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방랑 (2)
이른 새벽,
물의 명가 크라우드는 고요했다. 동부 사막 최고 도시라는 말이 무색하게 숨죽이고 있는 도시.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는 달. 그리고 찬바람만이 내 방랑을 축하하고 있다.
히히힝.
나는 명품 배낭에 각종 호화 아티펙트와 은화를 가득 담고 마구간 말 위에 오른다.
이 모든 건 어젯밤, 네하드람의 배려다.
-받아둬라.
-······이건?
-딱히 널 인정해서 여비를 챙겨주는 게 아니다. 황금 상회의 후계자로서, 사해의 시험 때 약조한 만큼 지킬 뿐.
딱 봐도 몇 백만 페니는 할 법한 지원을 해주면서 저런 말을 하면 합당한 덕담이다.
아무것도 안 주면서 저런 말을 하면 기분이 매우 나쁘겠지만, 큰돈 묵직하게 주니 감사를 전하고 받았다.
‘가주 엡실론과 현자 카나단 등 가문 사람들은 이미 어제 다 인사했으니 상관없겠지.’
다들 내가 낮에 떠나는 줄 아는 모양이지만, 새벽에 몰래 떠난다.
'어차피 동부의 변이 일어나면 다시 만날 텐데, 굳이 낯 뜨거워지고 싶지 않으니까.'
앞으로 동부의 변까지 길어야 3개월.
그 전에 언데드 군단을 막을 '바람의 마도서'와 '성수'를 구해서 돌아올 거다.
3개월이란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가주 엡실론, 장녀 네하린, 둘째 네하드람, 막내 네파란, 현자 카나단 등 물의 명가 크라우드 사람들과는 그 이후 정식으로 작별 인사를 하면 되겠지.
다크 로드 자칼과 언데드 군단을 물리친 무용담을 술안주 삼아서 말이다.
정확히 몇 시에 떠난다고 약조한 것도 아니잖은가?
투두두두.
네하드람이 선물한 준마를 타고 빠르게 가문을 나간다.
용용이를 타고 비행할까 고민해봤지만, 역시 눈에 띄어서 참았다.
마을에 들어가기도 곤란할뿐더러, 자칼을 대비하는 비밀 병기인 만큼 굳이 남들 눈에 띌 필요 없으니까.
‘언젠가 녀석이 큰 도움이 될 거다.’
아마도 동부의 변 때.
휘이잉.
다그닥다그닥.
그렇게 달리고 쉬고를 반복하다 보니 해가 중천이다.
벌써 찬바람이 분다. 사막의 밤이 춥기도 했지만, 북부로 갈수록 쌀쌀해진다.
“오늘 야영지는 여기군.”
따라서 더 어두워지기 전에, 잠잘 곳을 찾는다.
바람을 막아줄 바위나, 몸을 숨길 나무가 있는 곳.
그렇게 괜찮은 곳을 찾아 모포를 꺼내 바닥에 깐다.
푹신하면서도 바닥의 한기를 막아주는 모포.
그 위에 누워서 로브를 이불처럼 덮으니 전혀 춥지 않았다.
역시 인생은 유물론이다.
주위에 모닥불도 피워놨으니 야생 동물에게 기습당할 일도 없겠지.
안심하고 잠을 청하려고 할 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서는 꼭 이럴 때, 기습 이벤트가 벌어지던데······ 아니겠지.”
***
그렇게 안심하고 깊은 잠이 든 새벽.
-크르릉.
-고오오오.
“?”
그런데, 귓가에 스산한 짐승 울음이 들린다.
특성 드래곤 하트를 얻은 이후, 발달한 마나 기감과 신경.
본능적으로 불길함과 섬뜩함이 동시에 느낀다.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있는 황야에서 도마뱀형 수인족이 날 잡으러 스멀스멀 오고 있었다.
“시발,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별들의 전쟁2>가 원체 이딴 게임이었다.
한시도 마음 편히 놓을 수 없는 세계.
-lv11 리자드맨.
-lv13 리자드맨.
-lv9 리자드맨.
.
.
못해도 최소 20마리는 돼 보인다.
수인이라기엔 몬스터에 더 가까운 이들은 날 바라보며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야행성인 놈들이 날 발견하고 잡아먹으려고 모여들던 모양이다.
아무리 나라도 자고 있을 땐 무방비 상태인 만큼 소름 끼치는 상황.
-크리얏!
