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니콜라스의 첫 번째 수업 (1)
일주일간 정신없이 달리니, 크라우드 가문에 도착했다.
비몽사몽 잠을 깨며 마차 창문을 열어본다.
마차는 이미 가문 내부로 들어와 있었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왔는가.”
“가주님.”
마중 나온 사람 중엔 가주 엡실론도 있었다.
현자 카나단을 필두로, 파견 나갔던 중진 마법사들이 허리 숙인다.
엡실론은 목례만으로 인사를 받고 심각하게 말했다.
“사안이 중대하니 보고가 우선이다. 따라오도록.”
제대로 쉴 시간도 없이 우리는 곧장 가주 회의실로 모였다.
현자 카나단이 대표로 보고한다.
“······해서 크로코 가문이 당장 대금을 지불한 능력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수로수리비용은 100만 페니만 받고, 향후 3년간 코코넛과 정제된 흙을 30% 독점 계약하기로 했습니다.”
“······.”
현자 카나단이 대표로 크로코 수로 사업에 대해 보고했다.
가주 엡실론은 말없이 보고를 계속 들었다.
30분 가까이 듣기만 하며,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혹시 이번 거래 건이 마음에 안 든 건가.’
이에 형제자매들은 물론, 원로 마법사들도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조마조마한 순간,
“잘했군.”
짧지만 묵직한 칭찬 한마디가 나왔다.
“어차피 크로코 가문은 가까운 이웃 혈맹. 앞으로 20년은 계속 거래할 가문이다. 지하 수로 때문에 사정이 안 좋다면 유예기간을 늘려줘도 좋다.”
“예, 가주님.”
“현자 카나단. 네가 이번 사안 책임지고 끝까지 맡도록.”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엡실론은 문서에 무거운 도장을 찍은 후, 카나단에게 넘겨줬다.
그리고 장녀 네하린과 차남 네하드람에게 눈을 돌린다.
“치수 사업은 크라우드 가문의 근간이다. 후계자를 표방한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업이지.”
“······.”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훌륭히 정비했으면 됐다. 둘이 협력해서 작업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엡실론은 담담히 몇 마디 덕담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몇 마디로 차남 네하드람이 환하게 웃고, 좀처럼 미소가 없던 장녀 네하린조차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엡실론은 아버지라기보다는 가주인 사람이니까.
원체 칭찬이 적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분위기가 풀려서 희희낙락할 때, 마지막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네카르.”
엡실론은 포도주잔을 찰칵, 내려놓으며 말했다.
목소리 음역대가 달라졌다.
무겁게 내려앉는 주위 공기.
“난 널 이번 기회에 가문에서 파문하려고 했다.”
“······!”
충격적인 발언에 현자 카나단은 물론, 차남 네하드람조차 토끼 눈이 돼 제 아버지를 홱 쳐다본다.
파문.
말 그대로 가문에서 내쫓는다는 뜻이다.
족보에서 지우고 크라우드 출신임을 부정하는 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가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니까.
귀족에게 사형 선고 다음가는 형벌이니까.
다만, 나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리 혈육이라도 타 가문에서도 패악질을 부리며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다면 참을 수 없었겠지.’
이 시대는 정보 공유를 오직 소문으로만 한다.
정보 길드와 신문사가 있긴 해도, 워낙 값 비싸다보니 평민들에겐 소문이 무성하면 기정 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거다.
확실한 처리를 위한 유도.
엡실론에게 나는 오랜 시간 앓았던 썩은 이니까.
아예 확실히 뽑아버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패악질 부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흑마법사 소행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지.”
엡실론은 포도주잔을 한참이나 기울이다 말했다.
“고생했다.”
포상은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이제 곧 사해(沙海)의 시험이다. 다들 돌아가서 정진하라. 카나단은 남고.”
엡실론은 그 말을 끝으로 왼손을 까딱했다.
축객령이었다.
끼익.
가주 회의실 문을 열고 모두가 나온다.
