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결급 특성으로 대마법사-43화 (43/140)

43. 가뭄의 악마 (4)

해일이 몰아친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푸른 물.

수직으로 솟구치는 토네이도는 멈추질 않았다. 용오름 치듯 끝없는 회전력으로 주위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보라색 모래, 지옥불, 부서진 미궁의 벽 잔해 등이 작은 점으로 소멸한다.

[그으으······. 끄아아악-!!!]

귓속에 메아리치는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의 비명.

사제들은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에 양손으로 귓가를 틀어막지만, 텔레파시인 만큼 막을 순 없었다.

[크으윽······. 크앗, 크하핫핫-!!]

비명을 지르다가 갑자기 광소를 터트리는 녀석.

물의 폭풍에 찢겨 나가는 검은 연기가 입꼬리를 올리듯 헝클어진다.

고통과 굴욕감, 그리고 비웃음을 담은 표정.

[큭큭! 한심한 인간놈들! 그래도 복수는 하게 되어 기분이 풀리는군!]

“······.”

[너 또한 곧 마나가 떨어질 터. 그 애처로운 바람이 끝나는 순간, 모조리 수장되겠지. 나는 고작 수백 년 힘을 잃고 마계로 돌아갈 뿐이지만, 너흰 시체도 찾지 못한 채 모조리 수몰되고 말 것이다!]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는 마계로 강제 송환되면서도 날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웃는다.

현재 나는 ‘바람의 길’로 물길의 방향을 모두 타비로스에게 집중하고 있으니까.

콰아아아!

하지만 그런데도 미궁은 빠르게 침수된다. 벌써 내 허리를 넘어선 물.

이대로는 모두 갇혀 죽게 될 것이다.

“형제님······.”

미케일라와 프레야 사제들도 자신들의 최후를 직감한 듯 날 바라보는 눈매가 구슬프게 처진다.

그러나 이내 내 곁으로 모여서 두 눈을 감고 합장한 채 기도한다.

숭고한 최후.

악마를 토벌하는데 자원했을 때부터 죽음을 각오했으니까.

······아니, 도적 떼가 타바스 영지에 구휼하러 떠나기 전부터, 순교를 각오한 사제들이다.

“프레야 여신님의 품으로 돌아가겠군요.”

“······가족분들은 너무 심려치 마세요. 곧 성녀 예하께서 진상조사에 나서실 테니. 역사가 우릴 기억해줄 것입니다.”

"각자 한 마디씩 유언을 남기세요. 제가 신성력으로 보존해드리겠습니다."

미케일라를 비롯한 세인트 발키리들은 함께 한 사제들을 달래듯 말했다.

하기야 프레야 교단은 선과 질서를 추구하기 위해 자비를 강조하는 곳.

모범을 보인 자는 순교자로 추존해 가족들을 보살펴준다. 자비의 선순환을 유도하는 거다.

부르르.

그러나 물이 차가워서 그런지, 손이 떨리는 사제들.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다.

“······얘들아, 언니가 아무래도 먼 곳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할아버지, 꼭 약 챙겨 드시고요······.”

곧 울음바다가 되는 유언들.

약하다고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모두가 솔직해지는 법이니.

다만 나는 그들을 바람의 길로 지키며, 반쯤 사라진 타비로스를 바라본다.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군.”

【헤비 레인 lv1.】

차오르는 물을 천장 높이 올려보낸다. 미궁 천장을 넘어, 흙을 돌파해 타바스 영지 하늘까지 치솟는 물방울들.

쏴아아아.

하늘로 역류하는 빗물들.

믿기지 않는 기적에 유언을 남기던 프레야 구휼단은 물론, 마지막까지 남의 유언을 묵묵히 들어주던 미케일라가 입을 쩍 벌린다.

쿵, 쾅, 쿵, 쾅.

심장이 맹렬하게 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이 물은 너를 위한 빗물이 아니다.”

[······!]

발달한 마나 기감이 타바스 영지 지상을 촉촉이 적시는 걸 확인한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타비로스.