내가 깨어나자 이미 들켰다는 듯 본격적으로 덤벼든다.
허리춤에서 피 묻은 돌칼을 꺼낸다. 저 돌칼에 죽기엔 매우 고통스러울 것 같다.
‘차라리 잘 됐다. 새로 얻은 매직 오브를 사용해봐야겠어.’
나는 이들을 응전하기 위해서 가주 엡실론에게 받은 매직 오브를 꺼낸다.
지이잉.
플라이 마법이 새겨져 있어 스스로 두둥실 떠오르는 매직 오브.
이윽고 예열이 완료돼서 마법을 차징한다.
매직 오브에 기록한 마법은 ‘워터볼’.
촤아앙, 파아앙!
-꾸엑!
시원한 타격감과 동시에 날아가는 리자드맨.
매직 오브는 빠른 속도로 재장전한다.
【아쿠아 lv2.】
촤아아악.
그러는 사이, 나는 큰 마법을 준비한다.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물줄기.
당장 아쿠아 스톰으로 일대를 쓸어버리려고 할 때,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달려온다.
히히힝, 두두두두!
“······물러나십시오! 혼자서 상대하긴 적이 너무 많습니다!”
“?”
가벼운 옷차림에 냉병기로 무장한 인간들.
그들이 내 쪽으로 달려오며 호통쳤다.
‘이놈들은 또 뭐야?’
갑자기 또 다른 무리의 등장에 다소 당황한다.
이대로 아쿠아 스톰을 시전하면 저들도 휘말릴 수 있으니까.
혹시 산적일까?
아니,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화살을 리자드맨에게 겨누고 있으니.
아마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용병들이 내가 리자드맨에게 포위당하자 도와주러 온 모양이다.
실제로 내 추측이 맞았는지, 용병들은 당장 활을 꺼내 리자드맨을 마구 쏴 죽였다.
쐐액, 팍, 팍!
용병들은 제법 훌륭한 실력으로 리자드맨을 사냥한다.
돌칼밖에 없는 리자드맨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활 같은 고등 병기도 없고, 달리기가 인간보다 빨라도 말보다 빠르진 않으니.
순식간에 총 리자드맨 4마리가 죽는다.
상황이 틀렸음을 직감하는 리자드맨.
-크르륵······!
황급히 초원 수풀로 숨어든다.
용병들이라면 충분히 쫓아가 다 죽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어두운 밤.
수풀로 들어가기엔 시기가 적합하지 않다.
더구나 지금 전투 목적은 사냥이 아니라 날 도우러 온 모양이니까.
적당히 리자드맨 무리를 내쫓고 내게 다가온다.
“휴, 다행이군요. 불빛이 보이길래 야영지를 얻어쓸까 하고 온 게 천운이었습니다.”
워워, 말을 진정시키며 함께 도착하는 용병들.
아무래도 여행객을 구했다는 생각에 뿌듯해하는 모양이다.
‘딱히 도움이 필요 없었는데.’
나 혼자서도 리자드맨을 전부 쓸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호의를 베푼 건 사실이다.
생판 모르는 날 구하려고 몬스터와 싸워준 걸 보면 그리 악인은 아닌 모양.
예의상 감사를 적당히 전한다.
“도와줘서 고맙군요. 그런데 당신들은 누굽니까?”
“앗, 우리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은빛 늑대 용병단장 맥스라고 합니다.”
상대는 용병패를 내밀며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lv29 은빛 늑대 용병단장 맥스.
-lv11 은빛 늑대 용병단 제나.
.
.
시스템 창을 보니 딱히 거짓말을 하진 않는 모양.
특이한 점이라면 용병단장만 레벨이 월등히 높았다는 점이다.
용병단장 맥스는 정중하게 묻는다.
“그런데 어딜 가시는 길이길래, 위험하게 혼자 야영하십니까? 이 근방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질문은 당연했다.
치안이 좋은 도시에서도 범죄가 일어나는 데, 경비병조차 없는 야영지는 매우 위험하니까.
상단도 여럿이 몰려다니며 용병을 고용하는 게 대다수다.
나는 품속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저는 마탑의 마법사입니다. 폭풍의 산 파르티잔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척.
니콜라스에게 받은 마탑의 신분증을 보인다.
푸른 첨탑 모양 신분증.
위조 방지를 위해서 주인의 마나에만 빛나도록 설정되어 있다.
그러자 용병들이 살짝 놀란다.
“······진짜 마탑 신분증인가?”
