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결급 특성으로 대마법사-4화 (4/140)

4. 망나니 (3)

“······그래서 나처럼 물의 마법에 능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면······.”

나는 마법 연무장에서 차남 네하드람의 개소리를 한참이나 들어주었다.

억눌린 게 많았는지 자기도 모르게 신나서 설명하는데 대놓고 무시하기 뭐하잖은가?

‘뭐, 나름 새 가족인 만큼 친분도 쌓을 겸 들어줘야겠군.’

역대 최고 랭커였던 내게 초급 마법 강의를 하고 있으니 조금 귀엽기도 하고.

그렇게 지겨운 무용담 들어주며 연무장에서 한창 노닥거릴 때,

똑똑똑.

“네하드람 도련님. 계십니까?”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했다.

차분하면서도 진중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네하드람조차 흠칫 놀란다.

“······현자 카나단님? 어서 들어오시지요.”

드르륵.

놀랍게도 네하드람은 상대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늙은 사내가 고고히 들어온다.

그는 나와 네하드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사해의 시험을 앞두고 형제분들께서 함께 훈련 중이셨군요. 늦은 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마침 숨 돌리던 차였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크로코 가문에 갑자기 큰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가주님께서 부르시니 속히 찾아뵈시지요.”

“······!”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늙은 사내는 엄숙한 표정으로 크라우드 가주의 뜻을 대신 전한다.

현자 카나단.

가주 엡실론이 가장 신임하는 가신 중 하나로서, 4써클에 도달한 뛰어난 마법사였다.

일주일 전, 내 변화를 알아차리고 관심 있게 쳐다본 자.

“아, 알겠습니다. 금방 가지요.”

카나단 앞에서는 천방지축이던 네하드람조차 쩔쩔맸다.

곧장 옷매무새를 정비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망나니라 가주가 찾지도 않는 건가?’

뭐, 나야 상관없는 일이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나는 눈 밖에 난 사람이니까.

어차피 언젠가 가문을 떠나 기연을 찾으러 돌아다녀야 하는 만큼 오히려 좋았다.

입맛은 다소 썼지만.

“네카르 도련님께서도 오시지요.”

그런데 카나단은 네하드람과 다르게, 날 향해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뭐, 가도 꾸어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테지만.

그래도 가족이라고 불러주니 기분이 좋았다.

“자, 가시지요. 도련님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점검하자, 카나단이 알아서 길 안내를 했다.

아직 크라우드 가문 건물 중심부는 익숙지 않은 내겐 다행인 일이었다.

***

회의실은 이미 만석이었다.

지난 식탁처럼 세로로 긴 탁자에 내 형제자매로 보이는 자들이 서열별로 앉아 있었고, 그 뒤에 늙은 가신들이 서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살벌한 분위기.

무슨 일인지 모두가 침묵한다.

형제자매들이 눈동자를 굴리며 서로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진다.

그나마 빽빽한 회의실에서 내 자리는 찾을 수 있었는데, 내 의자 하나만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의자는 7살짜리 꼬맹이보다도 못한 책상 꼬투리 자리다.

등 뒤엔 아무 가신도 없다.

‘······하기야 나는 아직 저 꼬맹이와 동급인 1써클이니까.’

새삼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걸 느낀다.

또각또각.

모두 착석하고 한참이 지났을 때 천천히 다가오는 구두 소리.

검은 예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모두를 내려다보며 입장한다.

이 회의의 주최자의 등장에 다들 숨소리도 죽이고 눈을 피한다.

“모두 모였느냐.”

의자에 앉아 무겁게 입을 여는 중년 사내.

가주 엡실론.

크라우드 가문의 핵심이자 수장, 그리고 일전에 만난 내 아버지다.

-lv51 5써클 가주 엡실론 폰 크라우드.

네하드람보다 무려 3배 이상 높은 레벨.

가주 엡실론은 동부 스토리에서 워낙 중요하게 나왔기에 알고 있다.

무려 5써클 마법사.

동부 최강의 마법사이자, 동부 패권을 지배하는 크라우드의 가주.

그런 엡실론이 입을 여니 건조한 공기가 한기가 되어 가라앉는다.

“몇 개월 전 우리 가문에서 설계했던 크로코 가문 수로가 물길이 막혔다. 오늘 낮부터 작동하지 않는다고 하지.”

“······.”

