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구휼단 (2)
나는 주교 그린달에게 ‘타바스 영지’를 거론했다.
타바스 영지.
동북부 영지 중 한 곳으로, 사막에서 드물게 풍요로운 초원 지대를 가진 곳.
물론 그것도 옛말이다.
최근 4년간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최악의 가뭄이 찾아왔으니까.
농작물이 전부 말라 죽고 땅이 쩍쩍 갈라져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주고, 기아와 난민이 늘어나는 영지다.
말 그대로 대재앙을 경험하는 곳.
‘그린달 주교로서도 골치 아프겠지. 포기하기엔 중앙 대륙과 연결된 곳이니.’
타바스 영지는 중앙 대륙에서 아펠 영지로 가는 길목에 있는 교통의 요지다.
앞으로 계속 왕래해야 하는데 방치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동안 타바스 영지는 인구가 많은 곳.
프레야 교도가 많은 만큼 신앙심이 투철한 그린달 주교로서도, 포기하기 힘들다.
이러한 때문에 계속 구휼 활동을 하곤 있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생각할 법한 곳이다.
“오오, 과연 네카르 경이 타바스 영지를 구원해준다면 프레야 사제로서 정말 고마울 것 같소! 교단에서도 이번 일을 크게 반길 것이오.”
당연히 주교 그린달은 격하게 반긴다.
나는 폭풍의 산 파르티잔에서 ‘헤비 레인’으로 어마어마한 폭풍우를 부르는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나라면 타바스 지역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를 부르는 마법은 대단히 희귀하니까.’
물의 명가 크라우드에서도 가주 엡실론과 원로 마법사들이 온 힘을 다해야 가능한 마법.
그조차도 오래 지속하기 힘들 만큼 마나 소모가 극심하다.
마스터급 특성 드래곤 하트를 가진 나조차 버거운 수준이니까.
날 보며 생각지도 못한 구원자라고 여길 법 한 일이다.
‘물론 타바스 지역에 계속된 가뭄이 드는 이유는 마계에서 강림한 그 악마 때문이지만······. 그건 아무리 나라도 해결 불가능한 영역이다.’
실제로 타바스 영지를 구원하고 아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주교 그린달에게 호감을 사서, 물을 성수로 바꿔버리는 성물 ‘아가타의 성배’를 빌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최선을 다해서 어느 정도 공로만 인정받으면 될 일이리라.
“그럼 내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이타심 넘치는 모습으로 말했다.
아마 그린달 주교로서도 프레야 교단 소속은 아니지만, 함께 등 맞댈 동지로 보였겠지.
그린달 주교는 타바스 지역 지하에 악마가 산다는 걸 모르기에, 희망차게 말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소? 현재 타바스 지역에 산적과 도적 떼가 기승을 부리고 있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소. 경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위험하니 곧 돌아올 성기사단과 함께 움직이는 게 좋겠소.”
그린달 주교는 구휼 활동 파견된 사제들이 대거 사라지고 있다며 단단히 경고한다.
한 달 후, 성기사단이 일부 돌아올 테니, 그들과 함께 가라는 거다.
“아닙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서둘러 사제분들부터 구해드리러 가야겠군요.”
물론 이제 곧 동부의 변이 닥친다는 걸 아는 나로선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지만 위험할 텐데······.”
“제가 위험하다는 뜻은, 사로잡히신 사제분들은 더욱 위험하다는 뜻이겠지요. 속히 가보겠습니다.”
헌신(獻身).
관용을 넘어서서, 제 몸을 희생시키면서도 남을 위하는 이타심을 말한다.
프레야 교단에서 최고로 숭고하게 여기는 가치.
그 모습에 그린달 주교는 감읍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카르 경의 의협심. 내 잊지 않겠소. 부디 무탈히 다녀오시오.”
그린달 주교는 품에서 배지를 꺼내더니 내게 선물한다.
“이건······?”
“프레야 교단에서 공인하는 실버 배지요. 아마 다른 지역에서도 이 배지를 보이면 교단의 호의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됐다!
나는 그린달 주교에게 신실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아마 저 공헌도 배지는 동색, 은색, 금색으로 나뉘어 있을 거다.
‘금색 등급에 올라야 성물을 빌릴 수 있었지.’
설마했더니 동색을 건너뛰고 곧장 은색 배지를 주다니. 기대 이상의 포상이다.
나는 속으로만 크게 기뻐하고,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겉으로는 순수히 방랑하며 남들을 돕는 선인(善人)의 모습을 보이면서.
홀로 고된 길을 걸어나간다.
