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67화 (67/70)

[67]

시안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카릴 정도는 우습다는 거야? 전쟁이 두렵지 않아?”

“두렵다고요? 저는 저희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게 기쁠 뿐입니다.”

귀가 저릿해질 정도로 황홀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간질였다. 그럼에도 시안나의 정신은 멍했다.

전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카릴을 망설임 없이 죽이겠다는 태도가 충격이었다.

‘디트리히. 정말 카릴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알고 있는 원작의 디트리히가 맞는 거야?’

이상한 건 또 있었다. 카릴은 분명 디트리히를 죽이려는 데다 흑마법을 사용하는 적이었다. 그런데 그의 목숨이 저무는 걸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디트리히를 조심하라고 일러줬기 때문인가. 실제로 호숫가 숲에서 날 다치게 만들었으니 그의 충고는 틀린 게 아니었지.’

디트리히도 흑마법사였다.

애초에 전쟁은 누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아수라장에서 꿋꿋이 흑마법사인 디트리히의 편에 설 수 있을까?

시안나가 답을 구하듯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가면 아래로 유려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니 누님…….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아슈토르 저택으로 돌아가십시오. 가장 위험한 건 누님이십니다.”

“귀찮게 하지 않을게. 아니면 디트리히도 나와 돌아가.”

“전 대공을, 아니 그게 아니라…….”

디트리히가 하얀 고양이 가면 아래에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그녀는 정말 눈치가 없었다.

“지금 누님의 모습을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습니다.”

어……. 그러니까…… 질투?

시안나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이 타이밍에 독점욕을 내뿜다니, 생각지 못한 고백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디트리히가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이는 것도 잠시.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하더니 시안나는 제 등 뒤로 숨겼다.

“아쉽군요. 정원에서 누님과 춤이라도 추고 싶었는데 불청객이 찾아올 줄이야.”

파사삭.

어둠이 내려앉은 수풀 속에서 숨어 있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까만 연미복 복장이었지만 괴도 가면과 허리에 찬 검으로 보건대 평범한 손님이 아니었다.

“누구…….”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 뒤로 수풀이 부스럭거렸다. 괴도 가면의 사내였다.

두 사람을 궁지에 몰 듯 사방에서 여섯 남자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하나같이 거구에다가 위협적인 분위기였다.

이 사람들, 디트리히를 죽이려 카릴이 보낸 암살자구나.

원작을 읽은 그녀는 상황을 대번에 눈치챘다.

어느 정도 포위망을 좁힌 남자들은 서로 곁눈질한 후 칼을 빼내 들었다.

스릉.

어둠 속에서 검 끝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살기를 느낀 디트리히가 시안나를 뒤로 숨겼지만 전방에서 접근하는 탓에 퇴각은 무리였다.

“누님, 제게 떨어지지 마십시오.”

디트리히도 허리춤의 검을 꺼내 들었다. 달빛을 받은 검날이 새하얗게 빛났다.

“누구냐?”

디트리히가 물음을 던지자 남자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듯 곁눈질했다. 이윽고 디트리히의 정면에 있던 남자가 기다란 장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흐앗!”

찰캉!

디트리히가 어렵지 않게 막아 냈지만 반대편에서 검이 훅 들어왔다. 상대는 다수였다.

쾅! 쾅! 조용한 정원에 쇠가 맞부딪치는 굉음이 연달아 터졌다. 귀청이 윙윙 울릴 정도였다.

몸을 지킬 호신용 검술이라도 배워 둘걸.

시안나의 마음속에 후회가 밀려들었다.

디트리히는 시안나까지 신경 쓰느라 공격을 겨우 막아 내고 있었다. 디트리히의 눈썹 주변이 흐트러졌다.

시안나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하지. 통나무집에 있을 때 디트리히는 피 냄새 따위 나지 않았어. 흑마법이 고갈되었는지도 몰라.’

디트리히가 비처럼 쏟아지는 검을 피했다. 비켜나간 것도 잠시, 다섯 개의 검이 머리와 심장을 노리고 들어왔다.

그는 피하기 급급했다. 혼자라면 단칼에 벨 수도 있었지만 시안나를 신경 써야 했다.

“큭!”

검은색 머리카락 끝이 사르륵 잘려 나갔다.

“하……!”

실소를 터뜨린 디트리히의 검이 민첩해졌다.

얼른 시안나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자. 그 후 모조리 죽여 버리자.

그런 생각에 등을 돌린 디트리히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얼어붙었다. 또 다른 괴한이 시안나의 양팔을 등 뒤로 포박한 채 가는 목에 단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제길, 한 명이 더 있었나.

디트리히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남자가 단검을 여린 목에 아슬아슬하게 붙이고 비죽거렸다.

“순순히 목숨을 내놓는다면 이 여자만은 무사히 보내 주지.”

“……감히 누구에게 칼을 들이대는 거지?”

당장 남자를 죽일 듯 그의 어깨가 급격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럼에도 주도권을 쥔 건 시안나를 인질로 잡은 괴한이었다.

“어찌할 거냐?”

어느새 디트리히의 목에도 칼이 들어왔다.

시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홍채와 하얀 공막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디트리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연회장으로 가! 사람을 불러 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녀를 잃느니 그가 목숨을 버리는 편이 나았다.

디트리히의 눈가 주변 근육이 자잘하게 일그러지더니 눈꺼풀이 감겼다.

그가 쥔 검이 밤공기를 머금어 차가워진 풀잎 위로 떨어졌다.

