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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소문이라니?”
“감금당하셨다고 끅, 그래서 걱정했다고요. 막 소문으로는 디트리히 님께서 시안나 님을 고문하신다고…… 흑!”
“미안해. 많이 걱정했지?”
미셰리가 한참 울분을 토해 내는 바람에 시안나는 연신 등을 토닥거려야 했다.
미셰리는 그간 저택을 떠돈 소문을 보따리처럼 풀어냈다.
공작 자리에 방해되는 시안나를 없애기 위해 감금했다더라. 선대 공작이 시안나에게만 말한 비밀 금고가 있다더라 등……. 전부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 야릇한 소문이 돌지 않아 다행이었다.
“흑, 인제 그만 울고, 시안나 님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드릴게요.”
시안나에게 패티 코트를 입혀 주고 캐미솔을 걸쳐 줄 때까지도 미셰리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치장을 마친 후, 시안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감탄을 흘렸다.
“와아.”
어깨가 완전히 드러나는 오프숄더 드레스는 청순함과 요염함을 동시에 뽐냈다. 분홍빛 드레스에 두른, 샹들리에처럼 올려진 하얀 프릴과 치렁치렁한 꽃이 화사한 분위기를 풍겼다.
울면서도 이렇게 예쁘게 꾸며 주다니. 역시 미셰리의 솜씨는 알아줘야 해.
시안나는 서둘러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정문 마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카릴은 침실에서 와인을 음미하며 성문에 쉼 없이 들어오는 마차 행렬을 구경했다.
파티는 오후 늦게 시작하건만 왕국 최대 규모의 행사인 만큼 귀족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개미만 한 사람들이 움직이는 장관을 보며 그는 숙적에 대한 조의를 표하고 와인을 삼켰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떫은맛이 유난히 감미로웠다.
“준비는 전부 된 거겠지?”
그는 뒤에 있는 참모에게 물었다.
디트리히를 암살하는 계획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기에 꼬리 자르기에 유용하도록 자신은 철저히 이 계획의 방관자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했다.
모든 것을 지휘한 참모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입니다. 뒤탈이 없고 실력이 확실한 자들만 모았습니다. 개중에는 흑마법사는 물론이고, 암흑가 길드에서 명성이 높은 자도 섭외해 두었습니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남자가 단언하자 카릴의 입꼬리가 흡족하게 올라갔다.
디트리히. 그의 숙적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흑마법사였다.
철통 경비를 뚫고 닐을 소리 소문 없이 살해한 능력이 그 증거였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히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비단 그 남자와 결판낼 카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숨겨진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면 디트리히, 그 남자는 끝장날 것이다.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는 빙빙 돌리던 와인을 단번에 쭉 들이켰다.
벌써 취한 것인지 마음이 찰랑거리는 와인처럼 뒤흔들렸다.
***
건국제는 왕국 내 가장 성대한 축제였다. 평민들에겐 3일 내내 무료로 빵을 제공했고, 축제를 밝히는 마법 횃불은 몇 날 며칠 꺼지지 않았다. 전 왕국민이 즐기는 행사에 수도 거리와 연회 홀도 기쁨에 들썩였다.
고양이 가면을 쓴 시안나는 헤이스의 팔짱을 끼며 왕궁으로 입성했다. 가면무도회였기에 시안나도 디트리히를 마음껏 찾는 게 가능했다.
가면을 쓰고 삼삼오오 모인 사람을 쭉 둘러보며 시안나가 헤이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내가 홀을 둘러볼 테니까 헤이스는 연주대가 있는 뒷문이나 클록 룸을 돌아다녀 주겠…… 헤이스?”
여우 가면 아래, 그녀를 보는 헤이스의 눈빛은 넋이 나가 있었다.
이상하다. 아까부터 왜 그러는 거지?
시안나가 다시금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헤이스가 정신을 차린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의 귀 끝이 붉었다.
“평소에도 아름다우셨지만, 오늘은 유난히 아름다우셔서…….”
셔츠의 깃 위로 굵은 목이 빨갛게 타올랐다.
그의 시선이 풍만한 가슴골 사이에 낀 넝쿨 같은 머리칼을 따라 꽃이 만개한 드레스에 닿았다. 꽃 잎사귀를 형상화한 듯한 드레스 때문에 꽃에서 태어난 요정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시안나는 큼큼 헛기침했다. 자꾸만 물컹한 헤이스의 입술 감촉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얼른 디트리히나 찾아야지.
“아, 아까 말했던 대로 나는 이 근방을 둘러볼 테니까 헤이스는 티 룸이나 홀 외부를 둘러봐 줘.”
“네……. 알겠습니다.”
헤이스는 아쉬운지 그녀를 두어 번 힐끔 돌아보곤 인파의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시안나도 얼른 부풀어 오른 드레스와 연미복 사이를 가로 지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맞이하는 테라스, 음료와 다과가 놓여 있는 테이블 한편.
회장 여기저기 시큼한 포도 향이 진동을 했다.
뽈뽈 돌아다녔지만 검은색 머리카락은 흔했기에 군중들 속에서 디트리히를 찾는 건 어려웠다.
