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동부의 변 (1)
한편, 포르티스 요새 첨탑 회의실.
네하드람은 임시 사령관으로서, 영주 회의를 소집했다.
한자리에 모인 가지각색의 문양을 가진 동부 귀족 영주들.
20여 명의 영주가 원탁에 모여 앉자 네하드람이 입을 연다.
“10만에 달하는 언데드 군단. 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 논의하고자 합니다.”
영주들은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고민하던 부분이었다.
“언데드 군단······. 스켈레톤은 뼈만 있는 병사들이라고 했소. 그들에게 화살을 쏘는 게 의미가 있는 거요?”
“적들은 계속 부활한다고 했잖소. 그렇다면 망치 같은 거로 완전히 부숴버려야 하는 건가? 일일이?”
영주들의 고민은 깊었다.
산전수전 경험이 많은 영주도 언데드 군단을 상대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더구나 귀족 연합군 3만 명보다 훨씬 많은 10만의 적.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 한숨이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신성 축복을 받거나, 은으로 만든 무기에 닿으면 부식한다고 하는군요.”
“그럼 3만 명이나 되는 병력에게 은을 전부 입혀야 하는 건가? 무슨 돈으로?”
“프레야 교단이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 그들을 어디에 배치해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하겠군요.”
다만 이는 쉽게 결정 나지 않았다.
프레야 교단 사제는 한정돼 있는데, 모든 영주가 가까운 성벽을 배정받고 싶어 했으니까.
사제들은 축복은 물론, 치료할 수 있는 만큼 자기 병력 손실을 최소로 할 수 있는 만큼 쉬이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회의가 길어진다. 불안한 공기가 가득하다. 목청이 올라간다. 지지부진한다.
콰앙!
그때, 천장에서 묵직한 것이 내려온 소리가 난다.
모든 영주가 적의 침공인지 알고 벌떡 일어난다.
그러나 곧이어 회의실에 남아있던 주교 그린달이 환하게 웃는다.
“네카르 경!”
“오랜만입니다. 주교님.”
꾸벅 인사하는 금발 머리카락에 흰 피부를 가진 사내.
네카르 폰 크라우드.
그가 샌드 드레이크를 타고 돌아왔으니.
-크르릉.
네카르는 회의실 문 앞까지 따라온 샌드 드레이크의 얼굴을 몇 번 쓰다듬어주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황금상회 관계자가 샌드 드레이크를 임시 둥지 속으로 데려간다.
“자네 5개의 전진 마을을 구하러 떠났다고 하지 않았나?”
“이미 구했습니다.”
“······뭐?”
네카르는 한 영주의 물음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하드람 사령관님!”
잠시 기다리자 성문 병사가 달려온다.
“무슨 일이냐?”
“5개의 전진 마을에 있던 피난민들이 요새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
5개의 마을 피난민들이 순차적으로 포르티스 요새에 도착한다.
다른 구원군과 피난민들도 곧 도착할 거라고 덧붙인다.
다들 한 시름 놓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회의는 잘 되고 계십니까? 제법 날이 늦었습니다만.”
“······아직일세. 자네는 언데드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이에 네카르는 언데드의 특성을 상세히 말해준다.
“언데드는 부활하는 데 마력과 시간이 걸립니다. 화살 세례는 흑마법사의 마력을 크게 줄인다고 생각하십시오.”
“일반 보병은 은으로 된 무기가 없어도 됩니다. 적들을 쓰러뜨리고 그냥 성벽 아래로 던져버리라 하십시오. 그럼 알아서 파괴될 테니까요.”
.
.
마을 주민을 구하면서 알아냈다기엔 너무나 상세한 정보.
짧고도 굵은 핵심 정보들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져준다.
그러나 일부 영주들은 시큰둥했다.
“그런데 네카르 경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거요?”
“내 듣기로도 크라우드 가문에서도 유명한 망나니라고 들었소. 경의 말을 함부로 믿었다가 큰일을 그르칠까 걱정이 되는군.”
대부분 동부 사막 중부 지역 영주들.