나는 사라져가는 가뭄의 악마를 비웃는다.

“죽는 건 너 하나뿐이다. 멍청이.”

***

그렇게 악마 사냥은 끝났다.

가뭄의 악마는 물의 토네이도에 소멸했고, 빗물은 타바스 영지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연거푸 무리한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지만,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마스터급 특성 드래곤 하트.

이 심장은 대단히 특별한 듯했으니까.

-당신은 물로 악을 정화했습니다! 아쿠아 마법을 한계 이상으로 사용했습니다.

-‘아쿠아 lv3’가 lv4로 스킬 레벨이 오릅니다!

-아쿠아 스핀 lv2가 lv3로 스킬 레벨이 오릅니다.

-헤비 레인 lv1이 lv2로 스킬 레벨이 오릅니다!

막대하게 울리는 시스템 창.

하기야 무려 마계의 악마를 소멸시킨 대사건이다.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은 써클인 3써클 마법사가. 거의 단독으로.

이는 아무리 마스터급 특성 드래곤 하트가 있더라도, 거의 불가능한 수준인 만큼 스킬 레벨들이 폭발적으로 오른다.

새삼 아쿠아 스톰을 첫재현했을 때보다 훨씬 체감되게 강해진 걸 느낀다.

“네카르 경······. 설마 그 많은 바람과 물을 전부 통제하시다니······.”

샤아아.

미케일라는 동그랗게 뜬 눈동자로 계속 날 바라본다.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풀린 동공.

그녀는 불덩이처럼 뜨거운 내 몸을 신성력으로 계속 회복시켜주면서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사제님들이 없으셨다면 시도도 못 했을 일입니다.”

나는 힘겹게 미소지으며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내 몸은 폭발할 듯 뜨거웠다. 마나 기감은 무리해 부풀었고, 일부는 실제로 터지기까지 했다.

만약 프레야 사제들이 날 치유하지 않았다면 심장이 아니라, 몸이 못 버텨 죽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럴 줄 알고 사제들을 꼭 데려간 거지만.

“아닙니다. 프레야 교도들을 괴롭히는 악마를 무찌르신 데다가, 저희 목숨까지 구해주시다니.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프레야 교단 사제들에겐 단순한 겸양으로 보이는지 연신 손을 젓는다.

하기야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혼자 다니는 법이 없으니.

날 앞으로 미래가 창창한 천재 마법사로 보는 게 당연했다.

“네카르 경께선······. 역시······. 아닙니다.”

“?”

미케일라는 사뭇 반응이 이상했지만. 마치 다모르가 날 바라보는 듯한 태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나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겠지.

나는 한참이나 몸을 안정시키고 나서 일어났다.

“슬슬 물건을 챙겨야겠군요.”

입가가 나도 모르게 올라간다.

보상 타임.

4년 이상, 타바스 영지를 가뭄으로 지배한 악마 타비로스를 죽이고 남긴 물건을 모으는 일이다.

악마는 탐욕스러운 존재. 타바스 영지는 물론, 마계에서도 희귀한 보물을 모아뒀을 수 있으니 말이다.

“예? 무엇을요? 설마 악마의 손길에 닿은 물건을 취하신다고요?”

“네카르 경. 탐욕의 유혹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신의 총애가 사라지고, 악마의 저주에 걸릴 겁니다!”

“······물론 프레야 교단에 보고하는 용도입니다. 차후 악마에 대해 분석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만 사제들이 격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겉으로는 금욕적인 척한다. 프레야 교단의 호감이 꼭 필요하니까.

‘······오히려 좋아. 여깄는 모든 것은 다 내 것이란 소리잖아.’

어차피 뒤에서 다 챙길 거니까.

가뭄의 악마를 처단해줬으면 됐지, 굳이 보상을 뱉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노움. 확실히 챙겨라.’

-우우움.

흙의 정령 노움이 뽈뽈 걸어가서 먼저 금은보화를 챙긴다. 흙 속으로 일단 깊이 묻어두고, 나중에 꺼내는 거다.

