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63화 (63/70)

[63]

“윽!”

그가 위에 올라타자 아득한 어둠에 집어삼켜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디트리히의 금안이 어둡게 빛났다.

“저를 이렇게 이기적으로 만든 건 누님 때문입니다.”

“뭐? 내가 무슨…….”

“누님께서 헤이스와 입을 맞추는 걸 보았습니다.”

디트리히의 음성은 나무 표면처럼 거칠었다.

디트리히를 꾹꾹 밀던 시안나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설마하니 그 광경을 디트리히가 지켜봤을 줄이야.

뭐? 헤이스와 함께 있던 장면을 목도한 거야?

그녀가 꿈에도 몰랐다는 듯 경악스러워하자 디트리히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저를 다른 남자 사이에서 이용해 달라고 말했던가요.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디트리히는 시안나와 이어진 그날 밤이 덫없는 것이었다고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결국 약혼자를 택했다.

“그때, 미칠 것 같았거든요.”

상체를 내빼는 시안나의 허리를 달아나지 못하게 콱 붙들었다.

위험한 예감이 들었다.

시안나가 깃털 베개로 디트리히를 퍽퍽 내려쳤지만 무위에 돌아갔다. 그가 간단하게 베개를 빼앗은 후, 저 멀리 던져 버리자 찢어진 틈 사이로 깃털이 쏟아져 내렸다.

시안나의 가슴이 디트리히의 가슴팍과 아슬아슬 닿을 만치 가까워졌다. 그는 연둣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소름 끼칠 정도로 다정스레 속삭였다.

“다신 누구도 누님께 닿게 두지 않을 겁니다. 설령 약혼자라고 할지라도.”

그녀의 귓가에 단호한 선고가 치명적인 독사처럼 파고들었다.

***

그 뒤로 시안나는 디트리히에게 시달렸다.

디트리히는 시안나가 기절도 못 하게 매일 괴롭혔다.

지금도 그랬다.

모두가 잠든 시각.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어둠만이 가득한 방이었다.

끼익. 서늘한 밤공기를 가르고 문이 열렸다.

작은 소리였건만 곤히 잠든 새벽에는 더없이 날카로운 소음이었다. 침대에 잠들어 있던 시안나의 정신을 일으켜 세울 만큼 컸다.

시안나는 섬찟한 소리에 방금 꾸었던 꿈을 잊고 바짝 숨을 죽였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구두 굽 소리가 침대로 다가오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적막한 공기를 낮은 목소리가 갈랐다.

“누님. 주무시는 겁니까?”

고막을 간지럽히는 감미롭고 낮은 목소리에 묵직한 긴장감이 전신을 훑었다.

“아니면, 제가 깨워드려야 할까요?”

시안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운 밤하늘 향기가 그녀의 코끝에 스쳤다.

“디트리히……. 돌아왔구나.”

감금당한 지 며칠이 지났는지, 지금은 무슨 요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디트리히를 보고 더 이상 내보내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차피 소용없을 걸 아니까.

“일어나 계셨습니까? 누님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분명 내일 저녁때에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니.”

“제가 늦게 오길 바라셨던 거로 들립니다.”

시안나의 눈동자에 생기가 없었다. 디트리히는 씁쓸한 속내를 감추고 시안나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겁먹은 초식 동물처럼 눈동자를 움찔 떨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젠 그의 마음대로 그녀를 휘두를 거니까.

시안나가 발버둥을 치며 반항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시안나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숨결을 그대로 느꼈다.

그때 머릿속이 빙빙 휘저어졌다. 또다. 이 병 같은 기면증.

“사랑합니다. 누님.”

수면 아래로 의식이 가라앉는 와중 그런 뜨거운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

뺨에 스산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마침 작고 하얀 알갱이가 콧잔등에 내려앉았다.

앗, 차가워.

무심코 고개를 올려다보니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긴 또 어디지?

시안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푸른 지붕이 여러 개 솟아올라 있는 을씨년스러운 저택이 그녀를 맞이했다. 멀리서 관리되지 않은 잡초와 철장 문의 녹슨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의문을 가진 것도 감시, 날카로운 음성이 그녀를 몰아세웠다.

“얼른 내게 그 목걸이를 넘기거라!”

그녀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등을 휙 돌렸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배경으로 철문 앞에 선 두 남녀가 그녀의 팔을 억지로 끼고 있었다.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은 험상궂은 사내,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어른 허벅지까지 오는 키를 가진 어린 시안나가 펑펑 울고 있었다.

‘아, 이건 꿈이구나. 어제 꿨던 꿈의 연속.’

그녀는 최근 시안나의 아기 때부터 아이로 성장하기까지 꿈을 순차적으로 꾸고 있었다.

왜 그런 꿈을 꾸는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바로 예언서였다.

긱스가 책을 보고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그녀도 무언가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빛은 함박눈만큼이나 차가웠다. 곧이어 어린 시안나가 소리를 내질렀다.

“싫, 싫어요! 이건 부모님께서 주신 소중한 목걸이란 말이에요.”

어린 시안나는 제가 움켜쥔 보랏빛 수정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소중히 품에 안고 어깨를 돌렸다.

여자가 시안나를 마귀처럼 노려보더니 삿대질을 했다.