“맞는 거 같은데? 귀족 신분증은 자기 마나를 넣어야 빛나는 거로 들었어.”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는 녀석들.
이내 신분증을 돌려주며 정중히 사과했다.
이 시대 마법사는 귀족과 같은 신분이니까.
“설마 마탑 마법사셨습니까? 진짜 귀족분을 만날 줄이야. 영광입니다.”
용병대장 맥스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이 시대에서 귀족은 자신을 모욕했다는 이유 하나로 평민을 감옥을 보낼 수 있으니까.
······물론 제나를 비롯한 다른 용병들은 몬스터를 상대로 당할 뻔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시큰둥한 표정이지만.
더 정확히는 ‘마탑 마법사는 뭔가 다르고 대단할 줄 알았는데, 별거 없네.’ 정도의 분위기.
‘······어처구니가 없군. 아쿠아 스톰에 너네가 휘말릴까 봐, 안 썼던 건데.’
그래도 악의는 없으니 넘어간다.
어찌 됐든 맥스라고 소개한 용병대장은 계속 말한다.
“이것도 인연이군요. 저희는 흑마법사를 아펠 영지로 호송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마탑 마법사를 만나다니요.”
“?”
아펠 영지?
아펠 영지라면 내 목적지인 폭풍의 산 파르티잔 인근의 영지다.
딱히 번화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 규모가 되는 대도시다.
동부에서 프레야 교단 지부가 건설된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니까.
이들은 왜 그곳으로 가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흑마법사를?
호기심이 들어 물어봤다.
“흑마법사를 호송하고 있었다고요? 흑마법사는 잡은 즉시, 즉결 처분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 원래 그렇긴 한데, 영주님께서 꼭 생포해오라고 하셨거든요. 돈 줄 사람이 그러라는데 따라야지요.”
굳이 생포해오라고 했다고? 왜?
내가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자, 덧붙여 말했다.
“사정을 들어보니까 이 흑마법사가 지난밤에 아펠 영주성에 홀로 숨어들어 가서 아주 중요한 교단 물품을 하나 훔친 모양입니다. 그 과정에서 치명상을 입고 달아난 모양이고요. 그래서 영주님께서 그 물건을 되찾기 위해 온 성기사단과 용병들을 다 불러서 생포하라고 현상금을 걸으셨습니다.”
이후 생포해서 마나 구속구를 채워놓았고요.
맥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충 상황은 알 것 같다.
시기를 보아 데이아가 실패한 이후, 마음이 급해진 흑마법사들이 무언가 하려다가 일이 꼬인 모양이니까.
그러나 나는 무언가 의구심이 들었다.
‘홀로 영주 성에 들어갈 정도라고? 프레야 교단 성기사단이 주둔하는 곳인데?’
프레야 교단.
신성력을 가진 사제가 있는 곳으로, 흑마법사의 천적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한 곳에 단독 잠입을 결심한다?
분명 엄청난 실력자일 터.
그 말에 경계심을 띄고 용병들이 호위하고 있는 한 마차를 바라본다.
물건을 보관하는 천이 아니라, 나무 창살로 되어있고, 죄수 하나가 갇혀 있는 마차.
심지어 마차 속 죄수는 붙잡히고 한 번도 안 씻었는지 피투성이에 꼬질꼬질하고, 턱수염이 더부룩했다.
그러나 눈에 흉흉한 살기를 번뜩이는 자였다.
-lv45. 다크 로드 자칼의 2번째 제자 베어켈.
‘미친.’
다크 로드의 두 번째 제자 베어켈.
과거 흑마법사 지부 C에서 뇌격의 원로 니콜라스를 죽일 뻔한 마벨보다 높은 서열의 흑마법사다.
1번 제자 카넬과 정반대로 단독 무력만을 기르는 살인 병기.
용병대장 맥스가 꽤 레벨이 높긴 하지만, 결코 베어켈을 상대할 수준은 아니다.
말 그대로 혼자서 몇 분 안에 은빛 늑대 용병대를 전멸시킬 수 있을 정도의 괴물.
과연 이 정도 되는 실력자니까 흑마법의 천적인 성기사단을 뚫고 정면 돌파한 모양이다.
더구나 은빛 늑대 용병단 따위에 붙잡힌 걸 봐선 정말로 치명상을 입은 모양이다.
‘······이거 내버려 두면 죄다 개죽음당하겠군.’