아까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에게 당해 다리를 절룩거렸을 때는 미안했는데, 지금 신나게 뛰어다니는 걸 봐선 다 나은 모양.

나는 일부러 노움과 반대편으로 사제들을 데려간다.

미궁 안쪽으로 가니, 창고처럼 생긴 방이 있다.

“과연. 이런 것이 있군요.”

-<데빌 노트>, 악마와 결탁한 자들이 기록된 장부. 얼마나 많은 공헌을 했는지 자세히 적혀있다.

그중에는 악행이 적힌 장부도 있었다.

하기야 악마도 흑마법사와 추종자들에게 공정하게 하사품을 내려야 하니까.

사제들과 함께 읽어본다.

-타바스 영지 추종 가신 리스트.

.

.

놀랍게도 타바스 영지에 있는 가신 중에서는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와 결탁한 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결탁 내역만 두꺼운 책으로 4권 분량이 있을 정도.

“설마 얼마 남지 않은 물로 사재기까지 하다니······!”

“천인공노할 놈들. 반드시 이단 심판해야 합니다.”

세인트 발키리들이 눈에 불똥이 튄다. 당장 찾아내 쳐죽일 분위기.

‘뭐, 내 일은 아니지만.’

나는 대충 훑어보고 발키리들에게 장부를 넘긴다. 어차피 이건 돈 되는 것도 아니니까.

프레야 교단에게 넘겨서 쓰레기들도 청소하고, 공헌도도 얻기로 한다.

“······?”

-장남 타르마. 악마의 씨앗을 타가리엔 남작에게 붙이는데 결정적인 공로.

-보상 : 10억 페니가량의 금은보화. (지급 완료.)

그러던 도중, 충격적인 기록을 읽었다.

장남 타르마.

그가 아버지 남작 타가리엔을 독살하는 데 일조했다는 기록을 봐버렸으니까.

‘······동방예의지국 출신으로서 이건 못 넘어가겠군.’

제 아버지를 독살하려고 한 패륜아.

이건 발키리들에게 따로 알린 후, 다음 물건을 찾는다.

“프레야 교황청 사제복도 있군요.”

“!”

놀랍게도 프레야 교단의 복장과 유해가 꽤나 많이 있었다.

하기야 실종된 구휼단과 사제들이 많았으니까.

모두 묵념한다. 시신을 수습해서 굴러다니던 항아리에 담는다. 이분들은 프레야 교단에서 특별 화장을 하고 순교의 전당으로 모실 거라고 한다.

“감사합니다. 네카르 경. 덕분에 평생 헌신하신 분들의 영혼을 프레야 여신님 곁으로 모실 수 있게 됐습니다.”

사제들은 다시 한번 내게 감사를 전한다.

하기야 사후세계가 중요한 아르카나 대륙인에게 장례식은 대단히 중요하니까.

그렇게 묵념하고 이만 돌아가려는데.

[이름 : ■■.]

[설명 : ■■.]

[효과 : ■■.]

“······!”

정체불명의 구슬을 발견한다.

시스템 창으로 해석되지 않는 구슬. 내부에 무언가 정체불명의 글자가 적힌 구슬이다.

마치 고대의 석판을 처음 보았을 때와 유사했다.

당장 손을 뻗어 들어 올린다. 드래곤 아이로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고대 시대 문자를 발견하셨습니다. 특성 드래곤 하트가 반응합니다.

“!!”

그때와 마찬가지로 시스템 창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읽을 수 없었던 시스템을 해석할 수 있게 됐다.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름 : 용의 구슬 #1. (MASTER.)]

[설명 : 고대 시대 만들어진 용의 유산 중 하나. 모든 구슬을 모으면 특별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

[효과 : 현재 봉인된 상태입니다.]

-용의 구슬을 모으셨습니다. (1/3).

용의 유산.

고대 시대, 용족들이 먼 훗날 강림할 악과 파괴의 교단 디메토르를 막기 위해서 남겨둔 유산.

특성 드래곤 하트와 동급인 마스터급 아이템이다.

