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가뭄의 악마 (1)
나는 뱀들로 사인족들을 쓸어버린 후, 프레야 사제들과 타바스 남작령에 도착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네카르 경.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네카르 경께 신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프레야 사제들은 내게 깊은 감사를 전했다.
마치 신이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보낸 사도처럼 대하니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타바스 영주의 셋째 아들 타레온 또한 감사를 전했다.
“다행히······. 영지민들에게 구휼 활동을 할 수 있게 됐군요. 형님과 누님을 뵐 낯이 생겼습니다. 다 경 덕분입니다!”
허리 숙여 감사하는 타레온.
눈가가 푸르러진 게 온갖 감정이 북돋는 모양이다.
하기야 가뭄으로 굶어 죽어 가던 영지에 구휼단을 이끌고 가던 중 사인족에게 사로잡혔으니까.
절망감, 분노, 허무 등 부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쳤을 텐데 그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기쁜 감정으로 대체됐으리라.
다만 몇몇 사제는 날 묘하게 두려워하며 질겁했다.
“저어······. 그런데 네카르 경. 그 뱀들은 왜 데려오시는 건가요······?”
“아, 죄송합니다. 쓸데가 있어서 말이죠.”
“······.”
뱀보다 더 새하얗게 질려있는 것 같은 사제들.
나는 사인족들이 부리던 수천 마리의 뱀을 뒤로 물렸다.
뱀들을 저 멀리 치워버리니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이 녀석들로는 마경에 있는 길목 한 곳을 막아놔야겠군.’
동부의 변 때, 쳐들어올 다크 로드 자칼의 군단.
그들 중 한 군대를 지연시키는 용도로 사용할 거니까.
언데드 군단은 뱀들의 독이 통하지 않지만, 몬스터 군단에겐 훌륭한 함정이 될 것이다.
우연히 얻은 병력이지만, 기왕 얻은 만큼 알차게 써준다.
땡, 땡, 땡, 땡!
타바스 영지 성문에 다가가니 종이 친다.
종소리를 듣고 구휼단을 환영하러 사람들이 달려온다.
“어서 오십시오! 프레야 교단 사제님들. 저흴 버리지 않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lv3 타바스 영주 장남 타르마.
입술이 메마른 사내가 격하게 반긴다.
장남이라면 차기 영주일 텐데도 감동한 모습.
설마 프레야 교단마저 자신들을 버린 걸까 싶어 노심초사한 모양이다.
“타레온. 정말 고생 많았구나!”
“누님!”
-lv1 타바스 영주 둘째 영애 타라헨.
한편, 장남과 함께 온 바싹 마른 여인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셋째 타레온을 끌어안는다.
그들은 몇 마디 대화하더니, 내게 다가온다.
“네카르 경이라고 하셨습니까? 제 동생과 구휼단 사제분들을 구해주셨다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용기를 낸 사람은 극히 드물지요! 감사의 뜻으로 저녁 식사로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신지요?”
내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여인.
‘계속된 가뭄으로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식사대접이라니.’
고작 한 끼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답례를 하려는 게 느껴져서 고마웠다.
하지만 걸리는 게 하나 있다.
“혹시 영주님과 함께 하는 만찬입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아버님께선 현재 큰 병을 앓고 계셔서요. 아하하.”
“······.”
타라헨은 어색하게 웃는다.
나는 눈매는 웃지 않았다.
‘아마 이들은 왜 영지에 가뭄이 드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
이 영지에 지독한 가뭄이 드는 건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타바스 영주 성 지하.
그곳에 마계에서 차원 이동한 악마가 근본적인 문제니까.
아마 이들은 지하에 어떤 악마가 숨어있는지 알고 있으리라.
‘뭐, 그렇다고 무작정 탓할 순 없겠지.’
나는 측은하게 이들을 바라본다.
가장 훌륭한 대처는 당연히 악마를 처치하는 것.
그러나 그건 영주 자녀들은커녕 3써클에 오른 지금의 나조차 홀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악마가 지독하게 까다로운 이유는 힘도 힘이지만, 각각 종류마다 자신만의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뭄을 일으키는 악마는 물리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 본체가 마계에 있으니까.’
나는 과거 타바스의 악마를 처음 공략했을 때를 떠올린다.
