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
아슈토르 공작가로 돌아가는 길.
시안나는 마차 안에서 가만히 차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소설 속 카릴의 행보를 다시금 되새겼다.
시안나에게 디트리히를 죽일 독을 주는 주범. 디트리히와 에르마야의 사이를 질투하고 종래에는 에르마야를 왕궁에 가두는 남자. 그는 냉혹한 폭군이자 잔인한 지배자였다.
“그러니까 디트리히가 위험하다는 충고 따위 무시하라고.”
그럼에도 신빙성이 있게 느껴지는 건 디트리히의 흑마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새 마차는 아슈토르 공작 저 성문을 지났다.
시안나는 마차에 내리며 눈을 찌르는 햇빛을 가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아직 중천이었다. 카릴이 디트리히가 범인이란 소식을 공표할까 일부러 이른 아침에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제 사건은 그대로 범인 없이 묻히게 될 것이다.
“휴. 이제 남은 일은 두 남자의 관계와 책의 비밀을 파헤치는 건가.”
디트리히가 저렇게 입을 딱 다물고 있는 이상, 본인에게서 알아낼 순 없을 것이다.
“카릴에게 빚을 지긴 싫고, 역시 예언서를 읽어 보는 수밖에.”
그녀가 손을 댈 수 있는 단서는 그뿐이었다.
시안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중앙 계단을 지나 방에 도착했다. 한숨을 쉬며 방문을 여는데, 뺨에 닿는 기온이 썰렁했다.
그녀가 화들짝 눈꺼풀을 들었다.
어지러운 방. 침대에 걸터앉아 온기를 찾는 듯 침대보를 더듬는 디트리히와 그녀의 시선이 맞닥뜨렸다.
“누님…….”
“디…… 트리히?”
시안나는 아뿔싸 싶었다.
드뷘모르가 저택에 가기 위해 싸 놓은 짐이 눈에 밟혔다.
“읏, 여기서 나가, 앗!”
시안나가 성큼성큼 디트리히에게 다가가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디트리히의 커다란 몸이 그녀를 덮쳤다. 시안나는 휘청거리며 침대로 밀쳐졌다.
검은 제복을 입은 채 그녀를 제압하는 디트리히 때문에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억압하는 것 같았다.
디트리히가 시안나의 어깨를 짓누르며 음산하게 읊조렸다.
“누님께선 아직 드뷘모르가 저택으로 돌아가실 계획입니까?”
“……그래. 너는 내가 소중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은 비밀에 부치니까.”
디트리히가 모든 걸 털어놓지 않는다면 그녀도 디트리히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 싫었다.
그녀가 대항하자 디트리히의 시선이 잔인하게 비틀렸다.
“하, 누님의 생각…… 잘 알았습니다.”
목 뒤에 우두두 소름이 돋을 만큼 음산한 목소리였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아, 그!”
시안나가 황급히 변명하려는 사이, 우둑. 목 뒤로 충격이 가해졌다.
디트리히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시안나의 목뼈를 가격했다.
알싸한 아픔에 시안나의 눈이 축 감겼다. 이윽고 디트리히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진 그녀를 품에 안았다.
디트리히가 그녀를 껴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이렇게 돌아다니실 줄이야.”
차라리 그녀의 목에 목줄을 매어 놓았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시안나를 향한 그의 집착은 이미 비정상으로 변모했다. 그녀를 지금처럼 자유롭게 둔다면 그는 어찌할 수 없는 불안감에 허덕이고 말 것이다.
디트리히는 자신이 미쳐 버릴 것을 직감했다.
“역시 처음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누님께선 계속 저택에 계셔야만 합니다.”
시안나를 응시하는 금안이 화르르 타올랐다.
***
타닥, 타닥. 장작에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버석. 나무가 죽어 가는 소리도.
곤히 잠든 시안나의 얼굴 위로 발간빛이 일렁였다. 그녀는 따뜻한 온기에 눈을 떴다.
“흐으……. 여긴…….”
그녀는 벽난로 앞 푹신한 가죽 소파에 앉아 팔걸이에 손을 올린 채 누워 있었다.
어째서 의자에서 선잠이 든 거지?
그녀는 반쯤 일어서서 멍한 얼굴로 좌우를 빙 둘러보았다.
벽난로만이 비추는 어둠침침한 방 안은 난생처음 보는 곳이었다.
벽은 오크 통나무가 층층 쌓여 있었고 그 옆에 허술해 보이는 철제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창이 어두운색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침체된 느낌을 더했다.
“여기…… 공작가가 맞는 건가?”
바닥마저 통나무인데다 화장실 대신 요강이 비치된 이곳은 평민이 사는 집처럼 보였다.
시안나는 근 10년간 이런 장소를 본 기억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내 방에서 디트리히를 만났고, 그 뒤로 기억이 없어.”
설마 디트리히가 외딴곳으로 납치라도 한 건 아니겠지?
시안나는 조심스레 일어서서 침대를 살폈다. 그녀가 팡팡 이불을 두드리자 녹색 모포에 슨 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하얀색 깃털 베개도 누리끼리했다.
“윽, 사람이 사는 곳 맞아?”
평민들이 산다기엔 천장에 말린 양파 따위도 걸려 있지 않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공기 냄새가 났다. 전체적으로 생활감이 결핍된 공간이었다.
