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65화 (65/70)

[65]

***

끼익. 몇 시간 후, 디트리히는 통나무집의 문을 열었다.

그가 발을 들이자마자 유리 조각이 까득 밟혔다. 그는 침대로 다가서며 바닥에 깨어진 도자기와 쓰러진 나무 의자를 훑었다. 문을 부수려고 용을 쓴 모양이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곤 착잡한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향긋한 풀잎 향이 그를 감싸 안았다.

곪아 가는 제 속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시안나가 얄미워 그녀의 몰캉한 볼을 콕콕 찔렀다.

“요 작은 머리에 든 건 오로지 제 앞에서 사라질 생각뿐인 겁니까?”

어디서부터 어그러진 걸까? 한편으로는 인제 그만 제품에서 포기할 때도 되었는데 자꾸 발버둥 치는 그녀가 미웠다. 그녀가 저항할수록 디트리히의 마음은 사막의 모래알처럼 말라 갔다.

그는 잠든 시안나를 조심스럽게 제 품에 끌어당겼다. 얌전히 안겨 있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깨어 있을 때도 온순하시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달콤한 체향을 맡은 순간, 제 품에 갇혀 엉엉 우는 모습과 그를 밀어내는 손길이 되살아났다.

그대로 몸 안에서 가뭄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말라 가는 고목처럼 안쪽에서 수분이 모조리 빠져나가며 허기가 졌다.

그녀에게 닿아야만 치료 가능한 극심한 불치병이었다. 그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도 불그스름한 입술에 닿았다.

그가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지려던 찰나였다.

달칵. 무거운 문이 열리고 두꺼운 군화 소리가 내부로 들어왔다.

“말씀하신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어두운 방만큼이나 안색이 좋지 않은 헤이스였다.

시안나가 깨어 있었다면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온통 시안나에게 정신이 팔린 디트리히가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테이블에 대충 올려놓고 나가.”

차갑게 내뱉은 그가 중단했던 일을 계속했다.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일이었다.

한껏 달큼한 채취를 만끽하는 광경에 헤이스가 혈관이 솟을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지금은 자정이 다가오는 시각이었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시안나에게 먹일 스튜를 준비하라니.

헤이스는 디트리히가 이런 광경을 일부러 보여 주기 위해 잡일을 시켰다고 확신했다.

그녀에게 정신없이 도취된 디트리히에게 증오가 솟았다.

그녀는 제 것이었다. 제 약혼녀다. 그런데 그걸 한순간에 빼앗겨 버렸다.

분노가 철철 끓는 냄비처럼 들끓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디트리히가 가만히 서서 침대를 노려보고 있는 헤이스에게 핀잔했다. 기분 나쁜 기색이 여실히 느껴졌다.

“……실례했습니다.”

그는 제 표정을 들키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빠져나왔다. 일부러 자신이 나간 뒤 그가 무슨 짓을 할지는 상상하지 않았다.

그는 성난 발걸음을 쿵쿵 옮기며 되뇌었다.

시안나는 제 여자였다. 자신은 그녀의 약혼자다.

비록 거짓 약혼이고 시안나가 원하는 사람이 디트리히라는 걸 알지만 바보처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문득 통나무집을 나와 후문 길을 가로지르는 헤이스에게서 어떤 음성이 메아리쳤다.

‘헤이스. 어떤 일이 있든 디트리히가 아닌 내게 충성할 수 있어?’

화난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

“혹시 시안나 님께선 감금당할 걸 예상하고 계셨던 건가?”

그래서 그에게 충정을 시험해 보는 말을 던진 게 아니었을까. 모든 게 신의 뜻처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렇다면 헤이스가 할 일은 그녀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꼭 구해 드리겠습니다. 시안나 님.”

그는 머리 위로 펼쳐진 푸른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별처럼 굳건히 반짝였다.

***

시안나는 어제도 디트리히에게 밤새 시달렸다. 사실 밤새라는 건 상투적인 표현일 뿐, 그녀가 갇힌 방에 창문이 없어 정확히 며칠이 지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가져다주는 스튜 그릇으로 날짜를 세고 있을 뿐.

하루는 세끼였고, 접시는 차곡차곡 쌓이다 하루가 끝나면 시녀에 의해 치워졌다. 분명 접시를 두 번 치웠으니, 오늘이 바로 건국제가 시작하는 그날이었다.

“방에서 나가야 해!”

축 늘어져 있던 시안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문 앞에 섰다. 그녀가 문고리를 돌렸으나 역시나 걸쇠를 잠근 듯 열리지 않았다.

“무리인가.”

시안나가 이마를 짚었다.

탈출하더라도 수도와 떨어진 곳이라 애초에 건국제에 참석하는 건 무리였다.

이대로 포기할 수밖에 없나?

디트리히가 암살자의 습격을 받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거야?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데 문 너머로 뚜벅뚜벅 발소리가 다가왔다.

누구지? 점심은 지났기에 식사를 주러 온 사람은 아니었다.

작은 기대감에 심장이 콩콩 뛰어오르는데 철문처럼 꼼짝하지 않던 문이 휙 젖혔다.

새하얀 빛과 벌새 울음소리가 들어오는 가운데, 발목까지 오는 긴 로브를 입은 헤이스가 나타났다. 어디 잠행이라도 가는 모양새였다.

“시안나 님.”

감격스러운지 뜨겁게 끓어오르는 음성이었다. 바라마지 않던 소중한 것을 겨우 찾은 얼굴로 목이 메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갇혀 지낸 탓일까. 그의 반응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간 괜찮으셨습니까? 안 본 사이에 야윈 것 같습니다.”

