 하나다.
물의 권능이자 특징 중 하나는 형태를 자유롭게 응축하거나, 변형할 수 있다는 점이니까.
그리고.
【아쿠아 스핀 lv2.】
검날에 회전을 부여한다.
파괴력이 대폭 증가한다.
“죽어.”
서걱.
나는 용용이에게 달려드는 박쥐들을 모조리 썰어버린다.
공간을 베어 가를 때마다 검날이 무지막지하게 길어진다. 박쥐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한꺼번에 쓸린다.
"효과가 쓸만하군."
나는 깔끔하게 날아가는 절단면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전기톱을 수십 배로 강화한 것 같은 절삭력을 선보였으니까.
-아쿠아 스핀의 또 다른 활용법을 체득하셨습니다!
-아쿠아 스핀 lv2가 lv3로 오릅니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때마다 빠른 속도로 오르는 경험치.
아쿠아 스핀은 아쿠아 스톰은 물론, 다방면으로 활용하는 물의 명가 크라우드의 비기인 만큼 쏠쏠한 소득이다.
“찾았다.”
그렇게 드래곤 아이로 발견한 검은 고성.
검은 벽돌로 된 다크 로드의 성은 동부 대륙 끝, 바다 위 절벽을 등지고 세워져 있었다.
“용용아. 한 번에 가자.”
-키야악!
【바람의 길 lv2.】
기왕 들킨 거 최대 속도로 진격한다. 나무 위로 날아오르더니, 초고속으로 질주하는 용용이.
이에 검은 고성에서도 긴급 반응한다.
지이잉, 콰앙! 쾅!
성에 새겨진 흑마법 마법진이 발동한다. 마치 화산 폭파 후, 파편처럼 검은 화염들.
용용이는 특유의 전투 본능으로, 날아드는 화염 운석을 곡예비행으로 피한다.
이후 검은 성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침입자다!”
“아니, 어느 틈에! 당장 몬스터를······!”
【워터볼 lv3.】
맞닥뜨린 흑마법사들이 다급히 방어 태세를 펼치지만, 속도 면에서 날 앞설 순 없다.
흑마법을 영창하거나, 몬스터를 부르기 전에 모두 쓸어버린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지.’
심장이 불길함을 감지하고 쿵쿵 뛴다.
이곳은 적들의 본거지.
말 그대로 사자 아가리 속으로 홀로 들어온 꼴이니까.
이곳에 온 목적,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역시 차원의 틈만 파괴하는 것뿐이다.
‘모든 흑마법사와 몬스터들에게 힘을 전해주는 차원의 틈만 파괴하면 일시적으로나마 큰 혼돈이 찾아올 테니까.’
탈출할 틈도 벌 수 있겠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만큼 망설임 없이 전진한다.
차박.
복도로 들어가니, 바닥이 물로 흥건하다. 점성이 있는지 끈적한 물.
나는 그것을 보고 상대 악마가 누군지 확신한다.
‘물의 악마 검은 악어로군.’
-lv45 늪지대의 악마 레비아노. (화신체)
나는 물이 흘러나오는 방을 드래곤 아이로 꿰뚫어 본다.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와는 정반대로 물을 관장하며, 그 속에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마계의 존재.
이곳 흑마법사들이 받들어 모시고 있던 악마인 모양이다.
‘본체도 아니면서 레벨이 무지막지하군.’
아마 덩치 또한 한 층을 전부 차지해버릴 만큼 거대할 것이다.
동부의 변을 위해, 물의 명가 크라우드를 저격해 섬멸하기 위해 준비한 비장의 카드였겠지.
‘하지만 아직 소환된 악마가 레비아노 한 마리뿐인가 보군.’
10년 후와 달리, 현저히 적은 악마들.
아마 내가 흑마법사의 정체를 밝히며 거사를 강제로 앞당기다 보니 벌어진 나비효과일 터이다.
이제 막 소환하기 시작하는 모양인데, 한 마리뿐이라면 정말로 할 만하다.
악마 같은 차원이 다른 존재는 아무리 차원의 틈이라도 소환하는 데 한참 걸릴 분더러,
레벨은 상성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절댓값일 뿐이니.
치잉.
나는 품에서 프레야 교단의 성물을 꺼낸다.
아가타의 성배.
물을 담기만 하면 무엇이든 모조리 성수로 변환시킨다는 전설적인 성물.