시안나는 입구에 다가가 나무 문을 당겼다. 역시나 잠겨 있었다.
“일단 바깥을 살펴볼까?”
밖이 어디인지 안다면 이 집의 위치도 식은 죽 먹기일 터였다. 여차하면 테이블 위 도자기로 창문이라도 깨면 되고.
하지만 커튼을 젖힌 시안나는 망연자실해졌다.
“어……. 창문이 없잖아?”
커튼을 젖히니 통나무 벽이 그녀를 반겼다. 두꺼운 커튼이라 빛이 닿지 않는 거라 여겼지만 실상은 창문 없는 방에 커튼만 달아 놓은 거였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등골이 오싹해질 때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소리 소문도 없이 문이 열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토마토 스튜를 든 디트리히가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이런 누추한 곳에 누님을 모시게 해서. 급히 준비하느라 당장 필요한 것들만 갖다 놓았습니다. 침대보는 곧 갈아드리겠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방에 그녀를 가둔 주제에 태연스럽게 말을 거는 게 소름 끼쳤다. 시큼한 토마토 냄새 따위 맡을 수 없었다.
공포로 벌벌 떠는 시안나에도 디트리히는 괘념치 않고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계십니다. 아직 몸이 편찮으신 겁니까?”
큰일이었다. 이미 본능이 경고음을 날리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작은 접촉만으로도 몸을 바들바들 떠는 시안나를 억지로 침대에 앉혔다. 그런 다음 트레이를 무릎에 올리고 스튜를 호호 불어 그녀 앞에 내밀었다.
“누님, 기력이 없어 보입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잠시만……. 디트리히, 이건 아닌 거 같아.”
“뭐가 말입니까?”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무미건조하게 말라갔다.
“네가 창문도 없는 곳에 날 납치한 거 말이야.”
그 순간, 천둥보다 무서운 침묵이 두 사람을 훑었다. 공기가 싸늘했다.
탁. 그가 스튜 그릇을 테이블에 올려놓곤 엉뚱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누님께서 창문도 없는 방에 계시면 울적하실까 봐 달아 두었습니다. 커튼 색이라도 화사하게 바꾸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루 종일 커튼만 보면 기분이 참 좋겠구나?”
그녀가 비아냥거렸다. 어떤 이유든 간에 그녀를 기절시키고 문도 열리지 않는 곳에 가둔 건 엄연한 납치였다.
벽난로의 불꽃이 어둠 속에서 가라앉은 듯한 남자의 얼굴을 그렸다.
“제가 누님께 강제적으로 이곳에 데리고 온 건 분명 잘못한 부분입니다. 그래도 전부 누님을 왕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르시겠습니까?”
디트리히의 눈빛이 절박해졌다. 그가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읏, 대체, 왕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와 그자 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드리긴 조금 곤란합니다. 모든 걸 아시게 된다면 누님께선 필시 저를 떠나가실 테니까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목구멍이 꽉 막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감금할 정도로 머리가 회까닥 돈 것 같은 짓을 태연히 저지르고 있었다.
디트리히의 입가에 쓴웃음이 드리웠다. 곧 진한 금안이 더욱 선명해졌다.
“누님이 그자를 모르셔서 경고를 드리는 거지만, 왕은 누님을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극도의 증오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곁에 맴도는 짓 따위 하지 마십시오. 오늘처럼 말입니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왕을 만나고 왔다는 걸…….”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뭐든 디트리히의 손바닥 안일 뿐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디트리히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때까지 카릴을 만나고도 무사했다는 걸 잘 알겠지?”
“하아, 이쯤에서 대화를 중단하는 게 좋겠군요. 안 그러면 그때 다리를 다치게 해야 했다고 후회할 것 같으니까.”
“그때?”
디트리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시안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카릴의 경고가 떠올랐다.
‘백작, 조심해. 소아르 호수에서의 일, 보고받은 적이 있거든.’
‘공작은 분명히 그대를 노리고 있었어. 그러니 그자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갑작스레 후미진 곳으로 말을 몰던 디트리히와 덫.
숲에서 느꼈던 디트리히의 알 수 없는 살의가 생각나자 눈이 번쩍 뜨였다.
“너…… 역시 날 일부러 상처 입힌 거였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님께선 그 예언서대로 건국제에 참석하시고 절 독살시키시겠죠.”
그제야 의뭉스러웠던 디트리히의 행동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녀가 암살자를 보낸 것 아니냐고 묻던 것도, 일부로 덫을 향해 말을 몬 것도.
디트리히 또한 예언서를 봤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과거에 일어났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전부 내게 털어놓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하지만 곧 그를 이해한다는 양가의 감정이 들었다. 소설 원작에서 시안나는 디트리히를 죽이려 했다.
즉 지금의 시안나인 내가 그를 싫어할 거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디트리히가 싫은 게 아니라고 말해 봤자 그가 믿어 줄까? 상황을 모면하려는 수작으로 보는 건 아닐는지.
눈앞의 디트리히가 여전히 두렵기도 했다.
시안나는 퍼뜩 침대에서 일어서 허겁지겁 나무 문을 당겼다.
절망스럽게도 디트리히가 손쉽게 열고 들어온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자 그녀가 출입문에 바짝 붙었다.
디트리히는 시안나를 가볍게 안은 후 침대로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