“······.”
“······.”
“······.”
밖으로 나간 형제자매들끼리는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크로코 가문에서 나름대로 전투도 함께 하고, 정화작업을 하면서 안면은 튼 것 같은데.
불편한 기색이 흐른다.
“어······. 음······. 뭐, 결국 고생했다고 하셨으니까. 칭찬이겠지?”
그 네하드람이 내 눈치를 본다.
아무래도 지난 번 흑마법사의 암습 때, 내가 공로를 넘겨줬기에 나름 친분이 생긴 모양.
‘이 상황, 희귀하군.’
물론 나는 가주 엡실론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서 아무렇지 않았지만.
아무리 내 친아버지라지만 네카르에 빙의한 동안, 지금까지 총 3번 만나봤다.
그런 사람이 내게 파문이니 뭐니 말해도 무슨 마음의 상처가 되겠는가?
“그렇다고 생각해야겠군요.”
다만 저 반응이 재밌어서 웃픈 척 희미한 미소만 짓고 숙소로 돌아갔다.
다들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멀리 떠나가는 날 안쓰럽게 바라만 봤다.
***
덜컥.
모두가 밖으로 나가자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을 지배한다.
가주 엡실론은 조용히 포도주만 홀짝인다.
카나단이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로 파문하실 생각이셨습니까?”
“······.”
엡실론은 잠시 침묵했다. 포도주에 떠있던 불순물이 가라앉았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10번도 넘게 파문했다.”
엡실론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문다.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포도주를 벌컥벌컥 마신다.
카나단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눈치챘다.
‘······아무래도, 아직 얀데르님을 못 잊으신 모양이시구나.’
네카르의 어머니는 셋째 부인 얀데르.
평민이었던 그녀는 어릴 때부터 엡실론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실부인이 되지 못했다.
대영주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영지 전체를 지배하는 실질적 군주.
정략결혼을 통해 세를 키우는 게 일상적이었기에.
정실도, 둘째도 아닌, 셋째 부인으로나마 겨우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카나단이 보기에, 엡실론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던 유일한 시절이다.
‘······네카르 도련님은 그런 셋째 부인님을 죽이고 태어나셨으니까.’
카나단은 눈꺼풀을 감고 힘겹게 과거를 떠올린다.
엡실론 입장에선 10년이 넘는 연애 끝에 드디어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었는데, 채 1년 만에 셋째 부인이 첫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때문에 네카르를 볼 때마다 죽은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잘해주지 못했다.
그것이 네카르 잘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토록 사람을 잘 따르던 녀석이었는데.
그 결과, 어느새 네카르가 비뚤어졌다. 더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그동안 엡실론이 망나니 네카르를 파문하지 못한 건, 자신의 과실이 크다는 자책과 셋째 부인의 유일한 자식마저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공존했기 때문이리라.
방안은 침묵이 계속 돈다.
엡실론은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 녀석이 갑자기 철이 들다니. 믿을 수 없군.”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현자 카나단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엡실론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정색했다.
“그래봐야 너무 늦었다. 이제 곧 사해의 시험이 시작되니까.”
사해의 시험.
크라우드 가문 차기 가주를 선발하는 자리.
패배한 직계 혈통은 가신으로 남거나, 떠돌이 마법사가 되는 차가운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네카르는 지난 20년간 가신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어떤 지식도 배우지 못한 만큼, 땡전 한 푼 없이 쫓겨나리라.
“혹시 모르잖습니까? 네카르 도련님께선 일전 가주님께서 주셨던 마법서 ‘아쿠아 스핀’도 다 익히신 듯 합니다. 가주님께 용서 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
현자 카나단은 네카르를 옹호해주었다.
지금껏 누구도 편들어주지 않는 아이였기에, 균형을 지키기 위해 챙겨준 아이였으니.
미운 정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인 것이다.
