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저……. 저는 무슨 일로…….”
그녀는 눈앞에 천사의 헌신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무서웠다.
긱스에게 들은 바로 카릴은 흑마법사였다. 자신이 성녀인 걸 안 이상 그녀는 제거 대상 1위였다. 조금 전처럼 치료 성력이 아닌 공격 성력을 사용하면 카릴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은인이라는 말을 그녀에게 건넸지만 머릿속엔 온통 고문 방법만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카릴은 그녀를 달래려 심혈을 기울였다.
“너무 겁먹지 말라니까. 난 오히려 생명의 은인인 그대에게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 혹시 원하는 소원이 있는가?”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후, 등이 경직된 걸 보니……. 나에 대한 소문을 긱스 공작에게 들은 모양이군.”
찻잔을 들려던 에르마야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찻물에 비친 카릴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럼 이건 알고 있는가? 난 원래 그대를 왕궁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애타게 찾던 그대를 긱스 공작에게 빼앗기고 말았지.”
“절 찾았다고요? 제가 왕께서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알면, 왕께 위험한 것 아닌가요?”
“분명 그렇지.”
카릴이 등받이에 등을 편안히 기대곤 부드러움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왜일까. 그대는 죽이고 싶지 않아.”
달콤한 목소리에 심장마저 아릿해졌다.
유려한 얼굴로 안타까워 보이는 눈빛을 보내는데, 심장이 고장 나는 건 이상한 게 아닐 것이다.
“그러니 편하게 말해. 알다시피 내 목숨값은 비싸니까.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금을 원하나? 지금이라도 줄 수 있는데.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카릴이 무릎 위에 다소곳이 올려져 있는 에르마야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그녀의 손등에 부드러운 감촉이 스몄다.
“제발 내게 기회를 주면 안 되겠나.”
가슴이 떨릴 만큼 애절한 목소리. 울 것처럼 흔들리는 사파이어 눈동자.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한 따뜻한 공기가 그녀의 감정을 감염시켰다.
어째서 내게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걸까.
카릴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한없이 낮추는 태도에 에르마야의 방벽은 허물어졌다.
결국 에르마야는 간이고 쓸개고 빼 줄 것 같은 얼굴을 한 카릴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녀가 손을 조심스레 빼어내고 우물쭈물했다.
“사실……. 제게 단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카릴의 등이 기울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차는 안중에도 없었다.
“……현재 공작님의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가 있습니다.”
그녀는 머릿속에 입을 맞추던 두 남녀를 떠올리곤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 군.”
카릴은 디트리히와 시안나가 심상치 않은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애매하게 긍정했다. 그보다 그녀의 사랑이 예전처럼 공작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쓰라렸다. 신이 그녀를 공작에게로 인도한 것 또한.
그는 자신의 소망을 담아 말했다.
“만약 왕국의 정식 재판을 받게 할 거라면, 내가 부인을 도와주지.”
“아뇨, 저는 그게 아니라…….”
에르마야는 손수건을 꺼내며 마른 눈두덩이를 벅벅 닦았다.
“공작님이 제게 열렬히 매달리면 좋겠어요. 제게 힘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에르마야는 성력을 사용하는 주제에 카릴의 흑마법을 빌려 달라고 간청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쉽게 조종할 수 있는 흑마법은 매력적이었다. 사람의 정신을 조종할 수도 있었고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도 손쉬웠다.
그녀는 강대한 힘으로 디트리히를 무릎 꿇리고 싶었다.
신이 어째서 그녀를 아슈토르 공작가에 보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신께서 징조나 새로운 신탁이 나타나기 전까진 계속 아슈토르 공작가에 머물길 바랐다. 그러니 계속 괴로워질 바에 복수하는 편이 나았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이 또한 신의 안배일 것이다.
에르마야는 슬금슬금 맞은편에 앉은 카릴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치졸한 부탁에 마음이 식은 건 아닌지 두려워졌다.
카릴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녀가 앉은 소파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에르마야가 놀라는 사이 손등에 부드러운 입맞춤이 떨어졌다.
“그대의 분부라면 뭐든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자 그가 눈을 사르르 접었다.
그녀에 대한 비난도, 경멸도 없었다. 그저 제게 내려진 명령을 수행할 수 있음에 더없이 황홀해하는 목소리였다.
***
찰랑, 찰랑. 머릿속에서 물소리가 찰박 울렸다.
새하얀 의식의 수면 속, 눈을 뜬 시안나의 주변은 칠흑처럼 깜깜했다.
주변을 살피려는데 창문에서 번쩍 번개가 내리쳤다.
그녀는 어두운 복도 중앙 문 앞에 멀거니 서 있는 꼬마 시안나를 발견했다. 살짝 벌어진 문틈 사이로 삐져나온 빛줄기가 꼬마 시안나의 얼굴 위로 선을 그었다.
“흑, 흑…….”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의 훌쩍임이 을씨년스러운 복도로 새어 나왔다.
나무 회초리를 든 긱스 옆에 선 디트리히는 종아리를 걷은 채였다. 하얗고 가는 맨다리에 그어진 새빨간 줄무늬가 선명했다.
시안나는 자연스레 건국제에 참석하기 전 꿈을 떠올렸다.