“그 때문에 크로코 가문에서 현재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물의 명가 크라우드 맞느냐고.”

가주 엡실론은 책상 위에 놓인 포도주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신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히 목을 축이려고 하는 듯하지만.

부글부글.

자세히 보면 잔 속 포도주 표면이 끓어오르고 있다.

엡실론의 분노가 무의식적으로 포도주 속 마나와 공명하는 것이다.

모두 숨죽이고 엡실론의 눈치를 살핀다.

주변 공기가 폭발할 듯 긴장된다.

“당장 책임자를 찾아내 문책하고 싶지만, 사안이 급하구나.”

“······.”

“현재 가문 장인들이 하이넬 변경백의 신축 성벽을 정비하러 자리를 비웠다. 크로코 가문으로 급파할 마법사가 필요하다.”

그러면서 엡실론은 탁자에 가까이 앉은 제 자식부터 한 명씩 노려봤다.

장녀 네하린, 둘째 네하드람, 막내 네파란. 그리고 나 네카르.

특히 날 심히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선언한다.

“따라서 차선으로 너희 중 몇 명을 보내고자 한다.”

가주 엡실론이 양손을 의자 팔 거치대에 올려두며 등 뒤로 신호를 보낸다.

-lv41 4서클 현자 카나단.

그러자 엡실론 뒤에 있던 현자 카나단이 공손히 나서서 말했다.

“이번 크로코 수로 정비는 공식적으로는 제가 책임자로서 다녀올 것입니다.”

“······.”

“허나 이 늙은이가 몸이 성치 않아 홀로 해결하기엔 어려운바, 가문 자제분들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저와 함께 크로코 가문에 다녀오실 자제분께서는 편히 손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나단은 나와 형제자매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군. 이건 테스트다. 이번 기회에 누가 후계자로 적합할지 실력을 확인하는 거야.’

나는 무슨 상황인지 눈치챘다.

차기 가주를 뽑는 사해(沙海)의 시험.

드넓은 모래 바다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찾아 돌아오는 시험이다.

말 그대로 불가능에 가까운 시험.

그 때문에 아무도 사해의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결국 가주 엡실론이 정황상 승자를 판명한다.

즉, 가주 엡실론의 입김이 대단히 중요해진다는 뜻.

그들의 눈에 띄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런 상황에서 가문 외부에 큰일이 터진 것이다.

가문 전체로 보면 악재지만, 가주로선 후계자들의 실력을 판가름할 좋은 기회다.

“제가 가서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실제로 둘째 네하드람도 상황을 눈치챘는지 손을 번쩍 든다.

그는 특별히 재능 있는 게 아닌 만큼, 장녀에게 정통성도, 실력도 밀렸으니까.

가주 엡실론과 현자 카나단의 눈에 들기 위해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 또한 현자님을 도와 가문의 명예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차분하게 입술을 떼는 한 여인.

부드럽게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주위 이목을 사로잡는 예의 바른 숙녀가 말했다.

황금빛으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을 가진 미인.

장녀 네하린.

물의 명가 크라우드의 후계자 중에서도 첫째이자, 마법, 행정, 예법 등 다방면에서 손꼽히는 천재다. 소위 말하는 팔방미인.

마법도 3써클로, 현자 카나단과 1단계밖에 차이 나지 않으니까.

다만 나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인 첫째 부인이 일찍 돌아가셨기에, 황금 상회의 지원을 받는 네하드람보다 세력은 약한 모양.

‘싸워라. 싸워. 다들 열심히 싸워라. 나랑 관련 없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경쟁을 턱 괸 채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나.

내가 뭣 하러 힘겹게 동부 사막을 가로질러 크로코 가문까지 가야 하는가?

나는 가주직도, 명예도, 수로 보수도 전혀 관심없다.

최대한 빨리 가문을 떠서 각 대륙에 숨겨진 금은보화와 희귀 마법서를 찾는 게 최종 목표다.

‘그나저나 크로코 가문? 어디서 들어는 봤는데. 뭐 하는 가문이었지?’

다만 계속 앉아 있기만 해도 지루하니, 긴가민가한 기억을 더듬어 매일 적는 일기장을 떠올린다.

‘······맞다. 그래서 영지보다는 지하 미궁이 유명했었지.’

드디어 기억이 난다.

슬라임 지하 미궁.

