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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61화 (61/70)

[61]

에르마야는 계속 신경을 긁었다.

‘못 믿겠다면 지금 당장 공작님 방 문짝을 열어젖혀 보든지요. 혹시 알아요? 당신도 끼워 줄지.’

그렇게 헤이스는 계단 난간에서 디트리히의 방문이 열리길 기대했다. 곧 문이 열리고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나가는 시안나를 포착했다. 창자가 꼬이는 것 같았다.

“헤, 헤이스?”

시안나는 겁이 날 정도로 굳어 버린 헤이스에 깜짝 놀라 엉덩이를 뒤로 뺐다.

분한 눈초리로 입술을 짓씹는 모습이 섬찟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눈을 내리깐 헤이스의 시선이 둥근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호흡이 불편해 보여 리본을 푼 바람에 둥근 둔덕이 보일 듯 말 듯 아슬했다.

“…….”

코에 스치는 땀 냄새와 꿉꿉한 냄새, 더러운 비린내가 그를 괴롭혔다.

이렇게 비린내를 잔뜩 묻힌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건네받았을 때 기분이란.

그녀 주변에서 떠도는 다른 수컷의 향기를 지우고 싶었다. 그녀에겐 훈육이 필요해 보였다.

정신 차리고 보니 헤이스는 귀여운 리본이 매달린 천 위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읏! 헤이스?”

갑작스러운 접촉에 시안나가 다급히 주황색 머리칼을 밀어냈다.

하지만 저돌적으로 달라붙는 바람에 방패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계시지 않으면 다치실 겁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당신의 약혼자는 저라는 걸 단단히 교육시켜 드리겠습니다.”

헤이스가 으르렁대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주황 머리칼이 덜덜 떠는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시안나는 어떻게든 짐승처럼 흥분한 헤이스를 진정시키려 했다.

“나, 난 헤이스가 약혼자라는 거 잊은 적 없어!”

그 순간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던 헤이스의 고개가 휙 들렸다. 눈동자에서 설명할 수 없는 광기가 스쳤다.

“그 말이 정말이십니까?”

“그, 그래.”

이 저택 내에서 시안나의 편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전부 공작인 디트리히의 수족이었으니 제 편이라곤 5년 이상 그녀의 손발이 되어 준 미셰리뿐일 터였다.

이제 그녀의 목적은 디트리히가 숨기는 진실, 과거를 파헤치는 것이었다.

디트리히가 부리는 흑마법사 때문에 한 사람의 손도 아쉬운 상황이라 헤이스는 분명 큰 전력이었다.

헤이스는 여전히 정색하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확답이 필요합니다.”

“확답?”

시안나가 감도 잡지 못하자 헤이스가 제 오른뺨을 톡톡 두드렸다. 시안나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그래. 뺨에 뽀뽀 정도야 괜찮지. 일단 약혼자이기도 하니까.

“헤이스. 어떤 일이 있든 디트리히가 아닌, 내게 충성할 수 있어?”

“물론입니다.”

그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안나는 그의 최우선순위였다.

“그 말, 잊지 마.”

그녀는 노을이 생각나는 머리칼에 이마를 맞댔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물컹한 감촉이 닿았다.

어라? 물컹?

“읍?”

눈을 뜨니 노을 같은 머리칼 아래로 감긴 속눈썹이 보였다. 입술이 맞닿기 전에 헤이스가 고개를 돌려 입 맞추게 만든 것이다.

“그대로 가만히.”

잠시 입을 뗀 헤이스가 그녀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 준 뒤 들썩이는 뒤통수를 단단히 받쳤다. 시안나는 당황스럽고 숨이 막혔지만 자신을 옭아맨 남자를 벗어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하나가 되었다.

“…….”

살짝 열린 방문의 틈으로 디트리히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시안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

아침 햇살이 그녀의 눈꺼풀을 살포시 두드렸다. 시안나의 눈썹이 들썩이더니 훅 들렸다.

햇볕이 동공을 강렬히 찔렀다.

시안나는 느릿하게 침대를 빠져나와 종을 울리며 생각에 잠겼다.

“언제 잠든 거지? 많이 피곤했던 건가?”

마른 입술을 긁적이는데, 자연스레 어제 헤이스와의 당혹스러운 접촉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시안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갑자기 입을 맞출 건 뭐람.

“휴…… 과연 헤이스가 흑마법을 막을 수 있을까.”

그녀가 알기로 흑마법사는 항상 마법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라는 재료가 필요했다.

분명 디트리히가 흑마법을 쓰긴 했지만, 시체를 조달할 방법이 없는 이상 그걸로 끝이었다. 흑마법이 곧 고갈될 것이다.

그러니 헤이스도 그 틈을 노려 쓸 만한 패로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시안나 님. 일어나셨어요?”

그녀의 생각은 세안 도구를 든 채 활기차게 문을 열어젖히는 미셰리에 의해 뿔뿔이 흩어졌다.

간단한 아침을 먹은 후, 시안나가 곧바로 향한 곳은 왕성이었다.