***
“정말 고마웠소. 네카르 경. 언제든 우리 아펠 영지로 놀러 오시오.”
다음날, 나는 말을 타고 아펠 영지를 떠난다.
몸소 아펠 영주 호세가 마중을 나오는 모습.
마치 미래의 위대한 성인이자, 대마법사를 배웅하는 듯한 모습이다.
“용병단을 고용해서 갈 수도 있겠지만······. 역시 귀찮군.”
나는 홀로 타바스 영지를 향해 내달린다.
돈이야 썩어 넘치게 있었지만, 시간은 별로 없으니까.
흙먼지를 일으키며 최단 거리로 내달린다.
투두두두.
“타바스 영지 인근에 도적들이 있다고 했나? 대충 누구인지 알 것 같군.”
나는 타바스 영지에 가서 비를 내리기 전에, 주교 그린달과 나눴던 대화를 상기한다.
안 그대로 지독한 가뭄으로, 수많은 사람이 메말라 죽어가는 곳을 굳이 약탈하는 작자들.
떠오르는 놈들이 있다.
강한 몬스터에겐 끽도 못 하면서, 약한 자들에겐 사정없이 잔혹한 수인 족이 있다.
“쓰레기는 제거해야지.”
아무리 손익계산이 빠른 나라도 인정(人情)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 세계에서 척박한 동부 사막, 그것도 가뭄으로 고통받는 영지를 구휼하러 가는 사제분들.
그분들은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기왕 타바스 영지까지 가는 것, 그분들을 구할 겸 겸사겸사 도적 떼를 정리하고 가는 것이다.
‘뭐, 그것도 내게 손해가 없을 정도만이지만 말이지.’
도적 떼 정도 청소하는 건 현재 내겐 별로 힘든 일이 아니니까.
타바스 영지를 근본적으로 가뭄에 들게 하는 악마의 경우, 내 힘으로 불가능하기에 미련 없이 포기한다.
남 돕다가 나까지 죽을 순 없잖은가?
휘이잉······.
4일간 노숙한 끝에 타바스 영지가 보인다.
쩍쩍 갈라진 대지.
황량하게 흩날리는 모래바람. 잡초조차 말라죽은 사막을 보면 동부 대륙이 극한의 변방이라는 걸 새삼 체감한다.
“찾았다.”
나는 모래바닥에서 사인(蛇人)족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사인족.
뱀의 모습을 한 수인족으로, 리자드맨보다 보다 인간에 가까운 자들이다.
포악하고, 살육을 즐기는 뱀의 흉포함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처럼 언어를 쓰고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
저들을 청소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무턱대고 쳐들어가면 사제분들이 다칠 수 있다는 건데······.”
다만 잠깐 고민이 스쳐 지나간다.
사인족 놈들은 본능에 몸을 맡기는 자들이다.
마치 파리가 이성적으로 파리지옥임을 알면서도 달콤한 향기에 빨려 들어가듯, 열 받으면 이판사판으로 움직일 수 있다.
내가 아무리 강해도 순간적으로 인질을 죽이는 것까진 전부 막기 힘들다.
“······인질이라, 그러면 되겠군.”
곧 사악한 생각이 떠올라서 상관없게 됐지만.
하여튼 사인족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
타바스 영지 셋째 아들 타레온은 싸늘한 모래 구덩이 속에서 쓰러져 있다.
손발이 가죽 밧줄에 묶여있는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뿐.
별들조차 희미한 하늘이 보인다.
달빛만이 처연하게 보이는 이곳은 목말라 죽은 원혼이라도 나부끼는지 메마른 찬바람이 끝없이 분다.
‘이런······. 형님누님께서 애타게 날 기다리고 계실 텐데······. 제길!’
타레온은 죄책감에 머리를 모래바닥에 쿵쿵 찌었다.
그는 굶고 있는 제 영지민을 구하기 위해 프레야 교단으로 특파됐다.
현재 타바스 영주인 아버지는 병으로 쓰러지시고, 후계자인 장남과 둘째 누나는 영지민을 돌보느라 바쁘니까.
그나마 상대적으로 널찍한 셋째가 다녀온 것이다.
영지 주위에 도적 떼가 만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목숨 걸고 원조를 청하러 간 거였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마지막까지 와서 잡힌 거였고.
결국 마차에 실어온 구호물자는 도적단 배만 불려주는 꼴이 됐다.
“형제님.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곧 우리 교단에서 구원 부대를 보낼 거에요.”
함께 묶여있는 남자 사제가 타레온을 위로한다.