하수구로 건설된 지하 통로에 무슨 일인지 슬라임이 번식해서 영지 전체가 아예 던전이 되어버린 곳이다.

‘크로코 영지는 <별들의 전쟁2>에서도 꽤 유명한 금지였으니까. 지금 시점에서 해결될 일은 아니군.’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내 오랜 플레이 경험을 데이터로 하여금.

지금은 실제로 내가 플레이했던 <별들의 전쟁2>의 10년 전 시점.

10년 후까지도 슬라임이 창궐했다는 뜻이다.

즉, 내 예상대로라면 이번에 현자 카나단이 이끄는 수리공들은 해결할 수 없다.

내 형제자매들이 나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걸 말해줘야 할까? 하지만 말해봐야 믿질 않을 텐데?’

그때, 번뜩,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본래 나는 <별들의 전쟁2>의 거의 모든 업적을 클리어했다.

덕분에 지하 던전을 클리어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흙의 정령석. 크로코 슬라임 미궁을 클리어하면 그걸 얻을 수 있었지?’

흙의 정령석.

섭취 시 즉시 정령 친화력이 생겨서, 흙의 정령과 계약할 수 있게 해주는 보물이다.

정령사는 하급만 돼도 궁정 정령사가 될 수 있다는 점만 봐도 얼마나 귀한 보물인지 알 수 있다.

내가 가문을 떠나 무조건 얻어야 할 기연 중 하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손을 번쩍 든다.

어차피 얻어야 하는 보물이라면 형제들을 도울 겸 미리 구해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애초에 나는 슬라임 던전을 어떻게 클리어해야 하는지 아니까.

“······?”

“······!”

그러나 장녀 네하린과 차남 네하드람, 다른 형제자매들이 눈이 커진다. 가주 엡실론 또한 눈썹이 꿈틀한다.

놀람은 곧 분노로 바뀐다. 특히 차남 네하드람이 얼굴이 새빨갛게 타오른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망나니 주제에 왜 나대냐고 소리치려는 순간,

“그렇게 하시지요.”

현자 카나단이 웃으며 허락했다.

이번 행렬의 책임자는 현자 카나단.

그의 결정이 최우선으로 존중되어야 하니까.

가신들과 형제자매들도 입을 다문다.

가주 엡실론 또한 불편한지 눈매가 매섭게 세워졌으나, 잠시 침묵하고 말했다.

“가문 안과 밖은 또 다르다. 만약 크로코 가문의 명예에 누를 범한다면 가문 내에서 처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다룰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

공손히 대답하는 내 모습에 또 한 번 놀라는 사람들.

아니, 진짜 원래 몸 주인은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거지?

가주 엡실론은 내 몸에 구멍이 생길 듯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이내 선언했다.

“그렇다면 결정됐다. 현자 카나단은 이번 행렬에 책임지고 크로코 가문으로 출발하라. 그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일은 내게 허락받지 않아도 좋다.”

“알겠습니다!”

***

나머지 결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다만, 카나단은 가문 회의가 끝나고 각자 돌아가는 우리를 달밤에 불러 세웠다.

“가주 자제분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현자 카나단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크로코 가문은 나름 유서 깊은 흙의 마법 명가입니다. 어지간한 일이었다면 스스로 해결했을 터지요.”

진중하게 스며드는 목소리.

이내 부드러운 눈매를 감추고 심각한 눈빛으로 말을 잇는다.

“······해서 어쩌면 사태가 예상보다 더 심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에 하나, 지하 수로에 ‘포이즌 슬라임’이라도 창궐했을지 모르지요.”

“······!”

“······!”

카나단의 말에 가주 자제들이 흠칫 놀랐다.

포이즌 슬라임.

점액질로 몸이 구성된 끈끈한 액체 몬스터로, 마법으로 한 번에 없애지 않으면 끝없이 재생하는 마수.

그 덩치가 집채만 해, 사람을 덮치고 잡아먹는 경우도 잦았으니 놀랄 만했다.

‘호오, 이걸 눈치채다니.’

나는 현자 카나단의 통찰력에 놀랐지만.

그런데도 실패하는 귀족들이 안쓰러울 뿐이다.

“따라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밤, 각자 크로코 가문으로 가져갈 물품들을 챙기십시오. 아 물론 꼭 슬라임을 상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카나단은 그렇게 말하고 해산시켰다.