기별 없는 방문이었으나 기다렸다는 듯 문지기는 그녀를 그대로 통과시켰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물 흐르듯 알현실 앞까지 도달했다.

문을 열자 축복받은 것처럼 햇빛이 무수히 쏟아지는 단상 뒤로 왕좌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카릴이 보였다.

그는 시안나를 보고 픽 웃음을 지은 후 다른 이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미 그녀가 온 이유를 짐작하는 듯했다.

“왕국에서 가장 위대한 태양을 뵙습니다.”

카릴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젯밤 그대가 알레그라우 후작을 피신시켜야 한다고 말해 준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

시안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아마 난장판이 된 방을 보고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했으리라.

카릴이 여유 만만한 몸짓으로 턱걸이에 팔꿈치를 갖다 댔다.

“이제 누가 범인인지 알았겠지? 백작이 내게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말도 이해했으리라 믿어.”

시안나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카릴은 처음부터 이 사건의 범인이 디트리히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저를 끌어들이신 이유, 범인을 알고도 못 본 척하고 부하의 죽음을 묵과하신 이유. 전부 저와 거래를 하기 위함이었군요.”

짝짝짝. 고요한 알현실에 힘찬 갈채가 울렸다.

카릴의 얼굴 위로 화사한 미소가 흐드러졌다. 정답이란 소리였다.

예전 같으면 아침 이슬을 먹는 요정 같다며 감탄을 터뜨릴 미모였지만 지금은 가증스럽기만 했다.

“맞아. 공작과의 대화를 들어서 알겠지만, 그와 영 사이가 나빠서 말이지. 아무래도 그대가 내 편에 서 줘야겠어.”

“제가 디트리히에게 해를 끼치는 일 따위 할 것 같나요?”

지금 디트리히와 척을 지고 있긴 하지만 10년의 정이 갑자기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시안나가 바락 대들자 그가 퍽 섭섭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지. 이 사건의 범인은 공작이라고 발표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뭐…….”

“제 아버지도 흑마법사에 멋대로 사람을 죽이던 미치광이였는데, 아들도 똑같은 꼴이라니 볼만하겠어.”

“긱스 공작님께서 영지민을 납치한 건 전 왕비님과 왕께서 시키신 일이었잖아요!”

이를 드러내며 웃는 카릴에 시안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곧 고개를 숙연하게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카릴의 제안을 받지 않는다면 결국 디트리히가 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이 공표될 터였다.

시안나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 사건을 그대로 종결시키게 해 준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카릴의 얼굴에 승리에 찬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는 등판에 느른히 기댔다.

“뭐…… 내가 시키려는 건 별건 아니야. 그저 백작이 치안대에서 풀려났을 때처럼, 내 소원을 들어주면 돼.”

그 말을 끝으로 카릴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경계심 어린 시안나를 한걸음 거리까지 오도록 명령했다.

“자. 내 손을 잡도록.”

그녀가 하는 수 없이 내밀린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맞잡은 손에 악력이 강해지더니 손아귀 사이로 검은 전류가 파지직 튀었다.

“아읏!”

물레에 찔린 듯 따끔거리는 감각에 시안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까만색 마법은 흑마법이라는 증거였다.

불티처럼 튀던 스파크가 사라지고 카릴의 손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시안나는 따가운 손목을 돌리며 의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제게 무슨 짓을 하신 거죠?”

“짐승 보듯이 노려보지 마. 난 백작에게 걸려 있던 흑마법을 제거해 줬을 뿐이니까.”

흑마법이 걸려 있었다고?

도무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화제를 돌렸다.

“내 명령은 간단해. 공작과 날 선택하게 될 날이 올 때, 반드시 날 택해.”

카릴이 특유의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었다. 그에 반해 시안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겠지만 시안나가 그 대신 카릴을 선택한다면 디트리히는 큰 상처를 받고 말 것이다.

“대답은?”

시안나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할 수만 있다면 회유 따위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나 카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디트리히는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다.

아슈토르가의 명성은 떨어지고, 디트리히는 흑마법사로서 교회 앞 거대 십자가에 매달려 사형당할지도 모른다.

군중들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돌팔매질을 하겠지.

시안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잘 부탁하지.”

“…….”

카릴은 더는 볼일이 없는지 축객령을 내렸다.

“잠깐.”

그녀가 뒤돌아서서 알현장을 빠져 내려오려는데, 마침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를 붙잡았다.

“백작, 조심해. 소아르 호수에서의 일, 보고받은 적이 있거든.”

이젠 그녀가 모든 걸 깨달았다고 여긴 건지 그녀를 암살하려 했던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귀가 열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작은 분명히 그대를 노리고 있었어. 그러니 그자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상했다. 분명 카릴은 적인데도 그의 충고가 묵직하게 심장을 때렸다. 그녀에게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기면서까지 뒤에서 몰래 일을 치르던 디트리히의 수상쩍은 행보 때문이었다.

결국 카릴의 경고는 알현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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