“이익! 아직도 못 알아먹은 모양이구나. 네겐 아무런 힘도 없어. 어차피 미성년자는 법정 대리인이 필요해. 넌 우리가 없으면 허수아비 같은 존재란 말이다! 그러니 드뷘모르가 가문의 가주라는 증표를 이리 내!”

가주의 증표? 그렇다면 더더욱 이 귀중품을 어린애한테 소리나 지르는 사람에게 주기 싫었다.

어린 시안나도 그녀와 생각이 같았는지 눈매가 반항적으로 올라갔다.

여자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게! 먹여 주고 재워 준 은혜도 모르고! 또 하루 종일 밖에서 자야 정신 차리겠어?”

찰싹!

날카로운 소리가 비명처럼 울렸다.

소녀의 뺨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시야도 흐렸다.

“흑…….”

목구멍에서 억울함과 숨 막히는 답답함이 술렁거렸다.

꿈인데도 쥐어짜이는 듯한 울분이 선연했다.

고개를 숙이자마자 새하얀 눈밭 위로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해묵은 때 같은 사람들을 벗겨 내고 싶다는 소녀의 마음이 제게로도 전이되었다.

누가 좀 도와줘!

여자가 다시 한번 손을 올릴 때였다.

“아이를 때리는 일은 그만두시지요.”

“윽?!”

여자의 손이 갑작스레 튀어나온 까만 장갑에 덜컥 붙잡혔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어린 시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눈과 대비되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깔끔한 눈썹. 예리한 눈매.

귀족적인 콧대를 지닌 남자는 잘생긴 얼굴만큼 품격이 흐르는 코트의 신사였다.

익숙한 얼굴에 시안나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디트리히?’

아니, 조금 달랐다. 디트리히라고 하기엔 나이가 좀 더 있었고 목소리가 좀 더 탁했다.

“긱…… 긱스 공작님.”

여자가 깨갱 물러나자 긱스라 불린 사내가 빼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는 사이니?”

남자의 물음에 등 뒤에 숨어 있는 조그만 아이가 나타났다.

인형처럼 볼이 토실한 디트리히가 시안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도리질 쳤다.

“처음 봐요.”

“그렇군. 어쨌든 당신, 아이에게 손찌검을 날리다니. 질이 나쁜데.”

잠자코 있던 남자가 펄쩍 뛰었다.

“오해이십니다, 공작님. 저는 아이의 친척이자 대리인인데 이 아이가 가문의 인장을 넘기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만……. 이 일은 드뷘모르가 가문의 사정이니 부디 넘어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흠. 내가 모르는 새에 법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네?”

긱스가 무릎을 굽히고 눈물을 주렁주렁 매단 시안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

“분명 법정 대리인을 선택하는 건 아이 본인의 의지가 크다고 알고 있는데, 넌 저 사람들과 가고 싶니?”

도리도리.

“싫어? 그럼 우리 집으로 오는 건 어떻겠느냐?”

비로소 그녀를 향한 구원의 손길이 드리웠다. 뺨에 닿는 바람처럼 으슬으슬했던 심장이 남자의 물음에 녹진하게 녹았다.

갑자기 끼어든 긱스에 남자가 노발대발했다.

“아무리 공작님이라고 하실지라도 저희 내부의 일을 멋대로 휘두를 수는 없습니다!”

“드뷘모르가 백작은 내 오랜 친우였지. 내게는 이 아이를 책임질 의무가 있어.”

그가 발개진 볼 위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다정스레 물었다.

“어떻게 하겠니? 우리 집에 오는 것도 싫다면 난 그대로 지나가마. 선택은 너에게 달렸어.”

소녀는 입술을 사리물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긱스를 올려다보았다.

굳은 의지로 빛나는 눈을 본 긱스가 입술에 호선을 그렸다.

“시안나는 분명 날 선택했으니 그리 알도록.”

“이익!”

남자는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왕국 최고의 공작이라 쩔쩔매기 바빴다.

여자도 손톱을 깨물며 시안나가 긱스의 손을 쥐는 걸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어린 시안나는 긱스와 디트리히를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

그렇게 어린 시안나는 아슈토르 공작가에 도착했다.

지붕에 눈이 소복이 쌓여 꼭 얼음 성 같은 저택 앞에서 시안나가 마차에서 내렸다.

어린 디트리히가 차마 저택에 발을 들이지 못하는 시안나를 이끌고 소녀의 방을 소개했다.

통풍이 잘될 것 같은 커다란 창문에 커다란 성화가 걸려 있는 정갈한 방이었다. 햇빛을 잘 말린 냄새가 나자 소녀가 웃었다. 디트리히가 먼저 말을 걸었다.

“디트리히 아슈토르예요. 편하게 디트리히라고 불러 주세요.”

“아, 나는, 시안나 드뷘모르가.”

“누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렇게 소년과 소녀는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안나는 아까부터 블록을 밟은 것처럼 무언가가 턱 걸렸다.

잠시 고민을 하자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디트리히는 저주에 걸려 발음이 구름처럼 흐물흐물하게 뭉개져 있을 터였다. 그런데 눈앞의 디트리히는 아니었다.

‘어째서 디트리히의 발음이 또렷한 거지? 긱스에게 듣기로 디트리히는 좀 더 어릴 때 흑마법의 저주에 걸렸었는데.’

게다가…….

‘이렇게 과거에 없던 일이 생생하게 펼쳐질 수 있는 건가? 설령 꿈이라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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