강림만으로도 어둠이 내리깔리며, 걸어 다닐 때마다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는 악마.
프레야 토벌대는 그 지진을 피하면서 끝없이 성가대 합창을 해야 했고, 그 덕에 간신히 마계에서 현실로 끌어온 순간의 틈에 악마를 공격해야 했다.
장장 몇 시간 동안 쫓고, 쫓기던 추격전.
심지어 가뭄의 악마는 물을 지독하게 싫어하기에 주위 수증기가 거의 없어서 물 한 모금 못 마시며 이동해야 했다.
말 그대로 악몽 같은 기억.
비록 공략법을 알고 있다지만, 지금으로선 여전히 불가능에 가까운 적이다.
“오늘 저녁입니까?”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이것저것 정보를 얻어야 한다.’
타바스의 악마는 언제가 처치해야 하는 악마다.
동부의 변 때 첫 강림 해서 일대를 아예 점령해버리는 놈이니까.
그래서 일단은 영주 성에 있는 객실에 짐을 풀고 저녁 식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
손님용 방.
나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본다. 기다리는 동안 할 것도 없으니까.
“······프레야 구휼단입니다! 물을 나눠드릴 테니 한 줄로 서주세요!”
“한 가구당 한 동이입니다! 더 드릴 수 없으니 돌아가 주세요!”
타바스 영지에 도착한 사제들은 마차에 실어온 물건들로 구휼 활동을 하고 있다.
사인족에게 빼앗긴 물품을 되찾았으니까.
‘다들 고생이 많으시군.’
-lv15 프레야 교단 사제 안젤라.
-lv13 프레야 교단 구휼단 파비아.
사제들의 노고는 눈물겨웠다.
장장 6시간 동안 서서 양의 물과 식량을 나눠주는 건 엄청난 중노동이었으니까.
다만 소란스럽지는 않았는데, 이유는 다들 목이 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져 말 한마디 할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농노들은 조금만 더 달라고 눈빛으로 애원하고, 사제는 어색한 미소 지으며 다음 사람을 부른다.
내가 바라보는 장면은 그런 상황의 연속이다.
‘뭐, 내 일은 아니지.’
존경스럽긴 하지만 내가 하고 싶진 않다.
“자, 고생 많았습니다. 저녁 준비가 다 됐으니 다들 식사하고 푹 쉬세요.”
“오늘 구휼 활동은 종료입니다! 못 받으신 분들은 내일 다시 와주세요!”
그렇게 저녁 시간쯤 되었을 때, 식사를 준비하던 하급 사제들이 다가온다.
별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을 때,
‘······잠깐.’
순간 멈칫한다.
-lv38. 세인트 발키리 미케일라.
굵은 땀 흘리는 중년 수녀 중 한 명이 레벨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무려 레벨 38.
괴조 카디악의 레벨이 37이라는 걸 고려하면 엄청난 고위 사제다.
그런 수녀가 하급 사제복을 입고 있다.
‘······거기다 세인트 발키리라고? 설마.’
더구나 레벨도 레벨이지만 칭호 또한 경악스러웠다.
세인트 발키리.
대륙 7대 성인, 이단 심문의 성녀 루크레치아의 직속 산하 부대다.
성녀 휘하인 만큼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이 결사대.
이들은 대륙 각지를 떠돌며, 프레야 교단 소속 사제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거나, 악을 멸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마치 암행어사처럼 활동하는 자들이다.
타 지역에서 홀로 악인을 심판해야 할 경우도 많은 만큼 개개인 하나하나가 엄청난 전투력을 가진 사제들.
그들 중 한 명이 평범한 사제들 속에 숨어있었다.
‘잠깐만 이렇게 되면······.’
세인트 발키리가 왜 여기 있지?
머릿속에 번개가 친다.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똑똑.
“네카르 경. 곧 만찬 시간이니 준비해주십시오~.”
밖에서 친절히 안내하고 가는 하인.
“영애님께 다소 늦는다고 전해라.”
“예?”
나는 대충 옷가지만 챙겨서 밖으로 나간다.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 세인트 발키리를 여기에서 만나다니.’
아무래도 지하에 악마가 은거해있다는 걸 모르고, 가뭄을 조사하러 온 모양인데, 저 수녀와 잘 대화하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3써클에 오른 나. 심지어 지금은 바람의 마도서도 얻은 상황이니까.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악마를 상대할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
세인트 발키리 미케일라는 식사 준비를 마치고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대륙 7대 성인 중 하나인 성녀 루크레치아의 특명.