그러나 타레온은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구조대가 어떻게 올 수 있겠습니까? 저 많은 뱀이 있는데.”
“······.”
쉬잇, 치잇.
타레온은 모래 구덩이 위에 있는 수천 마리의 뱀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자신들을 납치한 사인족들은 뱀을 길러서 부리고 있었다.
권능인지 아무리 크고 독이 강한 뱀이라도 그들이 한 번만 피리를 불면,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순한 양이 됐다.
죽이든 살리든, 제 부모처럼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교배한 사막 뱀들이 바위 지대 전체에 깔려있다. 바위 하나하나마다 그 밑에 뱀들이 바글바글한 거다.
“불조차 당하지 않는 뱀이라니. 난생처음 봤습니다. 짐승과 몬스터의 격차가 이토록 차이가 나는군요······.”
사제는 침울하게 말했다.
사실 구휼단 속 몇몇 사제들은 각종 호신술과 신성 마법을 익혔다.
그 때문에 수많은 뱀이 처들어왔을 때, 주위에 불을 질러 방어했다.
하지만 몇몇 뱀은 불길조차 무시한 채 덮쳐왔다.
사인족이 부리는 수천 마리의 뱀에는 방울뱀, 코브라, 도마뱀, 왕뱀류 등 엄청난 종류가 섞여 있었기 때문에 온갖 상황에서도 대처 되는 거다.
그 때문에 구조대가 힘으로 구해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구나 은화로 협상해서 풀려난다고 한들, 또 다른 도적 떼가 와서 약탈할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말 그대로 답이 없는 상황.
물의 명가 크라우드나 대륙 7대 성인 같은 대륙 패권자급 거물들이 아니고서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 겁니까?”
“······.”
타레온은 푸념하듯 사제에게 물었다.
물론 사제는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4년간 계속된 가뭄.
오아시스가 메마르고, 경제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한 상태에서, 주위 영지들도 외면하고, 도적단이 날뛰는 상황.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무슨 짓을 해도 의미가 없다.
프레야 교단의 구휼조차 사막에 버려진 물고기에게 물 한 바가지 끼얹어 준 수준이었거늘.
그마저 허락하지 않는 세상이 원망스러울 법했다.
다만, 세상을 욕하는 건 사제로서 신성 모독. 그저 침묵할 뿐이다.
타레온 또한 해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기에 침묵한다.
“거 다들 조용히 해라. 협상이고 뭐고 그냥 콱 다 죽여버리기 전에.”
그때, 언덕 위에서 누군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소리친다.
심장마저 차갑게 식었는지, 목소리마저 냉온인 사내.
끝이 두 갈래로 나뉜 긴 혓바닥을 츄릅거리는 뱀 대가리를 가진 도적이었다.
“새 인간 놈을 잡았으니까. 사이좋게 지내라. 몸값 낼 곳이 없으면 얼마 못 지내겠지만 말야. 큭큭.”
사인족 보초는 젊은 청년 하나를 구덩이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 사람은 꽤나 잘생긴 귀족 청년이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푸른 눈동자.
더구나 햇볕에 타지 않은 하얀 피부는 그가 아주 고위급 귀족임을 증명해주었다.
“이런. 앞일 창창한 젊은이까지······. 여긴 어쩌다가 오게 됐는가?”
늙은 사제 하나가 안쓰러워 새 포로에게 말을 붙인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사내는 현재 상황을 두려워하지도, 절망하지도 않는 기색이었다.
“혹시 타바스 영지로 구휼 활동가시던 사제분들입니까?”
“그렇소이다만······? 그걸 어떻게 아시오?”
고개를 갸웃하는 사제들.
이에 젊은 사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간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저는 그린달 주교님의 부탁으로 여러분을 구하러 온 네카르라고 합니다.”
“구, 구조대란 말이오? 헉······.”
타레온은 깜짝 놀라 주위를 홱홱 돌아본다.
귀를 땅에 대보기도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혼자 왔으니 그러셔도 아무 소리가 안 들릴 겁니다.”
“혼자? 당신 혼자 왔단 말이오?”
“예.”
“허어, 우릴 구하러 왔다가 같이 변을 당한 모양이군. 미안하오. 처음부터 붙잡히지 말았어야 했는 건데······.”
타레온은 괜한 죄책감에 젖은 표정으로 낯을 떨군다.
타바스 영지를 돕기 위해 오다가 붙잡힌 사제들.
그리고 그들을 구하러 오다가 또다시 붙잡힌 구조대.