‘예전에 디트리히가 울던 그 꿈의 연장선인 건가?’
시안나는 문틈 사이로 눈을 붙였다.
울어서 새빨개진 디트리히의 얼굴에 가슴이 저렸다.
급기야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함박눈처럼 쏟아졌다. 그럼에도 긱스의 얼굴은 꿈쩍 않았다.
“얼른 실토해. 어째서 시안나를 데려오려고 한 거지? 광산 개발 건은 왜 그 작자에게 넘긴 거고?”
호통이 천둥처럼 우렁찼다. 디트리히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는 걸 주저했다.
긱스가 미간을 누르며 디트리히를 어르고 달랬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네가 가장 좋아하는 시안나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마. 어떠냐?”
꽤 효과적인 카드인 듯했다. 디트리히의 눈이 말똥해지더니 눈물 젖은 눈가를 소매로 벅벅 닦았다.
자물쇠 같던 입이 열렸다.
“아버지, 께서 그러셨잖아요. 시안나 누님은 부모님을 두 분을 잃었다고.”
“그랬지. 내가 이야기했을 때 넌 그 말을 듣고 따라가고 싶다고 졸랐지.”
긱스가 회초리를 책상에 올려 두고 그날을 회상했다.
시안나를 보러 갔던 날. 사실 긱스는 시안나를 입양할 생각 따위 없었다.
드뷘모르가 백작과는 작은 사업도 같이 추진하는 친우이긴 했다. 그래도 남겨진 핏줄을 거두는 것은 피가 이어진 가족의 몫이라는 게 그의 관념이었다.
그래서 그는 소녀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며 위로금을 쥐여 주려 드뷘모르가 저택에 들렀을 뿐이다.
드뷘모르가 정문에서 친척들에게 시달리는 아이를 보고서도 불쌍할 뿐 나서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디트리히가 말을 꺼내기 전까진 말이다.
‘아버지, 저…… 누님과 가족이 되고 싶어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 데 어떤 부모가 당해 낼 수 있을까.
긱스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들고 말았다.
“왜 시안나가 가족이 되면 좋겠다고 말한 거지?”
디트리히가 훌쩍거리며 입을 열었다.
“끅, 누님은 혼자잖아요.”
“뭐?”
긱스의 눈썹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꿈틀거렸다.
“저는 아버지가 계시지만 누님은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셔서…… 끅, 혼자잖아요…….”
굳어 있던 긱스의 눈이 놀란 나머지 크게 뜨였다.
“너…….”
“어머니가 곁에 안 계셔서…… 심장이 찢어질 듯이 아파요. 그런데 아무도 없는 누님은 얼마나 힘드실까요.”
쪼그만 정수리를 내려보던 긱스가 숙연해진 것도 잠시.
그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네 마음은 기특하지만…… 너 때문에 광산 주변에 치안이 아주 불안해졌다. 네 오판으로 그곳 주민들의 삶이 훼손되었다는 소리다. 지도자로서는 실격이지.”
“상관없어요.”
“뭐?”
긱스가 기가 차다는 듯 울음을 그친 디트리히를 내려다보았다. 꼬마 디트리히도 지지 않겠다는 듯 울음기 가득한 눈으로 똑 부러지게 말했다.
“아버지께선 항상 가족을 소중히 여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야 다신 만날 수 없는 사람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아내를 보내고 나서 든 그의 깨달음이었다. 그 당부를 제 아들이 제 말을 반박하는 데에 사용하다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제 가족 하나 지키지 못하는 영주가 진정한 영주인가요? 저는 싫어요. 누님의 눈물을 쏙 빼느니 그깟 광산 경영권, 나쁜 사람한테 줄래요.”
“너…….”
“소중한 사람을 울리는 게 영주라면 전 후계자 안 할래요. 누님에게 주세요.”
“디트리히.”
엄한 목소리에도 디트리히는 고집을 피웠다.
“저는 아버지가 있으니까 누님이 절 울려도 견딜 수 있어요. 하지만 누님은 아니에요. 아주 많이 아플 거예요.”
잠자코 듣고 있던 긱스가 말없이 디트리히를 꼭 껴안았다.
긱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디트리히의 마음에 소녀가 크게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낭패였다. 디트리히가 시안나를 가엽게 여기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예상보다 너무 깊게 동조하고 있었다. 저택에 함께 살며 감정적 교류를 하는 바람에 더욱 심화하였으리라.
아슈토르 공작가가 왕국을 멸망시킨다는 신탁이 내려왔다 들었다. 그가 염두에 둔 디트리히의 짝은 왕국과 대항할 수 있는 커다란 가문의 여식이지 아무런 뒷배도 없는 계집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으로 시안나를 이 집에 들인 것을 후회했다.
서로 얼싸안는 부자의 모습을 바깥에서 지켜보던 꼬마 시안나는 한 발짝 물러났다.
꼬마 시안나의 심장 소리가 바깥의 그녀에게까지 들렸다.
시안나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소설과 다른 이 꿈의 정체는 뭐지?”
디트리히가 말을 잘하는 것도, 시안나가 아슈토르 가문에 입양되었다는 것도 전부 현실과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