동부 대륙에서 사라지는 주민을 찾으라는 막중한 임무를 하명 받았거늘,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심각한 일에는 언제나 전조가 있다. 이건 분명 무언가 심각한 거사가 벌어진다는 징조야······.’
현재 동부 사막 시골 마을은 하룻밤 사이에 유령 도시가 되는 일이 잦다.
특히 마경(魔境) 근처에 있는 마을은 죄다 씨가 마르고 있다.
만약 몬스터의 습격이라면 마을이 부서지거나, 피바다가 흥건하고, 누군가 하나쯤은 주변 영지에 지원을 요청했을 테니까.
그런데 이 경우는 다소 달랐다.
‘이상하게도 핏자국 하나 없다.’
마을은 그대로 남아있고, 사람들만 감쪽같이 사라졌다. 심지어 젖먹이도 못 뗀 아기가 덩그러니 버려진 채로.
이건 악마의 소행임이 분명했다.
‘인력을 좀 더 배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재 서부 대륙이 내전으로 인원이 다 차출돼서 곤란해······.’
다만 미케일라의 표정은 그늘졌다.
프레야 교단이라고 놀고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인원이 부족할 뿐.
동부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면, 서부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으니까.
일단 급한 대로 서부 대륙에 지원을 집중하고, 동부엔 미케일라 같은 경험 녹록한 소수 사제를 보내는 게 성녀 루크레치아로서도 최선이었다.
만약 악마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파악한다면 성녀가 시간을 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내전을 막는 평화 유지군을 지휘하기에도 벅차니까.
‘현 상황은 과다출혈로 죽어가기에, 이를 치료하는데 급해 몸속에 자라는 악성 종양을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다······.’
설혹 악성 종양이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까지 발전한다고 할지라도.
그저 잘못되지 않음을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타바스 영지에 기록적인 가뭄이 오는 것 또한 악마의 소행일 텐데······.’
미케일라는 머리가 아팠다.
혹시 몰라 하급 수녀로 변장해서, 자선활동을 하며 조사를 착수하고 있지만 역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입이 바짝바짝 탄다. 정기 보고서를 올려야 하는 날이 두려워졌다.
“수녀님.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한 사내가 다가와 있었다.
노란색 머리카락에 깊은 푸른 눈을 가진 사내.
미케일라는 그제야 상대를 알아보고 인사한다.
“아, 네카르 경이라고 하셨나요? 저희 프레야 구휼단을 구해주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네카르.
동료 사제들에게 들어보니 대단한 실력자.
‘하지만 악마에 대해 알지는 못하겠지······.’
이는 악마 심판관이자 이단심문관인 그녀조차 감을 못 잡은 내용이니까.
별로 기대하지 않지만, 혹시나 해서 넌지시 물어보려던 찰나.
“세인트 발키리이십니까?”
“······!”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분명 완벽한 변장이었다.
옷도 갈아입었으며, 말투도, 발성도, 풍기는 신성력도 모두 하급 수녀였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알아봤지?
“그리 놀라실 거 없습니다. 제가 마나의 향을 잘 맡아서요. 일전 만나 뵈었던 세인트 발키리 소속 분과 닮았기에 드린 말씀이었는데, 역시 맞군요.”
세인트 발키리 소속을 만나봤다고?
분명 비밀 단체일 텐데?
프레야 교도의 비리를 감찰하는 단체인 만큼, 혹여 뇌물 청탁을 받을까 두려워 철저한 비밀 단체일 터이다.
마나의 맹세와 동일한 신의 맹세를 해서 스스로 신분을 밝히지 못하게 된 자들.
그런데 그들을 알아봤다니.
그렇다면 이 자는 일전에도 비밀잠입한 세인트 발키리를 알아봤다는 건가?
‘위험하다······.’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안주머니 속 단검. 순식간에 뽑아서 목을 벨 수 있다. 만약 이 자가 적이라면 이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니까.
악마 추종자였을 경우, 세인트 발키리들이 악마의 흔적을 찾지 못하게 빼돌렸을지도 모르니까.
그녀의 손가락이 단검을 향해서 꿈틀거릴 때.