그들은 근래의 네카르의 활약상을 별로 전해 듣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신뢰하기에는 너무 어려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이 화들짝 놀랄 만큼, 다른 지역 영주들이 버럭 화를 냈다.
“어허!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시오? 네카르 경보다 몬스터에 대한 전문가가 어디에 있다고!”
“네카르 경께선 우리 동남부 지역을 재패했던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까지 발견해 처치하신 분이외다! 말씀 가려 하시오!”
“네카르 경의 말을 못 믿으면서, 향간에 떠도는 소문 따위는 믿다니. 그게 중대사를 결정하는 영주의 태도요?”
대륙 동북부와 동남부 영주들이 펄쩍 뛴다.
그들은 각각 괴조 카디악 무리와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에게 영지가 황폐화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었으니까.
이를 아무런 사욕 없이 해결해준 네카르에 대해 전적인 신뢰와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동부에서 엡실론 다음가는 실세이자, 최고 권력자인 주교 그린달 또한 표정을 굳혔다.
“네카르 경께서는 우리 프레야 동부 교단에서 공인하는 단 3명뿐인 금빛 배지의 소유자이시오. 저분에 대한 모욕은 우리 프레야 교단에 대해 무시로 간주하겠소.”
“······!”
동부 대륙 교단 전체를 총괄하는 주교의 경고. 무게감이 달라진다.
이를 몰랐던 동부 중앙 영주들은 다른 지역 영주들이 일제히 화를 내자 당황한다.
“······험험, 네카르 경이 그렇게 달라졌단 말이오?”
“그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물론 아직 완전히 수긍하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뜨겁게 타오르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는다.
회의실이 다시 조용해지고 나서야, 네카르는 다시 입을 연다.
“그린달 주교님.”
“왜 부르시오?”
“프레야 교단에서는 요새 내부에서 대기하다가, 성벽에 위험해졌을 때, 나서주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핵심 사안을 거론한다.
언데드 군단을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한 예비군인 프레야 교단.
그들을 어떻게 할지 네카르가 조언한다.
임시 사령관 네하드람조차 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을 말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소?”
일단 이유를 들어보는 그린달 주교.
네카르는 그것이 비장의 방법이라는 듯 씨익 웃는다.
“언데드 군단은 암중에 숨어있던 군대. 대형 공성 병기가 거의 없는 만큼 ‘해자’를 시체로 메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자.
성벽 둘레에 파둔 인공적인 강으로, 성문이나 성벽에 충차나 공성탑을 붙일 수 없게 하는 수성 장치다.
포르티스 요새가 무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이 아주 깊은 해자(垓字) 때문이었다.
이 강을 메우려면 수많은 판교나 대형 방패 차가 필요한데, 몬스터나 언데드 군단은 이게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언데드 군단은 그 구덩이를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소?”
아직 의도를 모르는 그린달 주교는 고개를 갸웃한다.
스켈레톤 병사들이 해자를 넘치게 메울 텐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말이다.
“프레야 교단에서 강물에 신성력을 부여해 밑을 바치는 스켈레톤을 녹여버린다면, 그 위에 쌓은 사다리가 와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적들의 예봉을 크게 꺾을 수 있을 겁니다.”
“!!”
이에 네카르는 언데드 군단의 치명적인 약점을 간파한 듯 기묘한 현안을 내민다.
“오오오, 과연 현묘한 방책이군.”
“네하드람 사령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썩 괜찮은 방안이로군.”
네카르의 말에 임시 사령관인 네하드람 또한 동의한다.
“그런데, 네놈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순수한 의미의 질문.
마치 언데드와의 전쟁을 이미 겪어본 것처럼 계책을 술술 내지 않는가?
사실 별 생각 없이 한 질문이었는데, 네카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언데드라는 말에 갑자기 비책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뭐, 됐다. 뭐든 효과만 뛰어나면 됐지.”
그것으로 가장 핵심적인 방어 논의는 끝난다.
도저히 한 발자국도 진행되지 않을 것 같던 난관이 네카르라는 사람 한 명으로 인해 순식간에 끝난다.