그들을 보고 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에 네카르는 피식 웃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풀어드릴 테니까요.”
“어림없는 소릴. 혹, 도둑길드 출신이라 함께 탈출해주겠다는 거요?”
“비슷합니다.”
“뜻이야 고맙지만 자살행위요! 저놈들이 부리는 뱀 중에 코브라 따위는 낮에 깨어있고, 방울뱀 따위는 밤에만 활동하니까. 더구나 땅속에서 잠들어 있는 놈들도 버글버글하니 그만 포기하시오.”
타레온은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
타레온이라고 해서 탈출을 생각 안 한 건 아니다.
어떻게든 땅바닥에 있는 날카로운 돌을 골라서 밧줄을 끊고 달아나기 위해 온종일 고민했다.
하지만 답이 없었다. 상황이 워낙 좋지 않으니까.
사인족이 부리는 뱀이 원체 많다 보니 도저히 사각지대가 없는 거다.
그때 보초를 서던 사인족 하나가 고함친다.
“자꾸 뭐라 뭐라 씨부렁거리는 거냐! 시끄럽게 떠들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했을 텐데! 마침 새끼 뱀 먹잇감이 부족한데 네놈들로 해버릴까!”
짐승처럼 세로로 쪼개진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구덩이 속 포로들을 내려다본다.
다들 ‘히익’ 소리를 내며 눈을 내리깔고 진정하길 기다렸을 때,
“뱀 먹잇감이 필요하다라······.”
네카르가 고민어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투두둑, 끊겨버리는 밧줄.
네카르는 오른손을 반쯤 들어 올린다.
쿠과과.
“!”
“!!”
모래 구덩이에서 흙이 솟구친다.
포로들이 갇혀있는 구덩이가 순식간에 언덕처럼 올라온다. 평지보다 더 높게 올라온 거다.
“이, 이건······?”
“어스 마법! 흙의 마법사다!”
포로들이 화들짝 놀란다.
-쉬이이잇!
-취잇!
“히, 히이익!”
평지에는 수천 마리의 뱀들이 혀를 날름거렸으니까.
한순간에 뱀 떼에 둘러싸인 형국.
즉, 탈출이 아니라 사지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아, 안 돼! 뭐하는 짓이야! 다시 내려가!”
더구나 보초를 서던 사인족들 여럿 보였다.
우릴 내려다보던 사인족도 분노했다.
“이 건방진 새끼가! 기어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삐리리릭.
당장 피리를 부는 사인족.
그 소리에 뱀들이 일제히 꿈틀거린다.
-취이이익!
-사아아악!
마치 물 밖으로 버려진 미꾸라지처럼 사방팔방으로 미쳐 날뛰는 뱀들.
곧이어 뱀의 파도가 되어 움직이더니, 일제히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삐리리릭!
사인족은 또다시 피리를 연주한다. 순식간에 포로들을 포위하는 뱀들.
그 직후, 턱뼈를 활짝 펼치며 입을 쩍 벌리는 뱀들. 송곳니를 드러내며 포로를 물어뜯으려 한다.
포로들은 두 눈 질끈 감는다.
이제 곧 갈기갈기 찢긴 고깃덩어리가 되어 뱀들의 양분이 되는 상상을 한다.
“······?”
그런데······.
“뭐, 뭐야? 이놈들 왜 말을 안 들어!”
사인족들조차 당황한다.
그 흉포하다는 독사들이 포로 주위를 포위한 채 일순 얼어붙었으니까.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다른 연주를 해도, 반응이 오지 않는다. 벌벌 떨고 있었다. 마치 몽구스나 독수리를 본 뱀처럼.
파르르 떨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짝짝짝.
그때 네카르가 손뼉을 부딪친다. 마치 즐거운 관람을 했다는 듯.
그리고 터벅,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좋은 연주였군.”
터벅터벅, 두 걸음, 세 걸음 더 다가간다.
그러자 하나둘씩 길을 비키는 뱀들. 머리 방향을 정반대로 바꾼다.
제 주인이었던 사인족에게 몰려간다.
땡강.
피리를 떨어뜨린 사인족. 부르르 떤다. 사고가 정지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깊은 푸른 눈을 마주하며 아득한 절망을 느낄 뿐.
“스스로를 위한 장송곡이라니.”
네카르는 그런 사인족과 뱀들을 내려다본다.
뱀들이 소용돌이치듯 사인족들을 에워싼다.
제 주인이었던 사인족들을 물어뜯고, 몸에 올라타 새까맣게 가려버린다.
바위 지대에 사인족들의 온갖 비명이 메아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