“잠깐! 진정하십시오. 저 또한 프레야 교도니까요.”
“······.”
“못 믿으시겠다면······ 오늘 저녁, 영주성 테라스에 몰래 잠입해보십시오.”
“예?”
“어떤 사건이 터질 겁니다. 그때 누가 악마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상대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간다.
악마.
그 말에 미케일라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자신을 비롯한 세인트 발키리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그 존재를.
상대는 마치 알고 있다는 듯 말하고 있으니까.
미케일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
‘1단계 작전은 성공이군.’
나는 미케일라에게 진실을 전한 후, 저녁 만찬에 참석하러 석양이 걸친 영주 성으로 돌아간다.
미케일라는 분명 확인하러 올 거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영주성에 잠입하는 게 어렵지도 않을뿐더러, 악마에 대한 정보가 다급한 상황이니까.
‘만약 알아차렸으면 여기서 식사 준비나 하고 있지 않았겠지.’
판단을 마치고 영주성 식당에 들어선다.
“어서 오세요~. 네카르 경.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장남 타르마와 둘째 딸 타라헨이 날 반갑게 맞이한다.
내게 구조된 셋째 타레온은 손님 석에 앉았다.
이번에 함께 온 프레야 구휼단도 함께였다.
“자, 많이 드세요. 비록 계속된 가뭄으로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둘째 딸 타라헨은 슬며시 눈치를 보며 말했다.
식탁에는 음식이 제법 먹음직했다.
숯불 칠면조 구이와 딱딱한 육포, 풀에 가까운 샐러드 등 퍽퍽한 음식이 전부였을 뿐.
‘······마실 것도 없군.’
찰랑.
더구나 가져온 음료는 고작 맥주 한 병. 그것도 반쯤 남은 것이 고작이다.
아마 저것도 손님 응접용으로 몰래 숨겨둔 거겠지.
감사히 아껴 마신다.
“영주님께서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차도가 좀 있으십니까?”
“아하하······. 글쎄요. 예전보다는 나아지셨지만······. 확신할 수는 없네요.”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지는 타라헨.
나는 그 반응을 보고 영주의 상태에 확신했다.
타바스의 악마.
그놈이 숙주로 만든 게 틀림없다고.
‘비록 10년 전이라지만,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아쿠아 lv3.】
쏴아아······.
아마 내가 동부의 변을 10년이나 앞당긴게 영향이 있겠지.
나는 저 멀리 타마스 영주성 지하에 있는 물을 움직인다.
이번에 구휼대 마차에 담아온 물.
급히 제조한 ‘악마 퇴치용 즙’을 담은 물이다. 성수와 레몬, 그리고 칵테일 실버불렛을 섞은 물.
그 물을 끝없는 가뭄으로 갈라진 영주성 지하로 흘려보낸다.
발달한 마나 기감으로 악마의 위치를 향해 내려보낸다.
그와 동시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식탁에서 말한다.
“글쎄요. 한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예?”
“이대로는 영주님께 백약을 써도 차도가 없을 겁니다.”
돌직구로 말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다만 아직 내가 지하로 약을 풀었다는 걸 모르는 타라헨은 식기를 내려놓으며 정색한다.
순간 얼어붙는 식탁 분위기.
합석한 프레야 교단 구휼단 또한 조마조마한 눈치로 날 바라본다.
“아, 죄송합니다. 실례했군요. 저는 영주님의 병세에 대해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그럼?”
“영주님 몸을 잠식한 ‘악마의 씨앗’에 대해 말씀드린 것이지요.”
“······!”
악마의 씨앗.
흔히 악마가 힘을 회복하기 위해 근처 피조물에게 박는 낙인이다.
마치 불사왕 데힐라칸이 괴조 카디악에게 검은 불꽃 문양을 붙여놓은 듯 말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장남 타르마와 둘째 타라헨이 동공이 크게 흔들린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치.
하지만 굳이 대답하진 않는다. 어차피 약을 푼 이상, 곧 당사자가 나타날 테니.
고오오.
짙게 깔리는 어둠.
검은 안개가 날이 저물어가는 붉은 하늘을 가리며 영주성을 포위한다.
쨍그랑! 와장창창!
“꺄아악?”
“뭐, 뭐야!”
그와 동시에 터져나가는 창문들.
