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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걸린 연하 남주가 집착하는 이유-60화 (60/70)

[60]

그녀는 질린 얼굴로 까만 방을 두리번거렸다. 지금 디트리히에게 붙잡히다간 무서운 일을 당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시선을 이리저리 휘두르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거다!

시안나는 디트리히가 방에 침입한 덕에 반쯤 열려 있는 창문을 향해 뛰었다.

“누님! 위험합니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챈 디트리히가 냅다 뛰었다. 그러나 이미 시안나의 몸은 반쯤 창문턱에 걸쳐진 뒤였다.

휘이잉. 발아래 땅이 보였다.

이곳은 4층. 발목이나 늑골 정도가 부려지려나. 디트리히에게 붙잡혀 무슨 짓을 당하거나 부상당하나 그게 그거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창밖으로 아무런 미련 없이 몸을 던졌다.

“제길!”

남자의 허탈한 비명이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두개골이 깨지기라도 할까 봐 시안나는 순간 몸을 둥글게 말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뺨을 매섭게 강타했다. 부딪친다!

그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몸이 밧줄에 칭칭 감긴 듯 꽉 조여들었다.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아래로 장기가 주룩 내려앉는 느낌이 멎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를 들어 올리자 싸늘한 얼굴과 맞닥뜨렸다.

“4층을, 그냥 뛰어내리실 정도로…… 제가 싫으신 겁니까?”

디트리히가 그녀를 안아 들고 있었다. 4층에서 뛰어내려 착지한 사람치고 고통은 한 움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 긱스가 그녀와 디트리히를 벼랑에서 구해 주었을 때가 스쳐 지나갔다.

“역시 흑마법사…… 였구나.”

디트리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안나는 그의 눈동자가 다시금 일렁이는 것을 보고 디트리히를 밀쳤다.

그래 봤자라는 듯 디트리히는 그녀를 내려다 주었다.

시안나는 구두가 땅에 닫자마자 얼른 그에게서 떨어졌지만 곧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복숭아뼈가 스산한 감각에 휘감겼다.

“읏, 발목에……. 이건 뭐야!”

시선을 내리니 문어 다리처럼 길쭉한 연기가 그녀의 다리를 나팔꽃처럼 칭칭 묶고 있었다.

까만 연기가 낯익었다. 브라움을 죽인 바로 그 괴물이었다.

“그것도 너였구나……. 디트리히.”

디트리히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는 시안나에게 느릿하게 다가갔다.

바닥을 기는 그녀의 등이 낑낑거렸다. 기다란 연기가 아등바등거리는 그녀의 팔을 뒤로 포박시켰다.

“읏, 그만, 아, 여긴?”

시안나는 속박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다 주변 풍경에 화들짝 놀랐다.

기다란 두 기둥이 놓여 있는 하얀색 정문과 중앙 분수대는 아슈토르 저택이었다. 조금 전 알레그라우의 자택이 분명했는데 지금은 아슈토르가 앞마당이었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힘이라니.

시안나는 거대한 공포 앞에 무력함을 느끼며 새하얗게 질렸다. 검은 연기가 시안나의 겨드랑이와 등을 꽉 옭아맸지만 저항할 기력이 없었다.

“누님께 확실히 알려드려야겠습니다. 누님께서 찾아가야 할 상대는 왕이 아니라, 저라는 것을요.”

디트리히는 냉정히 뇌까린 뒤 흙이 묻은 데다 엉망으로 구겨진 치마를 들치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에 와 닿자 소름이 돋았다.

“읏, 싫어!”

시안나는 세워진 무릎을 움직여 앞으로 꾸물럭 기어갔다. 자세히 보니 커다란 나무 아래에 키 큰 남자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하얀 제복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남자였다.

헤이스!

그는 초조한 듯 나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정문에 누군가가 들어오길 바라는지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다.

“……오지 않으시는 건가.”

고개를 내린 헤이스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섞였다. 모두가 잠든 시각이었다.

그런데 디트리히, 시안나 두 사람의 방만 비워진 채였다. 시안나의 방에 들렀다가 어떤 예감에 디트리히의 방에 들른 것이 화근이었다.

차라리 그녀의 방에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헤이스는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고 본관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느릿한 걸음걸이였지만 확실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헤…… 헤이스……. 살…… 려!”

시안나는 외침을 멈추었다.

까만 밤. 중앙에 달이 환하게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시안나를 내리누르는 디트리히를 가려 주지 못할 정도로 밝았다.

분명 헤이스는 그녀의 꼴사나운 모습을 발견하고 말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이 치솟았다.

그녀는 눈물 고인 눈가를 질끈 감았지만 이미 헤이스와 세 걸음 남짓한 거리였다.

그리고…….

탁. 탁. 탁…….

그의 발소리가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분명 바닥에서 뒤엉켜 있는 디트리히와 시안나를 발견했을 게 분명한데 헤이스는 본체만체하며 지나쳤다.

“설마……. 이 모습을 못 본 거야?”

디트리히의 짓이라는 게 뼛속 깊이 느껴졌다.

“네가 흑마법으로 헤이스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만든 거야? 공간을 조종하는 공간 왜곡 마법, 아슈토르 공작가로 이동한 순간 이동 마법, 촉수 같은 회색 연기를 불러내는 소환 마법까지.”