베어켈급 거물 흑마법사라면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반드시 흑마법사 구조대가 올 거다.
이제 곧 동부의 변.
큰 전쟁을 앞두고 흑마법사 최강 전력 중 하나인 베어켈을 포기할 리 없으니까.
아마 은빛 늑대 용병단 따위 능히 전멸시키고 유유히 사라지리라.
그런데 용병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지 그리 절망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찌 됐든 날이 늦어서 말인데, 귀하의 야영지에서 합숙해도 괜찮겠습니까? 저희 측에서 야간 경비 서며 지켜드릴 테니, 마법사님께도 손해는 아닐 겁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바람의 마도서를 얻기 위해 떠나는 길.
합숙한다고 돈 드는 건 아니니까.
더구나 다크 로드의 2번째 제자 베어켈을 호송하는 마차인 걸 확인했으니.
여기서 베어켈이 풀려나면, 훗날 동부의 변 때 다크 로드 자칼의 전력이 훨씬 늘어나는 꼴이니까.
‘내가 지켜줘야겠군.’
***
다음 날 아침,
용병대장 맥스는 합숙해서 감사하다며 아침 식사를 대접했다.
‘······황금 상회에서 준비해준 최고급 훈제 소시지가 있는데.’
기껏해야 희묽은 오트밀 죽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용병들 또한 그리 먹었으니 할 말은 없다.
어젯밤 리자드맨과 싸우고, 임시 숙소 짓느라 소란스러워서 밤잠을 못 잤다는 게 불만일 뿐.
‘졸리군······.’
【아쿠아 lv2.】
촤악.
세수할 겸, 아쿠아 마법으로 물을 모은다.
찬물에 세수하니 한결 개운했다.
그때 그 모습을 본 13살쯤 됐을 귀염성 없는 청소년이 내게 다가온다.
“저기요. 혹시 형이 이번에 합류했다는 마탑 마법사에요?”
“?”
그래도 마법에는 흥미가 있는지 말을 붙인다.
“그래, 우연히 동행하게 됐지. 넌 이름이 뭐냐?”
“전 제논이요. 제나 누나의 동생이에요.”
······제나?
아, 어제 맥스 곁에 있던 여자 용병 이름이 제나였다.
아마 그 녀석 동생인 모양이다.
‘제논과 제나.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가물가물한데······.
그때, 제논이 다시금 내게 말했다.
“그보다 저도 꿈이 마법사인데. 마법을 좀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글쎄.
나는 고인물로서 온갖 마법의 효과와 상성, 숨겨진 조합 등을 알고 있지만.
이는 마법 습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건 아니다.
따라서 적당히 뭉갠다.
“마탑 마법은 비전 마법이라 외부인에게 공개할 수 없다.”
“아.”
“그보다 마법을 왜 배우려는 거지? 누나를 따라서 용병 생활을 하는 게 낫지 않나?”
다행히 말을 잘 돌렸다.
“그야 우리 형 꿈이 마법사였으니까요.”
“뭐?”
“별거 아니에요. 우리 용병대였던 사람이 있었어요.”
아무래도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더 물어봐달라는 눈치.
하지만 나는 별로 관심 없는 만큼 굳이 물어보진 않는다.
“쓸데없는 소리 마. 제논. 너 또 모르는 사람한테 가서 마법 가르쳐달라고 하고 있었지?”
“누나?”
제논의 누나라는 제나가 다가왔다.
제논은 누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제드 형이 그렇게 꿈꿨던 일인데······.”
“내가 몇 번을 말해? 넌 제드 오빠 대신 사는 게 아니라고 그랬지? 더구나 용병 일해서 번 돈을 꼬라박아봤자 고작해야 1~2써클밖에 못 간다고.”
제나는 현실적으로 훈계한다.
하기야 용병들이 구할 수 있는 마법서적 수준은 그 정도가 한계일 테니까.
“그럼 안 돼······?”
“당연히 필요 없지! 모닥불 불피우고, 생수통에서 물 마시는데 굳이 마법이 필요하진 않으니까! 더구나 급박한 전투 때 언제 영창 외우고 앉아있니? 그냥 화살 한 번 더 쓰는 게 낫지!”
“······.”
뭐, 기분 나쁘지만 사실이다.
마법이란 학문은 저 써클일 땐 효과가 매우 떨어지니까.
고 써클로 갈수록 효과가 극대화되기 때문에 오랫동안 연구할 수 있는 귀족의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나라는 용병은 팔짱을 끼고 날 흘겨보더니 말했다.