나는 이미 용의 유산 중 하나인 드래곤 아이, 드래곤 피어를 얻어서 그 위력을 체감하고 있다.

심지어 다음 용의 유산이 무엇인지도 이미 들었다.

-용의 유산을 모두 모으면 특별한 힘을 깨울 수 있습니다.

-다음 용의 유산은 ‘ㄴ. 드래곤 윙.’으로, 육중한 드래곤이 비행하기 위한 용언 마법 ‘중력 마법’이 깃들어있습니다.

중력 마법.

마신(魔神) 문두스의 비전 마법이다.

일제 진격하는 기사단 전체를 하늘로 날려 낙사시키거나, 밤하늘의 운석을 끌어 떨어뜨렸다는 궁극의 마법.

북부 최고 대도시 오르비스를 대학살했다는 마법이기도 했다.

‘분명 다음 용의 유산은 북쪽에 있었는데······. 왜 여기 있는 거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하기야 동북부 또한 북부로 가는 길목 중 하나니까. 세월이 지나면서 이동했을 수도 있을 터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 용의 구슬을 구했다는 거니까.

‘동부의 변이 시작되기 전에 중력 마법을 배우면 가장 좋겠지만······. 시간상 그건 불가능하겠지.’

내 기억상 정체불명의 구슬이 보상으로 드랍 되던 곳은 북부에서도 극히 외진 지역.

그곳까지 찾아가기엔 거리상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더구나 지금처럼 다른 곳에 구슬이 있을 수도 있고. 원작 게임보다 무려 10년 전이니 말이다.

-구슬에 기록된 글자를 읽으시겠습니까?

용의 구슬 내부에 있는 고대 어를 눈여겨보자, 시스템 창이 나타난다.

나는 주저 없이 ‘예’라고 답했다.

-이 구슬을 발견할 어린 용이여. 동부에서 달아나라. 머지않아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거악이 강림할 터이니. 북부로 가서 다음 용의 유산을 찾아라.

“······.”

동부 사막을 포기하고 달아나란 전언.

고대의 용은 미래를 내다본 모양이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이 용의 구슬을 발견할 거란 것을.

그리고 동부가 멸망할 것이란 걸.

‘······아니, 그럴 순 없다. 진 엔딩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동부 또한 필요하니까.’

그러나 용의 예언은 틀렸다.

동부는 멸망하지 않을 거니까. 내가 동부에 남아 역사의 운명을 뒤바꿀 테니까.

“그만 가시죠.”

가뭄의 미궁을 나선다. 동부의 변이 머지않았으니까.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정말 얼마 없다.

타바스 영지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간다.

***

쏴아아아.

타바스 영지에 비가 내린다.

그간 갈라지고 상처 입었던 농노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보슬비.

“허억······!”

“비다! 프레야 여신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다!”

와아아아!

당장 영지 전체가 떠들썩한 함성으로 메아리친다.

마침 악마를 피해 영지 밖으로 모여있었기에, 가까운 이를 얼싸안는다. 드디어 고생이 끝났다는 듯 엉엉 운다. 빗물은 그런 눈물까지 닦아준다.

“······마, 말도 안 돼. 정말로 그 마탑 마법사가 악마를 물리쳤다고······?”

병실에서 아버지 곁을 지키던 장남 타르마는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달려간다.

창문을 투두둑 때리는 장대비.

“정말 잘 됐다······. 오빠. 그렇죠?”

“······.”

여동생 타라헨 또한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다만 타르마는 입술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억지로 고개를 끄덕일 뿐.

퍼석.

“······!”

그때 침대에 누워계시던 타바스 남작령 영주이자, 아버지 타가리엔에게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난다.

검은 종양.

악마의 씨앗이 박힌 후, 온몸에 퍼졌던 종양들이 일제히 깨진 거다.

새까만 고름이 흘러나온다. 침대가 검붉게 젖는다.

기생하던 악마가 사라졌기에, 악마의 씨앗도 사라진 것이다.

“으으, 으으으······!”

“아버지!”