그러나 엡실론의 표정은 오히려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가주직은 단 한 번의 요행으로 도전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엡실론은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 창밖을 바라본다.
그 또한 사해의 시험의 우승자. 제 형제자매들을 짓밟고 가주 직에 군림했으니까.
최근 크라우드의 번영에는 엡실론의 어깨를 짓누르는 그림자가 함께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극소수가 희생하는 자리.
그것이 귀족이고, 가주였다.
엡실론은 평화로운 크라우드 가문을 내려다보며 씁쓸히 뒤를 돈다.
현자 카나단은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난다.
***
크로코 가문을 다녀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지하 수로의 고장이 흑마법사 짓임이 드러났음에도, 귀족 가문들은 드라마틱한 행동 변화가 없었다.
흑마법은 대륙에서 금지된 마법으로, 발각 즉시 사형인 중죄지만, 그럼에도 바퀴벌레처럼 계속 존재했으니까.
마법을 익힐 기회가 없는, 그러나 재능은 있는 평민들은 위험하다는 걸 알아도 흑마법을 익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흑마법사는 꾸준히 등장했기에, ‘끌끌, 그런 쓰레기 잔당이 아직 남아있었군.’ 생각할 뿐, 큰 위기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내가 지나치게 완벽하게 일처리를 했으니까. 더 방심하는 거겠지.’
차라리 크라우드가 흑마법사에게 패배했으면 더 경계했을 거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의 수작을 다 알아채고, 수리했으며, 심지어 몰래 습격해온 잔당들까지 소탕했으니.
위협적이긴 해도 충분히 대처 가능하다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실상은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지하 수로를 정비하긴커녕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을 사람들이.
“하자스 가문에 조사 나간 마법사들에겐 별다른 소식이 없었습니까?”
“예, 도련님. 아쉽게도 가문에 스스로 불을 질러 폐허가 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현자 카나단에게 물어봐도 딱히 소득이 없다.
배후로 지목된 하자스 가문 사람들은 당연히 증거 인멸하고 달아났으니까.
대륙에서 박해받는 자들인 만큼 도망이 빠르다. 이미 뒤쫓기는 늦었다.
‘일단 나중에 생각할 수밖에 없겠군.’
파아앙.
나는 마법 연무장에서 밤늦게까지 워터볼을 수련하며 생각했다.
흑마법사 자칼이 어떻게 나서려나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쪽도 동부의 변이 얼마 남지 않아 조심스러울 터.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너무 늦으면 동부의 변을 알아도 못 막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꼬끼오~.
이른 새벽, 수탉이 운다.
페널티 특성 ‘허약한 몸’을 극복하기 위해 매일 아침 연무장을 달린다.
“에이미. 도련님이 달리신다.”
“하암. 벌써 7시인가요? 아직 졸린데······.”
이젠 하인들이 내가 달리는 시간을 보고 오전 7시라는 걸 알 정도다.
그만큼 내가 규칙적으로 살았다는 뜻이겠지.
나는 소소하게 뿌듯함을 느끼며 마법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대기하던 한 시종이 날 발견하고 다가왔다.
“역시 오시는군요. 도련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가주님께서 사해의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참가하시는 직계 혈통분들께 특별한 가르침을 선사해주신다고 합니다.”
시종은 대단히 부럽다는 듯 말했다.
다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한 가르침?
혹시 가주 엡실론이 직접 가르쳐주는 건가?
이는 원작에도 없었던 이벤트다.
내 방으로 돌아가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비하며 엡실론이 부를 때를 대기한다.
심심풀이로 마법서적을 소리내서 읽으면서.
끼이익, 히히힝!
“?”
그렇게 한참 책을 읽는데 크라우드 가문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호기심이 생겨 창밖을 살펴보니, 대문으로 정갈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들어온다.
고급스러운 마차와 깃발이 있는 걸 보아 꽤 높은 신분의 사람이 온 모양.
엡실론이 직접 가르쳐주는 건 아니고, 특별한 강사를 데려온 모양이다.
