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결급 특성으로 대마법사-21화 (21/140)

21. 카넬과 데이아 (1)

블랙 오아시스 지하 4층은 완전히 무너졌다.

짐승 발톱에 당한 듯 갈기갈기 찢어진 기둥.

청동 골렘이었던 파편들, 바닥에 흥건하게 깔린 물 자국만이 이곳에 아쿠아 스톰이 시전됐음을 기억해줬다.

만약 내가 무너진 기둥을 흙무더기로 급히 메우지 않았다면, 불법 공사된 블랙 오아시스는 그대로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고생했다. 노움.”

-우움······!

색색거리는 노움을 쓰다듬는다.

몹시 지쳐 보이는 녀석.

청동 골렘를 상대로 시간을 끄느라 만신창이가 된 거다.

‘하기야 최하급 정령이 이 많은 마나를 전부 출력하려고 하니 무리가 왔겠지······.’

나 또한 무리했는지 왼쪽 심장 부근이 아파 왔으니까.

나는 노움에게 포도알을 쥐여주고 가면을 정비한 채 위로 올라갔다.

‘다행히 들키진 않았군.’

블랙 오아시스는 무법지대인 만큼, 각자 알아서 살아남기 위해 난리였다.

그 인파에 섞여 자연스레 탈출했다.

밖으로 나와 햇빛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대로 크라우드 가문으로 돌아가면 된다.

우웅, 우웅!

“?”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통신 구슬에 긴급 연락이 왔다.

-네카르 도련님. 어디 계십니까?

연락한 사람은 현자 카나단.

평소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그가 유례없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숙부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것도 양자를 데리고요. 속히 가문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숙부.

그 단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이 쿵쿵 뛴다.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감지하고 최악의 상상을 한 거다.

‘······내게 숙부라고 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을 텐데?’

섬뜩,

머릿속에 용의자 얼굴을 떠올린다.

확인차 묻는다.

“숙부시라면 정확히 어느 분이십니까?”

-카넬 폰 크라우드 경입니다.

“!”

카넬 폰 크라우드.

가주 엡실론의 친동생으로, 현재 가문을 떠난 중년 마법사.

실상은 다크 로드의 대리인이자, 첫 번째 제자.

동부 사막 유저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최악의 네임드 악인 중 하나다.

‘그 새끼가 가문에 돌아왔다고?’

본래 카넬은 다크 로드가 악마와 계약하느라 잠적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인 흑마법사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스승이자 군주인 다크 로드 자칼을 위협할 만큼.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자칼의 명령을 받고 가문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형인 엡실론을 독살하고 실권을 차지한다.’

이후 다크 로드가 동부를 멸망시킬 때, 막아내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것이 바로 원작에서의 ‘동부의 변’이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단 한 순간에 동부 사막 전체가 지옥도로 변하는 대재앙이다.

카넬이 바로 그 포문을 연 장본이다.

‘그런데 그 괴물이 왜 벌써 크라우드 가문에 왔다는 거지?’

다만 의문점이 든다.

현재 원작보다 10년 이른 연도이니 아직 카넬이 나설 때가 아닐 텐데?

‘······설마?’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다.

‘동부의 변, 그 사건이 나 때문에 원작보다 10년 이상 당겨졌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역사가 바뀌었다.

그간 내 활약으로 크로코 가문 속 흑마법사가 발각되고, 자칼의 3번째 제자 마벨을 죽이는 쾌거에 달성했으니.

다크 로드 자칼로서도 더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만약 이대로 동부 사막이 무너지면?

가주 엡실론과 장녀 네하린, 둘째 네하드람, 현자 카나단 등 그동안 함께 지낸 수많은 사람이 몰살당한다는 뜻이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니다.

“예, 카나단님. 빨리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진 않는다.

원작에서 동부의 변을 막는 히든 업적을 달성한 적 있으니까.

더구나 10년 이르게 거사가 시작된다면 동부의 변의 준비도 덜 됐을 터.

해볼 만했다.

······아니, 해보는 수밖에 없다.

***

물의 명가 크라우드 백작가.

동부 사막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답게 인구도 많아 고층 건물이 많은 영지다.