전대 성녀의 신성력이 오롯이 남겨진 투박한 잔이자,
악의 천적인 신성력을 무한정 뿜어낼 수 있는 고대의 보물이 내 손에 있다.
“이쪽도 물이라면 자신 있어서 말이다.”
벌컥.
망설임 없이 방문을 열어젖힌다.
늪지대의 악마 레비아노를 마주한다.
***
포르티스 요새.
이곳은 지옥 같은 수성전을 치른다.
“쏴라! 모조리 벌집으로 만들어버려!”
아펠 영주 호세는 제 부하들을 향해 힘껏 명령했다.
쐐액, 파바바박!
-취이익!
-크어어억!
그러자 포물선 안에 있는 오크들이 피보라를 뿜어내며 일제히 쓰러진다. 거대한 전장 속에 작은 피 웅덩이가 생긴다.
힘찬 함성을 지르는 병사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고고고······!
뚜둑, 뚜두둑.
죽은 몬스터 시체에 검은 연기가 깃들더니, 살점이 순식간에 썩는다.
-그워어······.
-취이익······.
그와 동시에 다시 일어나는 오크들. 포르티스 요새를 향해 진격해온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병사와 마법사들.
“이런······! 계속 부활한다고?”
“그럼 우린 저 백골이 진토되도록 고쳐 죽여야 한단 말이야?”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적들은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끓는 기름을 쏟아붓고 불화살을 쏘며 좀비들을 녹여 죽인다.
1차 성벽을 오르는 적들에게 2차 성벽에서 화살을 쏜다. 측면을 맞은 적들은 관통력과 함께 사다리에서 떨어진다.
프레야 사제들은 신성력을 아꼈다가, 적들이 해자를 메워버릴 때만 나서서, 와르르 녹여버린다.
끝없는 적들을 상대로 어떻게든 버티긴 하는 모습.
대대로 이 사막에 거주한 주인으로서 저력을 선보인다.
팽팽한 구도 속에서 변화가 찾아온 건 해가 떨어지며 동쪽 하늘의 경계로부터 밤이 기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고오오.
“아니, 저 녀석들은?”
“······흑마법사들. 도대체 무얼 하려는 거지?”
호세와 병사들은 성벽 아래에서 검은 마법진을 펼치는 흑마법사들을 내려다본다.
불길한 기운을 뭉게뭉게 피워 올리는 흑마법사들.
그들 중 하나가 읊조린다. 호세는 입 모양을.
그 불길한 주문을 따라 읊조렸다.
“시체 폭발······?”
다음 순간.
쿠과과광-!!
동쪽 성벽이 모래처럼 들썩이더니 유리처럼 으스러져 내린다. 성벽을 타고 오르던 좀비 오크들이 뼈와 장기가 터져나간다. 아군이 휩쓸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모습.
쿠과과광-!! 끄아악!
시체 폭파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한번, 두 번, 세 번 연속으로 폭파한다.
날아간 뼈 파편이 성벽을 부수고 살아있는 병사 목을 꿰뚫는다.
죽은 병사 시체에 또다시 2차 폭발이 일어나고, 2차 폭발에 휩쓸린 시체에 다시 3차 폭발이 일어난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파괴력.
“떠, 떨어져! 뭉치면 죽는다!”
일부 성벽에서 한나절 동안 이어지는 전투로 심신이 지친 병사들이 분열하기 시작한다.
무너진 성벽에서 점차 물러서는 병사들과 그러한 병사들과 또다시 물러서는 병사들.
성벽을 재건해도 위험한 전장에서 점차 물러서기 시작한다.
쿠구구궁.
그러는 사이, 흑마법사들은 거대한 투석기를 만든다. 스켈레톤을 조립해서 만든 초대형 투석기.
쿵, 투쾅!
그 투석기에 거대 몬스터를 싣는다. 대포알처럼 무겁게 날아간다.
콰아앙!
-크오오오!
성벽을 부서뜨리며 강림하는 트롤들.
다리뼈가 완전히 분질러지지만, 흑마법사들은 끝없이 실어 날린다.
“오, 오크들이 올라온다! 빨리 밀쳐내!”
“마법사! 마법사들은 뭘 하고 있어!”
빠른 속도로 점령돼가는 성벽들.
트롤의 압도적인 덩치에 놀라 밀어내지 못한다.
-까아악!