‘······잠깐. 푸른색 첨탑 깃발? 설마?’
나는 어딘가 익숙한 문양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푸른색 첨탑 깃발.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건 대륙에서 가장 번영했다는 중부에서도 최고 마법 조직, ‘마탑’의 상징이니까.
마탑에서 온 마차에서 대머리에, 흰 수염을 길게 기른 할아버지가 나온다.
나는 저 늙은이가 누구인지 알기에 다소 놀랐다.
‘뇌격의 원로 ‘니콜라스’. 저 양반이 왜 여기 있지?’
뇌격의 원로 니콜라스.
마탑에서도 유명세 있는 원로 마법사로, 원작에서 히든 속성인 전기를 가르쳐주는 베틀 메이지다.
실제로 내 예측이 맞았는지 본 건물에서 크라우드 핵심 인사들이 마중을 나온다.
“오랜만이군. 니콜라스.”
“하하, 엡실론. 이게 몇 년 만인가! 현자 카나단도 있었군.”
놀랍게도 가주 엡실론과 마탑의 원로 니콜라스는 서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lv51 5써클 가주 엡실론.
-lv45 4써클 뇌격의 원로 니콜라스.
-lv41 4써클 현자 카나단.
실제로 그들은 농후한 나이답게 레벨도, 써클도 대단히 높았다.
“참으로 동부 기후는 적응이 안 된단 말야. 양산을 쓰고 있는데도 후덥지근하다니.”
“한동안 계속 있어야 하니 적응해야 할 텐데.”
“알고 있네. 예끼, 이 사람아. 거의 3년 만에 만나는 데 자꾸 일 얘기만 할 건가? 서운하게.”
니콜라스는 가주 엡실론 어깨를 툭툭 치며 호탕하게 말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작에서 그렇게 까탈스러운 늙은이였는데. 저런 면모가 있었어?’
원작에서 전격계 마법을 배우려고 니콜라스를 찾아가면 초면부터 ‘전격 마법을 쉬이 생각하지 마라!’ 호통치고 쫓아냈기 때문이다.
괜히 유저들에게 악명 높은 게 아니었다.
“그래그래, 날 초빙한 게 네 자식들 때문이었지? 사해의 시험이 한 달 남았으니까.”
“······기왕 동부에 온 김에 한번 봐보라고 했을 뿐일세.”
“하하, 그게 그 뜻 아닌가? 자네도 참.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구먼.”
그런데 이번 생에선 사람 좋은 인상으로 크게 웃었다.
설마?
나는 본능적으로 큰 일을 직감했다.
뇌격의 원로 니콜라스. 마탑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그에게 가르침을 전수 받는다면.
아니, 만약 그에게 전격계 마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물의 명가 크라우드에서 익힌 것과는 또 다른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특히 전기 속성은 살상력이 높고 물 마법과 연계도 훌륭해서 전투 마법의 꽃이라고 불리는 만큼, 기존 정해진 실력의 척도를 바꿀 새로운 마법을 익힐 수 있는 거다.
물론 물 속성 이외에 다른 속성 마법을 익힐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똑똑.
“도련님. 가주님께서 호출하십니다.”
“알았다.”
나는 시종의 부름에 따라 니콜라스 앞으로 나갔다.
네하린과 네하드람도 따라 나왔다.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현자 카나단이 우리를 소개한다.
“저 금발머리가 네카르라고?
“예, 그렇습니다.”
“끌끌, 그 속 썩인다는 망나니가 저 녀석이었나?”
“······.”
여기서도 나는 유명인사였다.
니콜라스는 다 말해놓고 됐다며 흠흠, 헛기침하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마탑에서 원로직을 맡고있는 니콜라스라고 한다. 사해의 시험까지 마지막 한 달이 남았다하여 들렀다."
"······!"
"남은 기간, 마법 수련을 도와주마. 물론 너희가 '듀얼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전격계 제자로 삼아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