촛불조차 꺼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셋째 타레온과 프레야 구휼 사제들은 벌떡 일어나 경계한다.
작은 숨소리마저도 크게 들린다.
또각, 또각.
그때 구두 소리가 저 멀리서 다가온다.
“누가 내 단잠을 방해한 거지.”
“······!”
중후한 사내의 목소리.
둘째 타라헨은 그걸 알아듣고 고개를 홱 돌린다.
“아, 아버지······? 안 돼요. 지금은 나오지 마세요······. 제발······.”
간절하게 애원하는 딸.
또각또각.
그러나 구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다가온다.
“네놈들이구나. 내 입속에 하수구 쓰레기 같은 물을 쏟아버린 놈이.”
번쩍.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새빨간 동공이 빛난다.
“데, 데빌 아이다!”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모두 신성 마법을 시전해라!”
그것을 보고 프레야 구휼단이 모두 경악한다.
데빌 아이.
악마의 권능이 담긴 눈.
악마 본인이거나, 악마의 씨앗에 감염돼서 조종을 받는 자에게만 드러나는 힘이니까.
샤아아.
각자 휘황찬란한 빛을 모아 붉은 눈이 빛나는 곳으로 쏘아낸다.
“불결하구나. 프레야의 개들.”
그러나 어둠 속 악마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오오.
악마에게 당도한 신성력이 스르륵 사라진다. 마치 한입에 삼켜버린 듯 빛이 사라진다.
헉, 누군가 소리를 낸 순간,
“후각이 뛰어난 놈이 있는 모양인데, 그놈 하나 때문에라도 살려둘 수 없겠군.”
벌써 목이 따끔한 모래바람을 타고 사람들이 달려오는 발소리가 전해진다.
콰아아아.
검붉은 마력 파동이 휘몰아친다.
영주성 식당 전체를 날려버리는 막강한 파동.
“꺼헉······?”
“꺄아아악!”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나자빠져 일어서지 못한다.
“여, 여신이시여······?”
“한스야, 그때 버리고 가서 미안해······. 날 용서치 마······.”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멋대로 중얼거리는 사람들.
나는 남겨둔 발광석을 하나 켜서 주위를 밝힌다.
동공이 풀린 걸 봐선 아무래도 환술에 완전히 당한 모양이다.
‘아마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겠지.’
나는 새삼 몸이 떨리는 걸 느낀다.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
이 악마는 사실 남의 고통을 흡수해 힘을 얻는 녀석이다.
단지 물을 극단적으로 싫어해서 인근 영지에 숨어서 영지민들을 괴롭혔을 뿐.
아마 불사왕 데힐라칸이 부리는 악마 하수인 중 하나로서, 다크 로드 자칼과 계약해서 동부 대륙을 강타하려고 나타났겠지.
‘하지만 이 녀석은 물리력이 강한 건 아니다.’
나는 푸른 눈을 빛내며 상대를 정면으로 노려본다.
-lv38. 세인트 발키리 미케일라.
어차피 밖에는 미케일라가 와있으니까.
본체가 아니라, 인간 몸에 잠시 빙의한 악마 정도라면 충분히 해볼 만 하다.
“인간. 네놈은 무슨 수를 쓴 거냐? 내 데빌 아이에 공포에 질리지 않는다니.”
붉은 눈을 번뜩이는 남작.
악마도 이 모든 일의 범인이 누구인지 직감했는지 내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제 발로 기어 나왔군.”
“!”
【드래곤 피어 lv1.】
그러나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더욱 똑바로 붉은 눈을 마주 본다.
그러자 오히려 멈칫, 발걸음을 멈추는 악마.
“네놈이구나, 냄새를 잘 맡는 프레야의 개새끼가.”
목에 흙먼지가 느껴진다.
가뭄의 악마 타비로스가 주위 수증기를 빠른 속도로 소멸시킨 거다. 황량하게 말라비틀어지는 목제 가구들.
“내가 냄새를 좀 잘 맡긴 하지. 그런데.”
【아쿠아 lv3.】
촤악!
그 순간, 나는 오른손을 뻗는다. 악마가 없애는 물보다 훨씬 많은 물을 끌어모으고.
쾅!
남작의 몸을 복도로 날려버린다.
“물어뜯는 걸 좀 더 잘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