***
마경(魔境) 검은 안개의 성.
대륙 최동부 마경에서도 가장 끝에 자리 잡은 이곳은 짙은 마기으로 인해 24시간 내내 어둠에 집어 삼켜져 있다.
그 어둠 속에 홀로 고고히 자리 잡은 건 검은 벽돌로 지어진 고성(古城).
고성에서 가장 안쪽에는 흑색 카펫이 깔려있다.
그리고 그 카펫 끝에는 뼈로 만들어진 높이 3m짜리 옥좌가 있다.
“드디어, 동부의 끝이 도래했군.”
그 옥좌에 팔을 괴고 반쯤 누워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사내. 거만하면서도 연로가 섞인 말투로 중얼거린다.
분명 겉보기엔 나잇대가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최소 60대의 것 이상이다.
반로환동(返老還童).
경지가 너무 지고하고, 품은 마력이 너무나 정제돼서 노화된 육체가 정화되고 젊을적 혈기로 회귀하는 것.
그 경지를 뚫어버린 듯한 모습.
그러나 젊은 피부 속 살은 썩어 문드러진 듯 검고 탁해, 가까이에서 보면 공포스럽고 기괴한 모습이었다.
[다크 로드 자칼님을 뵙습니다.]
[다크 로드 자칼님을 뵙습니다.]
그의 옥좌 앞에 놓인 수십 개의 수정 구슬 속 존재들은 그를 향해 일제히 무릎 꿇었다.
흑마법사도, 말 못 하는 짐승도, 몬스터도, 마계의 악마도 그의 위상 앞에 무릎 꿇는다.
다크 로드.
흑마법사의 왕이자, 동부의 악을 지배하는 위대한 존재를 경배한다.
“······너무나 길었군.”
그 모습에 겉모습이 젊은 사내는 허심탄회하게 읊조린다.
“10년이나 앞당겼음에도, 너무나 늦었음이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포도주 잔을 한 손에 휘휘 젓는다. 싫증이 난 듯 탁 떨어뜨린다.
쨍그랑.
산산이 조각나는 포도주잔.
그 소리를 신호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선다.
드드드득······.
그러자 뼈로 된 옥좌가 움직인다. 옥좌에 붙잡힌 두개골과 인간 유해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팔을 뻗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뼈 계단.
3m나 되는 높이에 있는 옥좌에서 위대한 영이 강림할 수 있도록 제 몸 밟히며 받쳐 든다.
또각.
다크 로드라는 젊은 청년은 그 계단을 한 걸음 내디딘다.
또각.
“살아남은 12제자.”
그 말에 검은 카펫 곁에 서 있던 10명 가까운 제자들이 허리를 펴고 일어난다.
또각.
“마경의 지배자.”
[그르르······.]
마경 몬스터들이 통신 구슬 속에서 네 발을 꿇어앉던 마경 몬스터들이 일어나고.
또각.
“마계의 악마들.”
-고오오!
검은 안개의 성, 옥좌 옆에 열린 차원의 틈.
마계와 연결된 차원 게이트에서 안개처럼 생긴 악마 한 마리가 일어난다.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와 동격, 혹 그 이상의 악마.
거악이자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의 제7군단장인 ‘데힐라칸’의 하수인.
그들이 마지막으로 출격 준비한다.
그로써 악을 추앙하는 모든 존재가 일어선다.
“진격하라.”
다크 로드는 또 하나의 구슬을 가리킨다.
포르티스 요새.
물의 명가 크라우드에서 관리하는 동부 최고 요새가 엿보이는 수정 구슬을.
쿠구구구.
흑마법사 왕의 명령에 일제 진격하는 병력들.
그와 동시에 검은 안개 성 앞에 대기했던 대군도 출정한다.
쿵, 쿵, 쿵, 쿵.
뼈밖에 남지 않은 스켈레톤이 진격한다.
그다음으로 검은 갑옷을 입은 데스 나이트들이, 그다음으로는 목 없는 기사 듀라한이.