타라헨이 놀라서 일어난다. 타르마도 자기도 모르게 우당탕 아버지 곁으로 달려온다.

“여, 긴······?”

“아버지! 정신이 좀 드세요? 게 누구 없느냐! 빨리 사제님을 모셔와라! 어서!”

타르마는 장남답게 일사불란하게 명령한다.

잠시 기다리자 이내 눈을 뜨는 아버지.

“타르마······? 타라헨······. 타레온까지. 내 자식들이 다 모여있구나.”

자신들을 보고 안심한 표정을 짓는 타가리엔 남작.

그 모습에 타레온이 울컥 눈가를 붉힌다.

“아버지, 당연히 곁을 지켜야지요. 누구 아버지신데.”

“그래······. 고맙구나······. 쿨컥, 후, 이렇게, 정신이 맑은 것도······. 오랜만이구나······.”

힘겹게 미소를 짓는 타가리엔.

다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얘들아.”

“예, 아버지.”

“언제 또 정신을 되찾을지 모르니, 이제라도 말해둬야겠구나······. 유언을 남겨야겠다······.”

“!”

유언.

그 말에 자식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지만, 정말로 돌아가시는 모습을 상상한 적은 없기에.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았기에.

한 움큼 다가온 이별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내 첫째 아들 타르마야.”

“······예, 아버지.”

“사실 나는 네게 말하지 않은 게 있단다.”

“······!”

설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타르마.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계속 입을 연다.

“사실 너는 내 친자식이 아니란다.”

“!!”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경악한 타르마. 설마 아버지께서 먼저 말씀하실 줄은 몰랐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곁에 있던 형제들은 전혀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막내 타레온은 병실 속에 숨겨진 수첩을 하나 꺼낸다.

“형······. 이거······.”

“그래. 타르마. 펼쳐 보거라. 네 친부모에 관한 내용이란다.”

“!”

타르마는 수첩을 펼쳐본다.

난생처음 보는 얼굴의 부부 그림.

돼지치기하는 모습이 선명히 그려져 있다.

아버지는 수첩을 살피는 장남에게 말했다.

“쿨컥······. 네가 후계자 임명식에 서는 날······. 만나게 해주려고 했었는데, 마음처럼 일이 되지 않는구나······.”

“!”

후계자로 임명하려고 했다.

아버지는 선의로 하신 말씀이겠지만, 타르마에겐 차가운 비수가 되어 꽂힌다.

‘나는, 날 차기 영주로, 안 삼으시려고 하신 줄 알았는데······.’

주먹을 부르르 떤다. 주위를 둘러본다. 자신이 양자임을 알면서도 그동안 내색하지 않고 장남으로 대우해준 사람들.

그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본다.

굵은 눈물이 아버지의 쭈글쭈글한 손등에 떨어진다.

“제가 그런 걸 바란 적 있습니까······? 수십 년간 얼굴도 모르는 남이 왜 궁금하겠습니까······? 제 아버지는 이미 여기 계신데······.”

“······.”

이후 침묵하는 병실.

물론 그 침묵의 이유는 각자 다르지만······.

아버지는 기쁘게 웃으며 ‘그래, 그래······.’ 연신 속삭인다.

타가리엔은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겨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내 자식들이, 끝까지 곁을 지켜주다니······. 역시, 내 생이, 그리 잘못된 것 같진 않구나······.”

“······.”

“고맙구나. 나는, 너희가 자랑스럽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숨을 색색 쉬었다.

오랜만에 계속 말하려니, 피곤이 몰려온 듯, 눈을 감는다.

“아버지!”

“괜찮으실 겁니다. 이제 곧 회복하실 거거든요.”

샤아아.

다들 뒤를 돌아본다.

병실 입구에는 노란 머리카락의 사내와 중년 수녀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자는 타가리엔 남작에게 치유 마법을 사용한다. 더는 악마의 씨앗이 없는 만큼

“네카르 경!”

타라헨과 타레온은 반갑고도, 감격스러운 감정으로 환하게 웃는다.

다만 타르마는 웃지 못한다. 그와 눈이 마주친 네카르도.