성벽 밖은 온통 황무지에 모래사장이지만 그 안은 항상 시끌벅적한 번화 도시.

그러나 현재 크라우드 백작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숙부 카넬 폰 크라우드의 귀환.

과거 사해의 시험에서 가주 엡실론에게 밀린 후, 반역을 저지르려고 했던 혈통.

크라우드 가문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의 장본인이 돌아왔으니까.

그를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분쟁이 일어난다.

이른바 비상사태가 선포된 거다.

“칫. 여기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나 또한 가문의 중심인물로서, 중요 안건에 참여할 지위가 있는 사람이거늘.”

“······.”

긴급 대기 명령을 받은 네하드람은 직계 혈통 연무장에서 혀를 찼다.

이번 사안은 원로원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가문의 후계자 후보이자 실세 중 한 명인 네하드람조차 관여하지 못한 거다.

장녀 네하린 또한, 대기 명령을 받았기에 옆에서 마법 수련을 했다.

7살짜리 꼬마 네파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보다 언니. 숙부가 돌아왔다는 게 왜 이리 소란이야? 그냥 죽이거나, 추방하면 되잖아?”

“‘망각법’ 때문에 그렇단다.”

“응?”

“제국법에 따르면 증거가 없는 사안은 수십 년이 지나면, 더는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단다. 숙부는 그걸 노리고 돌아온 거야.”

네하린은 표정을 차갑게 굳힌 채 말했다.

제국법 중 하나인 아델만 망각법.

아무리 죄인이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증거가 없는 죄는 나중에 법적 처벌을 할 수 없다는 법령이다.

물론 이 법 자체는 굉장히 좋은 취지로 만들어졌다.

법정증거주의.

증거 없는 형벌은 불공정할 수 있고, 나중에 기억이 왜곡될 수 있으니까.

이른바 증거를 제출하고 공식 재판으로 기록하라고 권고하는 법령.

혐오와 증오를 통해 대를 잇는 피의 복수를 방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법이다.

7살짜리 꼬마 네파란은 설명을 듣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언니, 숙부 카넬은 반역에 관한 증거가 없었어?”

“들킨 그 즉시 녹음 구슬을 깨뜨리고 달아났다고 하는구나. 따라서 조사원들의 증언만 있지.”

“!”

허나 카넬은 철저하게 증거를 파괴했다.

이 때문에 크라우드 가문과 원로원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가문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당사자가 돌아왔는데, 아무 처벌도 못 하고 모든 권리를 인정할 건가?

심지어 양자를 데려와, 차기 가주 시험에 참가시키겠다는데?

그렇다고 반대로 처벌한다면?

물의 명가 크라우드는 동부를 지배하는 패권 가문으로서, '대법원' 역할도 한다.

그런데 그런 크라우드가 제국 주요 법령을 무시한 채 멋대로 처벌한다면?

향후 다른 가문들이 공정성을 인정할까?

쉬이 결론이 나지 않는 난제 때문에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그제야 네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래서 문제가 복잡하구나.”

“그래.”

네하린과 네파란은 차분히 어른들의 결정을 기다렸다.

다만 둘째 네하드람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깟 직계 혈통의 권리가 뭐 중요한 데? 명예직 말곤 별거 없잖아? 그까짓 거 그냥 우리 황금상회가 돈으로 물어주면 되지.”

그의 주장은 간단했다.

어차피 직계 혈통은 명예직이니 시원하게 주면 되잖은가?

망나니 네카르가 아무것도 못 한 것처럼 식물인간 취급하잖은 거다.

그때 누군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군.”

“뭐라?”

네하드람과 네하린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뒤를 홱 돌아봤다.

겉모습만 보면 20대 후반 청년이 다가오고 있다.

상대는 검은색 곱슬머리가 머리카락이 풍성한 사내.

뾰족한 귀에 까마잡잡한 피부를 가진 사람.

얼핏 보면 검은 양 같지만, 눈매는 맹수처럼 흉흉한 삶이 깃든 다크 엘프였다.

“물의 명가 직계 혈통의 가치가 고작 돈으로 환산된다고 생각하다니. 그딴 사고방식이라면 황금상회가 동부 전체를 이미 지배했어야겠군.”