그것들이 무질서하게 진격하며 마경을 가득 채웠고, 금속 소리와 뼈 부딪치는 소리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운다.
유해의 파도.
죽음의 행군.
-그우우우.
마지막으로 아이 잃은 어미 소리를 내는 벤시가 출격한다.
턱. 히히힝!
다크 로드 자칼 또한 미리 준비된 유령마를 타고 친정한다. 어깨에 검은 로브와 왕관을 걸쳐주는 12명이었던 제자들과 함께.
“카넬.”
말 고삐를 당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첫 번째 제자와 통신한다.
[왕이시여. 부르셨습니까.]
“잠입은 성공했나.”
[사해의 시험 직후, 분신으로 사형당한 척 빠져나왔습니다. 이들은 제가 살아있는 줄도 모를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신하의 답변.
다크 로드가 쳐들어오면 내부에서 호응하겠다는 말을 남긴다.
젊은 청년의 모습을 뒤집어쓴 늙은 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고오오오!
차원의 틈에서 뿜어지는 검은 마력과 연결된 채 앞으로 나선다.
친히 동부 귀족 연합을 멸망시키기 위해 2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발을 딛는다.
***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나는 포르티스 요새 회의실에서 아는 바를 모두 전하고, 꾸벅 물러난다.
주교 그린달과 동남부, 북부 영주들은 붙잡았다.
“왜 벌써 돌아가는가? 자네 같은 인재가 회의실에 남아야지.”
“아닙니다. 이제 다른 영역은 영주님들께서 잘 아시라 생각합니다.”
나는 겸양 떨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게임 속에서 알 수 있던 부분은 이미 다 전했다.
그 외의 영역은 별로 도움 되는 바가 없으니 굳이 시간 낭비하지 않는다.
‘더구나 내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으니까.’
나는 용용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첨탑 둥지로 걸어간다.
동부의 변.
이 초대형 전쟁의 성패는 사실 크게 두 곳에 달렸다.
첫 번째는 포르티스 요새 수성전.
포르티스 요새가 뚫리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마경의 군단을 전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언데드 군단은 부서질지언정 끝없이 부활하는 존재.
포르티스 요새에서 잘 막더라도, 최종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차원의 틈. 다크 로드가 열어둔 그 게이트를 파괴해야 한다.’
두 번째는 차원의 틈.
마계와 연결된 그 틈은 악과 파괴의 교단 제7군단장 데힐라칸의 힘이 흘러들어오는 게이트다.
그 차원 게이트가 열려 있으면 악마가 인간계에 끝없이 소환될 뿐만 아니라, 다크 로드 자칼에게 계속 마력이 흘러 들어가니까.
자칼이 언데드 군단을 계속 부활시킬 마력을 회복하게 된다.
‘결국, 포르티스 요새가 버텨주는 사이에, 그 차원의 틈을 파괴해야 한다는 건데······.’
차원의 틈은 다크 로드 자칼의 핵심 거점인 마경 속 ‘검은 안개의 성’에 숨겨져 있다.
수많은 언데드 군단과 몬스터가 있는 마경을 뚫고 차원의 틈을 파괴하라니.
말 그대로 첩첩산중, 산 넘어 산이다.
‘혼자 해보는 수밖에 없겠지.’
따로 지원군을 차출하면 좋겠지만······.
가주 엡실론이 없는 상황에서, 과연 포르티스 요새가 다크 로드 자칼이 출정하는 암흑의 군대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
아무리 내가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근본적인 전력 차이가 바뀌진 않을 거다.
이곳이 곧 아비규환이 될 것을 앎에도, 병력을 빼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자칼, 그놈은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절대 모를 테니까.’
원작에서도 수십 번의 트라이 끝에 알아낸 최고의 공략 방법이다.
-키야악~.
둥지에서 자고 있던 용용이가 날 보고 반긴다.
그르릉, 거리는 녀석을 쓰다듬으며 사과를 먹인다.
예상외로 용용이는 고기가 아니라 사과를 좋아했다. 그것도 특히 새콤한 사과.