“이봐요. 마법사 나으리. 써클이 몇 써클이라고요?”
대답 대신,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오,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네. 주변에서 꽤 천재라고 추앙받았겠어요?”
“과찬이군.”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평민들에게 2써클은 용병 최고 천재 수준이겠지만, 마법 명가 귀족들에게 2써클은 평범한 수준이니까.
그러나 제나는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
“봐봐, 제논. 저기 천재라고 불리는 귀족 나으리가 2써클이래. 근데 어젯밤에 리자드맨들한테 습격당했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기가 막히게 등장하지 않았으면 죽을 뻔했다고.”
“······.”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제나.
나는 사실을 정정해준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죽을 뻔 하진 않았다.”
“하, 그럼 우리 없이도 살아남았을 거란 뜻이에요?”
“그래.”
“뭐, 어이가 없네. 고마운 줄은 모르시고······ 알았어요. 그런 거로 하죠. 어쨌든 알아들었지? 마법은 실전성이 전혀 없어. 작정하고 준비할 수 있는 대규모 전쟁터가 아니고서야 말이야.”
“······.”
제나는 전혀 안 믿으며 제논을 연신 훈계한다.
로망이 꺾였는지 표정이 다소 어두워진 제논.
그제야 제나는 만족했는지 화살을 내게로 돌린다.
“그리고 당신. 마탑에선 천재 소리 좀 들으면 혼자 다녀도 되나 봐요?”
“칭찬은 아니군.”
“비꼬는 건 아니고 걱정하는 거예요. 보통 천재 소리 듣고 자라면 현실 감각이 없거든요. 바로 당신처럼요.”
“······.”
“아무리 마탑 마법사라지만 혼자 방랑하다니. 지나치게 무모해요. 우리가 아니라 산적을 만났으면 어쩔 뻔했어요? 불 마법? 물대포? 그것도 정도가 있지, 우리처럼 머릿수 많으면 재장전하다 죽는 거예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마법이 아니라 스킬을 퍼붓기에 즉발로 시전할 수 있으니 예외다.
그래도 나름 걱정해주는 것인 만큼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려준다.
이에 거보라는 듯 기세등등해진 제나.
우쭐해져서 양손을 허리춤에 올려두며 말한다.
“이번엔 야영지도 얻어 잤으니까 특별히 무료로 호위해주지만 아펠 영지에 가고 나면 돈 내고 우릴 정식 고용해요. 우리만큼 믿을만하고 실력 있는 곳은 없으니까.”
“······.”
“아, 혼자 다 내야 한다곤 안 했어요. 원래 우린 상단 호위를 주로 하니까. 일정 금액만 내고 따라오라는 거예요. 마탑 마법사면 그 정도 돈은 꽤 있을 거 아니에요?”
어느새 영업하는 제나.
다 좋은데 착각하고 있다.
자신들이 날 호위해주고 있다고.
“보이시죠? 저희가 또 어떤 놈들을 때려잡았냐면······.”
제나는 다크로드 제자 베어켈이 갇힌 나무 창살을 탕탕 두드리며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뭐, 레벨을 보면 제나가 잡은 적들이야 잔챙이였을 게 분명할 테지만.
‘굳이 사실을 따질 필요는 없겠군.’
평소였다면 잔소리가 지겨워서라도 사실을 밝혔겠지만 웃어넘긴다.
왜냐하면.
-lv21 다크 드루이드 프로돈.
-lv24 다크 드루이드 차킨.
-lv26 다크 드루이드 사라딘.
제나가 단숨에 때려잡는다는 흑마법사들이 슬슬 다가오고 있으니까.
자칼의 2번째 제자 베어켈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된 다크 드루이드들이 도착했다.
다크 드루이드.
어둠의 정령과 계약한 드루이드들로, 자연에 악령을 부여해서 싸우는 자들.
숲 전체를 악령의 숲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고대 주술사들이다.
다크 로드 자칼과 협력하는 작자들.
지금 지형에서 가장 까다로운 적들이다.
용병들보다 레벨이 2배는 높으며, 수도 많다.
아무리 용병대장 맥스가 뛰어나더라도 감히 감당할 적이 아니다.
만약 용병들만 있었다면 학살을 당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있으면 얘기가 다르지.’
동부의 변 때를 대비해서라도 전부 없애버릴 거니까.
본의 아니게, 제나를 민망하게 만들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