“타르마 경.”

“······예.”

“우리 따로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음산한 목소리로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한다. 손에 들린 데빌 노트를 흔들어 보이면서.

“······금방 가지요.”

타르마는 악마와 결탁한 가신들과 마찬가지로 연행된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이송되면서 악마와 결탁하고 받은 금은보화를 토해냈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처단될 예정이다.

***

“마지막까지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카르 경. 덕분에 수월하게 악마와 결탁한 자들까지 붙잡았습니다.”

미케일라는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민다.

그야 내가 시스템 창으로 확인하며, 악마와 결탁해놓고 달아나려는 가신들을 모조리 붙잡았으니까.

이단 심문도 맡은 세인트 발키리답게 아주 개운한 표정이다.

“혹시 네카르 경께서는 이단심문관에 관심 없으십니까? 마법도 마법이지만, 사람을 감별하는 뛰어난 재능이 있으신 모양입니다만.”

미케일라가 조심스럽게 눈을 빛낸다.

하기야 이단심문관은 세인트 발키리 말고도 다양하게 있으니까.

내가 매우 탐나는 인재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나는 금욕할 생각이 전혀 없는 만큼 칼같이 거절한다. 이후 행선지가 나뉜다.

“저는 이만 그린달 주교님께 보고하러 가야겠군요.”

나는 이제 아펠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악마를 처치한 공로로 금빛 공헌도 배지를 하사받고, 성물 ‘아가타의 성배’를 빌려야 하니까.

‘동부의 변 때, 헤비 레인으로 성수를 비처럼 쏟을 준비를 끝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미케일라와 세인트 발키리들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군요. 아쉽게도 이만 헤어져야겠습니다.”

“발키리 분들께선 어디로 가십니까?”

“악마의 미궁을 공략하는 동안, 상부에서 긴급 소집을 명했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다시 가봐야겠습니다.”

······긴급 소집?

세인트 발키리라면 동부 대륙에서 최상위 전투 사제들이다. 그들을 긴급 소집하다니.

나는 묘한 불길함을 느끼고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 사실 저희가 동부에 파견된 이유는 마을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주민들만 사라지는 현상을 조사하러 온 것입니다. 마침 동남부 마을에 그런 현상이 발생했는데, 이번엔 희한하게도 거대한 소 발자국 흔적도 발견돼서 수사하러 갑니다.”

“!”

마을은 그대로 있는데, 주민만 사라졌다.

나는 그 말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거대한 소발자국. 이건 동부의 변 직전에 등장하는 흔적이다······!’

마을은 그대로 있는데, 주민이 사라지는 이벤트는 흔하다.

흑마법사들이 좀비나 언데드, 혹 실험체를 모으기 위해 사람들을 현혹해서 데려가는 거니까.

하지만 소발자국은 그와 별개다. 가뭄의 악마와는 또 다른 존재가 깨어나는 징조.

‘발록. 그놈이 깨어났다는 흔적이다.’

발록.

마계에 서식하는 포식자 마물 중 하나.

가뭄의 악마와 버금가는 마력을 가진 존재. 오직 살육과 파괴만을 위해 살아가는 괴물이다.

다크 로드 자칼이 거사 직전에 풀어놓는 마물.

‘만약 내버려 두면 다 죽겠군.’

나는 의문스러운 사건을 해결할 수 있겠다며 해맑게 미소 짓는 미케일라와 세인트 발키리를 바라본다.

어차피 발록은 동부의 변이 시작된다면 처리해야 하는 녀석이다. 동남부 사막 귀족들이 뭉치지 못하게 이중 전선을 만들게 하는 녀석이니까.

‘내가 먼저 나서야겠군.’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나는 모든 히든 업적을 클리어해봤던 고인물이니까.

발록의 약점이 무엇인지, 파훼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다크 로드 자칼이 수십 년간 준비해온 흑마법사의 날. 나는 그걸 수십 번 클리어해본 유저니까.’

따라서 미리 나서서 막는다. 본격적인 전쟁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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