찰캉. 어쩐지 처량하게 느껴지는 소리였다.

“디트리히! 나는 괜찮다고 했잖아!”

“제발 가능한 부탁을 하십시오. 제가 누님을 버리고 갈 수 있을 리가요.”

새파란 밤하늘 아래 디트리히가 슬픈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시안나의 목숨이 아슬아슬해졌을 때부터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녀만이 그가 온전히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럼 깔끔하게 보내 주지.”

디트리히의 목에 검을 들이댄 남자가 자비라도 되는 양 지껄였다.

고용인이 암살 표적에 대해 조심하라 거듭 당부했기에 남자는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까고 보니 마법을 쓸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하찮은 상대였다.

“안 돼! 하지 마!”

시안나가 양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반항했지만, 남자의 한 손에 간단히 제압당했다.

남자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시안나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윽, 끅, 너……. 너!”

정수리에서 남자의 숨넘어가는 신음이 내려왔다.

무슨 소리지?

시안나가 고개를 올렸다. 촉수 같은 기다란 검은색 연기가 남자의 목을 콱 조르고 있었다.

고통에 크게 뜨인 흰자위에 붉은 실핏줄이 터졌다. 남자가 손톱을 세워 연기를 박박 긁어도 촉수는 아랑곳 않고 목을 사정없이 비틀었다.

우득. 목뼈가 부러졌다.

“악!”

단말마가 밤하늘을 가르며 남자의 팔이 아래로 툭 내려갔다. 시안나가 헐거워진 팔을 풀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하, 하아…….”

“하……. 위험에 빠뜨려서 죄송합니다.”

곁에 다가온 디트리히가 호흡 곤란에 빠진 시안나의 등을 내리 쓸었다. 시안나는 어둠 아래에 괴로워하는 남자들을 주욱 살폈다.

“디트리히…… 이건…….”

어둠과 잘 분간되지 않았지만 모든 남자의 목에 검은 촉수가 칭칭 감겨 있었다.

사방에서 숨쉬기 힘들어하는 호흡음이 넘쳐흘렀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남자가 핏발이 선 눈으로 디트리히를 노려보았다.

“네, 네놈……. 그림자를, 실체화, 할 수 있는, 거냐?”

제기랄! 잠자는 사자를 건드리고 말다니.

그림자를 다루는 마법은 자연법칙을 아예 재조정하여 제 뜻대로 다룰 수 있는 고급 중에서도 최고급 마법이었다.

또 그가 단순히 그림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대지의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긴 시각. 그는 대지에 드리운 어둠을 전부 조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땅 위의 모든 것에 죽음을 선사하리라.

방심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준 게 이런 이야기였을 줄이야.

남자는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 깊은 후회를 삼켰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감히 누님을 건드린 죄, 죽음으로 갚아 주지.”

디트리히가 으르렁거리며 고통에 절규하는 암살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제 검을 주우려는데, 시안나가 그의 팔을 와락 껴안았다.

“디트리히, 죽이면 안 돼!”

“말리지 마십시오. 저자들은 누님을 헤치려고 한 자들입니다.”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에도 시안나는 계속해서 막았다.

“알아, 그래도 지금 여기서 사람이 죽으면 디트리히가 제일 먼저 의심받을 거야.”

어쩌면 암살자들이 죽는 것 또한 염두에 뒀을지도 모른다.

암살자들의 차림새는 누가 보아도 무도회에 참석한 손님이었고, 이런 손님의 시체가 일곱 구 발견된다면 큰 소란이 일겠지 않은가.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지만 디트리히가 무서워…….’

살육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디트리히라니. 나중에 카릴에게 에르마야를 빼앗기고 흑화하긴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너무 일렀다.

“그림자를 본 이상 죽여야…… 휴, 알겠습니다. 죽이는 건 포기할 테니 그만 잡아당기십시오.”

디트리히는 시안나를 떨어뜨려 놓고 구겨진 정장을 똑바로 폈다. 그가 일어서자 촉수 같던 그림자가 서서히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정원에는 방금 전 칼싸움이 일어났다고는 믿기지 않게 평온해졌다.

쏴아아. 찌르르. 바람이 불고 멀리서 풀벌레 울음이 울렸다.

그제야 두려움에 숨죽이고 있던 정원이 고개를 든 것 같았다.

디트리히가 졸도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나에 대해 증언하면 머리가 폭탄처럼 펑, 폭발하는 금제 마법을 걸 거다.”

디트리히는 반쯤 무릎을 꿇고 장갑을 낀 손으로 남자의 이마를 꾹 눌렀다. 켈트 모양의 복잡한 무늬가 빛을 내며 생겼다 사라졌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살벌했다. 그는 대체 누구를 건드린 건지 똑똑히 경고하고 있었다.

시안나와 디트리히는 기절한 암살자들을 남겨 두고 정원을 빠져나왔다.

홀로 향하는 길, 시안나는 의문이 들었다.

‘디트리히의 흑마법은 무한인 건가? 몰래 시체라도 모으는 게 아니면 어떻게 힘을 사용하는 거지?’

***

“오, 마침 잘 왔어. 아슈토르 공작을 찾고 있었는데.”

연회는 아직 한창이었다.

두 사람이 연회 홀로 들어서자마자 근처에서 고위 귀족과 와인을 즐기던 카릴이 뻔뻔하게 맞이해 주었다. 두 사람에게 암살자를 보낸 장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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