화룡점정으로 검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에 까마귀 같은 울음이 더해진다.
점점 다가오는 검은 새들.
그러나 그 크기는 까마귀의 100배 가까이 되는지 끝없이 커진다.
“저, 저건······!”
“가고일이다!”
악마의 익룡 가고일.
온몸이 돌처럼 단단해서 화살조차 버티는 괴물들. 무너진 성벽을 뒤덮는다.
쐐애액! 푸화아악!
“끄아아악?”
“모두 피해! 산개하라고!”
날카로운 발톱을 마치 낫처럼 세우는 가고일들.
성벽으로 초저공 비행하며 밭을 갈듯 병사들을 갈아버린다. 죽음을 수확한다.
“헉······. 헉······. 이런······.”
포르티스 요새의 사령관인 네하린은 첨탑에서 이를 지켜본다. 백옥 같은 얼굴에 그늘이 진다.
24시간 쉬지 않고 쳐들어오는 몬스터 부대.
병사들을 교대시키는 것도 이젠 한계다. 몬스터와 언데드보다 훨씬 빨리 지치니까.
아마 흑마법사들은 그걸 노리고 저녁이 돼서야 본대를 보낸 것이리라.
‘분명, 흑마법사들도 곧 마력이 한계일 지언데······. 어떻게 시체 폭발까지 쓸 마력이 남아있는 거지?’
네하린은 차원의 틈의 존재를 몰랐다. 그로 인해 흑마법사들이 끝없이 지치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비록 안다고 전황이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만약, 네카르······. 그 녀석이 차기 가주였다면 달랐을까······?’
네하린은 제 곁을 지키고 있는 크라우드의 원로 마법사와 기사들을 바라본다.
모두 체력이 떨어졌거나, 마나가 떨어져 숨 고르기 바쁘다.
쿠광!
그때 좀비 트롤 한 마리가 네하린이 지휘하는 첨탑으로 날아왔다.
투석기로 몬스터를 던져서, 내부로 침투시킨 것.
크라우드 원로 마법사들과 지방 영주들은 핏발을 세우고 고함친다.
“이런! 네하린 공이 위험하다!”
“가주님을 구해라! 사령관께서 위험하시다!”
-크롸아!
그러나 도와주러 오기엔 너무 늦었다. 트롤은 네하린 바로 앞에 있으니.
네하린은 마나 고갈로 피할 체력이 없었다.
‘아니다······. 이건 네카르가 있었어도 불가능했다······.’
한 사람의 힘으로 뒤바꿀 수 없는 전력 차.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한계였으니까.
그렇게 힘을 잃고 죽음을 기다리려는데.
촤아악! 쿵!
시원한 물보라 소리.
누군가 하늘에서 쿵 떨어진다. 좀비 트롤의 외마디 비명이 들린다.
“······!”
그와 동시에 일순 침묵하는 전장.
도대체 무슨 일이지?
네하린은 의문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번쩍 뜬다.
“네카르?”
혹시 그 아이가 여기에 온 걸까? 하늘에서 내려온 금발의 사내를 살펴본다.
“분전하고 있군.”
“!”
그러나 그 사람은 네카르가 아니었다.
만약 네카르가 30년쯤 나이든 다면 저런 모습일까?
네카르와 똑 닮은 황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훨씬 연륜이 있었다.
이마에 주름이 쌓이고, 눈매가 용처럼 고고한 중년 사내.
엡실론.
물의 명가 크라우드의 현 가주이자, 동부 최강의 마법사. 동부의 꿈을 상징하는 존재.
그들의 아버지가 도착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앱실론이 하늘로 손을 뻗는다.
네하린은 그 손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완전히 밤이 내려앉은 하늘. 그곳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다.
“······오로라?”
빛을 머금은 빛의 커튼.
그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아, 아니잖아?”
그것은, 오로라 같은 신비로운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쿠과아아아-!!
거대한 물결.
하늘에 강이 떠 있었다.
비트로스 강. 동부 사막을 양분하는 그 물줄기가 하늘로 뻗쳐 올라간 뒤, 하늘을 가로질러, 머리 위에서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내.
쿠구구구-!
언데드 군단 위로 폭포처럼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성벽 아래에 비명이 메아리친다. 흑마법사들이 떼죽음 당하고, 뼈로 만든 투석기가 산산이 조각난다.
전장의 바람이 바뀐다.
단 한 명의 존재로.
아버지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