“넌 도대체 누구냐? 여긴 가문 혈통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인데?”

“‘데이아’.”

“!”

그 말에 두 눈을 부릅뜨는 네하드람과 네하린.

그들 또한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숙부 카넬이 데려온 양자 이름이 데이아라고.

네하린, 네하드람 등과 동등한 조건으로, 물의 명가 크라우드의 차기 지배자를 뽑는 ‘사해의 시험’에 참석하려는 자라는 걸 말이다.

“네놈이 데이아였구나. 여긴 무슨 낯짝이지?”

“이제 곧 열릴 사해의 시험에서 만날 경쟁자들을 살피러 왔다. 헌데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영 하찮군.”

“!”

데이아의 무시에 발끈한 네하드람.

“뭐라? 하찮은 건 네 부모 혈통이겠지!”

“넌 아버지가 엡실론인데도 그 모양이냐? ······아니, 혹시 외가 피가 하찮아서 돈에 집착하는 건가?”

“지금 뭐라고 했어. 이 새끼야!”

부모를 거들먹거리자 멱살을 붙잡는다.

그러나 데이아는 눈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칠흑 같은 눈동자를 더욱 냉철히 빛낸다.

턱.

데이아는 제 멱살을 붙잡은 네하드람 손을 양손으로 붙잡는다.

그리고 네하드람 손목 부분을 꽉 잡고 꺾어버린다.

“······!”

손목은 순전히 관절만 있는 부위.

저항할 수 없다. 네하드람은 그대로 양손이 꺾여서 완전히 제압당한다.

고통에 신음한다.

“끄아아악?!”

“쯧쯧, 정말 온실 속 화초로군. 기초적인 격투술조차 모르는 건가.”

“뭐, 뭣? 그딴 건 천한 거나 익히는······. 컥!”

우당탕.

고통 속에 바둥거리는 네하드람 배를 힘껏 걷어차는 데이아.

네하드람은 속수무책으로 바닥을 3바퀴 구른다.

정신 차린 네하드람은 땅바닥에서 데이아를 올려다본다.

데이아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하드람은 벌떡 일어나서 삿대질한다.

“커흑, 너! 격투술로 이겼다고 자만심이 든 모양인데, 이번엔 마법으로 붙어보자! 너 또한 사해의 시험을 본다면서.”

“네하드람!”

마법 결투라는 말에 놀라 고함치는 네하린.

그러나 네하드람은 차분했다.

“괜찮아. 누님. 저 녀석 우리 또래야. 어디 듣도 보지도 못한 잡가문에서 용병술을 익힌 모양인데. 그런 근본 없는 곳에서 익히는 데 한계가 있어.”

네하드람은 마법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럴 것이, 물의 명가 크라우드에서 비전 마법을 읽혔을뿐더러, 황금상회라는 든든한 뒷배를 통해서 다양한 마법 서적을 지원받아 왔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서 상대가 네카르와 네하린에게 크게 밀려 보일 뿐, 객관적으로 보면 평균 이상의 마법사란 말이다.

더구나 최근 네카르를 보고 자극받아 마법을 열심히 수련했기에 자신감이 차올라있었다.

그리고 상대는 근본 없는 잡배에 불과하지 않던가?

마법이란 무릇, 정통의 계보를 따라야만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네하린은 계속 만류했다.

“네하드람. 마법 결투는 대단히 위험하고 변수도 많단다. 굳이 필요 없는 싸움을 할 이유가 없어.”

그녀 또한 네하드람이 승리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 무슨 이득이 있는가?

마법 결투로 승리한다고 한들, 네하드람이 물질적으로 얻어갈 건 없다.

오히려 사고로 다치기라도 한다면 소중한 동생에게 큰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하드람은 막무가내였다.

“흥, 그건 누나가 장녀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이미 갖고 싶은 걸 다 가졌으니까.”

“······.”

그는 아버지 엡실론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칭찬과 인정이 고팠다. 문제가 된 카넬과 데이아를 정당한 결투로 이기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거기에 이대로 간다면 무난히 차기 가주직을 빼앗길 거라는 불안감에 찌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다소 무리해서라도 승부수를 뒀다.