헤이스의 커다란 손이 시안나의 뺨을 조심스레 더듬고는 얇은 목선을 타고 쇄골 위에 붉게 찍힌 자국을 꾹 눌렀다.

벌레에 물린 듯 새빨갛게 올라온 자국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명확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그가 슈미즈 위로 시안나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만치 가냘픈 허리에 또 한 번 가슴이 선득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일찍 당신을 데리러 오지 못해서…….”

헤이스는 시안나가 디트리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사죄를 읊조렸다.

그의 생각으론 이렇게 자유를 억압하는 디트리히에게 그녀가 질려야 정상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시안나는 고개를 저으며 저보다 벌벌 떨고 있는 헤이스의 등을 차분히 쓸었다.

“헤이스, 때마침 잘 와 줬어.”

키스했던 기억이 스치자 껄끄러웠지만 정말 기뻤다. 헤이스 덕에 정체불명의 방을 탈출할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잠시 해후를 즐긴 그녀는 몸을 떨어뜨리곤 질문을 퍼부었다.

“헤이스, 혹시 오늘이 건국제가 시작하는 날이야?”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사실 시안나 님을 디트리히 님 몰래 찾아뵐 수 있는 것도 다 건국제 덕분입니다. 디트리히 님께서 건국제에 참석하시느라 저택을 하루 종일 비우셨거든요. 지금이 탈출할 기회입니다.”

헤이스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여린 팔목을 잡아당겼다.

그의 속도 모르고 시안나는 반대로 팔을 당기었다.

“잠시만,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

자기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에 헤이스는 기가 차는 듯했다.

“가주님께서 그런 것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까? 후문에 있는 통나무 저장소 2층입니다.”

“아!”

아슈토르 저택 후문에 있는 통나무 저장소는 1층에 땔감을 저장했고, 2층은 후문 보초를 서는 데 필요한 임시 숙소였다.

저택을 지키는 파수꾼이 일주일마다 번갈아 가면서 보초를 서는데, 고용인들도 후문은 잘 지나다니지 않아 한적했다.

“휴, 다행이다. 휴양지란 말은 그냥 겁박이었구나.”

일부러 그녀를 모르는 곳으로 가둬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헤이스의 등 뒤로 보이는 화창한 하늘을 보아하니 무도회가 열리기엔 시간이 일러 보였다.

지금이라도 무도회장에 갈 채비를 하면 도착할 수 있어!

헤이스가 다급하게 시안나의 손을 움켜쥐었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디트리히 님께서 들이닥치기 전에 멀리 피신해야 합니다.”

디트리히가 저택에서 출발한 후, 헤이스는 통나무집 보초를 서는 잭에게 약혼녀의 얼굴만 보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아슈토르가에 오랫동안 일한 충성스러운 잭이었지만 헤이스와도 한솥밥 먹은 지가 10년이었다.

어렵사리 얻은 기회가 너무 소중했다. 그런 헤이스의 마음도 모르고 시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난 아슈토르가를 떠날 생각이 없어.”

“어째서입니까!”

헤이스가 절규를 터뜨렸다. 애타는 심정을 몰라주는 그녀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시안나는 드뷘모르가를 바로 세우더라도 홀연히 디트리히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건국제에서 디트리히의 죽음을 막는 것이 가장 다급했다.

시안나가 힘이 들어간 눈동자로 헤이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반대로 물을게. 우리가 도주할 수 있는 자금은 넉넉해? 아슈토르가는 마음만 먹으면 전 대륙을 뒤질 수 있어.”

“발루아로 가문이 교역한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저희가 배의 짐칸에 숨기만 하면 바다 건너 대륙까지 도착할 수 있습니다. 출항은 해가 지기 전까지입니다. 그러니 어서!”

“난 도망자 같은 삶에 자신이 없어. 게다가 공작가가 마음먹고 전쟁이라도 일으키면?”

시안나의 신랄한 어조에 헤이스가 눈에 띄게 주춤거렸다.

회의적인 태도는 예상에 없는 일이었다.

헤이스가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내리자 시안나는 죄의식이 샘솟았다. 그녀는 디트리히를 구해야 한다며 마음을 추슬렀다.

“차라리 지금 건국제를 가는 거야. 내가 도망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심어 주는 거지.”

“건국제요?”

“난 이때까지 선대 공작님과 빠짐없이 건국제에 참석했어. 그러니 건국제에 가는 건 내 의무야.”

“으음.”

탈출할 기회를 두고 왜 건국제를 운운하는 건가 싶어 헤이스가 신음을 흘렸다.

그럼에도 그녀가 탈출을 거부하는 마당이라 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잭도 건국제에 참석한다는 이유라면 그녀를 쉽게 보내 줄 것이다.

헤이스는 시안나에게 자신이 입은 로브를 걸쳐 준 뒤 곧장 저택 본관으로 함께 이동했다.

일분일초가 급했다. 방에 도착한 시안나는 곧장 미셰리를 불렀다.

그녀를 본 미셰리는 꼭 유령이라도 본 얼굴로 딸꾹질을 하더니 입을 가렸다. 곧 격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윽, 시안나 님? 윽……. 진, 진짜 시안나 님 맞으세요?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사라지셨는데 알고 보니 임시 숙소에…… 감금당하셨다고 하셔서.”

눈물샘이 터진 미셰리의 등을 시안나가 차분히 쓸었다. 미셰리가 북받치는 소리를 냈다.

“시안나 님이 사라지시고, 디트리히 님과, 시안나 님 사이에 관해, 끅, 소문이 돌았어요.”

시안나의 심장이 물레에 찔린 듯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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