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꿈은 생각보다 길었다.
디트리히와 시안나는 저녁놀이 지고 식사를 했다. 둘이 식당 의자에 나란히 착석하자 긱스가 드물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시안나. 너는 이 집이 마음에 드니? 앞으로 계속 함께 살 집이니 첫날 첫인상이 좋아야 할 텐데 말이다.”
온화한 미소는 저주에 풀린 디트리히가 가끔 그녀를 볼 때 지어 주는 웃음과 닮아 있었다.
시안나는 목걸이를 빼앗길 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긋 웃었다.
“좋아요. 디트리히가 저택을 안내해 준 덕분이에요.”
활짝 핀 미소를 본 디트리히도 기쁜지 생글생글 웃었다.
“저도 누님이 좋아요.”
“잘되었구나. 너희는 앞으로 남매가 될 테니까.”
남매?
시안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매라는 건 과거와 달랐다. 소설에서 시안나는 아슈토르 가문에 입양되었지만 빙의한 그녀는 성은 따르면서도 호적에 이름은 올리지 않은 어정쩡한 위치였다.
아까부터 현실과 어긋난 상황이 펼쳐졌다.
“시안나, 네가 마음의 상심이 클 거로 안다. 다릭스는 내 오랜 친우였지.”
다릭스. 불현듯 시안나의 아버지 이름이라는 사실이 스쳤다.
긱스는 어린 시안나에게 다정스러운 위로를 건넸다.
“네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날 편하게 대해 주렴.”
“네.”
훈훈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시작되는데, 갑자기 세 사람이 저녁을 드는 모습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공간 자체가 왜곡되며 물감처럼 섞였다.
시안나가 당황하는 사이.
흐물흐물 녹아내린 풍경은 어린아이의 방으로 변모했다.
‘여긴…….’
바닥에 장난감이며 동화책이 어질러져 있는 방은 어린 디트리히의 방과 똑 닮아 있었다.
침대 옆에서 오일 파스텔로 양피지에 포도를 그리는 디트리히.
그 옆에 앉은 시안나가 그를 뾰로통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척 봐도 기분이 나쁜 나빠 보였다.
디트리히가 가만히 있는 시안나의 손에 오일 파스텔을 쥐여 주었다.
“누님은 그림 안 그리세요?”
천진난만한 물음에 시안나는 부아가 치미는 듯했다. 시안나가 오일 파스텔에 힘을 주고 양피지에 동그란 구멍이 날 정도로 힘을 주었다.
북, 북. 양피지가 찢어지고 구멍이 뚫렸다. 디트리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님께선 구멍을 뚫어서 포도를 그리고 싶으셨던 거예요?”
소녀의 속을 뒤집어엎는 말에 시안나의 눈빛이 뾰족 솟았다.
벌떡 일어선 소녀는 오일 파스텔 통을 바닥으로 후두두 떨어뜨렸다. 그리고 디트리히에게 달려들었다.
쿵. 넘어진 디트리히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소년의 눈썹이 아래로 추욱 꺼졌다.
“왜, 왜 그러시는 거예요?”
“나는 분명 정원에서 놀자고 했어. 공작님한테 말했단 말이야. 그런데 네가 그림을 그리자고 해서…….”
디트리히는 제 얼굴에 낙서를 하려는 시안나를 힘겹게 막았다.
“항상 그래! 내 의견은 묵살되고 네가 원하는 대로 일이 처리돼. 차라리 처음부터 가족이 아니라 놀이 상대로 온 거라고 말해 주지 그랬어!”
디트리히의 놀란 얼굴 위로 뜨거운 물이 뚝뚝 쏟아졌다.
“누님…….”
디트리히가 어찌할 바를 모르다 소녀의 속눈썹을 닦아 주려 손을 뻗었다.
탁! 그러나 시안나는 소년의 손길을 거부하더니 방을 뛰쳐나갔다.
타다닥. 디트리히는 저 멀리 복도로 사라지는 시안나를 망연자실하게 응시했다.
그 광경을 끝으로 시야가 먹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새까매졌다.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에 흐릿한 윤곽이 생기더니 점차 밝아졌다. 어두운 복도로 변했다.
그녀는 불빛이 일자로 새어 나오는 디트리히의 방앞에서 멀거니 서 있었다.
꼬마 시안나도 숨죽이고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가 방에 있는 건가?
대답처럼 안에서 소년의 서러운 울먹임이 새어 나왔다.
시안나가 조용히 문에 다가서서 방 안을 살폈다.
매를 든 긱스 앞에서, 종아리가 드러날 정도로 바지를 걷은 디트리히는 눈물바다였다.
‘디트리히가 펑펑 우는데도 울음도 닦아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긱스는 낯선데. 대체 무슨 일이지?’
그가 엄한 얼굴로 추궁했다.
“왜 그 작자들에게 광산 경영권을 넘긴 거지? 네가 시안나를 가족으로 들이고 싶다고 한 저의가 궁금하구나.”
광산 경영권? 가족이 되고 싶다고 졸라?
설마 맨 처음 꿈에서 그녀가 아슈토르 저택에 오게 된 계기를 말하는 건가? 그럼 결국 시안나가 아슈토르 공작 저에 오게 된 건 디트리히가 긱스에게 부탁했기 때문?