제 딴에는 대단히 이길 확률이 높은 일이라고 계산하면서.

네하드람은 거보라는 듯 자신 있게 말한다.

“룰은 ‘퍼스트 블러드’ 어떠냐? 외지인 하나 손보는데 그 이상 룰은 필요 없겠지.”

퍼스트 블러드.

조금이라도 피가 난 쪽이 지는 결투 룰이다.

그런데도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지만, 결투 룰 중에서는 가장 약한 수위였다.

이에 데이아는 계획대로라는 듯 피식, 악마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 괜찮겠냐. 외가 돈벌레. 마법 결투 중엔 ‘실수로’ 죽을 수도 있는데.”

“쯧, 내가 할 말이다. 열을 세고 시작하지.”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선공은 양보하지.”

“······뭐라?”

네하드람의 이마가 빠직, 일그러졌다.

선공을 양보한다.

마법은 영창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한 턴, 한 턴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첫 번째 마법은 공격하지 않고 무조건 방어만 하겠다니!

네하드람을 완전히 자신 아래로 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너 이 새끼. 정말 말로 해선 안 되겠구나.”

촤아악.

네하드람은 전력으로 워터볼 마법을 시전한다.

그간 특훈한 보람이 드러나듯 깔끔하게 모이는 물의 구체.

네하드람은 아직 실드 영창조차 외우지 못한 데이아를 보며 비웃었다.

“건방지게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쳐다본 죗값을 치르게 해주지!”

망설임 없이 워터볼을 쏘는 네하드람. 열이 뻗쳤기에 센 언어가 나왔다.

다만 정말로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데이아의 왼쪽 팔을 노렸다.

쐑.

“······?!”

“······!”

그런데 데이아는 워터볼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일부러 자기 목을 들이댄다.

마치 자살하려는 듯.

파아앙!

그와 동시에 터져나가는 워터볼.

데이아가 만든 검은 물의 벽에 막혀서 허공에서 팡 터져버린다.

워터 실드.

그것도 물의 명가 크라우드에서 사용하는 방식과 똑같았다.

“이런. 설마하니 정말 목을 향해 쏘다니. 날 죽일 생각이었나?”

“!”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탐욕스러운 미소를 짓는 데이아.

그러나 네하드람은 난생처음 보는 방어 마법에, 상대 목을 노렸다는 실수까지 겹쳐서 크게 당황했다.

“아, 아니······. 나는 분명 팔을······.”

그 때문에 다음 마법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변명을 했다.

그리고 이는,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가진 상대에게서 치명적인 실수였다.

고고고.

“!”

데이아는 검은 물을 끌어내며 악마의 미소를 짓는다.

마치 물의 명가 크라우드의 마법을 다 익힌 듯.

숙부 카넬에게 배운 대로 물의 마법을 펼친다.

그 모습에, 네하린마저도 오싹함을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이제부터 정당방위다. 방금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니.”

***

쿠과과광!

시끄러운 굉음이 터진다.

무중력을 몸소 체험하게 하는 강력한 폭발.

네하드람은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땅에 처박혔다.

······땅바닥이 차갑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한쪽 고막이 터졌는지 소리가 멍멍하다.

시선이 제 몸에서 흐르는 붉은 피로 향한다. 아마 몸에서 피가 너무 빠져나가서 어지러운 모양이다.

“······빠! 오, 빠. 죽지 마. 정신 차려······!”

네파란이 달려와 울먹거린다.

그녀는 피투성이 된 사람을 처음 봤는지 패닉 상태다.

몹쓸 꼴을 보였군.

네하드람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쿠과광.

추가적인 폭발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네파란은 물론, 네하드람도 놀랐다.

······잠깐.

나 이미 피 나고 있지 않나?

분명 마법 결투의 룰은 퍼스트 블러드일 텐데?

장녀 네하린도 마찬가지인지 눈썹 사이가 구겨진다.

“네놈. 결투는 이미 끝났을 텐데.”

“내가 왜 저깟 놈이 만든 룰을 지켜야 하지?”