“아니…… 어렵다는 거, 취소.”
환한 샹들리에 아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와인을 홀짝이고 있는 한 남자에게 스포트라이트 같은 빛이 쏟아졌다.
광택이 흐르는 검은색 코트에 날카로운 칼라, 원형 브로치와 턱시도 베스트, 장신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고양이 가면 남자는 섹시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훤칠한 디트리히는 많은 인파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디트리…… 아…….”
시안나는 뛰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에르마야가 그의 옆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공작 부인인 에르마야가 디트리히의 곁을 지키는 건 당연한 거지.’
그랬다. 아무리 디트리히가 시안나와 고용인 임시 숙소에서 하루 종일 뒹굴었다 하더라도 디트리히의 옆자리는 에르마야였다.
화려한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한 쌍의 연인을 보니 시안나는 가슴이 저미었다.
안 돼, 얼른 디트리히에게 무도회장을 빠져나가자고 해야 하잖아.
눈물을 훔친 시안나가 다가서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온 중년의 신사가 디트리히에게 귓속말을 했다.
디트리히는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신사를 따라나섰다.
“나도 뒤를 밟아야겠어.”
시안나는 사람들의 등쌀을 힘겹게 해치며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디트리히를 쫓아 도착한 곳은 어스름한 어둠이 내리깔린 왕궁의 후원이었다. 난간, 손님방과 더불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 적격인 장소였다.
높은 수풀로 이루어진 벽으로 들어가는 그를 발견했다.
시안나는 진한 장미 향을 맡으며 재빨리 따라갔다.
휙. 미로와 풀벌레 소리만이 주위를 맴돌 뿐 디트리히의 뒷모습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분명 여기로 들어가는 걸 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꺅!”
고요한 정원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시안나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미로로 들어갔다고 생각했지만 옆에 샛길에서 대기한 모양이었다.
디트리히가 가면을 낀 시안나를 알아보는 건 당연했다. 사방에 장미 향이 진동해도 청아한 허브 향에 유독 민감한 그였다. 그게 시안나의 체향이었으니까.
“어떻게 오두막을 빠져나오신 겁니까? 제길, 게슴츠레한 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는데 역시 믿을 게 못 되는군요.”
하얀 고양이 가면 아래로 잭을 떠올린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시안나는 놀란 마음을 감추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
“디트리히. 분명 내게 ‘제 도움 없이 혼자서 이 방을 빠져나가신다면 인정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던 것 기억나?”
시안나가 그의 말투를 흉내 내며 무게 잡듯이 말하자 그가 쯧 혀를 찼다.
설마하니 정말로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상상도 못 했다. 너무 안일했다.
그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누님께선 제가 위험에 처한다고 말씀하셨죠. 제가 다른 사람에게 당할 거라 여기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디트리히의 능력은 과히 상상 초월이었다.
문안에 문을 만들지 않나, 기다란 촉수 같은 걸 부리지 않나, 공간을 이동하기도 했었지.
시안나가 흑마법에 빠삭하진 않았지만 충격적인 능력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카릴도 원작 소설을 알고 있었다.
“카릴이 역으로 오늘 건국제에 다른 함정을 파 놓았다면?”
“저는 그 책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겁니다. 이번엔 필리프 대공을 만날 예정이니까요.”
필리프 대공. 그는 선대 왕의 후처, 마이린이 낳은 카릴의 배다른 남동생이었다.
한때 부왕의 사랑을 받은 그녀는 왕의 자리까지 넘보았으나 왕이 알 수 없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후 변방으로 밀려나 버렸다. 더는 필리프 대공에게 붙는 세력은 없었다.
그런 그가 혁명을 꾀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너 설마 반……!”
화들짝 놀란 시안나가 주위를 휙 살폈다.
반란을 이야기한다면 모가지가 잘리는 걸 넘어서 아슈토르가의 시종들 모두의 목이 성문에 걸릴 것이다.
다행히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정원은 적막했다.
놀란 시안나를 안심시키려 디트리히가 부드러이 달랬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오래전부터 철두철미하게 준비되고 있었으니까요.”
“오래전?”
“네. 예전부터 왕국은 귀족들에게 뒤로 산 제물을 바치라고 명하고 있었습니다. 여왕이 유력한 차기 계승자인 필리프 대공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죠. 그 때문에 원성을 산 귀족이 상당합니다. 제 아버지도 물밑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왕의 뒤를 칠 계획을 준비했더군요.”
“그럴 수가…….”
긱스가 뒤에서 카릴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 긱스의 이야기를 들은 시안나는 납득이 갔다.
한편으론 디트리히의 목적이 궁금했다.
“디트리히는 카릴을 없애려는 거야?”
“네. 먼저 제게 이를 드러내기도 했고, 이제 쓸모가 없으니까요.”
차가운 공기가 닿는 목덜미에 으스스 소름이 끼쳤다. 카릴을 일부러 살려 두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 게, 꼭 그를 벌레처럼 한 손에 짓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태도였다.
시안나는 도무지 그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왕이 쓸모가 없어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