‘아니야. 애초에 디트리히가 저주에 걸리지 않았잖아. 이건 꿈이야. 하지만…….’
그녀는 조금 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싶었다.
문에 몸을 가까이 기울인 순간.
팟!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저절로 눈이 뜨였다.
타닥. 타닥.
그녀가 누운 침대 옆 벽난로에서 장작불이 거세게 타오르는 소리가 났다.
한동안 초점이 맞지 않아 붉은 선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잠시 뒤 흐느적대는 잔상은 묵직한 가슴과 일자로 쫙 갈라진 복근으로 변했다.
속눈썹을 내리깔아 위험하고도 섹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디트리히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꿈에서 본 소년이 자란 얼굴. 눈썹을 덮는 까만 앞머리와 다급한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동요하는 금안을 보자 창문이 없는 통나무집이 번쩍 떠올랐다.
***
‘아까 어렸을 적 기억은 꿈이었구나.’
시안나는 이젠 익숙한 통나무 천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디트리히에 의해 정체불명인 곳에 갇힌 채였다. 그것도 몇 날 며칠 눈을 뜨면 이곳이었다.
디트리히가 그녀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속삭였다.
“깨워서 죄송합니다. 누님께서 그때처럼 영영 일어나지 않으실까 봐……. 코 밑으로 손가락도 대고, 심장 소리도 들었는데 도무지 진정되지 않아서…….”
그의 입술 끝이 참혹한 악몽이라도 본 사람처럼 파르르 떨렸다.
“죄송합니다.”
디트리히는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니 가슴속에서 후회가 들불처럼 번졌다.
덜덜 떨리는 손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넘겼다. 그녀가 딱히 거부를 표하지 않자 희미한 안도감이 샘솟았다. 다행이었다.
디트리히를 내버려 둔 채 시안나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기절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지만 창문 하나 없는 방은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두 명이 누워도 자리가 남는 커다란 침대 한편에 널브러진 양피지가 눈에 띄었다. 특히 왕국의 인주가 박힌 초대장이 신경 쓰였다.
“이건.”
시안나가 초대장을 들어 올리며 요리조리 살폈다.
“건국제 초대장입니다.”
건국제!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단 말인가!
분명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디트리히는 저주에 걸린 채였고, 그런 디트리히에게 샤워를 시켜 주며 건국제를 소개한 기억이 생생했다.
“정확히 언제 시작해?”
“이틀 뒤입니다. 특이하게 이번 건국제에서는 가면무도회를 개최한다더군요.”
흐리멍덩하던 까만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건국제가 곧이라니. 긱스와 매년 건국제에 참여한 그녀로선 드레스며 장신구를 새로 맞출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나 건국제에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소설 속에서 디트리히는 건국제에서 암살 위협을 받게 된다. 디트리히를 적대시하는 카릴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려 한 것이다.
가면무도회를 연 이유도 암살자를 왕궁에 쉽게 침투시키기 위함이었다.
“나도 가야 해! 네가, 네가 위험해져!”
시안나가 벌떡 일어서려 하자 디트리히가 그녀의 양어깨를 짓눌렀다. 수고로움도 없이 그녀는 손쉽게 제압되었다.
“누님께선 가실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안위보다 그녀가 바깥에 나가려 한다는 데에 더욱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야……?”
“지금까지 누님께서 저를 대신해 연회에 참석하셨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젠 제가 나서겠습니다. 누님은 이제 여기서 계속 머무르셔야 하니까요.”
불꽃이 반사된 금안이 화르르 타올랐다. 시안나는 어깨를 움킨 손등을 손톱을 세워 할퀴었다.
“네 대신이 아니야. 난 드뷘모르가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건국제에 참석할 거야.”
격앙된 목소리에 디트리히의 입에 쓴웃음이 맺혔다.
그녀가 아슈토르의 이름을 버리는 것이 마치 그녀가 이곳에 살아왔던 모든 것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있는 이 시간까지도.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감금시킨 생활에 점점 익숙해졌다. 이제 시안나가 밖을 돌아다닌다는 것만 생각하면 머리끝까지 불안으로 차올랐다.
그러니 그녀를 밖으로 내놓을 생각 따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불가능합니다. 여긴 공작 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슈토르령 휴양지거든요. 만약 왕성까지 혼자 걸어가시면 도착했을 때 이미 무도회는 끝나 있을 겁니다.”
그럴 수가! 처음 보는 장소로 옮겨 놓은 이유는 저항을 포기시키기 위함이었을까. 디트리히가 절망하는 시안나에게 쐐기를 박았다.
“제 도움 없이 혼자서 이 방을 빠져나가신다면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뭐?”
“열심히 애써 보십시오.”
비릿한 음성은 그녀가 절대 이 방을 탈출하지 못한다고 확신에 차 있었다. 디트리히는 마저 옷을 갖추어 입고 방을 나갔다.
“거기 서!”
시안나가 잽싸게 침대에서 튀어나와 문고리를 돌렸다. 절망스럽게도 방금 전 디트리히가 나갔던 문이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시안나가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하아, 대체 무슨 수로 여길 탈출하라는 거야.”
쾅쾅쾅!
시안나가 나무 문을 사납게 두드렸지만 부서지기는커녕 제 손만 매워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