이것으로 명료해졌다.

시험.

지금 가주 엡실론과 현자 카나단은 가문의 위기를 기회 삼아 제 혈통들의 통찰력을 시험해보고 있다고 말이다.

‘뭐, 나야 이미 정답을 알고 있지만.’

눈매를 결연히 다잡는 형제자매들과 달리 나는 심드렁했다.

크로코 지하 미궁 슬라임 공략법.

10년 후에나 나올 비법을 아주 세밀하게 꿰뚫고 있으니까.

걱정보다는 의욕 활활 불태우는 형제자매들이 어떻게 나설지 궁금할 뿐이었다.

***

새벽 동이 차오른다.

크로코 가문으로 떠날 사람들은 부리나케 말을 꺼내오고, 짐을 마차에 차곡차곡 쌓는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자 부산스러운 행사가 거의 끝났다.

출발하기 전에 현자 카나단은 우리를 불러놓고 말했다.

“자제분들. 어젯밤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했었지요? 늙은이의 호기심인데 무엇을 준비하셨는지 한번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카나단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험의 시작인지 눈초리는 매서웠다.

“물론입니다! 여봐라. 마차 문을 열어라!”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희희낙락하며 자신 있게 나서는 네하드람.

그의 명령에 구름처럼 몰려온 마차들이 일제히 문을 연다.

“크로코 가문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나, 결국 핵심은 무슨 이유인지 오염된 수로를 정화하는 것! 어떤 상황이든 수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다양한 물품을 준비했습니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네하드람.

과연 황금상회의 지원을 받는 만큼 물자가 동부에서 가장 풍부한 사람 중 하나였다.

덜컹, 덜컹덜컹.

특히 10개의 마차가 순서대로 열리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호오, 만사불여 튼튼이란 말씀이군요. 좋습니다.”

말과는 달리 눈매가 전혀 웃지 않는 현자 카나단.

그 이유는 다음 차례인 장녀 네하린이 대신 말해줬다.

“······중신들께 의견을 구한 결과, 너무 많은 물품을 가져가는 건 비효율적이란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함께 가는 말과 짐꾼들이 힘들어할 뿐더러, 가문 내에 쓸 물건이 텅 비기 때문입니다.”

네하드람은 흠흠, 헛기침했다.

네하린은 카나단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챙긴 것은 프레야 교단의 하급 성수와 우리 가문의 특산품인 향유입니다. 부족한 물품은 크로코 가문에서 빌려 쓰고 값을 치르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이라 생각했습니다.”

네하린은 향 좋은 나무로 만든 나무 함을 가져왔다.

함을 열어보니 푸른빛이 환하게 반짝이는 성수와 향유 10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오, 과연 총명하시다는 네하린 아가씨군요. 실로 혜안입니다.”

그제야 진정으로 웃는 카나단.

아무래도 저것이 그가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해답인 모양이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네카르 도련님께선 어떤 물건을 챙기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하린까지 발표를 마치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에게 몰린다.

나는 피식 웃으며 주머니 속에서 손을 꺼냈다.

“빈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내 손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허허······. 아직 공개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시군요. 알겠습니다.”

현자 카나단은 최대한 호의적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번 행렬에서 준비한 물품은 없습니다.”

그 말에 웅성거리는 사람들.

장녀 네하린도, 현자 카나단도 눈빛이 짜게 식는다.

하기야 이들에게 나는 아직 망나니일 테니까.

하지만 정말 그럴 뿐이었다면 굳이 나서지도 않았다.

"이번 일이 정녕 물건 몇 가지 챙긴다고 해결될 일이었다면, 크로코 가문에서 물건을 보내라고 하지 왜 수리할 마법사를 보내라고 했겠습니까?"

나는 담담하고도 논리적으로 말한다.

애초에 슬라임 지하 미궁은 물건으로 클리어할 수 있는 곳 아니다. 다들 원인조차 모르고 있으니까.

이에 네하드람이 괜히 찔려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어쩌긴요.”

나는 차가운 미소를 짓는다.

크로코 지하 수로는 흑마법사들이 몰래 잠입해서 물을 더럽히는 돌을 박아둔 곳. 그로인해 결국 슬라임 미궁으로까지 바뀌는 곳이다.

따라서 무언가를 가져가서 해결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물을 오염시키는 것들을 빼내야지.”

그리고 그 방법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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