“!”

고고고고!

데이아는 온몸에서 사악한 마나를 뿜으며 말했다.

일전 뇌격의 원로 마법사를 위협했던 마벨과 비슷한 수준의 마력.

장녀 네하린이 살기를 내뿜는다. 그녀 또한 워터 실드를 펼치며 데이아를 막아선다.

쓰러져있는 자신과 네파란을 지키기 위해서.

콰과광! 촤악.

“······큿.”

워터 실드가 크게 무너진다.

억지로 막아내느라 네하린 속이 진탕 뒤집힌 모양이다.

단순히 보아도 실력차가 한 단계 이상 난다. 그런데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막았다.

등 뒤에 쓰러진 자신과 네파란을 지키기 위하여.

‘나는, 저런 괴물을 상대로 나댔던 건가······?’

민폐다.

이번에도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네하드람 또한 일이 이렇게 되길 바라진 않았다.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는데.

아버지 엡실론의 심판 아래 당당히 이겨서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늘 패배만 했다.

남들이 눈치채는 걸 홀로 못 채고, 황금상회에서 영재 교육을 해줬지만, 마법 성취는 느리기만 했다.

그렇게 남들이 빨리 달릴 때, 자신은 느렸다.

다른 형제들에게도 따라잡힌다는 위기의식이 있었다.

심지어 망나니라고 생각했던 네카르가 자신을 아득히 추월했을 때, 아찔한 느낌도 들었다.

‘왜 나만, 왜 나만······. 잘 하는 게 없는 거야······.’

눈물이 시큰 난다.

사실 알고 있었다.

자신은 마법 재능이 없다는 걸.

차기 가주로 거듭날 인품도 없다는 걸.

그러나 인정해줄 사람, 아버지 엡실론이 마법적 성취를 원했다.

차기 가주에 기대가 많았기에 자신을 그쪽에 최대한 맞췄을 뿐이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가 계신 문이 봉쇄됐다! 빨리 부숴!

밖에서 구두 소리와 동시에 소란스러운 함성이 들린다.

폭발 소리에 놀란 크라우드 가문 사람들이 달려온 모양이다.

쿠궁.

그러나 이미 검은 벽에 입구가 막힌 상태다.

밖에서 사람들이 힘껏 둔기를 휘두르고 워터볼을 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크라우드 자제들 수준은 고작 이 정돈가. 사해의 시험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겠군.”

“!”

고오오오!

그 사이, 마법 연무장에서의 결투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데이아의 압도적인 승리로.

네하린은 이미 반쯤 주저앉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다.

데이아의 마나가 마법 연무장 전체를 뒤덮는다. 엡실론의 자제들을 시험 전에 전부 처형하려고 든다.

‘아버지······.’

점차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서도 아버지가 떠오른다.

이 모든 일을 단칼에 해결해줄 수 있는 중재자이자 자신의 완벽한 이상향.

그분이 오셨다면 지금 이 상황도 단숨에 해결될 텐데.

하지만 원로원은 이곳에서 꽤 멀다.

더구나 아직 정확히 무슨 일인지도 모를 텐데 곧장 달려오진 않겠지.

마지막 희망이 사그라든다. 눈꺼풀이 감긴다.

콰광!

그때 막혀있던 마법 연무장 문이 파괴됐다.

‘······혹시 아버지께서?’

네하드람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살핀다.

데이아의 마나으로 검은 물이 넘쳐흐르는 마력 연무장에 문밖에서 빛과 함께 인영(人影)이 하나 보인다.

“네카르······?”

황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차가운 인상을 지닌 사내.

네카르가 양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천천히 문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쿠구궁.

그러자 땅에서 솟구치는 흙의 벽.

네하린과 네하드람을 지키는 보호막이 일어나고.

“남의 집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으면.”

촤아아악!

바닥에 흥건한 물이 새 마나를 받고 활력을 되찾는다.

네하드람과 네하린이 일으켰었던 푸른 물.

그 의지를 계승해 강을 일으킨다. 성난 파도가 돼서 분노를 표한다.

“강도 새끼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마법 연무실을 장악한 어둠을 몰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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