디트리히의 얼굴에 미소가 스미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피잉. 경악스러울 만치 무시무시한 힘에 속눈썹이 젖어 들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고위 흑마법사는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거나 공간을 이동하는 것쯤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인 게 틀림없었다.

디트리히가 이내 시안나의 등에 손을 갖다 댔다.

위잉. 괴음과 동시에 등에 뜨거운 열감이 퍼졌다. 시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트리히… 너…… 내게 무슨 짓! 읏!”

“누님께선 그냥 가만히 있으시면 됩니다. 제 품에서.”

“아…….”

장갑 낀 손이 치맛자락 사이로 파묻혔다. 이젠 그가 너무 잘 아는 곳이었다.

“공기가 벌써 후덥지근합니다. 혹시 기대라도 하고 계셨습니까?”

디트리히는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시안나의 목덜미에 입맞춤했다.

차가운 공기와 대비되는 뜨거운 입술에 등허리가 멋대로 들썩거려질 정도였다.

디트리히는 시안나가 움찔 떠는 모습에 기꺼워하며 여린 살을 아예 흡입하듯 빨았다.

살이 세차게 빨리는 느낌이 너무 아찔했다.

이윽고 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현기증 나는 감각이 그녀를 덮쳤다.

***

팟!

시안나의 눈이 홱, 하니 뜨였다.

어둠에 잠긴 하얀 천장, 손에 잡히는 포근한 이불이 익숙했다. 어두운 내부는 자신의 방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조용한 실내에서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설마 아직도 디트리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거야?’

걱정과 달리 헤이스가 옆에서 물수건으로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고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간밤의 일이 영화 필름처럼 재생되었다.

추가적인 살인 사건을 막기 위해 샤므일 후작가로 간 그녀.

범인은 디트리히였다.

그 후 일어난 이상 현상. 문안의 문, 갑작스러운 위치 이동, 헤이스가 디트리히와 그녀를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

몇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치고 현실감이 없었다. 차라리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입 안이 바짝 마른 시안나는 헤이스가 주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데, 그녀가 입고 있던 드레스가 아니었다. 시안나가 달아오른 얼굴로 양팔을 감싸 안았다.

“내 옷…! 설, 설마 헤이스가?”

“안심하십시오. 옷이 젖은 데다 시큼한 냄새가 풍겨 미셰리를 불러 갈아입힌 것뿐입니다.”

큼큼한 냄새라니. 시안나는 민망스러워 볼을 긁적였다.

괜히 디트리히와 있었던 일을 들킨 것 같아 그녀는 억지로 활짝 웃었다.

“밤에 잠이 안 와서 좀 달리기를 했더니… 하하….”

“…….”

공기가 1도 정도 낮아진 것 같은데 착각일까? 헤이스는 주변을 살핀 후 간절하게 물어 왔다.

“외람되지만 방 꼴이 이게 뭡니까?”

시안나는 구겨진 옷을 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에 모조리 떼어져 가지런히 쌓인 액자. 꽃이 없는 꽃병. 바닥에 떨어진 태피스트리. 흡사 태풍이라도 지나간 광경이었다.

“헤이스에게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구나. 나 아슈토르가를 떠날 거야.”

“떠난다니…….”

디트리히와 이어졌을 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강압적으로 굴고 비밀을 숨기는 디트리히를 보니 떠나는 게 맞았다.

시안나는 헤이스가 콰드득 주먹을 쥐는 걸 애써 무시했다.

“지금 몇 시야? 헤이스가 날 방으로 데려온 거야?”

뱃속에서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는 고통이 선연했다.

“……아직 깜깜한 새벽입니다. 공작님께서 기절하신 시안나 님을 데리고 오셨을 땐 깜짝 놀랐습니다.”

새벽을 닮은 파란 눈동자에 온기가 서린 것도 잠시, 두 눈이 그릇처럼 냉기를 품었다.

“디트리히 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혹시, 몸을 겹치셨다거나…….”

직접적인 말에 회색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어떻게 그 사실을 헤이스가 아는 거지?

시안나의 반응에 헤이스의 입매가 굳게 다물렸다.

공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자 깜짝 놀란 그녀가 세차게 도리질 쳤다.

“아, 아니! 그럴 리가!”

그는 눈앞에 여자가 마뜩잖았다. 비릿한 냄새나 지우고 거짓말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달짝지근한 채취와 희미한 땀 냄새. 젖은 듯한 드레스, 손에 달라붙는 진득한 목덜미.

이성이 깨진 둑처럼 무너졌다.

그는 오늘 아침부터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에르마야의 말이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부인께서 저에게 다시 찾아올 줄이야. 아침부터 외간 남자의 방을 방문하다니, 쫓겨나고 싶으신 겁니까.’

‘풋! 제가 쫓겨난다고요? 자기 약혼녀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요.’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방금 어떤 꼴을 보았는지 아시나요? 제 남편의 방에서 당신 약혼녀가 낮잠을 즐기는 동물처럼 안겨 있더군요.’

헤이스에 얼굴에 맺혔던 여유로운 웃음이 싹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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