마치 특식을 먹듯 아주 맛나게 먹어치운다.
다만 버릇 나빠질 수 있으니 활약한 만큼만 먹인다.
그리고 그때,
“네카르 경. ‘성물 아가타 예하의 성배’가 도착했습니다.”
“······!”
나는 용용이에게 만찬을 차려주고 있을 때, 한 고위 사제가 다가온다.
황금빛 자수로 실을 놓은 방석 위에 올려져 있는 물잔 하나를 대령한다.
성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투박하고, 어린애 장난 같은 꽃문양이 전부인 도자기.
그러나 그 성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은 가히 드래곤 하트에 비할 바가 됐다.
‘감정.’
[이름 : 전대 성녀 아가타의 성배. (ANCIENT)]
[설명 : 수도원에서 평생 남에게 헌신하고 죽은 아가타가 마지막 식사 때까지 사용한 잔. 그녀가 구해준 고아원 아이들이 감사의 뜻으로 선물로 바친 잔이다.]
[특수 효과 : 성배에 물을 담고 마나를 불어넣으면 성수로 바뀐다.]
역시 진품이 맞았다.
무려 ‘에이션트’ 등급의 아이템.
희귀 특성인 ‘엘리멘탈 마스터’ 등급이 슈퍼 레어였는데, 이와 성능은 동격이지만 훨씬 희귀한 등급이다.
“감사히 빌리겠습니다.”
나는 고위 사제에게 성배를 공손히 받는다.
아가타의 성배는 마나를 불어넣은 만큼 성수를 만드는 아이템.
반드시 내가 사용해야 제대로 된 성능이 나오는 아이템이다.
“예, 부디 파손 없이 돌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고위 사제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 곧장 돌아가려고 했다.
“잠시만요. 사제님.”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아니요. 잠시 절 따라와 주셨으면 해서요.”
“?”
다만 나는 아직 고위 사제를 보내지 않았다.
포르티스 요새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또각또각.
나는 영문 모르는 사제를 데리고 포르티스 요새 내 첨탑을 돌아다닌다.
-lv13 흑마법사 아리우.
시스템 창에 요새 내부에 수많은 세작이 나타났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자연스럽게 다가간다.
“죽어.”
파아아앙!
【워터볼 lv3.】
그리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머리를 날려버린다. 난데없는 살인에 경악하는 고위 사제.
"이 무슨······!"
“이 자 피에 성수를 뿌려보십시오. 흑마법사입니다.”
“!”
혹여 내가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는 말이 돌지 않도록 증인을 세워둔다.
그렇게 첨탑을 돌며 10명도 넘는 세작을 숙청한다.
동부 각 영지에서 활약했던 흑마법사들.
거의 모든 동부 영주가 집결한 만큼, 포르티스 요새 내부에 쓰레기들도 많이 모인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lv49 다크 로드의 첫 번째 제자 카넬 폰 크라우드.
젊은 남자 귀족.
다이크 가문의 소속으로 변장한 카넬 폰 크라우드.
한때 가주 엡실론에 버금갈 만큼 물의 마법 대가인 만큼, 물 분신 마법과 변장 마법 또한 뛰어난 그가 포르티스 요새에 숨어있었다.
쾅!
젊은 사내로 변장한 카넬을 내리친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수도 못 써보고 쓰러지는 카넬.
구슬도 꿰어야 보배.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영창을 읊어야 하는 법이니.
스킬을 쓰는 나와 달리 직접 마법 영창하는 카넬로선 기습전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아버지. 여기서 계셨군요.”
“네놈······!”
카넬이 그다음 말을 내뱉지 못했다.
내 손에서 터져나간 워터볼을 정통으로 처맞고, 벽에 처박혔기 때문이다.
“크아아아······.”
카넬은 본 모습으로 돌아오며, 입에서 선지피와 이빨을 쏟아냈다.
“카넬, 네놈들의 20여 년간 준비한 장대한 작전을 내가 하나하나 다 꿰뚫고 있는데······ 기분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